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라함 (2)
***
인간의 평균 신장을 훌쩍 상회하는 존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들의 피부색은 그들이 자리한 장소에 무수히 서서 햇살을 가로막고 있는 나뭇잎의 색깔과 같았다.
오크들이다. 제각기가 다스리는 부락의 상징을 그린 깃발을 족장의 호위대들이 들고 있고,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지 않으려 깃발을 노려보았다.
빈말로라도 사이가 좋다 할 수 없지만, 그들 종족 간에 일어났으며 또한 가속화되어 가고 있는 현상이 그들을 모이게 만들었다.
“다 온 건가?”
유난히 커다란 어금니를 가진 오크, 첸파가 팔짱을 낀 채 입을 열었다. 처음 말문을 텄다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그가 다스리는 부족이 가장 수가 많고 강대했다.
오크의 평균 신장은 180센티미터가 넘는다. 하지만 그런 오크들 사이에서도 첸파의 거구는 눈에 띌 정도였다. 단순히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단련된 근육들이 혈관과 함께 꿈틀거린다.
뒤를 이어 리어둔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오크의 평균 신장보다 약간 작지만, 그만큼 재빠른 몸놀림과 순발력으로 족장의 자리를 꿰찬 자. 허리춤에 달린 날카로운 단도는 그의 다른 손이라 불러도 무방하다고 전해졌다. 리어둔이 자리에 있지 않은 다른 오크를 지적했다.
“투메룬이 보이지 않는데. 인간들의 산장을 무너트리고 제물을 확보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네 개의 부족, 네 명의 족장. 그들은 미증유의 위기감을 공유하며 대륙 중부의 산맥에 모여들었다.
“점점 이성을 잃는 동족들이 많아지고 있다. 피부는 회색으로 물들고, 발음은 어눌해지고 있어.”
우룩크. 오크와 비슷한 외견과 덩치, 하지만 난폭한 성질 때문에 서넛의 무리밖에 만들지 못한다. 수틀리면 저들끼리도 이빨을 박아댄다.
그 정체는 변이된 오크였다. 고유의 색깔을 잃고 머리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며 사람과 짐승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괴물이 되어버린 것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도 언제 그렇게 될지 모른다.’
우룩크가 되어버린 동족을 베어 넘기길 수십 차례. 가늘게나마 이어져 있던 인간 상단들과의 끈도 우룩크들의 습격 탓에 점차 끊어졌다.
오크들은 고립되어 가고 있었고,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때 오랜 시간 바깥에 나가 있던 오크 주술사, 투메룬이 악마의 전령과 함께 돌아왔다.
전령은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했다. 악마와 손을 잡을 것. 그렇게 해서 완전히 새로운 종족으로 탈바꿈되는 것.
위험한 발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빠르게 도태되어가고 있었고,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오크들의 합의는 아직 일치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가 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신을 찾아야 한다.’
첸파의 주장이었다. 그는 오래전, 오크에게도 신이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가 이끄는 부족, 붉은 망치의 늙은 오크 주술사는 한때 그들에게도 신이 있었음을 설파했다.
그 신은 오크를 이끄는 전사신. 붉은 기운으로 육체를 강화하고, 검은 문신으로 피부를 뒤덮은 모습의 신이었다.
그 붉은 기운은 여느 괴물이 흘리는 불길한 빛과는 다르다. 맑고, 투명하며, 정신을 일깨워주고 전투 한정으로 지치지 않는 체력을 선사해주는 힘. 그야말로 신의 힘이라 할 수 있을 것이었으나, 전설로만 전해지기에 확인할 방법은 없다.
작금에 와서 오크의 신을 섬기는 자는 찾아볼 수 없다. 오크조차도 스스로의 신을 모르는 와중에, 어디로 가서 신의 대전사를 찾는단 말인가.
쿵!
커다란 칼을 등에 맨 오크, 쟈드무가 발을 굴렀다.
