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14화 (115/225)

114화 오크 (5)

***

주술에서 풀린 괴수와 괴물들은 도망치거나 병사들, 용병들에게 칼을 맞고 죽었다. 하지만 개중에는 무시할 수 없는 것들도 분명 있었다.

-우워어어어!

2미터에서 3미터 사이의 키를 가진 거인이 침을 흘리며 고함을 질렀다. 커다란 머리통, 무릎 아래까지 닿는 긴 팔, 초록색의 우둘투둘한 피부, 불룩 튀어나온 배.

고블린, 오크와 같이 그린 스킨 범주 내의 괴물 중 하나인 트롤이었다. 재생력을 가지고 있는 카테고리에서도 웨어울프와 같이 수위에 드는 재생력을 지닌 괴물이다.

주술에 걸려있던 트롤 중 크기가 작은 개체 몇몇은 숲으로 기어 들어갔지만, 개중 성인의 나이에 이른 놈 하나는 손에 쥔 나무 몽둥이를 휘두르며 난동을 부렸다.

“피, 피해! 아악!”

“물러서라! 범위에 들지 말고 물러서!”

“기사, 기사들은 어딨는 거야!”

트롤의 난동에 병사와 용병들이 허겁지겁 물러섰다. 그러나 트롤은 통나무 같은 다리로 훌쩍훌쩍 거리를 좁히며 병사들을 도룍했다.

훙- 하고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빠바박, 하는 파쇄음이 들렸다. 몽둥이에 얻어맞은 병사들의 몸통이 터지며 허공에서 흩뿌려졌다.

“히이이······!”

“살려, 살려! 아아아!”

박살이 난 시체의 잔해들이 괴물과 병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붉은 피와 선홍빛의 내장들을 뒤집어 쓴 괴물들은 포효했고, 병사들은 똥오줌을 지리며 주저앉았다.

보통 사람들에게 트롤은 대적할 수 없는 괴물이다. 괴력도 괴력이지만 상처를 입혀도 순식간에 재생하는 힘은 섣불리 싸울 만한 계제가 되지 못했다.

“어, 어? 이봐! 물러서라는 말 못 들었어?”

“어, 잠깐만. 저 사람?”

물론, 러셀에게는 하나도 통용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이거 오랜만인데.”

“구륵?”

러셀은 트롤 앞에 섰다. 그가 지나온 길은 죽은 괴물 시체의 길이었다. 그에게 생명을 구함받은 사람들이 멍하니 그를 쳐다보며 서 있었다.

무기를 들지 않은 맨손의 러셀이 트롤을 올려다봤다.

“그르르르르.”

“말은 못 하는 모양이군. 하긴, 그때 그놈이 좀 특이한 놈이었지.”

“크와아아악!”

태평하게 말을 잇는 러셀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트롤이 괴성을 내지르며 나무 몽둥이를 내리쳤다. 가만히 서 있던 러셀의 팔이 천천히 위로 들렸다.

빠르게 떨어지는 몽둥이에 비하면 너무 느려 보였지만, 기이하게도 러셀의 손은 어느새 몽둥이에 닿아 있었다.

그의 감각이 찰나를 인지했다. 전장에 떠도는 따뜻한 공기와 차가운 공기의 순환을, 새벽의 이슬과 이슬을 붉게 물들이는 피를, 앞으로 반보 내딛은 왼발과 다리, 뒤를 지탱한 오른 다리에서 느껴지는 굳건함을.

몽둥이에서 전해지는 충격은 러셀의 손을 타고 흘러들어가 팔꿈치와 어깨, 허리, 다리를 통해 지면으로 빠져나갔다. 그의 신체에는 어떤 타격도 없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천천히, 어루만지듯이 움직이며 나무 몽둥이의 경로를 틀었다.

콰앙!

러셀의 가벼운 손짓에 몽둥이에 실린 힘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려지고, 한 걸음 떨어진 바닥을 후려쳤다. 범인은 볼 수도, 인지할 수도 없는 찰나의 경극 속에서 힘의 분산과 비틂이 이뤄졌다.

