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습격 (3)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6월 초의 밤바람이었다. 밤하늘은 맑고 흐림을 반복하고 있다. 별과 달은 이따금씩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구름에 짜증을 내면서도, 결국 지상을 훔쳐보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러셀과 투메룬은 서로 등을 지고 있는 상태로 서 있었다. 사위는 조용했다. 러셀은 대검을 앞으로 내민 자세에서 눈살을 찌푸렸다. 손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러셀의 겉으로 보이는 외형에 상처는 없었다. 하지만 이름도 모를 저 오크가 발현한 마법은 그의 내부에 충격을 주는 데는 충분했다.
러셀은 울렁이는 속을 가라앉혔다. 불완전했던 부활을 이룩했던 로고스와의 대결 이후, 그리고 이스칼리아와의 전투 이후 오랜만에 느껴보는 불편함이다. 허나 그 둘 만큼 심각하진 않다.
그때 그의 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순식간의 그의 몸이 반전된다.
러셀은 발의 위치를 바꾼 다음 허리를 틀었다. 감각이 경고를 발한 공격이 찰나의 순간 그를 덮쳤다.
콰아아아!
엄청난 폭염. 아까부터 줄기차게 봐왔던 푸른 화염이다. 그 열기는 가히 지옥불이라 해도 납득 할 수 있을 정도.
이전, 마력을 각성한 트롤이 내뿜었던 불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칼리스덴에서 마지막에 싸웠던 용, 이스메니오스의 용의 숨결과 비슷했으나, 화염을 이루고 있는 구성 요소가 악마의 힘이다.
그럼에도, 러셀의 ‘눈’은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 러셀의 자청색 눈이 마력을 받아 번쩍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면을 넘어 좌우, 그리고 위와 아래까지 러셀의 모든 공간을 잠식하고 살라 먹으려던 불꽃의 뱀이 주춤한다.
눈에서 빛을 흘리며, 러셀은 한 손으로 나힐니르를 든 채로 다른 손을 들어 올렸다.
마력에 대한 감응력, 마력으로 감지하는 마력 감각권, 일정 반경을 두고 모든 에너지를 조금씩 제어할 수 있게 해준 영역이라는 깨달음까지.
이제까지 러셀이 여행하고, 방랑하면서 싸웠던 모든 경험과 전투에서 얻었던 감각과 지식이 한 데 어우러진다.
그의 왼손에 마력이 일렁였다. 영역을 활성화했다.
쿠웅-.
한순간 일대에 러셀의 존재감이 뿌리 깊게 내려앉았다. 자신의 마력을 한순간에 전방위로 폭사시켜 에너지를 제어한 러셀은 푸른 불길을 이루고 있던 악마의 마력조차 조금씩 흐트려버렸다.
마법사가 본다면 경악성을 참기 힘들 정도의 마력 조율. 이세계를 이루고 있는 마나, 그 마나를 정제한 힘 마력과 악마의 흑마력은 그 본질이 다르다.
악마는 제 마력을 생명체들의 혼, 부정적인 감정, 원怨에서부터 뽑아내고 정제하고 단조한다. 그 연결고리는 그 본질만큼이나 끈끈하기에 쉽게 떨어지지도 않는다. 천상의 신들이 내리는 성력이 아니라면 정화가 쉽지 않은 까닭이 여기 있다.
그러나 러셀의 마력 감응력은 그 모든 상식을 깨부순다. 섬세한 손길 아래, 지상의 모든 생명체에 대해 끝없는 증오를 품은 듯한 지옥불마저 결국 스러진다.
곧 연료를 잃은 악마의 불이 사그라들었다. 늦지 않게 대처한 덕분에 사상자는 없었으나, 주위는 그 뜨거운 열기에 의해 열풍이 불어닥쳤다.
러셀도 지옥불을 막아내면서 대지에 두 줄기의 깊은 고랑을 만든 상태. 주위는 그 여파로 인해 뒤집어지고 파헤쳐져 난리고 아니었다.
전신에서 열기와 흰 연기를 모락모락 피우고 있는 러셀이, 전방을 막았던 대검을 바닥에 박았다. 달아오른 대검이 흙을 태우며 박혀 들었다.
