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오크 (2)
***
차가운 새벽의 공기가 전장을 맴돌았다. 맑고 차가운 공기는 곧 피비린내에 물들었다.
본래 조용해야 할 고요의 시간은 수많은 괴수와 괴물들의 울음과 괴성으로 시끄러웠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소리가 그 모든 것들을 덮고 있었다. 러셀과 이름 모를 한 커다란 오크의 싸움이 그러했다.
쾅! 쾅! 쾅!
두 존재가 부딪칠 때마다 굉음이 울리고, 충격과 진동이 동심원처럼 퍼지기를 반복했다.
괴수들은 그런 충격에도 아랑곳 않고 부나방처럼 둘의 싸움에 달려들었다. 마력의 여파에 스치자마자 고깃덩이가 되어 땅바닥을 뒹굴었다. 그렇게 된 고깃덩이를 주워먹는 괴수들도 있었다. 전장은 난장과 지옥, 그 사이 어디 쯤으로 보였다.
성벽 위의 사람들은 입을 쩍 벌린 채 아래를 바라보았다.
“아니, 저게, 무슨······.”
“허······.”
제대로 된 문장으로 나오지 못한 감탄사와 신음이 흘러 나왔다. 타티아나 영주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야간 경계를 하던 경비병이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달려와, 관문 앞으로 괴물들이 모이고 있다고 했을 때.
그리고 한참 이른 새벽에 깨어서 간신히 갑옷을 걸치고 성벽에 섰을 때. 타티아나 그레이스는 오늘, 자신의 영지가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숲에서 넘쳐나오는 괴물들은 많았고, 그 기세가 흉흉했다. 작은 고블린과 임프, 코볼트등은 그렇다 치더라도, 거대한 다이어 울프를 탄 오크들, 나무 몽둥이를 든 트롤까지.
한 줌도 되지 않는 영지 군과 둘 밖에 없는 기사, 제대로 된 마력도 운용하지 못하는 자신이 저런 괴물 대군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용병을 모은다고 소문을 내기는 했지만, 번창하지도 못한 중부 산맥의 영지. 찾아오는 길도 험한 곳에 오는 용병들은 그야말로 돈이 궁한 막장 인생들 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용살자의 방문은 먹구름 낀 하늘에서 비추는 한 줄기 서광이었다.
급히 기사 반델을 용살자와 그 일행이 머무는 여관으로 보내 데려오게 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난관을 이겨낼 수 있을지는 몰랐다.
소문의 반만 되더라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생각은 구겨졌다. 소문은, 전설은 거짓이 아니었다. 용을 상대한 강력한 전사가 지금 저곳에 있었다.
“흐아아아압-!”
그리고 또 다른 전사가 전장의 한 곳에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갈색의 피부 위로 가공할 붉은 성력을 뿜어내는 오크. 길게 땋아진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문신이 인상적인 그는, 카이라는 이름의 오크였다.
그가 괴수들을 파죽지세로 무찌르며 우룩크들을 상대했다. 헌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회색 피부의 괴물들이, 카이의 주변으로 다가가자 머리를 붙잡고 쓰러지고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형제들이여! 눈을 떠라! 목소리를 들어라!”
카이의 영문 모를 말이 이어질수록 머리를 부여잡고 무릎을 꿇는 우룩크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카이의 붉은 성력이 우룩크들의 피부에 닿자, 변화가 일어났다.
회색 피부에서, 점차 갈색의 피부로. 피부 색깔이 변하고 있었다. 이지를 잃고 흐려진 눈이 맑아지고, 균형을 무시한 채 자라났던 근육과 뼈가 안정을 되찾으며 줄어들었다.
대주술사, 켈파그가 대경한 눈으로 그 현상을 바라봤다.
“저건······!”
켈파그가 흔들리자 그를 따르던 대여섯의 오크 주술사들오 불안한 얼굴이 되었다.
“대주술사님! 저 현상은, 대체?”
“켈파그님! 괴물들의 통제가 풀리고 있습니다! 우룩크들의 지배 또한······!”
오크 주술사들의 다급한 부름에 켈파그가 지팡이를 으스러져라 쥐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의 곁에서 함께 자라온, 그의 역사와 마찬가지인 지팡이가 불길한 빛을 토했다.
“말도 안 된다, 말도 안돼! 갑자기 왜, 이제 와서!”
켈파그는 충혈된 눈으로 괴수들을 물리치고, 우룩크들을 본래의 오크로 되돌리는 카이를 노려봤다.
틀림없었다. 까마득한 오래 전, 오크의 종족 신의 기운이었다. 그게 아니고서는 저런 현상은 말이 되지 않았다.