“시간이 없다! 우리가 모인 이유가 무엇인가? 결국 저 인간들의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었나? 투메룬이 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계획은 진행되어야 한다! 저기 아래 있는 인간들의 터전을 파괴하고 그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 그리고 악마의 힘으로 종족의 쇠퇴를 막는 것! 투메룬만 주술사인 것이 아니다!”
“쟈드무, 너?”
다른 오크들을 놀란 눈으로 보는 가운데, 쟈드무의 전신에서 뭉클뭉클한 검은 기운이 솟아올랐다. 흑마력이었다.
첸파가 눈을 가늘게 뜨고 쟈드무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냐, 쟈드무?”
“바보 같은 질문은 집어치워라, 첸파. 언제까지 밍기적거리고 있을 거냐. 오크의 신? 그딴 건 없다. 설사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 우룩크들을 보아라! 언제, 어느 때 우리가 그들처럼 변해버릴지 알 수 없다! 아직 한 줌의 이성이 남아있을 때 길을 정해야 한다!”
“······.”
흑마력을 전신에서 뿜어내며 쟈드무가 이어서 말했다.
“또 우리에게는 든든한 우군이 있다. 그를 끌어낼 수 있다면, 이번 전쟁은 손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라쉐를 말하는가. 그는 우릴 쉽게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돕지 않는다면 돕게 만들어야지.”
마지막은 네 명의 족장 중 유일하게 주술사의 위치를 가진 오크였다. 그것도 그냥 주술사가 아니라, 모든 오크 부족과 족장들이 조언을 구하는 대주술사. 켈파그.
탁!
켈파그가 들고 있던 나무 지팡이를 바닥에 찍었다. 그러자 그로부터 허연 빛이 안개처럼 일어나더니 중앙에서 지도 하나가 형성되었다.
주술과 마법의 힘으로 형성된 지도는 현재 오크들이 자리하고 있는 장소와 다스리고 있는 부하들, 산맥과 숲의 지형, 다른 그린 스킨 괴물들을 표시했다.
켈파그가 지팡이를 휘젓자 지도가 움직이며 숲이 끝나는 지점의 한 장소를 비췄다. 넓지 않은 평야와 밭, 그리고 수 킬로미터의 둘레를 감싸고 있는 성벽이 보호하고 있는 인간들의 도시.
“이미 우리는 물살에 올라탔다. 이제와서 내린다면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갈 뿐. 침공을 준비하라.”
오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일하게 첸파만이 무거운 표정이었다. 리어둔이 그런 첸파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
경비병의 정지 신호는 별것 아니었다. 러셀의 시선을 받은 경비병은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보다가 말했다.
“혹시, 용살자 아니십니까?”
“······그렇소만.”
“오오오!”
곧 그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경비병들이 우루루 몰려와 러셀 일행을 감싸더니, 흥분한 표정으로 떠들었다.
“거봐! 내가 뭐랬어, 용살자 님이 맞다고 했잖아!”
“라함 영지에 오셨다는 건, 괴물 토벌을 위해서이십니까?”
정확히는 그들 뒤의 배후로 짐작되는 악마, 겔리오투스를 죽이려 온 것이지만.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차피 괴물들과도 조우를 할 것 같았으니.
“맞소.”
다시금 경비병들이 러셀을 우러러본다. 에란디스에서는 이런 반응이 없었는데.
아마 지금 라함 영지가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 덕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주점과 여관, 용병 길드나 사무소에 오갈 말들이 거의 괴물 토벌에 관련된 것일 테니.
러셀의 전생처럼 몇 초 만에 반대편 나라의 살인 사건을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곳에는 마법이라는 다른 방법이 있다. 거기에 소문이라는 것은 원래 발 없는 말과 같다고 하지 않나.
“거기, 무슨 소란인가.”
갑자기 미성 한 줄기가 파고들었다. 경비병들이 화급히 몸을 돌리더니, 바로 허리를 숙였다.
“영주님!”
