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90화 (91/225)

90화 길 위의 것들 (3)

***

테보닌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대낮부터 이어져 온 마적들의 추격전과 그들의 습격, 그리고 애써 고용했던 용병들의 죽음까지.

“으으으······.”

십 년 넘게 행상인 노릇을 하면서 객사의 위기는 수없이 많았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서른 기가 넘는 마적 무리라니. 거기다가 전원이 모두 조금이나마 마력을 쓸 수 있는 마력 사용자들이었다.

마력 사용자라면 어느 마을, 도시에서든 환영받는 존재일 것인데. 어째서 마적 노릇을 하는지 테보닌은 알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칼 좀 쓸 줄 알고 마력은 없었던 용병들은 그런 마적들에게 속수무책이었다.

테보닌은 마차 틈에서 죽어가는 용병과 다른 사람들의 비명을 들으며 주먹으로 입을 막았다. 아무리 세게 깨물어도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심장은 이렇게 뛰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무섭게 뛰고 있었다. 죽음이 코앞이었다.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어느 마적이 “야! 저기 구릉 위에!” 하고 외친 것이다. 그러자 빙글빙글 달리던 놈들이 말을 멈춰 세우고 구릉을 바라봤다.

‘뭐, 뭐지?’

테보닌은 마차 틈 사이에 눈을 갖다 댔다. 마차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용병과 사람들을 죽이던 마적들이,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북서쪽의 구릉이었고, 거기에 세 명의 인영이 보였다.

마적들이 말의 옆구리를 찼다.

“이랴! 가자!”

“쇠뇌들 장전해라! 새로운 사냥감이다!”

테보닌은 잠시간 유예된 죽음에 작은 기쁨을 느끼면서도, 결국 죽을 자신과 저 여행자 일행을 향해 참담한 심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모두 죽을 것이다.

“어?”

하지만 이후 벌어진 일은 놀라웠다.

말을 탄 한 명의 남자가 어디선가 짙은 색의 대검을 꺼내 들더니-테보닌은 그 대검이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건지 알 수 없었다-달려오는 마적들에게 곧바로 돌진한 것이다.

정신이 나간 것인가, 무모한 것인가?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얻을 수 있었다. 대검에 갈가리 찢겨 나가는 마적들의 시체로.

사람이 휘두를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 대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남자의 모습에 테보닌은 입을 쩍하고 벌렸다.

폭력이 인간의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면 저러할까. 남자가 서넛의 마적들을 스쳐 지나가면 놈들은 그대로 목과 가슴에서 엄청난 피를 흩뿌리며 죽어 나자빠졌다.

그때 테보닌은 자신들을 덮친 마적들의 우두머리가 대도를 치켜들고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상인은 저자가 얼마나 끔찍한 자인지 알았다. 힘이 어찌나 센지 자신이 고용한 용병들을 허수아비 베듯이 갈라버린 자였다.

그렇게 죽은 용병들은 몸 안의 것들을 여지없이 내보인 채 땅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테보닌은 욱, 하고 치밀어오르는 구역질을 참으면서도 마차의 틈에서 얼굴을 떼지 않았다.

제발, 제발 저 검은 머리의 남자가 이겨주기를 바랬다. 그리고 테보닌의 바램은 이뤄졌다.

대검과 대도의 충돌에서 울린 굉음에 저도 모르게 귀를 붙잡은 테보닌은, 그 무섭고 끔찍했던 마적 우두머리가 낙마해 바닥을 거칠게 구르는 것을 보며 몸을 번쩍 일으켰다.

“만세!”

팔까지 번쩍 치켜든 그는, 그러다가 남은 마적들이 자신을 보고 화살을 쏠까 황급히 엎드렸다.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다. 다른 마적들은 모두 자신들의 대장이 졌다는 것에 얼이 빠진 듯했다.

이후 벌어진 일들은 그저 학살에 가까웠다. 남은 마적들은 변변찮은 저항도 못 하고 죽었다.