주술도, 마법도 아닌 신성한 힘. 신을 잃고, 숲과 산맥으로 들어가 초록색의 피부를 지니고. 게다가 점차 지능과 이성을 잃고 회색의 괴물이 되어가던, 쇠락해 가던 오크.
악마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잊혀진 신을 이제 와서 어떻게 찾는지도 알 수 없었고, 악마의 손길은 너무 가까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신을 찾아내다니. 아니, 신이 그들에게 찾아온 것인지도 몰랐지만 켈파그의 머릿속에 그런 이성은 남아있지 않았다.
“···바뀌는 건 없다.”
“켈파그님?”
“주문을 시행하라.”
오크 주술사들이 켈파그를 돌아보았다. 지금도 시시각각 카이가 다가오고 있고, 괴수들은 주술에서 풀려 숲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우룩크들은 지배에서 벗어나 본래의 오크로 돌아가고 있었다.
처음 계획했던 모든 것이 어그러지고 있는 상황에서, 켈파그는 다시 명령을 내렸다.
“주문을 외워라!”
화들짝 놀란 오크 주술사들이 제각기 지팡이를 들었다. 켈파그의 것처럼, 태어나기 전 선택받은 극소수의 오크들만이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 주술사가 된다.
그리고 주술사들은 모두 각자의 지팡이를 받는다. 켈파그의 오래된 고목 같은 지팡이는 아니더라도, 원숙한 지팡이를 가진 주술사들이 주문을 외웠다.
주술과 악마의 힘이 결합 된 혼돈스러운 힘이 주술사들을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
유난히 낮게 흐르던 구름 하나가 지상에서 터진 충격파에 의해 산산이 조각나 흩어졌다. 흩어진 조각들의 시선이 땅으로 향했다.
거기에 강대한 마력을 휘두르는 두 개의 검이 있었다.
굉음과 함께 두 개의 칼날이 부딪혔다. 선과 선이 만난 그 한점에 놀랄 만큼 강력한 압력이 가해졌다. 마력을 두른 검은 상하지 않았고, 도리어 주위의 공기와 지면이 웅웅 떨렸다.
각각 칼들의 주인은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았다. 넓은 전장 위를 강대한 마력의 주인들이 질주했다. 괴수와 괴물들은 피아를 가리지 않으며 달려들었고, 허공을 격하는 마력과 검격에 핏덩이가 되어 스러졌다.
무수한 괴물들의 사체가 쌓이고, 피가 도랑이 되어 흘렀다. 아직 밝지 않은 하늘 아래 피의 색깔은 검기만 했다. 그리고 그건 해가 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러셀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숨은 짙고 길었다. 하얀 숨이 연초의 연기처럼 훅, 하고 허공을 물들였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다. 하늘의 색깔은 검정과 파랑, 보라와 노랑을 오갔고 다채로운 구름이 수놓아져 있었다.
분명 어느 한쪽의 하늘은 쪽빛으로 물들며 밝아왔고, 다른 한쪽은 아직 밝아지는 것을 원치 않다는 듯 어둠을 놓지 않았다.
“꽤 하는데.”
러셀의 손이 입가를 훔쳤다. 터진 입 안쪽에서 흐른 피 때문에 쇠맛이 났다.
“···크흐으.”
쟈드무는 대꾸하지 않고 몸을 비틀었다. 누적된 충격 속에서 망가졌던 육체가 재생을 거듭했다. 뿌득거리는 소리가 나며 억눌렸던 오른팔 근육이 펴지고, 부러졌던 늑골 뼈의 접합부가 붙었다.
쟈드무는 검푸른 마력이 일렁거리는 눈으로 러셀을 노려보았다.
러셀도 멀쩡한 신색은 아니었다. 묶었던 머리카락은 풀려서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고, 찰나 지간 그가 내질렀던 주먹에 맞은 얼굴에는 입술이 터져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쟈드무처럼 근육이 파열되거나 뼈가 부러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저 얼굴에 주먹을 날리기 위해 쟈드무는 아까의 부상을 입었었다.
“후우우.”
쟈드무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상대는 평범한 인간의 내구도가 아니다. 마기를 얻기 전에도 그의 근력은 바위를 부술 수 있었다. 인간의 머리통쯤은 스치는 것만으로 산산조각 낼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마기로 강화된 육체로도 저 인간에게는 작은 생채기 하나에 불과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차례 거대한 격돌 이후 물러섰던 둘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쟈드무의 칼은 거대한 대도였다.
번뜩이는 외날에 흑마력이 맴돌며 칼날의 크기를 더욱 키웠다. 검기였다. 단순히 마력이 많은 것만으로는 검에 마력을 씌울 수 없다.
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검을 쥔 나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어야만 검기가 형성된다. 쟈드무는 칼날 위로 부풀어 오른, 길이가 2미터가 넘는 대도를 두 손으로 들었다.
