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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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
파렐스가 비명을 지르며 땅을 굴렀다. 그가 구른 자리 위로 수십 개의 화살이 박혀 들었다.
“케륵! 케르르르르!”
사냥감을 놓친 고블린들이 아쉬운 투의 울음을 흘렸다. 작은 악귀들은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를 넘나들며 다시 시위를 매겼다.
피피핑!
인간에게는 단궁일 것이나 고블린에게는 장궁과 같을 활에서 화살들이 쏘아졌다. 끄트머리에 달린 쇳조각에는 고블린들이 자체적으로 제조한 독들이 발라져 있다.
조금이라도 고블린들의 생태를 아는 자들이라면 저 독에 치를 떨 것이다. 각종 경련과 마비, 현기증과 호흡 곤란, 구토를 유발하는 저 독의 주재료는 분변이다.
“뭐 이렇게 그린 스킨들이 많은 거야?!”
이를 간 파렐스가 다시 몸을 날린다. 방패라도 있으면 좋았겠지만, 지금 그에게는 달랑 검 한 자루와 누비옷, 그리고 가죽 스케일 갑옷 밖에 없었다. 화살에 맞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뛰어야 했다.
“맞아라!”
바닥을 구르는 동안 큼직한 돌멩이 하나를 쥔 파렐스가 부지불식간에 나뭇가지 틈 사이로 던졌다. 파사삭, 하고 나뭇잎 몇 장만 떨어질 뿐 괴물의 비명은 들리지 않는다.
“케륵, 케륵, 케륵!”
“저거 나 비웃는 것 같은데. 으악!”
인간보다 작은 몸집과 근력을 그보다 상회하는 민첩함과 순발력, 그리고 균형감각으로 때우는 모습. 원숭이 뺨치는 나무타기는 이 고블린들이 얼마나 공중에서의 습격으로 재미를 봐왔는지를 보여준다.
파렐스가 혼자였다면 결국 고슴도치 꼴이 되어 흙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다. 종잡을 수 없고, 가끔은 무섭게까지 느껴지는 사람이긴 했지만, 최소한 전투에 있어서는 든든하기 짝이 없다.
“파렐스. 거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
서늘하고, 또 아름다운 목소리가 파렐스를 우뚝 서게 만들었다. 그의 동료는 허튼 말을 하지 않는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라고 했으면, 정말 한 발자국도 움직이면 안 된다.
숲에서 때아닌 사슬 소리가 명랑하게 울렸다. 그리고 흰색의 번뜩이는 섬광이 폭풍에 휘말린 갈대처럼 나부꼈다.
촤촤촤촤촤!
섬뜩한 절삭음이 끝나고, 모든 건 잠시 멈춘 것처럼 보였다. 정지는 오래가지 않았다.
드드득,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울리며 무수한 나무들이 밑동만 남긴 채 쓰러지기 시작했다. 수십 년을 한 자리에서 뿌리 내리며 곧은 선을 그렸던 나무들은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땅에 몸을 뉘였다.
파렐스는 가만히 몸을 떨었다. 정확히 한 발자국 이내의 모든 지면이 공격 범위에 들어서 있었다. 조금이라도 팔이나 다리를 내밀었다면 나무들과 같은 꼴이 되었을 것이다.
나뭇가지 위에 있던 고블린들도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졌다. 불운한 몇 마리는 그대로 나무에 깔려 죽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고블린들이 살아서 몸을 일으켰다.
“케르르르르!”
놈들은 어째서 나무들이 쓰러졌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고블린들은 그저 맹목적인 본능의 가리킴에 따라 울고, 허리춤의 끈에 매달아 두었던 단도나 작은 손도끼를 손에 쥐었다.
목표는 자욱한 흙먼지와 흩날리는 나뭇잎들 사이에서 홀로 고고하게 서 있는 검은색 일색의 여자. 검은 머리카락과 빛을 반사하지 않는 검은 동공에 작은 초록 피부 괴물들이 비쳤다.
여자가 말했다.
“징그럽네.”
“케르가악!”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고블린들이 달려들었다. 동공 안쪽에 붉은 점이 깜박이고,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흐른다.
여자, 이루실은 이 숲에 흐르는 기묘한 마나의 흐름을 피부로 느꼈다. 마치 끈적한 실 같은 것이 나무와 나뭇가지, 나뭇잎과 수풀을 감고 있는 듯하다. 불길한 마나의 흐름이었다.
“흐압!”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에 그 자리에 그대로 있던 파렐스가 고블린들과 조우했다. 허리춤보다 낮은 키의 괴물들을 상대해야 하기에 자세가 엉거주춤하다.