저 먼 구릉으로 달려갔던 놈들도 죽은 것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멀리 있음에도 커다람을 짐작할 수 있는 한 거구와, 그 옆에 서 있어서 더 자그마하게 보이는 사람까지.

그리고 테보닌은 이제 그들에게 다가온 자들의 면면을 확인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 오크가 있었다. 그린 스킨은 아니다. 갈색 피부를 지닌, 오래전에 초록 피부 오크에게서 갈라져 나간 오크. 그래도 오크인 건 변치 않는다.

갈색 피부에는 언뜻언뜻 검은 문신들이 새겨져 있었고, 그건 훤히 드러난 상체의 근육 움직임에 따라 휘거나 일그러진 그림을 그렸다.

“안녕하쇼?”

카이가 씨익 웃었다. 사람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험상궂은 얼굴도 그렇지만 입술 밖으로 툭 튀어나온 강철 어금니가 햇살에 반짝였다. 사람들도 인사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카이 딴에는 자신의 멋들어진 어금니를 자랑한 것이지만, 사람들에게는 거의 이제 네 목을 어깨에서 떼어 주겠다-라는 선언처럼 보였다.

두 번째는 이제 열여섯은 됐을까 싶은 나이의 소녀였다. 하얀색의 머리카락에다가 인형 같은 외모를 가진 소녀는, 호기심과 흥미 어린 얼굴로 상단과 마차, 살아남은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안녕?”

발랄한 인사. 그때 검은 머리에 자색 눈을 가진 남자가 말했다.

“아엘라, 존댓말.”

“윽. 안녕하세요······.”

소녀는 고개를 까딱였다. 사람들은 똑같이 고개를 숙였다.”

어린 나이의 소녀라고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아까 구릉에서 번쩍인 섬광을 볼 때, 이 소녀는 마법사가 분명했다. 백발과 푸른 눈이라는 화려하면서도 신기한 외모가 그 추측에 힘을 더했다.

사실 사람들은 덩치가 커다란 카이보다도 더 소녀가 조금 더 꺼림칙했다. 마법사, 마녀란 존재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였으니.

그들은 보기도 힘든 존재들이고, 보통 영주나 귀족같이 푸른 피를 지닌 사람들에게 고용된 경우가 많았다.

평민들이 그런 마법사나 마녀를 만날 기회는 아주 적었다. 그리고 만난다고 해서 그 끝이 좋은 경우도 드물었다.

믿을 수 없는 소문 중에는 가만히 웃으면서 대화를 해도 심사가 뒤틀리면 개구리로 만들어 버린다거나, 입에서 민달팽이가 나오게 한다는 등, 상상만 해도 끔찍한 것들이 많았다.

허나 테보닌은 오크보다도, 백발의 소녀보다도 세 번째의 인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먼저 검은 머리의 남자에게 인사했다.

“가, 감사합니다. 저희를 구해주셔서.”

테보닌은 남자가 범상치 않은 가문의 자제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잘생긴 외모는 어떤가. 짙은 눈썹과 우뚝한 콧날, 반짝이는 눈과 굳게 다물린 입술까지. 어느 것 하나 귀족의 외모가 아닌 것이 없었다.

거기다 아까 그가 보여준 무력은 웬만한 기사들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세상에, 서른 기가 넘는 마적 떼를 홀로 물리치다니. 어떤 이름난 기사도 그럴 수는 없으리라. 기사의 힘은 단단한 갑옷과 날이 잘 드는 칼, 그리고 비싼 군마에서 나온다.

그런데 저 검은 머리 남자는 갑옷도 입지 않았는데 거대한 칼을 휘두르며 마적들을 참살했다.

남자는 대검을 코트 안으로 갈무리하더니-테보닌은 그제야 저 커다란 칼이 어디서 나왔는지 볼 수 있었다.-말했다.

“됐소. 어차피 싸워야 할 것들이었으니.”

지나쳐갈 것도 뭣도 없이 마적들이 먼저 러셀 일행을 발견하고 냅다 달려왔다. 어차피 길을 가던 도중 한 번쯤은 마주쳤어도 이상하지 않을 놈들.