그곳에 말을 타고, 판금 갑옷을 입은 자가 있었다. 갑옷에 새겨진 곡선과 문양이 화려하다. 그의 뒤로는 비슷한 갑옷을 입은 기사 둘이 서 있었다.
곧 그자가 투구를 벗자 위로 묶여 있던 연한 회색의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드러난 얼굴은 아름다운 여인의 것이었다. 연파랑의 눈동자와 살짝 올라간 눈매가 매력적이었다. 눈가에 찍힌 두 개의 눈물점이 도드라져 보인다.
햇빛을 오래 쬐지 못한 사람의 것처럼 피부는 하얗기 그지없었다. 작은 얼굴만큼이나 가느다란 목은 사슴의 것처럼 부드럽고 가냘팠다. 하지만 갑옷을 입고 말 위에서 안정적인 균형을 잡고 있는 모습은, 그녀가 얼마나 몸을 쓰는데 능숙한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판금 갑옷이라 하면 무거울 것 같다는 생각이 있지만, 편견이다. 오히려 가벼운 편이다. 판금 갑옷의 방어력은 두께에서 나오지 않는다.
거기다 이 세계는 마법이 실존하는 세계. 경량화 마법은 그리 드문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주문을 쓸 수 있는 마법사가 필요하겠지만, 이만한 영지에서 그 정도의 영지 마법사가 없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영주라고 불린 여자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말에서 내렸다. 러셀도 영주가 내리는데 계속 말에 타고 있을 수는 없었고, 그래서 똑같이 크라이에서 내렸다.
영주는 투구를 옆구리에 끼고 다른 손을 내밀었다.
“타티아나 그레이스. 라함 영지의 영주일세. 시찰 중이었는데 소란이 있어 와 보았지. 오길 잘 한 것 같아.”
본래라면 한쪽 무릎을 꿇고 손가락에 끼인 반지에 입을 맞춰야 하지만, 장갑을 끼고 있는 손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거기에 내민 것도 손등이 아니라 악수를 하듯이 엄지를 위로 한 방향이었다.
러셀은 무릎을 꿇지 않고 악수를 받아들였다. 영주라는 자가 그걸 원하는 것 같았기에.
“러셀입니다. 뒤의 사람들은 제 일행입니다.”
악수를 나눈 타티아나는 뒤의 인원을 쭉 살피더니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음. 오크와 소녀라. 특이한 조합이군. 지금 우리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아는가?”
“알고 있습니다.”
타티아나의 푸른 눈이 호선을 그렸다.
“알고 있다니 괜히 마음이 두근거리는군. 그대 일행들을 성으로 초대하고 싶은데. 받아주겠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타티아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에 올랐다. 한 두 번 오른 솜씨가 아니다. 허리춤에 매달린 장검 또한 손질이 잘 되어 있었다.
“그럼 이따가 성에서 보도록 하지.”
타티아나는 러셀 일행에게 안내역으로 쓰라며 병사 하나를 붙여주고는 말을 돌렸다. 그리고 기사 둘과 함께 길 저편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고. 행수 쿤테니오가 돈이 담긴 가죽 주머니를 러셀에게 건넸다. 러셀이 돈주머니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묵직한 것에 그를 쳐다보았다. 쿤테니오가 씩 웃으며 말했다.
“조금 더 넣었습니다. 솔직히 러셀 님 아니었으면 몇 번이나 위험한 순간이 많았잖습니까. 산장에서 렘파드의 조언을 듣기를 잘 했다고 얼마나 저를 칭찬했는지 모릅니다.”
“고맙군.”
“별말씀을. 러셀 님은 얼마나 여기서 더 머무를 생각이십니까?”
“일단 상황을 보고 판단을 해야겠지.”
“그렇겠지요. 제가 당연한 걸 물었습니다. 상황이라 하시면, 역시 이 라하무른 산과 산맥 주변의 괴물들 때문이겠군요.”
