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오크 (4)
***
전장은 치열했다. 괴물과 인간의 진짜 전쟁. 서로가 가진 이빨과 발톱을 부딪치고, 피와 살점이 터진다.
어디선가 비명이 새어 나오면 이어서 고함이 그 위를 덮고, 다시 비명이 뒤를 잇는다.
“하압!”
기합성을 내지른 타티아나 영주가 양손으로 꾹 쥐고 있던 검을 내리쳤다. 그 무시할 수 없는 기세에 오크 전사 하나가 방패를 들어올렸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오크 전사의 거구가 흔들렸다. 호리호리한 체형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박력. 자욱하게 일어있는 흙먼지가 일순 동심원을 그리며 흩어질 정도의 힘이 실린 공격이었다.
하지만 오크 또한 타고나길 장사의 근력과 체력을 가지는 종족이었다. 방패로 공격을 막은 오크 전사가 반격했다. 타티아나 영주는 더 나아가지 않고 검을 휘둘러 반격을 흘려냈다.
“후우, 후욱, 흐으.”
타티아나 영주는 시야를 가리는 투구를 벗어 던졌다. 머리를 죄여오는 듯한 감각을 참을 수 없었다. 눈 먼 화살이 날아올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이 전장에서 화살을 쏘는 자들은 많지 않았다.
투구를 벗자 땀과 피에 젖은 회색 머리카락이 엉긴 채 흘러내렸다. 그녀는 볼과 목덜미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신경질 어린 손동작으로 털어냈다.
“흡!”
물러섰던 오크 전사가 달려들었다. 타티아나 영주는 검을 들었다. 예상하고 있던 충돌이 닥쳤다. 발목과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낮춘 다음 상반신을 틀어 공격을 흘려낸다.
타티아나 영주의 체내에 존재하는 불완전한 회로에 마력이 달렸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의 오크 전사가 내는 괴력을, 160센티미터를 간신히 넘는 타티아나의 마력이 상쇄했다.
세상은 불합리한 것만큼이나 공정한 면도 존재했다. 이를테면 저렇게 무지막지한 육체를 지니고 태어나는 종족이 신을 잃어 괴물이 되어간다는 것이 있었고.
“으, 아아아아!”
아인종들에 비하면 무른 살과 작은 체구를 지닌 인간들이, 각자만의 가능성을 깨달아 마력이라는 미지의 힘을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이 그랬다.
한순간 타티아나 영주의 몸이 가속했다. 오크 전사는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녀의 검이 목을 가르고 있었다.
서컥, 하고 초록 피부의 머리통이 공중을 뱅글뱅글 돌다가 툭 떨어졌다. 뿜어지는 핏줄기와 머리를 잃은 거체가 털썩 쓰러졌다. 타티아나 영주는 멈추지 않았다.
처음 죽인 오크의 뒤를 이어서 달려오는 오크 전사들과 곧바로 검격을 교환했다. 맞부딪치고, 빗겨내고, 흘려낸다.
피할 수 없는 공격은 입은 갑옷의 방어력을 믿었다. 둔기가 아닌 날붙이들은 갑옷 안쪽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목구멍에서 끓는 고함을 억누르며 타티아나의 검이 두 오크의 심장과 허리를 갈랐다. 가슴팍을 움켜쥔 오크 전사가 쓰러지고, 허리에서 삐져나오는 내장을 잡은 오크가 모로 누웠다.
그런 오크 둘의 확인 사살을 마친 타티아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다가 무릎을 꿇었다.
“쿨럭, 우웨엑!”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무너진 타티아나 영주의 입에서 붉은 피가 토해졌다. 무리하게 마력을 운용한 대가였다. 가뜩이나 제대로 된 회로가 새겨져 있지 않은 신체로, 넘볼 수 없는 속도의 지평을 엿본 대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쓰러진 영주의 주변으로는 전투가 한창이었다. 누비 갑옷, 가죽 갑옷, 사슬 갑옷 등 통일되지 않은 갑옷을 입은 용병들이 소리를 지르고 악을 쓰고 있었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 상대방의 목줄을 끊기 위해 무기를 휘둘렀다. 밝아진 하늘은 이제 아침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동쪽에서 뜬 태양이 눈부신 햇살을 뿌리며 전장에 선 모든 이들을 비췄다.
산 자, 죽어가는 자, 죽은 자 모두에게 공평하게 내리쬐는 햇살.
타티아나 영주가 내보인 눈부신 활약 덕에 다가오는 괴물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른 오크 전사들이 칼과 도끼를 들고 다가왔다. 그녀의 주위에 다른 기사들은 없었다.
모두 혼잡한 전장에서 괴수와 괴물, 오크들에 의해 흩어졌다. 러셀과 카이가 수를 줄여놓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그들은 한참 전에 시체가 되어 누웠을 것이다.
그러나 전장에 돌격 명령을 내린 것은 타티아나 영주였다. 흉벽에서 러셀과 카이의 분전을 보며, 그녀의 심장은 두근두근 뛰었다.