그럼에도 파렐스는 곧잘 싸웠다. 펄쩍 뛰어오른 고블린의 상하체를 가르고, 뒤에서 접근해 발목을 자르려던 놈을 걷어찬다.
대롱을 입에 대고 마비침을 쏘려던 놈에게는 흙을 걷어차 뿌려 시야를 가린 다음 머리를 쪼갰다. 그만하면 충분히 숙련된 용병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루실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발을 디딘 바닥에서 흰색의 사슬들이 뱀처럼 머리를 치켜들며 올라오더니, 잔영을 그리며 고블린들을 휩쓸었다. 초록색 살점과 검은 피가 터지며 비산했다.
그녀에게 달려든 고블린들이 정리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괴물들은 고블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 간!”
고블린들을 첨병으로 보낸 것인지, 아니면 나뭇가지를 타 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것인지. 뒤늦게 나타난 회색 피부의 괴물이 새는 발음으로 으르렁거렸다.
우룩크다. 오크의 먼 친척뻘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지성을 잃고 포악함이 강해진 것들. 우룩크가 오크의 변형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우룩크라는 놈들 자체가 오크보다 강하기도 하고, 산이나 숲 깊은 곳에서 저들끼리 살아가다 여행자를 습격해 잡아먹는 까닭.
놈들이 목격된 지는 몇 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규모 또한 많지 않았다.
나타난 놈들은 다섯 마리. 하나 같이 180센티미터 이상의 키에 그보다 과한 근육을 우락부락하게 달고 있다.
가진 무기는 검과 도끼, 그리고 창과 방패 따위. 고블린보다 못한 손재주로 만들었을리는 없고, 사냥한 인간들에게서 빼앗은 것일 테다.
방어구는 없다. 그저 사타구니만 간신히 가리는 천과 가죽 허리끈만 달려있을 따름. 오크들이 나름대로의 의복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만큼 야만적으로 변했다고 하겠다.
“크아악!”
도끼를 들고 있는 놈이 냅다 달려들어 휘둘렀다. 이루실은 허리를 유연하게 뒤로 젖히며 피한 다음 그대로 한쪽 다리를 치켜올렸다. 발끝이 우룩크의 턱을 가격했다.
빡!
턱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놈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뇌가 뒤흔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고개를 두어 차례 흔들고는 곧장 시야를 되찾았다.
이루실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지금 우룩크라는 괴물을 처음 본 참이다. 시범삼아 마력을 많이 담지는 않았다고 해도, 저리 빠르게 정상으로 돌아올지는 몰랐다.
도끼를 든 놈이 주춤거린 사이 다른 우룩크들이 쇄도했다. 한 놈은 오른쪽에서 칼을 날리고, 한 놈은 창대를 휘둘렀다. 호리호리한 체형의 이루실은 방어구 하나 없었다.
가죽 바지와 질 좋은 셔츠, 조끼, 그리고 외투만 걸친 간소한 차림. 검대에 매어놓은 길쭉한 장검만이 무기였다.
스르릉.
이루실의 장검이 칼집을 벗어나는 소리. 그녀의 팔이 흐릿한 잔영을 그리며 움직였다.
왼편에서 횡으로 그어지는 칼을 위로 걷어내고, 동시에 오른편에서 옆구리를 후려치려는 창대를 아래로 내리긋는다.
곰과 비슷한 힘을 내는 우룩크들의 괴력이었지만 마력으로 강화된 이루실의 신체 능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거기에 속도는 확연히 그녀가 빨랐다.
가장 급한 두 개의 공격을 차단한 뒤 이루실은 앞으로 몸을 날렸다. 다시 한번 팔이 흐릿해지고, 우룩크들은 다급한 얼굴이 되어 제각기 무기를 들었다.
스칵! 하며 쇠붙이 잘리는 소리가 난다. 그녀의 몸과 같이 강화된 검은 무리없이 우룩크의 칼을 자르고 가슴팍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녀가 왼편의 칼 든 우룩크에게 검상을 입힐 때 창을 든 오크가 뒤에서 이루실의 등허리를 찔러 들어갔다. 허나 창날은 피와 살을 머금지 못했다.
어느새 바닥에서 솟아오른 하얀 사슬들이 창대와 우룩크의 다리, 팔을 칭칭 감고 있었다. 감고,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무릎과 허리가 푹 숙여진 우룩크가 괴성을 질렀다.
“크워어어어!”
엄청난 괴력이 사슬을 하나둘 끊어낸다. 이루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강력한 마력 저항. 고블린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자빠진 것과는 다르다.
