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격전
카이는 주먹을 맞부딪치며 투지를 불사르고 있었다.
“와라!”
불칸의 기운이 카이에게 깃들자 갈색 피부 위로 붉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그 기운을 주먹에 집약시킨 카이가 괴물이 휘두르는 검을 향해 마주 주먹을 휘둘렀다.
터엉!
피륙과 강철 검이 부딪쳤다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맑은 소리. 불칸의 힘으로 강화된 주먹이 검을 튕겨냈다.
카이가 곧바로 오른 주먹을 날리려 할 때, 좌우, 그리고 위에서 공격이 들어왔다.
나머지 셋이 각각 빈 공간을 점유하고 달려든 것이었다.
“미끄러져랏!”
그때 아엘라시스의 기합성과 함께 바닥에 짙은 서리가 깔렸다. 카이가 딛지 않은 곳만 빼고 모든 지면에 얼음이 깔리자 좌우에서 검을 휘두르던 놈들의 균형이 흔들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냉기가 다리를 딱딱하게 굳혀 고정시켰다.
아엘라시스는 저 멀리서 혼자 키메라 넷과 싸우는 러셀을 보며 초조함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가 다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러셀의 마음이 걱정스럽다.
소녀는 마을의 참상을 보면서도 별반 다른 감정을 느끼진 않았다. 소년이 죽었을 때와 소년의 어머니, 그리고 상단의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은 것을 봤을 때도.
소녀에게 중요한 것은 딱 하나, 러셀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엘라시스는 지금 러셀이 화가 났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빨리 끝내야 해.’
소녀는 가슴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불안감을 억누르며 마력의 조율에 박차를 가했다.
“크압!”
거친 고함을 지른 카이는 비틀거리는 양옆의 놈들은 신경 쓰지 않고 위에서 덮쳐온 놈의 검을 잡았다. 합장하듯이 모아든 손바닥 사이의 검과 그걸 쥔 키메라의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그 사이 자세를 회복한 다른 키메라 셋이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채앵!
세 개의 검을 동시에 막아낸 칼이 있었다. 검붉은 머리카락의 여자, 칼리아였다.
그녀는 한 손에 그림자로 이뤄진 검, 그리고 방패를 들었고, 몸에도 같은 부분 갑주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 한 몸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집약되어있는 것인지. 가히 끔찍한 놈들이로다.”
중얼거린 칼리아가 방패를 위로 크게 젖혔다. 세 개의 검이 뒤로 물러났다.
“고맙소!”
“무얼.”
칼리아에게 감사 인사를 한 카이가 합장을 하던 손바닥의 위치를 위아래로 바꾼 다음 힘을 가했다. 그러자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한 검이 뚝, 부러졌다.
칼자루를 놓아버린 키메라가 두 주먹을 들고 돌진했다. 카이 또한 투우장의 소처럼 콧김을 내뿜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난타전. 카이의 주먹이 키메라의 얼굴에 꽂혔다. 얼굴이 홱 돌아가며 날카로운 이빨이 지면에 쏟아진다.
그러나 키메라는 돌아가는 기세를 거스르지 않고 홱 몸을 비틀더니 왼발로 카이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퍼벅!
서로가 서로에게 한 방씩 먹인 상황. 카이는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괴물을 노려봤다.
키메라는 입가를 쓱 닦더니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부러졌던 이빨들은 온데간데 없고, 잇몸에서 새로운 이빨이 급속도로 삐져나와 불똥을 튀겼다.
“킁! 와라!”
가공할 재생력에 주눅이 들 만도 했지만, 카이는 투지와 붉은 기운을 불사르고 또 두른 채 재차 돌격했다. 키메라 또한 다 찢어진 검은 망토를 뜯어서 버리고 바닥을 박찼다.
“카이! 몸 숙여!”
그때 뒤에서 울린 아엘라시스의 목소리. 카이는 묻지도 않고 달려나가던 자세에서 허리를 확 숙였다. 그러자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몸이 그의 등을 밟고 날아올랐다.
“이야압!”
높게 뛰어오른 아엘라시스가 두 손을 머리 위로 한껏 치켜들고 있다.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동안 가만히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마력을 모으고 있었는지, 작은 두 손에 응집된 마력의 양이 막대하다.
“하!”
아엘라시스가 두 손을 아래로 내뻗자 대기 중의 수분들이 급속도로 응결되더니 하얀 서리 칼날들 수십 개가 형성되어 지면으로 내리꽂혔다. 그 지면 위에는 키메라가 있었다.