돌격 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도 바라지 않고, 이른 새벽부터 오크와 괴물 무리를 보자마자 앞장서 싸우고 있는 용살자에게,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마력을 각성한 자들은 모두 좋든 싫든 삶이 싸움으로 점칠 된 사람들이었다. 타티아나 그레이스 또한 그랬다.
13년 전 갑자기 불어났던 그린 스킨의 준동에 아버지와 측근들을 잃은 후에는 언제나 싸움의 연속이었다. 괴물들을 막고, 영지를 발전시키고, 병사들을 육성하고.
그럼에도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무리들의 발걸음은 그녀보다 빨랐다. 이번에도, 그런 듯했다.
“영주님!”
병사 하나가 타티아나 영주의 위기를 알아챘지만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그녀의 위로 커다란 전투 망치가 쇄도했다. 타티아나 영주는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아직 여파가 가시지 않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검을 들어 올리는 것뿐이었다.
퍼억!
타티아나 영주가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의 앞에 거구의 초록 피부 오크가 서 있었다. 자리에 있는 어떤 오크보다도 컸다. 그 오크는 망치의 자루를 양손으로 붙잡아 막고 있었다. 완전히 피하진 못한 듯 망치 머리가 오크의 어깨에 닿아 있었다.
망치를 든 오크가 씹어뱉듯이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오! 첸파!”
“무의미한 전투를 멈추려는 짓이다. 헤손.”
“···내 이름을 아시오?”
첸파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탈구된 어깨의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쟈드무가 이끄는 붉은 망치의 전사 아닌가. 예전에 그가 싹수있는 오크 중 하나라고 그대의 이름을 말한 적이 있지.”
“······.”
“헤손. 쟈드무는 죽었어. 보지 않았나.”
보았다. 못 볼 수가 없었다. 그 강한 쟈드무와 싸우고, 압도해서 이겨버린 남자를.
“왜 그 사내를 상대하러 가지 않고 인간들의 진영으로 온 건가.”
“···켈파그가 말한 것 잊었소? 최대한 많은 피와 생명을 수확하라고 하지 않았소.”
“그러면?”
“그러면이라니? 이제 남은 전사들은 한 줌이오, 첸파! 여기 있는 오크들이 전부란 말이오! 아직 저 빌어먹을 회색 피부가 되지 않은 전사들은, 여기 있는 오크들 밖에 없소!”
각 족장당 전쟁에 참여한 오크의 숫자는 오십 명. 그렇게 오크 이백과 우룩크 백, 그리고 괴물 이백 마리가 모여 오백이 넘는 군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괴수와 괴물들의 숫자는 러셀과 쟈드무가 벌인 싸움의 여파에 그 숫자가 크게 줄었다. 우룩크들은 카이의 성력에 의해 괴물로의 변화를 멈추고,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하고 있었다.
남은 건 이제 이백을 조금 넘는 오크들 뿐이었다. 예전, 번식력과 성장 속도로 따지면 오크를 뛰어넘는 종족은 많지 않았다. 인간이 그나마 비견되었지만, 오크는 성인 남자 대 여섯도 상대할 수 있는 강력한 육체가 선천적으로 타고났다.
그러나 마력을 다루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언제 잊었는지 제대로 기록되지도 못한 신의 부재에 의해 종족은 멸망하고 있었다.
지능을 잃고, 한낱 원숭이처럼 본능과 욕망에만 달려드는 괴물들이 되어갔다.
첸파가 말했다.
“이해한다. 헤손. 나 또한 너와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언제 나도 저렇게 되어버릴지 모른다. 가족, 친구, 동료를 잊고 닥치는 대로 싸움을 거는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나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렇다고, 악마의 힘을 빌리는 것은 안 된다. 나는 이 모든 사태의 뒤에 그들이 있지 않나 의심스럽다.”
“···뭔가를 아는 것이오?”
“확신은 아니다. 헤손, 전사들을 물려라. 나는 이미 내 동지들을 전장 바깥으로 내보냈다.”
첸파가 손을 들어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주술사들의 계획은 실패했다. 저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도 그렇지만, 가장 놀라운 건 따로 있다.”
“···무슨 소리냐?”
“저 갈색 오크를 봐라.”
첸파가 가리킨 곳에 카이가 있었다. 그 주변에는 갈색의 피부가 된 오크들이 방진을 이룬 채 괴물들을 잡아 죽이고 있었다. 제대로 된 옷차림이나 방어구,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싸우는 이들.
헤손의 눈이 커졌다.
“저들은······.”
“그래. 우룩크들이다.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였던 괴물들.”
그러나 우룩크는 더 이상 회색 피부의 괴물이 아니었다. 거기다 피아식별도 하지 못하고 붉은 눈을 희번뜩 거리는 괴물들은, 카이의 성력에 닿자 몸부림을 치며 쓰러졌다.
