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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92화 (93/225)

92화 칼리아

쉐린은 덜덜 떨면서 나왔다. 저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너무 두려웠다.

“고개 들어.”

쉐린은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 러셀이 도끼를 어깨에 걸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새삼 키와 덩치가 큰 것이 보였다.

남자의 전면은 노을빛을 등지고 있어서 어두웠다. 음영이 짙게 서린 얼굴에서 보랏빛의 눈동자가 불길하게 빛났다.

“사, 살려주십시오!”

쉐린은 떨리는 몸에 힘을 주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자 인형술사가 조종하던 실에 묶인 관절 인형이 주저앉는 것처럼 그의 몸이 철퍼덕, 하고 바닥에 엎드렸다. 그는 재차 외쳤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 저는 자경단입니다. 우리 마을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러셀은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 거리가 충분히 남아있었다. 문을 열어서 다른 사람들을 들여보내도 됐을 텐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쉐린은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행동은 괘씸했지만, 그렇다고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살인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망설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조금 애매했다. 자경단인 그로서는 해야 할 일을 한 것이기는 했다. 그래도 상단과 일행을 받아줬다면 좋았을 테지만.

사람의 목숨이 길가의 돌멩이만큼 하찮게 여겨지는 세상이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똑같이 취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긴 그가 살아가는 세상이었고 그는 거슬리는 짓 한 번 했다고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가 아니었다. 그렇게 되기도 싫었다.

“일어나.”

그는 벌떡 일어났다. 러셀은 도끼를 어깨에 툭툭 두드렸다. 쉐린에게 그 몸짓은 이제 이 도끼날로 네 어깨 위를 허전하게 만들어주겠다는 것으로 보였다.

"이 물어라."

"예?"

러셀의 손이 그의 뺨을 가볍게 후렸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쉐린이 나동그라졌다.

"일어나."

쉐린은 터진 입에서 피를 질질 흘리면서 벌떡 일어났다.

다시 쩍, 하고 울리는 소리.

"일어나."

쩍.

이제 피는 거의 폭포수처럼 흘렀다. 얼굴은 벌겋고 퍼런 자국이 가득했다. 세 번 맞은 걸로 사람 얼굴이 그렇게 됐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쉐린은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비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음에는 사람들 들여보내."

"예, 예!"

러셀은 쉐린을 지나쳤다. 쉐린은 머리를 땅에 닿을 듯이 숙였다. 그는 걸어가면서 바닥에 꽂았던 나힐니르를 회수했다.

근처에 타 죽은 듯한 늑대 괴물 시체 두 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달의 룬이 내뿜은 성력에 의해 죽은 괴물이었다.

카이가 다가오는 러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엄청난 도끼질이더군.”

“뭘. 아엘라는?”

“일어났어. 흐아암.”

아엘라시스는 말똥말똥해진 눈으로 크게 하품을 했다. 크라이가 그런 작은 주인을 향해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장난을 쳤다.

“에헤헤, 왜 그래··· 어? 뭐야? 또 뭐랑 싸웠어?”

백발의 소녀는 난장판이 되어있는 땅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앞에 하얀 서리에 덮인 땅과 괴물사체가 보인 것이다.

“저번에 멀리서 만났던 늑대 무리였다.”

“그래? 근데 생긴 건 딴판이네?”

아엘라시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얼어붙었다가 러셀의 도끼에 산산이 부서진 놈들은 전혀 늑대처럼 생기지 않았다. 그보다는 지하 세계에서 막 올라온 괴물들처럼 끔찍하게 생겼다.

“그건 이제 알아봐야지.”

러셀은 크라이의 고삐를 잡고 걸음을 옮겼다. 테보닌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소. 다친 사람은 없소?”

“예, 예. 기사님이 꽂아주고 가신 검이 괴물들이 다가오는 걸 막아줬습니다.”

러셀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테보닌이 물었다. 그의 안색은 쉐린을 칠 때부터 조금 질려 있었다.