타바바박!
키메라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서리 칼날들을 피했다. 서리 칼날의 속도도 빨랐지만, 키메라의 동작들은 그보다 더 간결하고 빨랐다.
키메라가 피한 서리 칼날들이 땅바닥에 날아가 박살나자 자욱한 흰 안개가 피어나 시야를 가렸다. 그 안개는 차가웠고, 가만히만 있어도 피부가 얼어붙을 정도였다.
몸이 둔해지는 것을 느낀 키메라는 안개의 범위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땅에 내려선 아엘라시스에게 짓쳐 들었다.
거구 앞에 서 있는 작은 소녀는 금방이라고 커다란 주먹에 의해 뭉개질 것 같았다.
그러나 아엘라시스는 물러서지 않고 다시 마력 덩어리를 길쭉하게 뽑아냈다. 길어진 그 덩어리는 곧 눈부신 빛과 째지는 소음을 발하는 전격의 창이 되었다.
파지지지직-!
아엘라시스는 키메라에 뒤지지 않는 반응속도를 보이며 주먹을 피한 다음, 낮아진 머리에 전격의 창을 꽂아 넣었다.
왼쪽 눈을 뚫고 들어간 전격에 괴물이 몸부림을 치며 물러났다.
“후웁!”
그리고 붉은 불칸의 기운을 온몸에 두른 카이가, 폭주 기관차처럼 안개를 헤치며 키메라에게 당도했다. 안개의 냉기는 카이를 얼리지 못하고 분분히 흩어졌고, 수증기와 붉은 기운에 휩싸인 주먹이 키메라의 가슴에 꽂혔다.
키메라는 카이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 왼쪽 눈에 박혀 있는 전격이 계속해서 뇌와 신경을 태우고 전신의 근육을 수축하고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퍼억!
카이의 손이 키메라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손도 괴물의 가슴팍에 꽂아 넣은 다음 불칸의 기운을 모두 때려 박았다.
재생하려던 키메라의 혈관과 회로에 이질적인 신의 힘이 깃들고, 모든 수복을 멈춰버렸다. 괴물 또한 자신의 죽음이 목전까지 왔음을 알고 발버둥을 쳤다.
주먹과 발길질이 카이의 몸통을 수 차례 때리고 또 때린다. 재생력이 발휘되지 못해도 키메라 본연의 육체가 가진 힘은 엄청났고, 맞을 때마다 불칸의 기운이 흔들리며 그의 피부에 시퍼런 멍이 들었다.
카이가 괴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팔에 힘을 주자 갈색의 근육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뿌드드득.
피부가 통째로 찢어지는 소리. 곧, 키메라의 상반신이 좌우로 쪼개져 버린다. 오른쪽 어깨에 달린 목이 덜렁거리며 흔들렸다.
카이는 곧장 그 머리통을 붙잡고 뽑아버렸다. 머리 아래로 연결 되어 있는 경수 신경, 중추 신경 줄기 다발과 척추뼈가 주렁주렁 흔들렸다.
마지막 단말마를 내뱉은 키메라는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카이는 그것을 획 내던지고 주저앉았다.
“크, 허억, 허억, 허억.”
온몸이 고통으로 벌벌 떨렸다. 불칸의 힘을 끌어내고도 직접 맞은 키메라의 공격력은 가히 대단했다.
잠시 후, 고통이 겨우 가라앉고 거칠던 숨도 고르게 됐을 때. 카이는 고개를 들어 러셀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허.”
절로 감탄사가 새어 나온다. 자신과 아엘라시스가 합동 공격으로 한 마리의 키메라를 무력화시키고 죽였을 때, 러셀은 이미 네 마리를 모두 박살 내놓고 있었다.
멀리서 그가 바닥에 쓰러진 괴물의 가슴에 발을 박은 채 벼락으로 터트리는 것이 보인다.
그의 얼굴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갑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러셀에게 저런 마도구도 있었던가?
그럼에도 카이는 러셀의 표정이 안 보이는 것에 작은 안도감을 느꼈다. 지금 저 투구의 눈구멍 사이로도 형형히 새어나오는 안광이 그의 심정을 짐작하게끔 했다.
카이에게 러셀은 다가가기 어려우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는, 자신 스스로도 감히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들게 하는 자였다.