손바닥을 펼치자 칼자루까지 엄습한 열기에 의해 벌건 화상이 일어난 것이 보였다. 진물이 지글지글 끓었다. 끔찍한 고통이었지만, 러셀은 감내했다.
주먹을 꾹 쥐고 체내의 마력을 순환시키자 흰 연기가 옅게 피어나며 재생했다. 곧 고통은 사라졌다.
러셀은 고개를 들었다.
놀랍게도 오크는 죽지 않았다. 곰 가죽에 깃털 모자를 쓴 오크는 헉헉거리는 숨을 내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곧 웩, 하는 소리를 내며 무너진다.
오크가 내민 뼈 지팡이의 두개골 부분에서 남은 푸른 불길이 작게 일었다.
그의 눈이 빛나며 오크에게 일어난 현상을 분석했다. 답을 얻었다.
그의 나힐니르가 머리를 가르기 직전, 검과 투메룬의 목이 닿는 부분, 그 아주 가느다란 이음매가 불꽃이 되어 러셀의 공격을 흘려 넘겼다.
투메룬으로서는 구명절초의 한 수라고 자부할만 했지만, 지금 그는 자부심을 표현할 상태가 아니었다.
“쿨럭, 컥, 커헉! 카하악!”
주문의 반동은 만만치 않은 듯 보였다. 당연하다. 신체의 일부를 비물질로 만들고, 확정된 죽음의 순간을 늦추는 그야말로 악마의 주문이라 할 만한 것이었으니.
당장 보기에도 초록색 피부가 완전히 그을렸고, 눈, 코, 귀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거기에 입에서 쏟아지는 건 타버린 내장 조각들이다.
투메룬은 곧 몸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크의 피부에서 검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흘러나와 사위를 잠식해 나갔다.
오크는 손으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더니 러셀을 응시했다. 다시금 그 눈에서 푸른 불길이 비췄다.
“난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우리 오크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부흥을 이루고, 지성을 되찾고, 영토를 가지게 될 것이다. 겔리오투스의 보살핌 아래, 오크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대한 힘을 얻게 되리라!”
자랑이다, 등신. 러셀은 침을 탁 뱉었다.
산장 내부의 싸움은 이제 소강 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강화된 고블린들은 거의 다 러셀이 처 죽였다. 남은 놈들이 있긴 하나 그 정도는 산장의 남은 병사들, 용병들이 처리하는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쓰러진 목책 너머로 숲의 다른 괴물들이 들어오고 있지만, 그마저도 칼리아와 아엘라시스, 카이가 합세하니 상대가 되지 않는다.
러셀은 거리가 있음에도 괴물들을 처죽이는 일행의 모습을 한 눈에 담아 볼 수 있었다. 칼리아는 피를 이용한 무기 조형과 단조로 괴물들을 학살 중이고, 아엘라시스 또한 공중에 여러 발의 얼음 창과 송곳을 만들어 용병들을 지원했다.
카이는 예의 붉은 기운을 전신에 두른 채로 함성을 지르며 싸우고 있었다. 갈색 피부와 그 위에 그려진 검은 문신이 꿈틀거릴 때마다 괴물 여러 마리가 박살 나 죽었다.
그 모든 것들을 눈으로 보고 있던 러셀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바로 앞에 오크가 지팡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빈틈이라 여긴 투메룬의 회심의 공격이었지만, 그의 감각에는 훤히 잡혔다.
러셀의 대검과 투메룬의 뼈 지팡이가 부딪쳤다.
콰우웅!
악마의 힘이 담긴 뼈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온 충격파는 러셀이 마주 내뿜은 충격파에 상쇄되었다. 꽈앙, 하는 굉음과 함께 둘을 중심으로 반구형의 파동이 번졌다.
안쪽의 공기와 바깥쪽의 공기가 가진 속도의 차이에 하얀 수증기 같은 것이 확 밀려났다. 투메룬의 덩치는 아까보다 확연히 커져 있었다.
