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습격 (2)
***
“쓸모없는 것들.”
칼리아의 일갈과 함께 고블린 한 마리의 가슴팍에 커다란 상처가 생겼다. 석둑 잘려버린 갈비뼈와 그 안의 펄떡거리는 심장이 훤히 드러났다.
고블린이 비명을 지르며 팔을 앞으로 내밀 때, 두 번의 핏빛 섬광이 그어졌다. 그녀의 길쭉한 붉은 창이 그려낸 것이었다. 괴물은 조각난 신체들을 떨어트리며 죽었다.
그 시체에 피는 없다. 핏빛 창이 모두 흡수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칼리아는 쥐고 있는 창으로부터 괴물의 피를 소량 흡수했다.
“음.”
그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악마의 마력이 느껴진 탓이다. 그것도 그녀를 타락시킨 악마, 겔리오투스의 것.
예전의 육체였다면 겔리오투스의 마력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 영향이 끼쳐질지는 그녀도 예상할 수 없었다. 다만 좋은 결과가 아니란 것은 확실했다.
아엘라시스는 칼리아의 뒤에 서서 체내의 마력을 일으켰다. 그녀는 살아가면서 저절로 지혜와 마법의 비원을 깨닫는 종족이었다. 아직은 냉기와 뇌전의 속성밖에 다루지 못했지만 점점 그 운용은 세련되어지고 있었다.
“사, 살려줘!”
“불! 불이야!”
쿵!
아엘라시스의 작고 앙증맞은 발이 대지를 내려찍었다. 힘이 많이 담긴 것이 아니었음에도 일순 작은 진동과 소리가 울렸다.
사아아아아-
소녀의 발밑에서부터 냉기의 안개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안개였지만 퍼지는 속도는 무척 빨랐다. 냉기의 안개에 의해 흙바닥에 뿌려진 핏물들이 얼어붙고, 불타는 천막과 건물의 화마가 점차 수그러들었다.
옷과 기름 먹인 갑옷에 불이 붙어 나뒹굴던 자들이 멍한 얼굴로 소녀를 올려다봤다. 아엘라시스는 침착하게 말했다.
“일어나. 그리고 싸워.”
“네, 네!”
용병들은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나 무기를 꼬나쥐었다. 그중 몇이나 고블린과 싸울지, 아니면 달아나버릴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생각이 있는 자들이라면 산장을 잃고 숲속을 헤매는 것보다는 고블린과 싸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들을 구한 아엘라시스는 다시 마력을 허공에 방사했다. 대기 중의 수분이 소용돌이치며 하얗게 응결되더니 얼음 창이 되고, 파직거리는 정전기가 휘몰아치며 벼락의 가지가 되었다.
아직 근육통의 여파가 남아있기도 했고, 그녀의 움직임을 보조해줄 주문을 칼리아가 걸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엘라시스는 원거리에서 고블린들을 잡는데 주력했다.
“흡.”
작게 숨을 내쉬며 손을 말아쥐자 얼음 창과 벼락 가지가 허공을 내달려 고블린들을 얼리고 감전시켰다.
그러면 겨우 목숨을 구한 용병들이 제각기 무기를 휘둘러 고블린들의 숨통을 끊었다.
사람들의 감사 인사를 흘려 넘긴 아엘라시스는 슬쩍 고개를 들어 칼리아를 쳐다봤다. 보통 칼리아는 싸움에 잘 나서지 않는 편이었다.
러셀의 그림자 속에서 머물다가 이따금씩 나와서 같이 밥을 먹고, 아엘라시스의 머리를 땋아주거나 같이 잠을 자주기도 했다.
아줌마라 부르기는 했어도 아엘라시스는 내심 칼리아가 머리를 만져줄 때 기분이 좋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려웠다. 소녀가 물었다.
“칼리아. 왜 그렇게 화났어?”
“응? 무슨 소리냐. 화가 났냐니.”
“나보고 공격에 감정이 실리면 안 된다며.”
쫘아아악!
막 달려든 괴물 하나를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갈라버린 칼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화 안 났느니라. 그냥, 음. 잠을 방해받아서.”
“그러고 보니 아까 나랑 같이 잔 거 아니었어? 일어났을 때 없던데.”
“큼. 아엘라시스. 굳이 묻지 않아도 될 것 같소만.”
“카이?”
