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산장 (3)
길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숲속을 제 집처럼 쏘다니는 것들이 있다. 태어나기를 나뭇잎과 비슷한 색깔의 피부를 지녔지만 보다 더 폭력적인 방식으로 삶을 구가하는 생물들.
그중에서도 작은 몸집을 가졌지만 뛰어난 손재주와 근력, 그리고 오크의 투지와 맞먹는 집요함을 지닌 작은 악귀, 고블린이었다.
이 작은 악귀들은 지금 한 존재를 향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절을 받는 존재는 오크였다.
고블린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성인과 어린아이 정도의 키와 체격 차를 자랑하는 아인종.
오크의 모습은 기이했다. 깃털로 장식된 모자를 썼고, 곰 가죽으로 된 케이프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한 손에는 뼈와 뼈가 엮인 괴상한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두 개의 다리 뼈가 서로 맞물리고 갈빗대가 위를 장식하고, 아래 턱 뼈가 떨어진 작은 해골들이 매달린 외양의 지팡이였다.
그밖에 드러난 얼굴과 피부에는 문자와 그림 같은 것이 칠해져 있었다. 머리 위에는 푸른색의 불길이 둥둥 떠다니면서 원을 그렸다. 오크는 고개를 숙이고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커다란 동굴이었다.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파고 또 파서 만들어진, 개미굴 같은 동굴.
자연적인 동굴에서 고블린들의 힘이 가해진 동굴의 외벽과 바닥은 매끄러웠다. 기이한 차림의 오크가 다루는 푸른 불꽃에 의해 벽과 바닥은 푸르스름한 빛으로 반들거렸다.
“시발, 뭣들 하는 거야?”
“나도 몰라. 일단 조용히 있자고.”
“우린 다 죽을 거야. 죽을 거야. 죽을 거야.”
“개좆같은 소리 하지 마!”
구석에는 인간 용병들이 있었다. 아까 브리타와 코헨처럼 의뢰를 받고 고블린들과 싸웠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들었던 것보다 괴물들의 수가 많았고, 예상했던 것보다 강했다. 그래서 전장을 이탈하고 도망쳤다. 불운하게도 고블린들의 마비 화살에 맞아 쓰러졌고, 이 동굴로 옮겨졌다.
밧줄로 꽁꽁 묶인 사람들은 많았다. 쉰 명은 되는 듯했다. 누비 갑옷을 입은 용병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많았다.
푸른 빛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사람들의 얼굴은 공포와 불안에 질려 있었다. 고블린들은 그들을 마비시킨 다음 동굴로 끌고 왔다. 그리고 방치됐다.
잡혀 온 사람들은 고블린들이 당장 그들을 잡아먹거나 하지는 않아서 안심했지만, 그도 오래 가진 못했다.
그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오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오크의 눈에는 퍼런 광망이 일렁이고 있었다.
“카락-투쉬-피오-.”
이윽고 오크가 이상한 발음의 말을 하며 손으로 줄로 묶여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러자 오크의 손가락 끝에서 빛이 일렁이더니, 무시무시한 흡입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억, 억? 흐, 아아악!”
“으아아아······.”
흡입력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것을 빨아들이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점점 전신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살려, 살려줘! 살려주세요!”
“개새끼야, 이거 안 풀어!”
애원과 욕설. 살고자 하는 의지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몸부림쳤지만 밧줄은 튼튼했다. 또한 살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이 커질수록 주문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살과 근육이 점점 메말라가고 뼈가 드러났다. 눈두덩이는 움푹 패이고 눈알은 수분을 잃은 채 푸석푸석해졌다.
비명과 애원은 점차 힘을 잃어갔고, 종국에는 실낱같은 신음이 되었다. 사람들을 묶던 밧줄들이 헐거워지면서 투둑, 떨어졌다.
구속하던 것들이 사라졌음에도 사람들은 일어서지 못했다. 모든 생명력이 쭉 빨린 그것들은 그저 시체가 되어 차가운 동굴 바닥에 널브러졌다.
오크는 쉰명이 넘는 사람들에게서 뽑아낸 힘을 동굴 천장으로 올렸다. 희끄무레한 영체들과 기운이 뭉쳐진 그것은 회색의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한데 뭉쳐 있기는 했지만 구심점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 금방이라도 풀려나갈 듯이 위태로웠다. 가만히 놔두면 실타래가 풀려나가듯이 흩어져서 세상의 흐름에 편승할 것이었다.
오크는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그는 머리 위를 떠돌던 푸른 불길을 손으로 잡아채더니, 그대로 회색의 덩어리로 날려보냈다. 불길은 회색 영체와 생명력의 덩어리에 중심을 잡더니 그대로 빨아들였다.
그런 이적들이 일어나는 동안 고블린들은 자신들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다듬어왔을 동굴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겔리-오투스!”
그때 오크가 뼈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푸른 불길과 그것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던 회색의 덩어리가 한데 뭉쳤다.
번쩍이는 섬광과 천둥이 이어졌다. 동굴이 우르르 떨리고 흔들림을 견디지 못한 종유석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났다.
