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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05화 (106/225)

105화 라함

많은 사람들이 러셀의 무위를 목격했다. 최소한 고블린에게 죽기 직전 구제받은 자들이나, 투메룬과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그러했다.

두 개의 커다란 무기를 쥐고 괴물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며 학살하고, 푸른 화염을 마구 내뿜던 오크 주술사에게서도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압도하고 물러가게 만들었다.

지금 멀쩡히 산장에 도착했다는 것은 산장을 습격한 그 오크 주술사도 죽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렘파드 외의 많은 사람들이 러셀과 그 일행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산장의 목책이 쓰러지고, 안쪽의 무수한 건물들이 파괴와 화재로 인해 무너졌음에도 사람들의 표정에 좌절의 얼룩은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러셀에 대한 무수한 호기심으로 반짝거리고 있다. 여차하면 와서 말을 걸 태세지만, 러셀이 지닌 특유의 분위기-귀족적인 외모와 기이한 눈동자 색깔-와 일행의 면면이 그 충동을 억제하고 있었다.

이렇게 다가와서 말을 건 렘파드 같은 경우가 조금 특이한 셈.

러셀은 일행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렘파드가 물었다.

“큼, 어디로 가시오?”

“날이 밝았는데 이제와서 다시 잠을 청하기도 그렇고. 아침을 먹은 후 떠나야지.”

“그럼 어제의 주점으로 오시겠소? 내가 가서 먼저 식사를 주문해놓지.”

러셀은 그러라고 했다. 렘파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옷을 추스르고 주점으로 걸어갔다.

“난 말한테 가볼 테니 카이, 너는 짐 챙겨서 내려와.”

“알았소.”

그들이 머물렀던 여관은 무사했다. 마구간도 마찬가지로. 생각한 것보다 더 멀쩡했다.

마구간을 지키던 어린 소년은 얼굴과 팔에 검댕과 피를 묻히고 있긴 했지만, 자신의 피는 아닌지 씩씩하게 움직이며 마구간의 말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소년은 러셀 일행을 발견하고 허리를 숙였다. 허리를 숙인 방향은 칼리아를 향해서였다.

“오셨습니까! 분부하신 대로 말은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고맙구나.”

러셀을 본 크라이가 투레질하며 입술을 벌름거렸다.

아엘라시스가 말의 목덜미와 갈기를 쓰다듬자 기분이 좋은지 눈을 감았다. 러셀은 그걸 바라보다가 말했다.

“멀쩡하군. 생각했던 것보다.”

러셀의 옆에 서 있던 칼리아가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내가 나오기 전에 마법으로 기척과 시야를 가려놨느니라. 고블린들이 발견하진 못했을 것이다.”

소년의 예의 바른 인사에는 이유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칼리아의 수혜를 받은 여관과 마구간은 그곳뿐이었고, 다른 건물들은 괴물들의 습격을 피해갈 수 없었다. 완전히 무너지진 않았어도 벽에 커다란 상흔을 입은 여관들이 부지기수다.

무너진 마구간이나 다리가 다친, 그리고 죽은 말들도 많았다. 짐마차를 이끄는 말들이 죽었기에 상인들의 주름이 깊어질 것이었다.

주점은 화재에 지붕이 통째로 날아갈 뻔했지만, 아엘라시스의 극적인 마법 덕분에 그럭저럭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록 처마와 한쪽 벽이 새까맣게 그슬리긴 했지만.

들어서니 안쪽은 한산했다. 둥근 테이블들에 들어찬 손님들은 서넛밖에 되지 않았다. 아직 바깥의 난리를 수습하지 못한 것일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불귀의 객이 되어서일 수도 있었다.

“어서 오세요!”

활달한 목소리. 시선을 돌리자 어제의 여급이 그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었다. 마주 인사하고 들어서니, 구석의 자리에서 렘파드가 손을 들었다.

“여기입니다.”

먼저 식사를 주문한다고 하더니, 테이블 위에는 푸짐한 한상이 차려져 있었다. 넷이 자리에 앉자 테이블이 좁아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여급이 갖다준 맥주를 홀짝이던 렘파드가 불쑥 말을 꺼냈다.