악마의 마력으로 강화된 그의 뼈와 근육이 우둑거리는 소리를 내며 커져 있었고, 그에게 불가해한 힘을 주었다.
콰과과과과과-!
러셀과 투메룬은 그 자리에서 수십 번의 공격을 교환했다. 투메룬의 손에 들려 있던 뼈 지팡이는 어느새 거대한 낫이 되어 있었다.
대검과 낫이 충돌할 때마다 쩌렁쩌렁 울리는 굉음이 터지고 충격파가 발생했다. 하지만 누가 밀리는 지는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크, 헉! 인간, 이 어떻게······!”
악마의 마력으로 강화된 육체에다가 지팡이까지 낫으로 바꿔 휘두르던 오크, 투메룬이 만신창이가 된 몰골로 뒤로 비척비척 물러났다.
전신에 상처가 여럿이고, 낫도 이곳저곳이 균열이 간 상태였다. 자신만만하게 변신해서 덤빌 때와는 전혀 다른 결과.
“속도와 힘만 빠르면 뭐하나. 기술이 형편없는데.”
분명 투메룬의 힘은 강하고, 움직이는 몸놀림도 빠르다. 마법을 부린다고는 하지만 그 본래 육체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흑마력의 힘으로 더욱 강화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뿐. 인간처럼 제대로 된 기술 없이 육체의 힘만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는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러셀은 투메룬과 맞먹는 신체 능력, 그리고 그를 아득히 상회하는 기술을 가진 전사였다.
지금 투메룬이 휘두르는 낫의 궤적이 모두 보인다. 보이는 것에 국한하지 않는다. 궤적이 완전히 이뤄지기 전 그 중간을 끊고, 흔들림을 유도하며, 균형을 잃은 몸에 송곳 같은 공격을 꽂아넣는다.
“커헉!”
입에서 피를 토하며, 투메룬이 광폭하게 두 팔을 휘저었다. 일순 대지에 깊은 상처가 남을 정도로 거대한 낫이 휘몰아친다. 하지만 러셀은 그 모든 공격을 거대한 대검으로 받아내며 투메룬을 몰아붙였다.
땀을 뻘뻘 흘리는 투메룬이 갑작스레 외쳤다.
“사령들이여, 내게로 오라!”
뼈로 이뤄진 낫이 허공에 그어졌다. 그러자 투메룬을 중심으로 검은 파동이 번지고 죽어 나자빠져 있는 시체들에게서 희끄무레한 형상들이 스멀거리며 일어났다.
흑마력에 의해 죽은 시체들에게서 백魄과 사기死氣를 빨아들이는 것이었다. 반딧불이처럼 총총거리며 일어난 기운들이 순식간에 투메룬에게 모여들어 흡수되었다.
그러자 오크의 전신에 난 큼직한 상흔들이 재생되고 뼈로 이뤄진 낫이 복구됐다. 동시에 물리력을 갖춘 원혼들이 탄환처럼 전방위로 러셀을 압박하며 쏘아진다.
따다다다당!
번개같이 러셀의 몸이 회전했고, 그 연장선상의 대검도 같이 회전했다. 탄환으로 조형된 원혼들은 나힐니르에 닿자마자 귀곡성을 흘리며 스러졌다. 대검의 검신에서 은은하게 달의 룬이 빛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멍하니 중얼거리는 투메룬. 그리고 애써 재생한 보람도 없이, 러셀의 대검이 날아들어 투메룬을 날려버렸다.
“크윽!”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공방. 투메룬은 점차 밀리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물었던 상처가 터지고, 낫이 부서진다. 이래서는 안 되었다. 그의 계획은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되었다.
산장을 먼저 점령하고 인간들을 죽인 후 그들을 제물로 바쳐 숲의 괴물들을 강화하는 계획.
나아가 그런 숲의 괴물들을 군대 삼아 자신의 부족과 합류하고, 토벌대로 온 인간들을 싸그리 몰살시킨 후 영지를 점령하려 했지만.
공포가 스며든다. 투메룬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럴 리 없다!”
한낱 인간에게 두려움을 느끼다니!
“뭐가 그럴 리 없어야.”