여행과 모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하지만 조급하진 않고, 근처의 어려운 자들이 있으면 외면하지 않는, 고결한 성품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칼리아는? 카이가 그쪽을 쳐다보니, 그녀 또한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
카이와 아엘라시스가 한 마리의 키메라를 상대하는 동안 칼리아는 셋의 키메라를 동시에 상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왼손의 방패를 흩어버리고 양손으로 검을 잡아 휘둘렀다.
길게 채찍처럼 늘어난 그림자의 검이 키메라 셋을 덮쳤지만, 괴물들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타다당!
키메라 셋은 순식간에 시선을 주고받았다. 방금의 한 수로 정면에 서 있는 여자의 실력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왼쪽.”
“아래.”
“위.”
순식간에 나눠지는 공격 대형. 곧이어 키메라들은 각자 검을 들고는 재차 달려든다.
회색 하늘 아래, 흐릿하게 번뜩이는 세 자루의 날붙이가 동시다발적으로 칼리아를 노리고 쇄도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광채를 흘리고, 체내의 마력을 격발시켰다. 러셀로부터 받아마신 피가 마력으로 전환되어 온몸을 뜨겁게 달궜다.
“하으으.”
저도 모르게 달뜬 신음이 흘러나올 정도의 쾌감.
쿵, 쿵, 쿵, 쿵 하고 심장이 격하게 뛴다.
심장의 고동은 아까부터 느껴졌었다. 러셀의 강렬한 감정이 느껴졌을 때부터.
무표정한 얼굴 아래 감춰진 그의 뜨거운 감정이 느껴지고, 그럴 때마다 칼리아는 저릿한 쾌감을 느꼈다.
조금 더 그를 자극하고 싶다. 그의 다른 면모를 보고 싶다. 조금 더 뜨거운 분노를, 혹은 슬픔을, 혹은 기뻐하는 러셀을 보고 싶다.
그런 욕망은 자연히 하나의 귀결로 다가가기도 했다. 그를 자신의 품에 온전히 안아버리고, 절대로 놓아버리지 않는 것.
자신의 다리와 팔로 감싸고 자신만 바라보게 만드는 것. 이 감정을 무어라 이를 수 있을까. 부모에게 관심을 바라는 아이의 소망 같기도, 애인의 정열적인 소유욕 같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칼리아는 러셀의 모든 변화가 기껍다는 것이었다.
몸을 부르르 떤 칼리아는, 곧 눈앞까지 다가온 칼날들을 직시했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속도로 휘둘러지던 칼날들의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마력의 전환, 그리고 신경과 근육 등의 육체 강화. 피에 관한한, 그녀의 지배력과 감응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카가가가각!
칼리아의 피부를 핥은 칼날들이 쇳소리 내며 불똥을 튀겼다. 갈려나간 것은 가녀린 여인의 피부가 아니라 차가운 강철의 날붙이들. 찰나에 그녀가 자신의 몸에 건 강화가 늦지 않았다는 증거다.
평범해 보이는 여인의 창백한 피부가, 강철 검이 상처를 내지 못할 정도의 경도를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일.
하지만 키메라들은 그런 이적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처음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무표정으로 공세를 이어나갔다.
카강! 캉! 카가가각!
셋이 번갈아 가면서 이뤄지는 무시무시한 공방. 칼리아는 그 모든 공격들을 막아내면서, 마치 세 개의 머리에 여섯 개의 팔을 지닌 하나의 괴물을 상대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전투 중에 그런 인상을 할 정도로 아직 그녀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칼리아의 번개 같은 손놀림이 자신의 손목을 스쳤다.
울컥이며 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그것은 중력을 거스르며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폭발적으로 양이 늘어나더니 붉은 소용돌이가 되어 그녀를 감쌌다.
검 세 자루가 궤도를 비틀고 지척까지 단숨에 거리를 좁힌 것은 혈류가 소용돌이를 이룬 직후. 키메라들은 멈추지 않고 검을 찔러넣었다.
무수한 핏방울은 검에 닿는 소리. 그리고 칼리아는 내재된 마력을 통해 피로 그린 술식을 풀어 헤쳤다.
치이이이이이-!
달궈진 철판에 물을 부은 것 같은 소리가 나고, 검들은 모두 핏물에 부식되고 녹아 칼자루만 남은 상태가 되었다.
무기를 잃은 키메라들이 다급히 물러섰을 때, 소용돌이치던 혈류에서 붉은 가시 수십 개가 동시다발적으로 쏘아졌다.