병사와 용병들의 눈이 커지고, 입이 쩍 벌어졌다. 트롤의 끔뻑이는 눈이 러셀을 향했다.

“뭘 봐, 자식아.”

몽둥이를 두 손으로 잡고 내리쳤기에 트롤의 허리와 고개는 상당히 낮아져 있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러셀의 주먹이 후려치기 딱 좋은 자리에 있었다는 말이다.

뻐억!

곧장 날아온 러셀의 주먹에 트롤의 머리가 반바퀴 돌아갔다. 우드드드득, 하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그르륵, 그라아악······.”

몽둥이를 놓친 트롤이 뒷걸음질 쳤다. 놈의 시야는 거의 뒤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척수와 목뼈가 완전히 박살나고 어긋나버렸다. 제 아무리 트롤이라도 단번에 재생하기 어려웠다.

팔을 들어 올려 자신의 목을 더듬거리는 트롤에게 성큼성큼 걸어간 러셀이 다시 주먹을 쥐었다. 쟈드무를 상대하고 나서도 그의 마력은 거침없이 흐르며 오른팔에 집중됐다.

벼락으로 성질이 전환된 마력이 구현되며 오른 주먹과 팔뚝을 타고 백청의 소용돌이를 그렸다.

파츠츠츠츠츠츠!

러셀의 빛나는 주먹이 트롤의 몸통을 강타했다.

쾅!

폭음과 함께 트롤의 몸이 산산조각났다. 비유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난 것이었다.

거대한 몸뚱아리가 터지는 충격으로 부채꼴 모양의 공기가 확, 하고 밀려났다. 갈가리 찢겨진 살점과 내장, 부러진 뼛조각들이 공중으로 솟구치고,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뒤의 반경에 있던 괴물들은 터진 트롤의 뼛조각에 실린 힘에 몸 이곳저곳에 구멍이 나며 쓰러졌다.

라함 영지군과 용병들이 고전하던 괴물이 한 방에 참살당해서 무너졌다. 어안이 벙벙해진 사람들을 뒤로 한 러셀은 곧장 다른 트롤을 찾아 또 박살 내버렸다.

그 압도적인 무위에 힘입어, 주춤거렸던 병사들이 다시 창과 방패를 앞세우며 돌격했다.

“용살자! 용살자! 용살자!”

“용살자가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맞서 싸워라아-!”

“영지를 위하여!”

드높을 정도의 사기가 충전된 병사들의 창칼에 괴수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 나갔다. 전투로 인한 흥분한 용병들도 상처의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다는 듯이 돌진을 거듭했다.

러셀은 마안으로 전장을 돌아보았다.

치열했던 싸움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처음 가장 큰 불꽃을 피워올렸던 러셀과 카이.

그중 러셀이 곳곳에서 괴물들을 척살하고, 카이가 오크로 다시 돌아온 우룩크들을 이끌며 사람들을 구하고 있었다.

“뭐, 뭐야?”

막 마수화된 들개에게 머리통이 뜯겨질 뻔했던 젊은 용병이 주저앉은 채 위를 올려다봤다. 들개를 패대기치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갈색 피부의 오크가 그런 용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젊은 용병이 옆에 떨어진 칼을 집으려는 것을 보던 갈색 오크가, 손을 내밀었다.

“······.”

피와 땀으로 젖은 손이 서로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곳곳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불칸의 성력으로 제정신을 차린 갈색 오크들이 인간의 편을 들자 괴물들은 더 빠른 속도로 죽어 나갔다.

러셀과 카이가 전장에서 활약하는 것을 보던 타티아나 영주는 곧바로 모든 치안 병력을 제외한 병사들을 집결시킨 다음 진격했다. 지금이 아니면 라함 영지 바깥에 진을 칠 괴물들이나 괴수들, 또 오크들의 계획을 어그러트릴 수 있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새벽부터 라함 영지 바깥을 포위하려던 오크 부대와 괴수, 괴물들은 갑자기 난입한 러셀 때문에 제대로 된 진형도 갖추지 못한 채 싸움에 돌입했다.