북부의 마수, 마물들 또한 강한 마력 저항력을 갖춘다. 그들의 변이, 강화에도 자연의 기이한 마력이 필요 조건의 한 요소이기 때문.
그런데 이 처음 보는 괴물들도 북부의 괴물들과 비슷한, 혹은 그 이상의 저항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찰나의 빈틈은 전장에서 생과 사를 가른다.
촤악! 이루실의 검이 우룩크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곧 매끈한 단면을 드러내며 목이 뒤로 굴러떨어졌다.
남은 건 넷. 그 중 가슴팍에 깊은 검상을 입고 누웠던 놈이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일어나려 한다. 이루실의 검이 더 빨랐다. 마력이 깃든 검은 단단한 우룩크의 가죽도 무리 없이 찌른 다음 빠져나왔다. 심장이 파괴된 우룩크는 그대로 죽엇다.
이제 셋. 이루실의 왼손에서 생성된 사슬이 채찍 같은 곡선을 그렸다.
우룩크 셋과 이루실의 공방이 이뤄졌다. 그녀의 마력 사슬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덮쳐오는 칼과 도끼들의 공격 경로를 틀고, 발목을 잡아채고, 때로는 끝을 날카롭게 만들어 살점을 꿰뚫었다. 그 혼란스러운 사슬의 틈 사이에서 이루실의 팔과 다리가 유연하게 미끄러졌다.
채앵!
사슬을 팔에 휘감아 위에서 내리꽂힌 칼을 막은 이루실이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한 마리의 제비처럼 공중을 가른 그녀에게서 수십 개의 사슬이 만들어져 지상의 우룩크들에게 꽂혔다.
촤르르르르륵!
제각기 몸에 감겨든 하얀 사슬을 잡아당기는 우룩크들. 하지만 보다 더 많은 마력이 부여된 사슬은 아까처럼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사슬들은 점점 더 많이, 그리고 더 촘촘하게 우룩크들을 감쌌다. 마치 거미가 거미줄로 먹잇감을 돌돌 마는 것 같다.
다만 이루실도 찾아온 마력 공백에 안 그래도 하얗던 피부가 창백해졌다. 예상보다도 우룩크들의 힘이 강하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끊어내려는 괴물들과 버티는 이루실의 힘겨루기가 이뤄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감기는 사슬들이 많아질수록 몸부림은 굼벵이가 꿈틀거리는 것 이상의 반응을 만들기 어려웠다.
머리통만 드러나 있고, 나머지는 사슬에 감긴 우룩크들이 분노에 찬 눈길로 이루실을 노려봤다. 그러나 관절과 관절이 사슬에 감기고 묶여 있는 와중이다.
힘을 준다고 하면 오히려 자신의 근육과 뼈가 상할 터. 보다 편리하게 구속하는 데 성공하자 이루실의 마력 소모도 한 층 줄어들었다.
“주긴, 다! 크아악!”
제대로 된 발음으로 말도 못하고 자신의 감정도 제대로 제어지 못한다. 흉흉한 눈빛에는 우룩크 이전, 오크로서의 지성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에 띄는 무엇이든 파괴하고, 먹어 치우는 상종 불가능한 괴물로서의 본능만이 보일 따름.
이루실조차도 북부가 아닌 중부에서 이만한 흉성을 보이는 괴물을 만날 줄은 몰랐다. 위험한 괴물이다.
“괜찮으십니까?”
자기에게 달려든 고블린을 해치우고 온 파렐스가 곁에 섰다. 검은 피와 내장, 땅바닥을 구르느라 묻은 먼지와 나뭇잎 때문에 몰골이 말이 아니다.
“괜찮아. 냄새는 좀 나지만.”
“윽. 죄송합니다.”
물러선 파렐스가 아직 감겨서 바둥거리는 우룩크를 보며 말했다.
“오크인 줄 알았는데, 우룩크군요.”
“우룩크?”
“예. 오크의 먼 친척쯤 되는 괴물이라죠. 생긴 것도 비슷하고. 어디에서는 구분 짓지 않고 싹 다 오크라고 부르면서 토벌하려 들기도 하는데, 워낙에 세서. 얘네들 때문에 망한 화전민 마을들도 많다고 하더군요.”
“주로 중부에 서식하나?”
“네. 아직까지는 다른 지역에서 봤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오크가 있는 쪽에는 꼭 얘네들이 같이 있는 경우가 많다더군요. 마탑이나 용병 조합 쪽에서는 우룩크와 오크 간의 종족 다툼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견측도 내놓고 있습니다.”
“종족 다툼은 아닌 것 같은데.”
“예?”