“큼, 호, 혹시 마을에서 며칠 정도 머무를 생각이신지요?”

“하루 정도.”

“아, 알겠습니다. 여기까지 같이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볼거리가 있으면 더 머물러도 좋겠지만, 없으면 그냥 떠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테보닌은 이 마을에서 며칠 정도 머무른다고 했다. 러셀은 고개를 끄덕이고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입구에는 사람들이 가득 서 있었다. 소동을 듣고 뭔 일인가 싶어서 나온 자들이었다.

러셀은 그들 사이를 무심하게 지나쳤다. 카이가 뒤를 따랐다. 사람들은 러셀의 외모와 범상치 않은 거구에, 그리고 오크인 카이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분분히 물러섰다.

“나 배고파.”

“나도 그렇소.”

러셀은 픽 웃었다. 그래, 뭐든 밥부터 먹고 해야지.

***

외지인은 언제나 경계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 외지인이 손가락으로 튕긴 금화는 모든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힘이 있었다.

금화 하나로 여관주인과 마을 사람들의 환호를 한 번에 받은 러셀은 구석진 자리에서 카이, 아엘라시스와 식사를 마쳤다.

“내가 아직 소개하지 못한 사람이 있어.”

러셀의 뜬금없는 말에 카이와 아엘라시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카이는 마시던 맥주잔을 내려놓고는 입가를 쓱 닦았다.

“누구 말이오? 우리만 있는 것 아니었소?”

아엘라시스도 거의 비슷한 동작으로 나무잔을 내려놨다. 아엘라시스의 입가에도 벌꿀 맥주의 흰 거품이 묻어있었지만, 모르는 듯했다.

“카이 말고 또 있다고? 우븝?”

러셀은 소녀의 입술에 묻은 흰 거품을 닦아주었다. 그로서는 거의 반사적으로 나간 행동이었다. 집에서 어린 동생들의 밥을 먹여준 일이 많았으니.

하지만 아엘라시스는 러셀의 손이 입술을 훑고 가자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입가에 거품 묻어서.”

“내가 어린 애야?”

러셀은 아엘라시스를 위아래로 훑었다. 작은 키와 몸집, 팔다리까지. 비율이 원체 좋아서 서 있을 때는 잘 모르지만, 앉아 있으면 영락없는 어린 애로 보였다.

“그럼 이제 한 살 밖에 안됐는데 어린 애지.”

“우씨, 삼 백년 동안 깨어 있었다니까!”

“절반 이상은 잠들어 있었다며.”

“으극.”

아엘라시스는 다시 맥주를 마셨다. 소녀의 빨개진 얼굴은 커다란 맥주잔에 가려졌다. 러셀은 픽 웃고 말았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는데. 설명 좀 해주시겠소?”

“아. 아직 말 안 했나. 아엘라는 용이야.”

“어, 나 용이야.”

카이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차차 설명해줄게. 일단 그렇게 알고 있어.”

“알겠소.”

카이는 여러모로 단순한 성격이었다. 오크는 대개 개인주의적인 성격이 강하고, 그렇기에 남들이 말하지 않거나 숨긴 사실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다.

여관 안은 가벼운 소음으로 가득했다. 모두가 러셀이 한 잔 씩 돌리게 만든 술잔을 잡고 떠들고 있었다.

고된 하루 일을 마친 농부들은 낡은 카드로 카드놀이를 했고,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은 탁자 위에서 팔씨름을 했다.

러셀은 다른 구석에서 테보닌과 앉아 있는 쉐린을 발견했다. 퉁퉁 부은 얼굴의 쉐린이 테보닌에게 고개를 숙였다. 테보닌은 팔짱을 끼면서 뭐라 말했다.

쉐린은 크게 놀란 얼굴이 되더니, 조심스럽게 러셀 일행이 있는 자리를 쳐다봤다. 그러다가 러셀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더니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벌꿀 파이 나왔습니다.”