운 나쁘게 종유석에 몸체가 꿰뚫려 죽는 고블린들도 있었지만 어떤 괴물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윽고 흔들림과 섬광이 멎었다. 괴물들의 머리 위에는 찬연한 광채를 발하는 푸른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오크가 그것을 보며 다시 한번 지팡이를 휘젓자 불꽃에서 촉수 줄기 같은 불줄기가 사방으로 분화했다. 분화한 불줄기는 모든 고블린들의 눈, 코, 입에 스며들었다.
“케르르르!”
“칵! 케륵!”
푸른 불꽃이 스며든 고블린들의 몸체가 커져 갔다. 우둑 우두둑하고 뼈가 뒤틀리고 근육이 강제로 자라나는 고통이 괴물들을 덮쳤다.
몇몇 놈들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죽었다. 그러자 그 시체도 쪼그라들더니 다른 고블린들에 흡수되었다.
“크륵, 크허어엉······.”
“카후우웅, 카르르르.”
뒤바뀐 고블린들은 이전과는 달랐다. 키는 170센티미터에 가까웠고, 얄팍했던 팔다리는 근육질로 덮였다. 위로 뾰족했던 귀는 묘하게 둥글어졌고, 구부정했던 신체도 꼿꼿이 펴졌다.
악마의 마력과 인간들의 생명, 영을 뽑아내 만들어진 사악한 주문으로 고블린들은 이전에는 없던 괴물들이 되었다.
악마의 힘을 다루던 오크는 그 모습을 보며 킬킬 웃었다. 오크가 중얼거렸다.
“겔리-오투스.”
고블린들이 괴성을 질렀다. 괴물들의 동시다발적인 울음이 동굴 벽과 천장, 바닥에 반사되자 그야말로 쩌렁쩌렁 울렸다.
소음 속에서도 오크는 태연한 표정으로 동굴 바깥을 가리켰다. 그러자 덩치가 커다래진 고블린들이 일사불란하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괴물들의 발길질에 생기가 모두 빨린 인간들의 시체나 동족들의 시체가 퍽퍽 부서져 먼지가 되었다.
숲속의 어둠을 틈탄 괴물들이 수풀을 넘으며 달려갔다.
***
러셀은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누워있었다. 어두운 갈색 천장이 보였다. 약간 경사가 지고 튼튼한 서까래가 줄지어 선 천장. 틈새마다 채워진 짚단은 빗물을 흡수하고 경사를 따라 흐를 수 있도록 홈이 파인 곳으로 늘어져 있다.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면 창문과 하늘이 보였다. 달은 보이지 않았지만, 달무리는 보였다. 푸른 달무리가 안개처럼 밤하늘 구석을 환하게 밝혔고, 별빛은 그것을 뚫지 못했다.
러셀은 저 별빛이 사실은 아득한 거리를 넘어서 온 과거의 빛이고, 또한 달빛은 태양의 빛이 반사되어 생기는 빛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법과 환상이 실재하는 이 세계에서 별빛은 가끔씩 그 아득한 거리를 뛰어넘어 실시간으로 주문에 힘을 부여했고, 태양에 반사되는 것뿐이어야 할 달빛은 괴물들의 흉성을 자극하거나 그를 믿는 자들에게 힘을 내려주기도 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궁금했던 적도 있지만, 지금에 와서는 모두 부질없는 것들이었다.
우주의 비밀, 신들의 존재, 괴물과 악마, 마법의 비밀을 밝히는 것은 살아가는데 별도움은 되지 않는 것들이다. 그보다는 검 한 번, 도끼질 한 번 더 휘두를 힘을 기르는 게 나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잠은 잘 오지 않았다. 해소되지 못한 힘이 그의 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불꽃 같은 힘은 언제쯤 피가 튀고 목숨이 간당간당한 싸움을 할 수 있느냐 묻는 듯했다.
그는 다른 생각을 이어갔다.
유리아. 유리아 히폴리아스 드 휘페리온. 제국의 제 2황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도시 칼리스덴에서 자신의 주문에 잡아먹힌 용족, 카루곤을 처치할 때. 그녀가 가진 유물이 하늘에서 벼락을 불렀고, 러셀은 그 벼락을 이용해 검은 괴물로 되어가던 카루곤을 물리쳤었다.
이후 도시 칼리스덴 지하의 미궁과 그녀의 조상 루드비히, 그리고 이스메니오스를 만날 때까지 도움을 받았었다.
러셀은 코트에서 인장패를 꺼내 보았다. 제국의 상징이 찍혀져 있는 인장은 제국의 영향력이 끼치는 곳 어디에서든 그의 신분을 보장해주었다.
제국의 내전이라. 언젠가는 한 번 가볼 생각이기는 했다. 어떤 사람들이 있을지, 또 어떤 괴물들이 있을지.
“잠이 오지 않느냐?”
물음은 갑작스러웠지만, 러셀은 이미 인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칼리아가 침대 옆에 서 있었다. 문이 열리거나 복도가 삐걱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도 방에 나타나 있는 그녀의 모습은, 일견 유령 같기도 했다.
창문 너머 하늘의 달빛과 별빛은 그녀의 가슴께만 간신히 비추고 있었다. 그 위는 어두웠다.