“라함 영지로 가는 것 맞소?”

“그런데.”

“어차피 갈 것이라면, 상단과 같이 가는 건 어떻소? 이번에 칼잡이들이 죽어서, 자리가 좀 남는데.”

“무슨 상단?”

렘파드는 러셀의 반말에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쿤테니오라는 이름의 상단주가 이끄는 상단이오. 규모가 꽤 있지. 이번에 라함 영지가 괴물 토벌 건으로 상금을 걸고 용병들을 모집하니, 자연히 상인들이 모이고 있소. 아, 안 그래도 저기 오는군.”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세 명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러셀이 고개를 조금 들자 화려한 옷과 모자를 입은, 누가 봐도 나 상인이오 하는 옷차림을 한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코 아래 멋들어지게 난 콧수염이 눈에 띈다. 상인 양옆에는 칼을 찬 용병 둘이 있었다. 호위인 듯했다.

용병들은 러셀 일행에 잠깐 시선을 두었다가 바로 정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봤다. 용병이라기보다는 훈련받은 병사 같은 자세였다.

“반갑습니다. 쿤테니오라고 합니다. 염치 불고하게도 여기 있는 렘파드에게 따로 부탁했습니다.”

“러셀이오.”

러셀 외의 일행들이 인사를 마치자 쿤테니오는 본론을 꺼냈다.

“들으셨겠지만, 저희 또한 라함 영지로 가고 있습니다. 지금 그곳은 수렵 축제 비슷한 것까지 열리고 있다는군요.”

“수렵 축제?”

“예. 오크 말고도 다른 괴물들이 우후죽순으로 나타나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괴물들 때문에 가도나 상도가 완전히 막혀버릴지도 모른다고. 더 지체되면 찾아드는 사람이 뚝 끊기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예측하더군요. 여기 산장에서 일차적으로 용병들을 모집했다가 영지로 보내는 일도 진행 중이었는데.”

쿤테니오는 한숨을 쉬었다.

“사흘 전, 소소하게 고블린 부락 하나 정리하는 것에서부터 예상치 못한 피해가 나오고, 어젯밤에는 아예 이상하리만치 커진 고블린들이 산장을 덮쳤습니다. 그 배후에는 놀랍게도 오크가 있었고요. 마법을 부리는.”

아직도 잘 믿기진 않습니다만, 사람들이 하나같이 떠들어대는데 믿지 않을 수도 없지요, 라며 상인은 너스레를 떨었다.

“정보에 밝으시군.”

“상인은 언제나 귀를 활짝 열어 둬야 돈을 버니까요.”

러셀은 일행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나?”

카이는 대수롭잖게 어깨를 으쓱였다.

“대장은 당신이오. 난 그대 결정에 따를 뿐.”

“나도 상관없어. 불침번 오래 안 서도 되지?”

“부쩍 잠이 많아졌구나, 아엘라. 키 크려고 그러나?”

“어? 진짜?!”

아엘라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키를 재자고 말했다. 하지만 상대는 육체를 자유롭게 조정 가능한 칼리아였다. 키가 컸냐고 묻는 아엘라는 곧 칼리아의 가슴팍에 파묻혀 오두방정을 떨었다.

러셀은 다시 쿤테니오에게 고개를 돌렸다.

“합류하지. 여정은 며칠 정도로 보고 있나?”

“······아. 얼마 걸리진 않을 겁니다. 산장과 그리 멀지 않으니까요. 길어봤자 사흘, 혹은 나흘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보수금은?”

“영지까지 무사히 간다는 전제하에 금화 열 장입니다. 선수금으로 다섯 장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생각한 것보다 많은 양이었다. 고작 사흘만 같이 상단을 호위해주는 것으로 금화 열 장이라니. 그러나 러셀만 한 실력을 가진 용병을 구하는 것은 무척 힘들다. 아니,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러셀이 고개를 끄덕이자 쿤테니오와 렘파드의 얼굴이 환해졌다. 쿤테니오는 당장 자리에서 금화를 꺼내 건네주었다.