거기다 카이라는, 오크의 종족신을 모시는 대전사의 등장 또한 영지를 침공하려던 오크 부족들에게 등장한 엄청난 변수였다.

우룩크들을 이용해서 오크의 손실을 낮추려는 계획 또한 어그러진 것이었다.

그렇기에 러셀이 보는 전장에서 세력 구도는 삼파전이었다. 오크와 그들이 아직 조종하고 있는 괴수, 괴물 무리들. 러셀과 그 일행. 그리고 라함 영지군까지.

숫적 우세로 크게 앞서던 오크 부족은 이제 확연히 줄어 있었다. 예상치 못하게 벌어진 전쟁은, 그 시작과 마찬가지로 예상치 못한 변수들에 의해 빠르게 종식될 것 같았다.

“으아악!”

“커헉!”

러셀의 눈이 한 곳으로 향했다.

상공에서 회오리치던 혼잡한 마나의 흐름이 한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에 검푸른 마기를 불태우는 오크들이 있었다.

이때까지 힘을 비축하고 있었는지 그 기세가 흉흉했다. 거대한 늑대, 다이어 울프를 탄 오크들이 검푸른 마기에 휩싸인 채 검과 도끼, 망치와 창을 휘두르자 순식간에 전열이 흐트러졌다.

“크하아아아압!”

그때 파죽지세로 돌진해던 오크 라이더들에게 맞서는 붉은 무리가 있었다. 카이, 그리고 그와 같은 피부 색깔을 가진 오크들이었다. 우룩크에서 다시 오크로 돌아온 자들.

미처 구하지 못한 수가 많았는지 백여 마리의 우룩크 중 오크로 돌아간 자들은 이제 사십에서 오십 사이였지만, 그럼에도 무시할 수 없는 숫자였다.

“정신 차려라, 형제들이여! 악마에게 혼을 팔지 마라!”

“크아악!”

카이와 갈색 오크들이 외쳤지만 이미 마기에 침식된 오크들은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불-칸-!”

검푸른 오크들을 맞상대하던 카이가 기합성을 내지르며 주먹을 높이 들었다가 지면에 내리꽂았다.

놀랍게도 지면은 박살나지 않았고, 대신 불칸의 신성력이 파도처럼 일어나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검푸른 마기가 그 성력에 타오르고, 악마의 힘을 받아들인 오크들이 타오르는 마기와 함께 비명을 질렀다.

이미 마기가 골수까지 미친 오크를 구제할 방법은 없었다. 카이는 붉은 성력으로 이글거리는 주먹을 들었다.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는 오크의 목숨을 손수 거뒀다.

마기에 중독된 오크들은 지금 카이가 막고 있다. 괴수와 괴물 무리는 라함 영지군들과 용병들이 소탕하는 중이다. 그 선두에는 타티아나 영주와 이름 모를 커다란 오크 하나가 있었다.

이미 말이 오간 듯 병사들은 커다란 오크가 자신들과 함께 싸우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남은 것은 오크들의 주술사들, 그리고 대주술사 켈파그.

러셀이 눈에 마력을 집중하자 자청빛 마안이 서광을 흩뿌렸다. 그런 그의 주변에도 괴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는 그 한복판에 있었다.

그러나 어떤 괴물도 그의 코트 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어느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거대한 백색의 외날 도끼. 마지막 서리가 웅혼한 서리를 내뿜었다.

스카가가가각!

달려들던 하이에나 형태의 마수와 곰 형태의 마수가 육편으로 쪼개지고, 얼어붙은 다음 땅에 떨어져 부서졌다.

천천히 걸어가던 걸음걸이는 곧 뜀걸음이 되었다. 그럴수록 그에게 몰려오는 괴수 무리 또한 넘쳐났다. 덮쳐오는 파도를 향해 나아가는 작은 이쑤시개 같은 모습으로 러셀이 달려갔다.