그때 쟁반을 든 여급이 다가와 시야를 가렸다. 여급은 큼직한 파이를 식탁 위에 놓고는 러셀에게 눈웃음을 쳤다.

“우리가 후식을 시켰던가?”

“아니요. 제가 서비스로 내드리는 거예요.”

여급은 맛있게 드세요, 라고 말하며 물러났다. 의도적으로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것이 여관주인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짐작이 갔다.

“어딜 그렇게 봐?!”

러셀이 돌아보니 아엘라시스가 눈썹을 팔자로 만들고는 그를 째려보고 있었다. 나름대로 나 뿔났다라고 말하는 듯한데. 웃음밖에 나지 않았다.

“어쨌든,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이스칼리아.”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카이와 아엘라시스는 의심쩍은 눈으로 러셀을 쳐다봤다.

“이스칼리아?”

그의 뇌리에 음성이 스며들었다.

-나가기 전에, 한 가지 청을 들어주면 좋겠구나.

“뭔데?”

-칼리아라고 불러주거라. 이스는 빼고.

“왜?”

-이스칼리아라는 호칭 중에서 이스는, 이스갈드 왕국의 정당한 지배자의 이름 앞에 붙이는 단어다. 내 앞의 선왕들은 각각 이스고르드, 이스테론, 이스함마르 등으로 불렸지. 내 이름은 칼리아다. 내가 다스릴 수 있는, 다스려야 하는 왕국이 없는 이상 이스칼리아라는 이름을 계속 쓸 수는 없다.

뭐가 그리 복잡해? 러셀은 그 청을 들어줬다. 짧게 부르면 더 좋지 않은가.

“······그래. 칼리아.”

슈우우욱.

카이와 아엘라시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러셀의 그림자가 갑자기 크기와 부피를 넓히더니 위로 솟아오른 것이다.

그림자는 곧 검은 드레스를 입은 한 여인으로 변모했다. 검붉은 머리카락에 옅은 자줏빛이 반짝이는 눈의 여인이었다.

러셀은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칼리아가 그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못 알아챈 것이다. 이제까지 육체의 기민한 감각을 잘 아는 그로서는 아주 오랜만에 느낀 불분명함이었다.

거기다 그들 일행의 주위로는 흐릿한 역장이 쳐져 있었다. 그 역장 덕분인지 그림자에서 사람이 하나 솟아 나왔는데도, 어떤 사람도 러셀 일행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때 러셀은 뒤통수에 뭔가 묵직하면서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뭔가가 닿는 것이 느껴졌다. 칼리아가 러셀의 목을 팔로 감고 껴안은 것이었다. 그의 뒤에서 나타났기에 바로 껴안을 수 있었다.

칼리아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처음 보는구나. 나는 칼리아라고 한다.”

아주 오래전에 한 왕국을 지배한 군주였고, 여러 나라의 합공을 받아 멸망해버린, 그렇기에 악마와의 돌이킬 수 없는 계약을 통해 괴물이 되어버린, 이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칼리아였다. 이스칼리아가 아니라. 그리고 그것에 썩 만족 중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바로 앞에서 입을 쩍 벌린 채 동공이 흔들리고 있는 소녀의 모습 또한.

아엘라시스가 몸을 부들거리면서 떨었다. 손에 쥐어진 나무잔의 액체가 풍랑을 맞은 파도처럼 요동쳤다.

“떠, 떨어져.”

“응? 뭐라고 했니?”

“떨어지라구! 거긴 내 자리야!”

정확히는 목마를 타던 자리였지만, 그런 생각은 아엘라시스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소녀의 머리에는 저 시커먼 여자가 러셀을 꼭 껴안고 있는 것만 들어왔다.

벌떡 일어난 아엘라시스가 도도도- 하고 작은 다리를 놀리며 칼리아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칼리아는 러셀의 목에 감은 팔을 풀더니 도리어 소녀를 안아버렸다.