“출발은 우리 용병들도 식사를 마치면 모두 출발합니다. 대략 한 시간 안에 끝날 것 같으니, 그때쯤 해서 산장 입구로 나와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소.”

***

상행은 그럭저럭 평탄했다. 무수한 괴물들의 습격만 없었어도 더 평탄했을 것이다.

“우아악!”

용병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하늘로 올라갔다. 그의 겨드랑이나 등짝에서 갑자기 날개가 돋아난 것은 아니다. 그러자면 그가 머리를 땅으로 하고 발을 하늘로 향한 채 솟구치지는 않았을 테니까.

용병을 서울 구경시켜주는 주체는 바로 굵은 덩굴이었다. 그리고 그 덩굴은 진흙과 나뭇가지, 죽은 동물의 사체가 얼기설기 엮인 거대한 나무 괴물의 것이었다.

그오오오오-!

“시발, 저건 또 뭐야?”

나무 거인의 울음에 용병들이 혼비백산했다. 다급히 화살을 퉁겨보았지만, 가지와 가지가 얽혀있는 괴물에게 통하지는 않았다.

“으아아악! 보고만 있지 말고, 어떻게 좀 해봐 개새끼들아!”

덩굴에 발목이 잡혀있는 용병이 나무 거인의 입 위에서 발버둥쳤다. 그때 하얀 원반 하나가 덩굴을 자르고 나무 거인의 얼굴에 틀어박혔다.

비명을 내지르며 얼굴을 감싸 쥔 나무 거인이 비척거리며 물러나고, 용병은 바닥에 뚝 떨어졌다.

“아이고! 내 허리······.”

허리를 붙잡은 용병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도끼를 던진 것은 러셀이었다. 그리고 러셀은 나무 거인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쿠오오오!

도끼를 뽑아낸 나무 거인이 울부짖으며 몸체에서 덩굴 줄기를 쏘아냈다. 웬만한 화살보다도 빨랐지만, 러셀은 살짝살짝 몸을 틀면서 모든 공격을 흘려냈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휘적휘적, 산책을 걷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런데도 덩굴줄기는 러셀을 꿰뚫지도, 붙잡지도 못했다.

약이 오른 나무 거인이 울며 커다란 나무뿌리 뭉치 같은 두 주먹을 들어 올렸다.

서걱.

그리고 두 팔은 그대로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언제 손에 쥔 것인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도끼가 러셀의 손에서 냉기를 발하며 웅웅, 떨고 있었다.

러셀의 마력이 주입되자 도끼의 날에 서리가 어리더니, 그 크기가 배는 커졌다.

슈아아악!

공기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러셀의 도끼가 휘둘러지는 걸 본 사람은 없었다. 다만 허공에 무수히 그어진 하얀 실선의 흔적이 찰나의 시간 동안 몇 번이나 춤을 추었는지 짐작만 가능케 했다.

쿠웅!

몸체가 얼어버린 나무 거인이 뒤로 쓰러졌다. 그리고 우수수 부서져 얼음조각이 되었다가, 그마저도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무슨 괴물이야, 이건?”

렘파드가 다가와 말했다.

“늪의 정령 같소.”

“정령?”

“늪지대에서 인간이나 짐승의 사체가 쌓이고, 부패가 계속되면 가끔씩 이런 것들이 나타난다고 들었소. 흔한 건 아니고, 숲의 마력이 이상하게 흐르면 생겨난다고 하는데.”

숲의 마력이라.

“정령이 사람도 헤치나?”

“우호적인 경우는 드물 거요. 요정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대화도 힘들지.”

거참. 새삼 약한 사람들은 살기 힘든 세계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러셀이 도끼를 코트 안쪽으로 넣을 때, 허리를 붙잡고 있던 용병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고, 고맙습니다.”

러셀은 고개만 까딱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있던 상단의 후미는 카이와 아엘라시스가 대강 정리를 마치고 있었다.