나힐니르에 맞먹는 대도의 검극이 겨눠지자, 러셀은 거대한 송곳에 겨눠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이제까지 만난 마력을 다루는 적들 중, 검술에 특화된 적은 한 명도 없었다. 에란디스 영지에서 칼리아가 사복검을 휘두르긴 했지만, 그것은 경지에 오른 마법과 공간을 이용한 기술이었다.
재생을 마친 쟈드무의 육체는 아까보다 더 단단해지고 질겨졌다. 끊임없이 마력을 생산하는 생명의 돌이 미증유의 거력을 쟈드무에게 부여했다.
러셀의 보랏빛 눈이 이채를 띄었다.
“호.”
기이이잉.
쟈드무의 심장 어림에 자리 잡은 생명의 돌. 그것이 발작하듯이 진동을 흘리고 있었다. 울컥울컥, 하고 마력이 쏟아졌다.
악마의 힘을 받아들이고 종족의 멸망을 회피한 오크, 쟈드무. 그의 초록색 피부 위에 검푸른 마기魔氣가 넘실거리며 피어올랐다.
쿠구구구구구.
낮은 울림과 함께 쟈드무가 서 있는 지면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움푹 패였다. 아니, 그도 모자라 반구형의 크레이터가 생기고 있었다.
러셀의 눈에는 쟈드무의 심장에서부터 쏟아져나오는 마력이 증폭되고, 다시 증폭되는 것이 보였다.
꾸드드드득.
쟈드무가 다리를 굽혀 자세를 낮췄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보이고, 발끝이 지면을 파고들자 흙이 짓눌렸다.
쟈드무의 대도가 커다랗긴 하지만, 러셀의 나힐니르 역시 만만찮은 대검이었다. 그 또한 자세를 달리했다. 아까까지 한 손으로 잡았던 칼자루 위에 두 손을 올렸다.
나힐니르에 검기를 일으키진 않았다. 지금 그에게는 그보다 쓸 만한 힘이 있었다.
채 물러가지 못한 새벽의 어둠 속에서 푸른 달이 빛났다. 그 달빛이, 러셀의 대검에 내려앉았다.
파츠츠츠츠.
나힐니르의 검신에 새겨진 달의 룬이 반짝였다. 은빛의 기운이 그 위를 흘렀다.
투명한 아지랑이와 검푸른 마기의 충돌에 허공에서 스파크가 일었다. 서로가 디디고 있는 대지가 쩍쩍 갈라지고, 가벼운 돌멩이들이 둥실 떠올랐다.
마력과 마기의 물고 물리는 자리싸움이 한순간 씻은 듯이 사라지고, 지면에서 5센티미터쯤 오르던 돌멩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꽈앙-!
돌멩이가 떨어진 소리는 그보다 더 큰 굉음에 묻혔다. 그리고 충격파에 의해 모래가 되어 바스라졌다.
주저앉은 지면이 더 낮게 패였다. 그 한가운데에 두 존재가 다시 격돌했다.
쟈드무의 전신이 회전했다. 엄청난 속도였다. 대도와 거기 더해진 검기의 길이를 짐작한 러셀이 뒤에서 확 잡아당긴 것처럼 바닥에 누웠다.
속도를 미처 따르지 못한 앞 머리카락이 잘려서 흩날렸다. 쟈드무의 대도가 지나가자마자 허리의 반동으로 튕겨오른 러셀이 나힐니르를 찔러 갔다.
크게 휘두르느라 자세가 흔들렸던 쟈드무가 억지로 몸을 움직여 칼자루를 당겨 대도의 검면으로 나힐니르의 검극을 막고, 튕겨냈다.
있을 수 없는 동작이었고, 그런 동작을 소화한 오크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생명의 돌에서 치솟은 마기가 그런 비명을 억눌렀다.
튕겨난 나힐니르 때문에 러셀의 가슴팍이 일순 비었다. 쟈드무의 왼발이 오른발 뒤로 돌아가고, 허리에 힘이 실렸다. 쿵, 하고 디딘 지면이 다시 내려앉음과 동시에 대도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한쪽은 밝고 한쪽은 어두운, 새벽의 여명과 어둠이 교차하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검푸른 흑마력을 두른 대도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꽈과광!
이제까지 만들어졌던 어떤 크레이터보다 더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성되며 땅이 통째로 주저앉았다.
거대한 진동파가 지면 위를 휩쓸고, 휘말린 괴수들이 허공을 날았다. 불칸의 성력을 두른 카이조차 바닥을 뒹굴었다.
성벽에 자리하던 인간들은 불어 닥쳐온 흙먼지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물러섰다.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와 신음,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는 의문성이 뒤를 이었다.