테보닌은 사십 대에서 오십 대 사이의 나이로 보였다. 이마가 훤히 벗겨졌고 입고 있는 옷은 상인답게 조금 화려했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테보닌이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행상인입니다.”

“러셀. 여행자요. 여기는 순서대로 카이, 그리고 아엘라시스.”

테보닌은 감격했다. 아까 백발의 소녀에게 제대로 인사를 하라는 것에서부터 눈치챘지만 러셀이라는 남자는 그들을 존중해주고 있었다.

그건 귀족이나 기사에게서 받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봐도 좋다. 귀족들에게 평민들은 길가의 돌멩이 같은 것이었다. 흔해 빠졌고, 누군가에게 던질 때나 유용한 것.

테보닌이 러셀에게 물었다.

“혹시 어디로 가십니까? 저는 마르조프 남작에게 고용되어 그분이 계신 영지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귀리, 보리나 다른 식료품들을 옮겨서 가는 도중이었는데······.”

그러다가 마적들을 만나고 다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였다. 러셀이 가만히 들어보니 행선지가 자신들과 그리 차이 나지 않았다.

“그, 그래서 말입니다만. 호위를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 돈은 당연히 지불하겠습니다.”

러셀은 카이와 아엘라시스를 쳐다봤다. 둘 다 불만 없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가는 길이 같다면 굳이 떨어져서 갈 필요는 없었다.

“좋소. 같이 가지.”

“가, 감사합니다!”

테보닌은 감격한 얼굴이 되었다. 러셀은 인사를 받아주다가 멈춘 마차와 엉거주춤 일어서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다친 사람들은?”

“예? 아!”

테보닌은 그제야 부상자들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는 다급히 다른 행상인들과 같이 숨어 있던 사람들을 부른 다음 마적들에게 상처 입은 자들을 분류했다.

“아, 아빠! 아빠!”

“여보, 으흐흑······.”

행상인 무리에 껴서 여행자 가족이 가슴에 화살 세 대가 박힌 사내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다른 자들도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마적들의 칼질은 평범한 사람들이 견뎌내기에는 너무 강했다.

부상자들 대부분은 잠깐 숨을 몰아쉬다가 죽었다. 러셀은 치유의 빛을 쓸 줄 알았으나, 그걸 쓴다고 해도 저런 깊은 상흔들을 치유하는 건 어려웠다. 그리고 피를 이미 너무 많이 흘렸다.

마법은 기적이 아니다. 주는 것이 있으면 대가가 있는, 거래에 가깝다. 마력을 이용해 상처를 봉합할 수는 있지만 이미 흘려버린 피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다른 시체들의 상태들도 좋지는 않았다.

가슴팍이 쩍 갈라져 갈비뼈가 드러난 것은 그나마 양반이다. 얼굴이 반으로 쪼개지거나, 상반신과 하반신이 아예 끊어진 용병의 시체도 있었다.

테보닌은 참담한 얼굴이 되어 시체를 수습했다. 이번 습격으로 고용한 용병들 열 명 중 여섯이 죽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자들은 맞서기보다 숨는 것을 택했던 자들이었다.

용병들 말고도 그들 행상인 무리에 끼었던 여행자들도 서넛 씩 죽었다.

테보닌이 말했다.

“가족이나 친구가 있는 자들은 일단 천으로 감싸고, 교회가 있는 마을로 갑시다. 그 밖의 사람들은······, 매장을 합시다.”

테보닌과 나머지 상인들은 열 구가 넘는 시체들을 위한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러셀이 다가갔다.

그리고 러셀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삽을 들고는 땅을 팠다. 땅은 그가 파는 대로 푹푹 잘도 파였다.

테보닌은 깜짝 놀란 얼굴이 되어 그를 말렸다.

“기사님. 어떻게 기사님이 이런 험한 일을······.”

기사라. 러셀은 뒷목을 긁적였다. 기사라면 기사였다. 가문에서 제대로 된 서임식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런 걸 받기도 전에 집을 나왔으니 말이다.