파도는 이쑤시개에 의해 갈라지고, 얼어붙고, 부서졌다. 러셀은 전장을 거의 횡단하다시피하며 몸을 날렸다.

그의 마안이 포착한, 가장 거대한 적수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그곳에 거인이 있었다.

“우아아아!”

거인이 휘두른 주먹을 간신히 피해낸 아엘라시스가 풍압에 휘말려 나동그라졌다. 그런 아엘라시스를 칼리아가 간신히 안고는 뒤로 물러났다.

목표물을 놓친 주먹이 대지를 내리쳤다.

꽈르르릉-!

전장의 소음을 일시에 몰아내는 압도적인 폭력. 체고 6미터의 오거가 내지른 주먹에 의해 난 충격파가 대지를 휩쓸었다.

40미터 반경의 모든 풍경이 황폐해졌다. 조금 전까지 자리에 있었던 모든 것들이 오거가 내리친 주먹을 중심으로 밀려나 있었다.

가까이 있던 것들은 그야말로 형체도 찾기 힘들었다. 붉은 핏자국만이 뭔가가 있었다는 것을 알리는 화인이었다. 그게 사람이었는지, 오크였는지, 괴물이었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콜록, 콜록!”

간신히 칼리아의 품에 안겨져 목숨을 구한 아엘라시스가 기침했다.

그런 아엘라시스의 등을 두드리며 칼리아가 자욱한 흙먼지를 노려봤다. 흙과 먼지 너머로 거체의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확하고 먼지가 가라앉았다.

“흑······! 이, 이게 뭐야······!”

기침하던 아엘라시스가 억눌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사위를 내리누르는 압력에 숨도 쉬기가 힘들었다. 그때 칼리아의 마력이 그런 압력을 밀어내며 둥그스름한 보호막을 만들었다. 그제야 아엘라시스의 숨쉬기가 편해졌다.

“······대단한 괴물을 길들였구나. 까마득한 후손이라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거인족의 말예를.”

오거가 육중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러난 거인의 육체는 잘 짜인 하나의 갑옷 같았다. 큰 머리통은 그보다 더 넓은 어깨에 비하면 작아 보였고, 그 아래로 긴 팔과 다리, 몸통에 비하면 잘록한 허리가 있었다.

어떤 마력이나 마기를 두르고 있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가진 기세가 엄청났다. 그에 맞서 칼리아가 가죽옷을 갑옷으로 변화시켰다.

“빛이 밝게 빛날수록 그림자 또한 더욱 짙어지리라.”

오래된 주문에 의해 그녀의 그림자가 크기를 크게 부풀리더니 삽시간에 넓은 대지를 검게 물들였다. 범위 안에는 오거 또한 있었다.

나타나고 나서 말 한마디, 괴성 하나 내지르지 않은 거인은 조용히 서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런 오거를 향해 그림자 자체가 움직이더니 커다란 입이 되어 하반신을 물어버렸다. 그에 그치지 않고 검은 촉수들이 일어나 오거의 팔과 목, 어깨를 묶은 다음 끌어당겼다.

동시에 칼리아가 한쪽 손을 들어 올리자 전장에 흐르던 핏물들이 의지를 타고 일어서 붉은 송곳이 되었다.

“엔-탈리두.”

시동어가 내뱉어지고, 붉은 가시들이 봉쇄된 오거를 향해 쏘아졌다.

오거는 순식간에 붉은 가시가 돋아난 고슴도치 같은 것이 되었다. 하지만 한 손을 지면에 대고, 다른 한 손은 오거를 가리키고 있는 칼리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쉽지 않군,”

꾸웅-!

공간을 울리는 소리가 터지고, 거인을 중심으로 회색의 안개가 화악 퍼져나갔다. 붉은 가시들이 재가 되어 스러지고, 오거를 봉인했던 그림자의 술식은 모두 풀려서 대지로 가라앉았다.

거대한 파동은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기세가 되어 전장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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