콰앙!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던 흙먼지가 돌연 확 하고 퍼졌다. 두 번째의 충격파가 날려버린 것이었다.
“이럴 수가.”
성벽 위의 인간들은 러셀과 카이, 단둘만이 저 전장에 참여한 것을 몸으로 이해했다. 저 전장에서 병사들과 용병들은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었다.
최소한 숙련된 기사와 전투 마법사, 그것도 마스터 급 이상의 강자만이 저 충격파 속에서 몸을 가눌 수 있었다. 타티아나는 떨리는 몸을 부여잡았다.
자신의 마력 회로가 저 강대한 마력과 마력의 충돌에 파르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아래로 내려가서, 말을 몰며 검을 휘두르고 싶었으나.
동시에 여기 가만히 서서 저 전투를 지켜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 이율배반적인 감정 속에서 자신의 곁에 다른 인형이 선 것이 보였다.
“이런, 말도 없이 벌써 내려가셨군요.”
“저기 있는 게, 러셀인가요?”
“예, 사라넨 님. 그것보다, 후와. 예전에 뵈었던 것보다 훨씬 강해지셨군요. 이제는 짐작도 되질 않겠어요.”
“···인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군요.”
타티아나가 막 흉벽에 오른 두 인영을 바라보았다.
“그대들은?”
“아, 영주님. 인사가 늦었습니다. 대교회에서 파견된 성기사, 제스입니다. 이쪽은···.”
타티아나는 사라넨을 알아보았다. 언젠가 자신의 부모가 근방의 숲을 관리하는 드루이드라는 존재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으니.
“직접 만난 건 처음이군. 반갑소. 타티아나 그레이스요.”
“사라넨이에요.”
사라넨은 성벽 아래의 전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과할 정도의 마나와 마력, 마기가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그 소용돌이의 흐름을 잡아 끌고 있었다. 사라넨의 녹안이 빛났다.
“주술사들.”
“예?”
“오크 주술사들이 후방에서 주술을 펼치려 하고 있어요. ···그런데 아엘라시스는 어딨죠?”
“어?”
대검과 대도가 부딪쳤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은빛으로 빛나는 달의 성력이 흑마력으로 이뤄진 검기를 불태웠다. 쟈드무는 넘치는 마기로 태워진 만큼의 흑마력을 보충하고 러셀에게 파고들었다.
공격과 방어, 방어와 반격, 반격과 다시 공격. 수없이 휘몰아치는 연격이 허공을 울리고 땅을 부수며 파헤쳤다.
둘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고 그럴 때마다 천둥을 닮은 굉음이 지상에서 터졌다.
쟈드무는 승기가 있다고 여겼다. 자신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는데 반해, 러셀은 그대로였다.
“후욱, 후욱. 오크는, 여기서, 무너지지 않는다.”
러셀은 왼쪽 위에서 대각선을 그리며 찍어오는 대도를 흘려냈다. 쟈드무는 흘려내는 것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회전시켜 횡으로 그었다.
검면으로 막은 러셀이 뒤로 훌훌 날아갔다. 그 뒤를 쟈드무가 바닥을 터트리며 달려가 내려찍었다.
도끼 질을 하듯 수없이 내려치는 검격. 더 이상 그 공격에 검술은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악마의 힘에 휘둘리는 한 미련한 짐승이 보일 뿐이었다.
러셀의 눈이 차가워지고, 동시에 입꼬리는 스산한 웃음을 지었다.
다시 한 번 사선으로 그어오는 대도. 이번에 러셀은 그 대도를 피하지도, 흘려내지도 않았다. 쟈드무는 아까 자신의 힘에 러셀이 뒤로 날아갔던 것을 떠올리고, 있는대로 괴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잠깐 동안 쟈드무는 러셀의 몸을 볼 수 없었다.
그저 흐릿했다. 뭉개진 유화 같은 움직임. 선명하지 못한 그림자.
까앙!
이제까지와는 다른 소리가 울렸다 보편적인 날붙이의 소리였다.
쟈드무의 멍한 눈이 하늘로 튕겨져 올라가는 대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칼자루를 잡고 있는 손과 팔뚝도.
그 팔뚝이 참 익숙해 보인다는 생각을 할 때, 뒤늦게 그의 잘린 상완에서 피가 푸슉, 하고 솟구쳤다.
비명을 내지를 시간도 부족했다. 나힐니르가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곡선의 궤적 속에 쟈드무의 가슴, 복부, 왼팔이 있었다. 그리고 빙글 도는 러셀의 몸과 함께 휘둘러진 대검은 쟈드무의 다리를 완전히 절단해 버렸다.
털썩, 하고 쟈드무의 무릎이 의지와 상관없이 꿇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