양팔을 교차한 키메라들이 뒤로 나가떨어지고, 가시를 소모한 혈류가 사그라들었다. 혈류 안쪽에 있던 칼리아는 아까보다 창백해진 피부로 괴물들을 응시했다.
스스로의 피를 소모했기에 혈색이 줄어든 것.
투두둑.
가시에 찔린 키메라들의 상처에서 피가 떨어졌다. 하지만 옅었고, 흘린 피도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다. 곧 상처마저 말끔하게 재생하기 시작했다.
괴물들은 천천히 교차했던 양팔을 풀었다. 흉흉한 시선은 당장이라도 그녀의 전신을 찢어발길 듯하다.
그러나 칼리아가 바란 것은 괴물의 신체에 파고 들어간 자신의 피. 그것이면 되었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키메라의 수복되던 상처에서 갑자기 폭발이 일었다.
퍽! 퍼버벅!
연쇄다발적으로 터지는 폭발. 키메라들의 목, 가슴, 어깨, 등, 허벅지에서 기포가 터지는 듯한 진동과 파괴가 일었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폭발에 키메라들의 눈과 코, 입 귀에서 충격을 이기지 못한 핏물과 내장 조각이 쏟아졌다.
“커헉, 쿨러억!”
“카아아아!”
당황한 키메라들이 칼리아에게 달려들지도 못하고 제 몸의 마력과 신체를 통제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들의 통제력보다 칼리아의 지배력이 한층 더 강했다
키메라들의 온몸이 너덜너덜해진다. 퍽! 눈알이 깨져나가며 투명한 수정체와 붉은 피가 섞여 흘렀다.
놈들의 겉과 안은 연속해서 일어나는 피의 폭주에 뒤집어지고 찢어져 있어 흉측했다.
그 와중에도 키메라의 심장에 담겨져 있는 붉은 수정으로 말미암은 생명력은 끊임없이 괴물들의 살과 피를 복원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럴 수록 키메라들의 몸은 급속도로 쪼그라들었다.
등가교환. 생명을 살리기 위한 행위가 되려 생명 스스로를 죽이게 만드는 자가당착적인 상황이다.
칼리아는 아직 재생시키지 않은 자신의 손목에서 다시금 피를 뽑아 올려 사복검을 조형해 휘둘렀다.
채찍처럼 휘어지는 커다란 반경이 키메라들의 상반신을 훑고 지나갔다.
***
투둑, 투두둑. 투두두두둑.
쏴아아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전부터 충만하게 차오르던 구름은 이제야 할 일을 하겠다는 듯 몸속의 것을 꺼내어 아래로 흩뿌렸다.
안 그래도 어둑했던 사위가 더 알아보기 힘들어진다.
러셀은 절그럭거리는 갑주가 거슬려 다시 코트로 변환시켰다. 답답하게 씌워져 있던 투구가 벗겨졌다. 하지만 빗줄기가 그의 몸에 닿지는 않았다.
곧게 떨어지던 빗방울은 러셀의 머리 위 1미터쯤에서 방향이 꺾인 채 떨어졌다. 그는 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깊게 빨아들이자 특유의 텁텁한 듯하면서도 시원한 향이 폐부에 깊숙이 들어왔다. 한결 차분해진 숨을 흰 연기와 함께 내쉬었다.
거센 빗줄기는 타오르고 있던 집의 불길을 꺼트렸다. 담배 연기와 비슷한 흰 연기가 모락모락 솟아오른다.
루가네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곱게 못 죽을 줄 알라고? 하하하······.”
크지 않은 소리에도 불구하고 공기가 웅웅 울린다. 흑마법사가 퍼트린 마력이 그의 웃음소리와 동조하며 떨리는 진동이었다.
진동은 그 자체로 공격이 되어 러셀을 덮쳤다.
“큼.”
러셀이 침음성을 내뱉었다. 평형감각이 어그러지고 시야가 거세게 흔들린다. 내가 제대로 서 있는 건지, 아니면 쓰러져 누워있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공기라는 매질을 타고 전해진 진동이 그의 고막과 전정기관, 눈알 안쪽의 수정체를 뒤흔든 것.
그 틈을 탄 루가네스의 두 번째 공격이 쏘아졌다.
콰앙-!
지팡이를 휘두르자 연못에 파문이 이는 것처럼 허공에 거대한 파동이 물결을 치며 퍼져나간다.