상인들이 거주하던 천막으로 향했던 카이가 손으로 머리에 묻은 피를 훔치며 걸어왔다. 손과 팔, 가슴과 얼굴 등 검은 피로 목욕이라도 한 듯한 몰골이었다. 여기저기 상처가 나서 카이의 피도 같이 흐르고 있었다.
“괜찮아? 다친 거 아냐?”
“이 정도는 괜찮소.”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굳이 묻지 않아도 된다는 건 뭐야?”
카이는 시선을 돌렸다가 칼리아의 서슬 퍼런 눈을 마주하고는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아무리 오크인 그라도 여자의 행복을 놓친 800년 묵은 여자의 시선은 무서웠다.
“아, 아무것도 아니오. 이쪽은 대강 정리가 된 듯 한데, 다른 쪽으로 가보면 어떻겠소? 그뎀린, 코볼드, 케스퍼 같은 놈들이 들어와서 날뛰고 있소.”
목책 안쪽으로 들어온 건 악마의 마력에 의해 강화된 고블린들 뿐만이 아니었다. 그밖에 숲속에 사는 괴물들, 짐승들이 피 냄새를 맡고 슬금슬금 들어와 있었다.
“그래. 뭐.”
아엘라시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군말하진 않았다. 그때였다.
퍼엉!
굉음과 함께 푸른 불길이 산장의 구석에서 솟아올랐다. 모두의 시선이 절로 향했다. 칼리아가 말했다.
“악마의 불이다.”
“러셀 쪽인데?”
셋은 가만히 불길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가도 될 것 같네.”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소.”
***
어디선가 불어온 구름이 밤하늘을 가렸다. 별빛과 달빛이 가려지자 산장은 조금 더 짙은 그림자를 망토처럼 두른 모양새가 되었다.
그 검은 망토 속에서 푸른 불길이 질주했다.
푸화화확!
러셀은 지팡이를 든 오크의 전신에서 타오른 불꽃을 피해 멀찍이 물러섰다. 통상의 화염과는 전혀 달랐다.
러셀은 화끈거리는 전신에 마력을 돌려 식히면서 오크를 노려보았다. 마력이 담긴 그의 눈이 도깨비불처럼 타올랐다.
그의 눈에 오크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검은 기운이 보였다. 악마의 힘. 오크가 딛고 있는 흙바닥이 검게 침식되고, 주위에 자라난 풀이 노랗게 물들더니 푹 스러졌다.
짧게 숨을 들이쉰 러셀이 다시금 바닥을 박찼다. 쾅, 하고 흙덩이와 돌멩이들이 비산했을 때 그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꽝!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나며 대검이 지팡이 앞 허공 한 치 앞에서 멈췄다.
뼈 지팡이에서 녹색의 촉수가 스멀거리며 자라나더니 대검을 칭칭 휘감으려 들었다.
러셀은 나힐니르를 붙잡으려 드는 촉수를 아랑곳않고 힘으로 밀어붙였다. 그그극, 거리는 소리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티와 함께 났다.
그때 러셀의 도끼에 반쯤 잘려서 너덜거렸던 오크의 팔이 급속도로 재생하더니 주먹을 말아쥐었다. 말아쥔 주먹에 악마의 마력이 깃들자 초록색 피부가 회색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휘둘러졌다.
러셀은 왼손을 들어 올려 쥐고 있던 도끼의 옆면으로 오크의 주먹질을 막아냈다. 굉음과 함께 둘이 자리한 지면이 부서지며 동심원으로 퍼졌다.
“크합!”
기합 소리와 함께 오크에게서 끝 모를 힘이 솟아났다. 잠깐의 힘겨루기에서 밀린 러셀의 대검과 도끼가 옆으로 튕겨나고, 그의 상체가 훤히 비었다.
오크는 당장 지팡이를 휘둘러 악마의 주문을 투사했다. 일순 러셀의 몸에 지독한 무력감과 현기증, 어지럼증과 이명이 찾아들었다. 거기다 오감이 느끼는 감각까지 혼란을 빚었다.
모든 감각이 차단되기 직전, 러셀의 눈이 번쩍 빛을 토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주문의 해일 속에서 가까스로 결을 찾아냈고, 그곳을 검과 도끼로 베어냈다.
찌이이이익-!
종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러셀은 주문에서 해방되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힘이 공중에서 모여드는 것이 들어왔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그 힘이 바람을 가르며 러셀에게 내리 떨어졌다.
콰과과광-!
폭탄 여러 발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땅이 갈아엎어졌다.
오크와 러셀의 싸움에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지켜보던 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하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투명한 힘에 으깨져 피 분수를 만들고 죽었다.