산장을 나오고 이틀은 거의 그런 식이었다. 용병들 선에서 해결되는 것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러셀과 일행이 나섰다.

쿤테니오가 그들을 합류시키지 않았다면 지금 상단의 절반은 부서지고 태반의 용병들이 자기 살겠다고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물론 뭉치는 것보다 흩어져 있는 것이 더 숲의 먹이가 되는 지름길이다.

사흘 째 되던 날, 숲을 빠져나오자 야트막한 동산이 나왔다. 동산 위에 오르자 그 아래로 펼쳐진 넓은 평야와 도시가 보였다.

멀리 두 줄기의 산맥을 끼고 있는 라함 영지였다.

거주지를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성벽이 보인다. 그 둘레의 지름이 족히 수 킬로미터는 되었지만, 성벽은 어디 하나 이 빠진 곳 없이 빈틈없이 바깥과 안을 분리했다.

성벽의 아래에는 달려드는 괴물들을 막기 위한 뾰족한 끝을 비스듬히 위로 향한 철창들이 꽂혀있고, 오십 미터 간격으로 배치된 망루에는 활과 화살을 든 병사들이 밭을 보며 괴물들이 오지 않나 경계했다.

오래되어 보이지만 그것이 곧 낡음을 의미하지는 않는 튼튼한 성벽 안쪽에는 줄지어 선 다종다양한 건물들이 보였다.

증축과 보수를 반복해온 건물들은 각기의 용도에 맞춰 건설되어 있었고, 그 주인이 아니라면 도저히 용도를 알 수 없는 부속지 같은 것이 달려있기도 했다.

맨 안쪽에는 하얀 돌로 지어진 큼직한 성이 보였다. 넓은 안뜰과 정갈하게 지어진 아성. 영주관인 듯했다.

“저기가 라함이오. 라하무른 산이 품은 도시지.”

쿤테니오가 말했다. 러셀의 앞에 앉은 아엘라시스가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아래를 관찰했다.

“와. 저번 것보다 훨씬 크고 높다.”

“그러게.”

러셀도 동감했다. 영지의 크기 자체는 에란디스보다 작았다. 하지만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산맥 한복판에 세워진 만큼 성벽의 크기가 에란디스의 것보다는 컸다.

어지간한 공사가 아니었을 텐데. 카이가 부언했다.

“허락받지 않은 자를 내치기 위해서는 저 정도 노력은 해야 했을 것 같소.”

칼리아가 자신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얼마나 많은 시체가 저 성벽을 지탱하고 있을지.”

야트막했던 동산의 내리막길을 상단이 천천히 내려갔다. 길옆에는 무성하게 자란 풀들이 바람에 밀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길을 따라 꾸준히 걸어가자 영지의 모습이 점차 커졌다. 인근의 밭이 가까워지자 벌레를 잡고 잡초를 뽑는 농민들이 상단을 구경했다.

농민들이 쓰는 수레와 그걸 이끄는 소, 말이 옆에 비켜서서 상단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상단 외에도 하나 뿐인 관문을 향한 사람들은 많았다.

마차들이 터벅거리고, 덜그럭거리고, 어디선가는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가 났다.

관문은 역시 용병과 다른 행상인들, 보부상들로 붐볐다. 문이 작지는 않았지만 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하나하나 검문하고 있어서 시간이 지체되었다. 쿤테니오가 중얼거렸다.

“검문이 생각보다 철저하군요.”

중천에 떠 있던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때쯤이 되어서야 그들은 경비병과 만날 수 있었다.

라함의 병사들은 군기가 꽤 굳세어 보였다. 누비 갑옷에 쇠 투구, 검대와 거기 매여져 있는 장검, 그리고 한 손에 들고 있는 도끼 창.

“잠시만. 안에 든 것을 봐도 되겠소?”

“그러십시오.”

쿤테니오가 앞장서서 경비병에게 수레 안에 든 것을 소개했다. 수레와 용병들이 천천히 관문을 통과했다. 그리고 러셀의 차례가 됐다.

“정지.”

러셀은 자신의 앞에 대각선으로 드리워진 도끼 창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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