원뿔형으로 뭉쳐진 공기의 충격파가 러셀을 덮쳤다. 그냥 날아오는 것이 아니라 회전까지 하면서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휘감고 들어온다.
건물을 박살내고 한낱 인간의 육체 또한 갈가리 찢어버릴 만큼의 위력이 내포된 주문.
그 주문에 러셀은 도끼를 쥐지 않은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퍼어엉!
처음의 진동으로 인한 공격은 이미 신체의 마력 통제로 회복, 강화한 상태. 퍼트린 마력 역장을 중심으로 운동 에너지를 상쇄하고, 이어서 도끼를 휘둘러 하얀 궤적을 그렸다.
공기의 충격파는 힘없이 스러지고 화살보다 강력한 힘을 내포하고 쏘아졌던 빗방울들은 딱딱하게 얼어붙어 바닥에 우수수 떨어진다.
루가네스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하군. 신체 능력은 마력으로 강화된 기사의 것인데, 마법사처럼 주위에 마력을 퍼트릴 줄도 알다니. 거기다 적재적소의 능력 활용까지······. 기사가 아니라 마법사와 싸우는 것 같군. 아니, 마검사인가?”
사용하고 있는 저 이상한 도끼나 갑옷에서 코트로 변환이 자유로운 방어구. 거기다 경악할 정도의 신체 능력과 마력에 대한 폭넓은 감응, 그리고 제어능력이라니.
직접 만나보지 않았다면 믿기 어려울 정도의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그에 대한 살의를 치갑게 일렁이면서.
러셀은 대꾸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가 걸을 때마다 대지를 적시고 있던 빗물들이 좌우로 갈라진다.
뚜벅, 뚜벅.
그의 발걸음 소리가 루가네스에게는 천둥소리보다 크게 다가왔다. 흑마법사는 마른 침을 삼키며 말했다.
“과묵한 남자야. 여기서 공들여 키운 내 자식들이 모두 날아갈 줄은 몰랐는데.”
“······.”
“그래도, 자네를 손에 넣는다면 감수할 만한 손해인 것 같아.”
“말이 많다.”
러셀을 받치던 지면이 돌연 뿌드득, 하고 짓이겨진다.
쾅!
러셀이 지면을 박찬 것과 동시에 흑마법사는 다시금 지팡이를 들었다. 쿵, 하고 내리찍었다.
“피어나라.”
러셀은 자신을 중심으로 퍼트려놓은 마력 감각권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여섯 번째 감각으로 깨달았다.
방금 그가 벼락으로 속을 구워버린 키메라의 시체가 급속도로 부풀더니 끓어오르는 살덩이로 화하며 수십 줄기의 고기 촉수가 되어 러셀을 덮쳤다.
그 속도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 러셀이 키메라들을 상대할 때 루가네스 또한 마냥 놀고 만은 있지 않았던 것.
전방위에서 쏟아지는 고기 촉수들의 한가운데서 러셀의 왼쪽 팔이 푸르스름한 빛에 휩싸였다. 푸르른 전광.
하지만 이제까지 날리거나 쏘아내는 것에 불과했던 것이, 이제는 러셀의 육신에 깃들었다.
쐐애애액!
얼굴과 어깨, 복부를 노리던 촉수들을 걷어내는 것과 동시에 러셀의 왼 주먹이 촉수다발을 휘두르던 모체에 처박힌다.
콰자자자자작-!
거대한 분쇄기가 돌아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리며 촉수의 모체가 새파란 전격의 회오리에 감겨 들어가더니 조각조각 부서진다.
부서진 괴물의 잔해는 다시 살아날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맣게 타버렸다.
파직, 파직.
러셀은 아직 왼팔에 잔류하고 있는 전격을 보다가 주먹을 꾹 쥐었다. 가능할까, 싶었는데 할 수 있었다.
너무 빨리 촉수 괴물이 죽어버린 탓에 공격할 타이밍을 놓친 루가네스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벼락을 자기 몸에 둘러? 사람이-”
의문은 끝맺지 못했다.
쾅!
루가네스 뒤편의 교회 문이 박살 나며 파편을 흩뿌려지고, 루가네스의 왼팔이 진흙을 튀기며 바닥을 굴렀다. 그는 멍한 눈으로 떨어진 제 왼팔을 내려다봤다.
러셀이 들었던 오른팔을 내리며 담담히 말했다.
“다음은 어느 쪽일까. 맞춰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