파지지지지직!
러셀의 전신에 일순 전광이 서렸다. 그의 눈이 번쩍이는 섬광을 토했다.
투메룬의 눈이 크게 뜨였을 때, 러셀의 신형은 이미 자리를 박차 그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러셀의 대검이 벼락을 머금고 아래에서 위로 솟구쳤다.
꽈앙!
간발의 차로 구현한 검은 막의 방어막이 투메룬의 목숨을 살렸다.
검은 방어막 속에서, 투메룬은 한 손으로 대검을 내리누르고 있는 러셀을 올려다봤다. 한 겹의 어둠을 두른 듯한 바깥 세상의 모습이었지만, 그 중심에서 러셀의 눈은 형형히 빛나며 투메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의 시선이 닿는 방어막의 마력 밀도가 눈에 띌 정도로 약해지고, 연결이 가늘어졌다.
경악한 투메룬은 필사적으로 낫을 내밀고 흑마력을 내뿜어 보강했지만, 내리누르는 러셀의 강력한 근력과 대검, 실시간으로 파헤쳐지는 방어막 탓에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투메룬은 결정을 내렸다. 이 인간은 이길 수 없었다. 지금의 상태로는. 투메룬이 두르고 있던 곰 가죽 케이프와 깃털 모자가 빛에 휩싸였다.
엄청난 양의 마나와 마력의 소용돌이가 투메룬을 감싸고, 풀려났다. 그 강대한 충격파에는 러셀도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공중으로 밀어 올려졌던 러셀은, 곧 자세를 다 잡고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그리고 깨진 방어막 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거대한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그워어어어엉-!
나타난 것은 엄청난 크기의 곰이었다. 그냥 평범한 곰은 아니었다. 등짝에는 깃털 날개가 달렸고, 뭉툭해야 할 꼬리에는 길다란 도마뱀의 비늘 덮인 꼬리가 달려있었다.
러셀이 보아하니, 투메룬이 두르고 있던 마도구들이 그 주인을 변신시켜준 것이었다. 거대한 곰의 형상에 길쭉한 비늘 꼬리, 그리고 독수리 같은 깃털 날개.
네 발로 선 자세에서도 체고가 러셀의 키에 맞먹었다. 두 발로 일어서면 4미터는 훌쩍 넘길 정도의 크기.
그워어어어-!
괴물 곰으로 변한 투메룬이 커다란 콧구멍에서 흰 김을 훅훅 내뿜더니, 돌진했다. 러셀은 피하지 않았다.
콰아아앙!
산장의 목책이 추가로 부서지고 거대한 곰이 뛰쳐나왔다. 그 위에 러셀이 대검으로 곰의 등판을 꿰뚫은 채 서 있었다.
구워어, 그워어엉!
괴물 곰이 울부짖으며 날뛸 때마다 숲의 나무들이 와지끈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나뭇가지 부서지는 소리는 나무들이 내지르는 단말마였다.
“어디까지 가냐!”
러셀은 등판에 꽂은 대검에 대량의 마력을 주입했다. 마력의 성질이 변화한다.
찌지지지지직!
허공을 찢어버리는 듯한 소리. 벼락이 터져 나와 괴물 곰의 상처에 들어가 날뛰기 시작했다.
-!
차마 비명도 내지르지 못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고통. 하지만 견뎌냈다. 러셀은 괴물 곰의 외피 뿐만이 아니라 그 내피마저 강력한 마력 내성을 지녔음을 확인했다. 어디서 이런 곰 가죽을 얻은 거야?
펄럭!
그때 널찍한 곰의 등판에 붙어있는 날개가 위아래로 펄럭였다. 엄청난 크기. 괴물 곰의 동체가 한 번 들썩였다가, 다시 지상에 내려앉는다.
이 와중에도 괴물 곰의 질주는 멈추지 않고, 앞을 가로막는 모든 나무들이 박살 나며 쓰러졌다. 러셀은 끊임없이 요동치는 괴수의 등판에서 균형을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 마력을 집중시킨 왼 주먹을 들었다가, 그대로 내리꽂았다.
꽈-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