어디서 정보를 또 물어왔는지, 쿤테니오는 러셀이 묻지도 않았는데 근방의 상황을 상세하게 풀어놓았다.
라함 영지의 동쪽으로 가는 길이 막혀있다고 한다. 그린 스킨들 뿐만이 아니라 난폭해진 짐승들 탓에 숲지기나 사냥꾼들이 애를 먹고 있다고.
“잘 들었소.”
“도움이 되었다면 기쁠 것 같군요.”
쿤테니오와 대화를 마치고, 사흘간의 여정 동안 함께 했던 용병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큼, 어. 당신들 꽤 강하던데 말이오. 혹시 동료가 더 필요하진 않소? 칼은 잘 다루는데.”
“용살자라고 하셨지? 사실 처음 듣는 얘기지만, 영주가 직접 올 정도라고 하면 대단한 거 맞지. 같이 다니고 싶은데, 안 되겠나?”
이런 식으로 파티를 이루고 싶다는 용병들도 있었으나, 러셀은 모두 거절했다. 몇몇은 계속되는 거절에 울컥하기도 했으나, 어느새 다가온 카이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그들을 쏘아보자 깨갱 하고 물러났다.
러셀은 개중 렘파드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로 간 것인지 그는 자취를 감춘 뒤였다.
찾으려면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겠으나, 러셀은 고개를 흔들고 안내역으로 붙은 병사에게 말했다.
“안내를 부탁하지.”
“아, 예! 알겠습니다!”
소문의 용살자를 직접 만났다는 것에 깊은 감명이라도 받았던 것인지, 젊은 병사는 러셀에게 과할 정도로 예를 차렸다.
***
“이름이 어떻게 되지?”
“아? 제, 제 이름 말씀이십니까?”
“그래. 난 러셀이다.”
“아, 제 이름, 이름은 데빈입니다.”
데빈의 안내에 따라 러셀과 카이, 아엘라시스는 라함 영지를 돌았다. 잘 깔린 판석이 길과 길을 잇고, 정갈하게 지어진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늘어진 빨랫줄이나 거기 걸린 옷가지들, 시장으로 이어지는 길고 커다란 길들. 그곳에서 또 다른 삶을 영위해나가는 사람들.
러셀 일행의 모습은 눈길을 끄는 것이었지만, 그들 외에도 아인종이나 이종족들 또한 많이 다녔기에 오래가지는 않았다.
해가 저물고, 땅거미가 올라오고 있었다. 러셀은 점차 세상의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영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횃불을 들고, 고정된 횃불대에 불을 붙였다. 점점 성벽 위로 불길들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농민들, 농노들이 하루의 고된 일과를 마치고 처진 어깨로 들어왔다. 바깥의 괴물들이 기승을 부리니 훼손된 밭의 면적이 많은 탓이다.
길거리에서는 벌써부터 거하게 취한 사내들이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하다가 결국 주먹질을 한다. 사람들은 말리지 않고 웃으면서 구경했다. 결국 치안 경비대가 와서 두 사내의 엉덩이를 후려치자 뿔뿔이 흩어진다.
바깥의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가운데에도 성벽 안쪽의 사람들은 이렇게 평화로워 보인다. 언뜻 이해가 안 가지만, 이 또한 적응의 결과일 것이었다.
러셀이 보고자 했던 세상의 또 다른 면이 바로 이 영지에 그려져 있었다. 말로만 듣던 명화를 코 앞에서 보는 기분이다.
썩, 나쁘지 않았다.
그때 러셀의 감각에 어떤 존재가 감지됐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스스로의 마력을 잘 감추고 있는, 로브를 뒤집어 쓴 자.
그자는 과일 가판대 앞에서 붉은 과일을 집어 들고 있었다. 그때 그자 또한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고개를 스르르 돌렸다.
러셀과 두건을 뒤집어쓴 존재와 눈이 마주쳤다. 찬란한 녹색 광채가 서려 있는 눈동자. 풀과 나무, 그리고 짐승의 기운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