“괜찮소. 그리고 다 같이 하면 더 빨리 끝나지 않겠소.”

“나도 도와주지.”

카이도 나섰다. 남들보다 배 이상은 크고, 힘까지 좋은 두 사람이 나서서 흙을 파자 구덩이들은 삽시간에 팼다.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시체를 옮겨 구덩이에 넣었다. 생전 그가 썼던 무기와 약간의 동화도 넣었다. 저승의 강을 건너게 해주는 뱃사공에게 주는 일종의 뇌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평야에 묘비도 없는 자그마한 봉분들이 만들어졌다.

살아남은 행상인들과 여행자들은 잠시 봉분 앞에서 서서 묵념했다. 뭔가 망설이는 듯하던 테보닌이 러셀에게 슬쩍 물었다.

“저, 기사님. 혹시 괜찮으시다면, 추도사를 부탁드려도 될지······.”

다른 사람들도 러셀을 바라봤다. 보통은 사제에게서 신의 말씀으로 추도사를 듣는 것이 보편적이나, 지금 그들에게는 사제가 없었다.

그런 경우 지체 있는 신분의 귀족이나 기사가 대신 죽은 자들을 위해 몇 마디를 읊어주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들은 지금 러셀에게 그걸 바라는 것이었다.

러셀은 잠시 서서 봉분들을 내려다봤다.

언제나 그렇듯이 죽음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이들도 이런 황량한 땅에서 마적을 만나 죽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삶의 불분명함은 분명 많은 것들과 연결되어있고, 죽음 또한 그랬다.

그는 그들이 믿었을 신과, 그들이 보장하는 천국에 대해 아는 대로 읊었다. 그리 많지 않았기에 추도사는 짧게 끝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숙연한 표정이 되어 눈을 감고 서 있었다. 각자 자신이 믿는 신께 기도하는 모습.

“정리들 합시다.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지, 안 그러면 또 저런 마적 놈들을 만날지 몰라.”

테보닌이 짝짝 박수를 치자 다른 사람들도 황급히 내팽개쳤던 자신들의 짐을 챙겨 들었다.

그 사이 러셀은 아까 자신들이 죽였던 마적들의 시체로 다가갔다. 이들까지 매장을 할 시간도, 의무도 없다. 그저 햇빛과 바람에 맡겨야 할 것이다. 풍장은 초원에서 흔한 장례법이다.

이상한 마력 회로의 근원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투시력은 그가 가장 꺼리고 자주 사용하지 않는 능력이었다. 거의 트라우마를 남겼다고 해도 좋았다.

어차피 몸 내부만 볼 수 있고, 마력과 관련된 작용은 알아보기 힘든 이유도 있었다.

상대했던 놈들의 기도가 워낙 거칠고 폭급한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지금 그걸 알아볼 시간은 없었다.

러셀은 자신을 상대했던 마적 우두머리를 내려다봤다. 목이 잘려 옆을 바라보고 있다. 눈알은 불투명한 유리구슬 같았다. 머지않아 말라붙어 버릴 시선.

그는 고개를 돌렸다. 마적들이 탔던 말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 주인이 사라지자 그대로 초원을 달려 사라진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아예 없지는 않았는데, 그중 한 마리가 대도를 쓰던 마적 우두머리의 말이었다. 놈은 덩치가 크라이에 비견될 만큼 컸다.

“이놈, 네가 탈 수 있겠냐?”

“흠. 덩치는 그럭저럭 맞는 듯 한 것 같은데. 일단은 짐 가방을 매는 쪽으로 하겠소.”

에란디스 영지에서는 카이가 탈 수 있을 정도의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크라이만 끌고 나온 것이었는데, 마적들을 만나고 운 좋게 말을 얻었다.

그때 눈치를 보고 있던 테보닌이 아직 얼쩡거리고 있는 말 세 마리와 바닥에 떨어진 마적들의 무기를 거둬 가자고 왔다.

“큼, 기사님. 여기 전리품들입니다.”