쉴 새 없이 내리치는 주문의 폭격과 박살나는 건물들, 붉은 속살을 내보이는 대지. 압도적인 힘에 저항도 못하고 개미처럼 찌그러져 죽는 생명들의 틈바구니를 보며 악마의 마력을 휘두르는 오크, 투멜룬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투멜룬은 악마 겔리오투스에게 마력과 마법, 주문을 하사받은 주술사였다. 그는 오래 전부터 오크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산맥과 숲, 동굴에서 살다가 인간이나 다른 괴물들을 잡아 죽이며 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제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반대 의견은 강력한 악마의 힘을 보여주는 것으로 묵살했다. 늙은 오크들은 더 이상 인간을 적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들이 잊어버린 신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더 이상 지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야만적인 생활을 벗어던져 세계의 일원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불칸이라는 신을 믿는 오크 무리가 다른 지성체 무리와 교류를 하고, 문명까지 일궜다는 전설이 있긴 했지만.
‘헛소리!’
투멜룬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인간보다 우월한 신체 능력과 번식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인간과 다른 지성체들에 밀리는 것은 단지 마력에 대한 감응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투멜룬 자신부터가 주술사였긴 했지만, 그건 약초와 하잘것 없는 원시 정령의 도움으로 잡술을 부리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 잡술로는 모닥불이나 만들 수 있을 뿐이었다.
투멜룬은 먼저 이 산장부터 초토화시킬 작정으로, 악마에게 받은 마력과 주문을 시험했다. 시험은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아까는 왜 잠깐 의식이 날아갔던 것일까? 뭔가가 자신의 입을 빌어 말했던 것 같은데, 정작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 찰나의 상념을 끊는 빛줄기가 전면으로 날아들었다. 그건 백색의 도끼였다. 아까 악마의 마력으로 팔을 강화하지 않았다면 투멜룬의 팔을 완전히 가르고 상체를 두 동강 냈을.
“허억!”
투멜룬은 황급히 지팡이를 들어 악마의 힘을 일으켰다. 그의 주인이 만들어준 인골의 지팡이가 푸른 불꽃을 토해냈다.
강철도 순식간에 녹여버릴 듯한 열기였지만 도끼는 형체를 유지한 그대로 날아와 투멜룬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천만다행으로 반으로 갈라지진 않았다.
기세가 약해져 있었기에 망정이었다. 하지만 곧 도끼에서 무시무시한 냉기가 피어오르자 투멜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익, 크아아아······!”
투멜룬은 지팡이를 땅에 꽂은 다음 가슴팍에 박혀있는 도끼를 잡아 뽑았다. 그새 그의 상체는 허연 서리로 뒤덮여 있었다. 투멜룬은 덜덜 떨리는 팔로 도끼를 내던져 버렸다.
문득 그의 고개가 퍼뜩 올려졌다. 이 도끼의 주인은 아까 자신과 맞섰던 그 남자의 것이었다. 그리고 주문은 그가 고통을 느끼고 마력의 운용에 방해를 받았을 때부터 멈춰 있었다.
주위는 난장판이었다. 투명한 거인이 동동거리며 대지를 난자한 듯한 흔적.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고, 여기저기서 끊어지지 못한 비명이 줄과 줄을 이으며 낮게 흘렀다.
그때, 흙먼지 속에서 검은 무언가가 달려 나왔다. 흙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상처 하나 보이지 않는 얼굴, 활활 타오르는 자청색 불길을 눈가에서 뿜어내는 남자.
러셀은 지금 저 오크놈이 저번에 만난 루가네스라는 놈보다는 확연히 악마와 더 가깝고 마법도 더 강하다는 것을 느꼈다.
두터운 곰 가죽 케이프를 걸치고, 깃털 모자에 인골 지팡이까지 든 놈. 템빨인가, 싶기도 했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일단은 저놈 모가지를 어깨에서 떼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투멜룬은 설마 그 주문의 세례 속에서 러셀이 살아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다급히 해골 지팡이를 든 다음 주문을 외우려 했다.
“큭······!”
그러나 아까 가슴에 박혔던 도끼의 여파가 그를 방해했다. 심장 근처까지 닿았던 냉기가 내장과 근육, 마력 회로를 상하게 하며 마력을 일으키는 데 방해하고 있었다. 재생도 늦었다.
그리고 투멜룬이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는 러셀의 대검이 그의 머리를 가르고 지나간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