“우픕?”

“흐으으음.”

아엘라시스는 그녀의 머릿결에 코를 파묻고 냄새를 들이키는 칼리아에게 경악하며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칼리아의 팔은 소녀의 몸을 완전히 감싸기에 부족함 없이 길쭉길쭉했다. 그리고 그녀의 커다란 가슴은 아엘라시스의 얼굴을 덮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네가 내 심장을 깨트렸던 그 용이로구나. 마력의 향을 맡으니 알겠다. 하지만 무척 어린데, 어떻게 그런 숨결을······ 음. 이 사람의 마력을 받은 게로구나. 그럼 설명이 되지.”

“웁! 우우웁!”

“하지만 난 너와는 달리 그의 다른 것도 같이 받았단다. 엄청난 생명력이 담기고, 짙은 농도의 끈적끈적한······.”

“우읍?!”

“피다. 오해하지 마라.”

지금 얘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칼리아. 숨.”

“음.”

“푸하아아!”

칼리아가 팔에서 힘을 풀자 아엘라시스가 다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바로 뒤로 물러서서 주먹을 들어 올린 자세를 잡았다.

“허억.”

아엘라시스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소녀보다 십 센티는 더 큰 신장에 성숙한 몸매를 지닌 여인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엘라시스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슬프도록 평평한 감촉이 느껴졌다······.

백발의 소녀가 우울해지는 동안 카이는 눈살을 찌푸린 채 칼리아를 보고 있었다. 오크는 그녀로부터 느껴지는 불길하고 또 꺼림칙한 느낌에 말을 꺼냈다.

“칼리아라고 하셨소?”

“그렇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대에게서······ 뱀파이어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한데.”

“맞아. 난 뱀파이어. 흡혈귀다.”

카이는 아엘라시스처럼 벌떡 일어나진 않았다. 그저 주먹을 쥐고는 노려보기만 했다.

“러셀. 설명해주시겠소?”

“그러지.”

러셀은 칼리아와 싸우게 됐던 경위와 흉수에 대해 말했다. 오랜 시간 동안 잠들어 있던 고대의 뱀파이어를 깨운 회색 갑주의 사내.

그로 인해 에란디스 영지에 일어났던 흡혈귀들의 습격. 카이는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그가 칼리아를 보며 말했다.

“그럼 뱀파이어들을 만들어서 영지를 쑥대밭으로 만든 게 당신이 아니라는 뜻인가?”

칼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피를 이용한 다른 놈의 짓이지. 영주의 아들이 다른 인간들을 뱀파이어로 만든 거야. 난 그자한테 날 부활시키라는 명을 내린 적 없어. 아니······. 그래. 무의식적으로는 내렸을지도 몰라.”

“무슨 말이오?”

칼리아가 러셀을 보며 말했다.

“러셀. 기억하나? 내 심장에 박혀있던 붉은 수정들.”

“그래.”

회색 갑주의 사내가 피의 샘에 뿌렸던 붉은 수정들. 생명력과 마력을 품고 있던 작은 조각들.

“그 수정들이 내게 생각을 심었어. 나조차 그게 진짜 내 생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교묘한 생각. 인간들을 잡아먹고, 힘을 키우라는. 그게 이전에 얼마나 많이 내게 들어온 건지는 모르겠어.”

“내가 봤을 때 뿌렸던 게 다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군. 던전이 나타났을 때부터······ 혹은 이전부터 그 수정들을 너에게 주입시켰을 수도 있다는 건가.”

“러셀, 당신의 안에서 바깥을 보는 동안. 내가 살았을 때보다 많은 시간이 흐른 걸 알게 됐다. 대략 800년 정도. 그 정도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으려면 보통 마력이 아니면 안 됐을 거야.”

그때 러셀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아까 괴물 늑대를 죽이고 뽑았던 것. 심장이었다.