그러다가 다른 오크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고, 우룩크는 오크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신의 대전사가 돌아왔으니, 인간과의 전쟁은 이제 필요하지 않다. 주술사들의 주문도 멈춰야 해.”
“······미안하오, 첸파.”
“헤손!”
헤손의 피부 위로 흑마력이 뭉클거리며 퍼졌다. 악마의 힘을 받아들였다는 증거였다.
“너무 늦었소, 첸파. 너무 늦었어.”
헤손의 초록 피부 위로 혈관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첸파가 주술사들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켈파그, 이 빌어먹을 놈이!”
흑마력의 폭주. 주술사들이 노리고 있는 것 중 하나일 것이었다. 첸파는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붙잡은 다음, 힘을 주었다.
뚜두둑!
“크흠!”
뼈가 맞춰지는 소리와 함께 거센 통증이 밀어닥쳤다. 놔뒀으면 근육과 신경이 더 늘어났을 것이다. 그런 첸파에게 숨을 고르고 있던 타티아나가 말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대가 우리 편이라는 건가?”
“그렇다, 인간의 영주.”
“알았다, 오크 족장.”
첸파와 타티아나 영주를 향해 흑마력을 일으킨 오크들이 이성을 잃은 채 돌격했다.
***
아엘라시스가 말했다.
“뭘 노리는데?”
-이 전장에 가득 차 있는 기운들을 봐라. 용인 너라면 느낄 수 있을 거다.
아엘라시스는 다리를 멈추고 자리에 섰다. 세계의 어린 수호자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결계? 아니면 소환인가?”
-역시, 용이라 그런지 이해가 빠르구나.
칼리아의 칭찬에 아엘라시스의 콧대가 우쭐거렸다. 그때, 주술사들의 주위를 지키던 오크 라이더들이 그런 소녀를 발견했다.
-온다.
“저도 봤어!”
커다란 다이어 울프를 타고 돌진해오는 오크들. 작은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거대한 폭력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엘라시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되려 마주 달려가다가, 어느 순간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검붉은 갑옷을 입지 않은 것처럼 가볍고 유려한 몸놀림.
아엘라시스는 그대로 양손을 내뻗었다. 주문과 영창, 시동어가 빠른 속도로 외워지고, 높게 떠오른 소녀의 주위로 바람과 서리, 전격이 휘몰아쳤다.
“아아아악!”
얕보고 있던 소녀가 돌연 높이 뛰어오르고, 그도 모자라 무시무시한 마법을 쏟아내자 오크 라이더들이 대경실색을 한 채로 산개했다.
그러나 산개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날아간 마법들이 포탄처럼 쏘아져 다이어 울프 앞의 지면을 폭발시켰다.
구슬픈 개 울음소리가 퍼지며 늑대들이 나뒹굴고 오크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막아라! 주술사들에게 접근하게 해서는 안 된다!”
떨어진 자들 중 대장 격으로 보이는 오크가 도끼를 들어 아엘라시스를 가리켰다.
그때 아엘라시스의 그림자에서 한 여인이 솟구쳤다. 검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요염한 미모를 지닌 여자. 가죽 옷을 입은 그녀는 전장에 널려있는 피와 그 냄새를 한껏 들이마셨다.
“그 사람의 피만큼은 안 되겠지만, 뭐.”
칼리아가 손을 아래로 뻗자 피가 의지에 응답했다. 자율 의지를 가진 것처럼 모여든 핏물들이 그녀를 향해 몰려들었다.
곧 피로 조형된 채찍 같은 검을 든 칼리아가 새빨간 입술을 휘며 미소를 지었다.
“편식은 하면 안 되는 거라고 했으니.”
오크 전사들은 갑자기 등장한 가녀린 여인을 보고서도 섣불리 다가서지 못했다.
겉으로 보이는 가냘퍼보이는 외견과 달리, 그녀의 그림자 아래로는 무수한 비명의 메아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칼리아가 검을 휘둘렀다. 유연한 채찍처럼 늘어난 칼날이 엄청난 길이로 오크 전사들을 덮쳤다.
“마, 막···, 크아악!”
러셀의 피를 한껏 들이키고 온 칼리아의 무력은 무시무시했다. 아엘라시스가 발한 마법의 파동을 깨닫고 충원된 오크 전사들이 우수수 무너졌다.
“아엘라, 다 끝나면 알지?”
“뭐? 사흘 간 러셀이랑 따로 자는 거?”
“그래.”
“알았어. 그런데 그건 왜?”
“꼬맹이는 알 거 없어.”
“나 꼬맹이 아니야.”
서리와 전격을 쏟아내고, 거대한 채찍 검을 휘두르는 소녀와 여인의 대화치고는 너무 평온했다.
그때, 주술사들이 있는 곳이라 짐작되는 곳에서 거대한 울림이 울렸다.
칼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건.”
쿵. 쿵. 쿵.
거대한 발자국 소리. 그리고 구릉 너머로 거대한 머리와, 넓은 어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