그러나 러셀은 그 한줌의 빛만으로도 사물을 잘 구분할 수 있는 눈이 있었고, 그래서 칼리아의 얼굴이 잘 보였다.
“그래.”
“흐음.”
콧소리를 낸 칼리아가 부드러운 동작으로 침대에 앉았다. 위치가 낮아지자 그제야 그녀의 얼굴에 빛이 찾아들었다.
하얀 도자기 같은 피부에 푸르스름한 달빛이 비춰지니 다른 종족처럼 보였다.
“아엘라는 잘 자고 있느니라.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지쳤으니 당연하겠지만.”
칼리아의 서늘한 손이 러셀의 가슴팍을 더듬었다.
“뭐하냐.”
“내 가슴이랑 다르게 참 탄탄하다 싶어서. 뭣하면 너도 만지거라.”
그녀는 말로만 그치지 않고 러셀의 손을 잡아다 자신의 가슴에 얹었다. 그는 손바닥에서 약간 따뜻한 온기와 부드러운 촉감, 그리고 두근거리는 심장 고동을 느꼈다.
“신기하지 않느냐? 심장이 뛰는 흡혈귀라니. 아니, 이쯤 되면 흡혈귀라고 부르기도 힘들지. 아예 새로운 종족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뱀파이어는 심장이 뛰지 않나?”
“뛰지. 하지만 아주아주 느리게 뛴다. 그리고 신선한 생혈을 먹지 않으면 딱딱하게 굳어버리게 되지.”
하지만 지금 칼리아는 피를 먹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열흘 전쯤의 마을에서 러셀의 손가락에 상처를 내고 피를 마셨을 때 이후로 한 번도 칼리아는 피를 달라고 하지 않았다.
“또 흡혈귀는 가족을 가질 수 없다. 기껏해야 오랫동안 피를 먹고 또 먹으면서 힘을 기르고, 진혈을 만들 수 있게 되었을 때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종복을 가지게 될 뿐. 그런데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르더구나.”
“어떻게?”
“지금 그걸 확인해 보고 싶으니라.”
말을 하는 동안 칼리아는 점점 가까워졌다. 코와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러셀을 바라보는 두 눈에는 열기가 가득하다.
러셀은 모공 하나 보이지 않는 뽀얗고 부드러운 피부와 빨간 입술, 앙증맞은 코,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맑은 눈동자 안에 자신의 얼굴이 작게 보인다. 칼리아의 눈은 옅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림짐작으로 이십 분 정도가 흘렀을까. 먼저 입술을 뗀 것은 칼리아였다. 고대의 흡혈귀였고, 러셀의 피와 마력 덕분에 강인한 육체를 지닌 그녀가 숨이 찰 리는 없다.
칼리아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몸이 잘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이게.”
“설마, 처음 해 보나?”
러셀의 물음에 칼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가늘게 뜨고서는 그를 노려볼 따름.
그러나 곧 그녀는 러셀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향긋한 채취가 콧속을 간질이고, 폐부 깊숙이 번져온다. 매혹적이고, 또 매혹적이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물어도 되겠느냐?”
“언제는 허락받고 물었나?”
“매번 허락은 받았던 것 같은데.”
그랬나. 생각해보니 칼리아는 항상 그에게 먼저 의사를 물었다. 내가, 너를 마셔도 되겠느냐고.
러셀과 칼리아는 주인과 종복의 관계가 아니다. 지라크의 경우와는 또 달랐다.
무저갱의 암흑 속에서 만난 소녀가 빚은 칼리아의 영과 육은 이전에 그녀가 가졌던 것과는 별개의 가공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었고, 러셀의 피와 마력은 열쇠였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칼리아는 언제나 의사를 물어왔다.
“왜냐하면, 그대를 존중하고 있기 때문이니라.”
“또 생각을 읽은 건가?”
“그대 표정에 다 드러나서 읽고 말고 할 것도 없느니라.”
“이러려고 아엘라를 그렇게 지치게 만들었군.”
“그대 곁에서 떨어지질 않으려 하니, 별 수 없었다.”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맞닿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따뜻한 설육이 만난다. 주도권 싸움은 치열했으나, 실력의 우위가 누구에게 있는지는 자명했다.
결국 패배한 칼리아의 얼굴이 쾌락에 녹아내렸다. 완전히 기울어진 몸이 러셀에게 기대었다.
“잠깐.”
문득 러셀이 입술을 떼고 상체를 들었다. 칼리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에게 안긴 채 얼굴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느냐?”
러셀은 창문 바깥에 시선을 두었다. 저 멀리, 나무가 우수수 흔들리고 있었다. 거기에 수풀이 마구잡이로 해쳐지고, 무수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곧 칼리아의 얼굴도 굳어졌다.
“불청객이로구나. 악마의 기운이 느껴진다.”
“겔리오투스?”
“파생된 기운이긴 하지만, 그렇다.”
칼리아는 한숨을 푸욱 쉬고 일어섰다. 번쩍 치켜 뜬 그녀의 눈동자에 살기가 감돌았다.
“내 이것들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