러셀의 주먹만 한 그 심장은 놀랍게도, 아직 펄떡이고 있었다. 아주 느리긴 했지만, 움직였다. 공급되는 피나 영양분이 없는데도 저 혼자서 박동하는 심장은 무척 기괴했다. 카이와 아엘라시스는 그 혼자 뛰는 심장을 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이것에서 뭔가 느껴진다고 했었지.”

“음.”

칼리아는 그것을 왼손바닥에 올려놓고 살피다가 오른손의 검지를 들어 허공에 알 수 없는 술식을 그렸다.

그녀가 입김을 불자 심장의 표면이 모래가 되어 스러졌다. 그녀가 손바닥을 비스듬히 기울여 모래를 털어내자 거기 남은 것은 아주 작은 부스러기 몇 개만 남아있었다. 붉은빛을 띠는 조각들이었다.

“그건.”

“나를 깨우는 데 쓰였던 것과 비슷한 것이야. 그보다 약하진 하지만.”

러셀도 그리 느꼈다. 칼리아와 싸웠을 때 보았던 그 수정만큼은 아니었다.

“러셀, 당신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날 깨우고 조종하려 했던 게 무엇일지. 모든 걸 안 것은 아니지만, 재료는 짐작이 가더군.”

“뭐지?”

“인간.”

칼리아의 스산한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흑마법과 혈마법이 섞여 있었다. 근력과 회복력, 내구성을 올리고 불완전하게나마 마력까지 각성시키는 것 같구나. 하지만 그만큼 부작용도 강해. 처음에는 그냥 음식을 먹어도 유지가 되겠지만, 갈수록 심장과 피를 갈구하게 될 거야. 점점 인지 능력과 사고 능력도 떨어지게 되겠지. 이런 게 마구잡이로 뿌려진다면, 음. 좋은 일이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칼리아가 고개를 들어 러셀을 바라봤다.

“흑마법사, 악마 숭배자가 만든 것 같다.”

러셀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편하게 여행 좀 할라는데 왜 이렇게 방해하는 것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그런 놈들이 있다면,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나?”

“러셀. 그런 놈들은 내가 살던 시대에도 많았다. 그리고 놈들에게 이유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어. 그저 자기가 가진 힘을 휘두르고, 사람을 학살하고, 세상을 불태워 버리고 싶어 했지.”

러셀은 전생에 보았던 영화의 한 대사를 떠올렸다.

‘세상에는 그저 세상이 불타는 모습을 보고 싶은 놈들도 있는 법입니다.’

“추적할 수 있겠나?”

“왜?”

칼리아가 물었다.

“러셀, 당신에겐 이런 일을 해결해야 할 의무는 없을 텐데.”

“좆같으니까.”

“허?”

“사람을 가져다가 그런 돌조각을 만드는 놈 죽이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칼리아는 씨익 웃었다.

“알겠다. 이것들을 추적할 수 있는 주문을 만들어보지. 아, 그러기 위해서는 네 피가 필요한데. 깨어난 후로 아무것도 안 먹어서인지 배고프구나.”

“뭐?!”

아엘라시스가 경악성을 흘렸다.

“러, 러셀의 피? 절대 안돼! 이 아줌마야!”

“아줌마?”

칼리아가 미간을 찌푸리고 아엘라시스를 내려다봤다. 아엘라시스가 접시에 놓인 파이를 가리켰다. 벌꿀과 사과, 견과류가 얹어진 먹음직스런 파이.

“여기 파이나 먹어!”

“싫구나. 훨씬 달콤한 게 바로 옆에 있는데 그걸 왜 먹니.”

“러, 러셀이 달콤해?”

아엘라시스가 혹한 얼굴로 러셀을 쳐다봤다. 칼리아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넌 안 먹어봐서 모르겠구나. 얼마나 새콤달콤한데.”

“러셀! 나도 네 피 줘!”

러셀은 다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오늘 밤 조용하게 자기는 그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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