무기는 다양했다. 투창도 열 발 가까이 됐고, 창날과 도끼날이 같이 단조 된 도끼 창, 곡도, 손도끼, 롱소드 등이었다.

거기다 마적들이 입고 있던 사슬 갑옷이나 가죽 갑옷 등, 방어구 또한 양이 꽤 많았다.

테보닌이 슬슬 손을 비비면서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이것들을 매입하겠습니다.”

“그러시겠소?”

“아유, 그럼요. 정상가보다 팍팍 쳐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넵.”

러셀은 무기들을 보다가 투창으로 쓸 만한 것들과 손도끼, 단검 몇 개를 골라내고 나머지는 모두 테보닌에게 넘겼다. 테보닌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남은 방어구와 말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상품들이었기 때문. 다음에 들리는 마을이나 도시에서 대장간과 마시장에 넘기면 괜찮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러셀은 테보닌이 두 손으로 건넨 돈주머니를 받았다. 살펴보니 금화로 열 장은 되어 보였다.

마적들이 입었던 가죽 갑옷이나 사슬 갑옷 등은 러셀의 무지막지한 대검에 여기저기 찢어지거나 부서져 있었기에, 대부분은 말의 값이었다.

말은 비싸고, 언제나 수요가 높은 상품. 소보다 쓰임새가 많고, 기병대를 꾸리는 데 필수적이다. 여차하면 농삿말로 쓸 수도 있으니 말의 상품성이 떨어질 일은 적었다.

일단은 마차를 이끌던 말이 마적들에게 모두 죽었기에 새로이 교체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말들은 주인들이 죽었음에도 온순하게 재갈과 고삐, 안장을 받아들였다.

“그럼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테보닌이 러셀에게 먼저 말했다. 그가 상단의 상단주이지만, 지금 이 무리를 지키는 가장 큰 무력을 가진 자가 러셀이니 자연히 그에게 허락을 맡는 태도였다.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행상은 다시 출발했다. 마차와 마차 뒤에 달린 짐수레, 그리고 여행객들이 그런 수레에 타거나 옆에서 걸었다.

러셀은 아엘라시스와 같이 크라이에 탔고, 카이는 옆에서 터벅터벅 걸었다.

평야 위로 옅게나마 드러난 길 위를 서른이 약간 안되는 무리가 걸어갔다. 뒤로는 점점 썩어가는 시체들만이 수두룩하게 남았다.

***

몇 시간 후. 쨍한 햇빛 아래, 평야에 누운 시체들은 빠르게 부패하며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하지만 그런 냄새도 반기는 이들은 있기 마련.

크르르릉.

초원에 부는 피와 살점이 썩는 냄새를 맡은 짐승들이 그곳에 도착했다. 이틀 전, 러셀이 만났던 초원 늑대 무리였다. 다른 무리와 합류한 것인지 숫자가 배는 불어나 있었다.

늑대들은 조심스럽게 러셀 일행이 처음 섰던 구릉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무려 서른이 넘는 인간과 말의 사체. 황야에서는 드물도록 잘 마련된 만찬이다. 늑대들은 만찬을 즐겼다.

짐승들은 홀린 듯이 살점에 머리를 파묻었다.

점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건 심장과 내장을 거의 다 먹어 치웠을 때였다.

탐스러웠던 털들이 윤기를 잃더니 점차 바스러졌다. 그리고 산들바람에도 훌훌 휘날리며 떨어져 나갔다.

털들이 빠져버린 피부는 점차 붉은 빛을 띠고, 진물을 흘렸다. 우둑,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나며 뼈가 뒤틀리고 근육이 팽창하며 몸집이 아까보다 배 이상으로 커졌다. 네 개의 다리가 아까보다 배 이상으로 길쭉해진다.

하지만 짐승들은 제 몸에 일어나는 변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인육을 탐했다. 그리고 곧 하얀 뼈만 남긴 채 모든 근육과 살점이 짐승들의 배 속으로 들어갔다.

이제 그곳에 있는 건 더는 늑대들이 아니라 괴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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