이루실은 멀리서 다가오는 기척들을 느꼈다. 안력을 돋워 살펴보자 오크 무리였다. 수가 만만치 않고, 갑옷과 무기를 갖췄다. 대략적인 수만 해도 스물은 넘었다. 아무리 이루실이라 하더라도 스물이 넘는 오크들과 한꺼번에 싸우기에는 부담이 갔다. 거기에 그녀가 경계하는 대상은 따로 있었다.
마력을 다루는 주술사가 저 무리 중 하나에 끼어 있다. 그리고 그 마력은 여기 있는 우룩크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가느다란 실과도 같은 마력사가 괴물들의 정신과 연결되어 그들과 전투를 치른 것.
우룩크를 조종하고 다루는 주술사의 존재. 또 어떤 주문이 있을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이 숲에 깔려있는 음습한 마력들이 걸렸다.
이루실의 마력 구현 능력이 경지에 다다랐다고는 하나, 불리한 지형과 숫자의 열세, 거기다가 제대로 된 주문을 다룰 줄 아는 주술사의 존재는 까다롭다. 재빠르게 목숨줄을 끊어놓으면 모를까, 그렇지 못한다면 다른 오크들에게 포위 당할 것이다.
어떻게든 그녀 혼자라면 빠져나올 수 있어도 파렐스는 죽을 것이다. 길을 찾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그녀로서는 아직 길잡이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전력을 가늠한 이루실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물러나자.”
“알겠습니다.”
파렐스는 가타부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몇 달간 그녀가 가진 넓은 시야와 전략적인 판단은 그에게 그 외의 행동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로부터 목숨을 구제받은 적도 많았고,
“그 라함 영지라는 곳이 얼마나 남았다고?”
“아, 예. 이제 사흘거리입니다. 근처에 산장이 있다고는 했는데, 길잡이가 있지 않고서는 찾기 어려운 외진 곳에 있다더군요. 일단 이 방향으로 쭉 가면 영지 외곽이 나올 겁니다. 성벽을 따라 돌면 관문이 나온다고 하니,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내 동생의 경로가 이 방향인 건 확실하겠지.”
“다른 곳이 있을 수가 없어요, 확실합니다.”
“알았어.”
이루실은 떠나기 전 우룩크들의 숨통을 모두 끊었다. 저항은 부질없었다. 심장과 목이 잘린 우룩크들의 피가 마른 흙바닥을 적셨다.
이루실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자리에서 떠났다. 차마 발자국을 남기지 않을 정도의 실력은 없는 파렐스는 이루실에게 업혔다.
이루실과 파렐스가 사라지고 얼마 후, 나무 지팡이를 든 오크 주술사와 오크 무리가 살육의 현장에 도착했다.
무수히 잘려 밑동만 남은 나무들과 부러진 나뭇가지들, 육편으로 남은 고블린들. 그리고 목이 베이고 심장이 파괴된 우룩크들.
“어떤 놈들이.”
주술사가 중얼거렸다. 숲에서 여행자들을 발견하면 잡거나, 죽이라는 지시를 조종하는 우룩크들과 고블린들에게 내려놓기는 했다. 고블린들은 간단한 주문으로도 쉬웠고, 우룩크들도 어렵지 않았다.
지성이 떨어져 괴물로 전락한 동족이지만, 그런 동족의 시체를 일별하는 주술사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문의 효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 때때로 새겨놓은 주문을 다시 점검해야 했는데, 지금 같은 경우는 그 주문을 미처 되새기기도 전에 일어났다.
주술사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리저리 난잡한 흙바닥에는 추적할 만한 흔적이 없었다.
혀를 찬 주술사가 명령을 내렸다. 우룩크의 시신을 수습하라고. 전쟁이 머지않았다.
***
자연의 힘을 담은 시선과 러셀의 눈이 마주쳤다. 처음 녹색의 눈동자에는 이렇다 할 감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거의 무정물에 가까운 눈이다.
그렇기에 러셀을 발견하고 살짝 들어찬 놀라움은 그만큼 파격적이었다. 잔잔한 호수에 커다란 돌 하나를 떨어트린 듯한 반응. 돌이 일으킨 파동에 넘실거리는 녹색 호수가 러셀을 응시한다.
그러더니 과일을 내려놓고 러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늑대의 은인이시군요.”
“넌 누구지?”
두건을 내리자 그 안에서 연둣빛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드러난 얼굴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아보기 어려운, 중성적인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목소리로도 분간하기 쉽지 않다.
“사라넨이라고 합니다. 마그나가르타의 오랜 친우이기도 했습니다.”
마그나가르타. 로고스 마을의 수호신의 이름이다. 달의 여신의 은총을 받아 지성과 힘을 얻어 신수가 된 늑대.
“러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