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길 위의 것들
“정신 차려라, 멍청이들아! 상대는 한 놈이야!”
검게 죽어가던 표정들의 마적 중, 유일하게 한 놈만이 목청을 높이며 소리쳤다. 그 마적의 덩치는 꽤 컸고, 그만큼이나 말도 커다랬다. 거의 크라이에 근접해 보였다.
러셀은 그놈이 지금의 마적 무리를 이끄는 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놈의 전신에 흐르는 흉포한 기세의 마력.
고작 마적 떼의 우두머리 주제에 저런 마력량이라니. 러셀에게는 당연히 미치지 못해도, 웬만한 기사급의 마력은 되어 보였다.
“당장 말머리 돌려! 안돌리는 놈은 내가 직접 돌려주겠다!”
커다란 대도를 뽑아든 놈은 말로만 그치지 않겠다는 것을 증명하듯 도망치는 마적 하나에게 칼을 휘둘렀다.
“아악!”
“이히히히힝!”
놈의 완력은 놀라웠다. 바로 마적의 상반신과 말을 반으로 쪼개버렸으니. 인간과 말의 단말마가 이중으로 퍼졌다.
“도망치지 마라! 도망치는 놈은 나한테 죽는다-!”
넓은 평야임에도 붉은 대도를 든 놈의 목소리가 넓게 퍼졌다. 놈이 대도를 확 뿌리자 붉은 피가 긴 직선을 그렸다. 달아나던 마적 놈들이 고삐를 잡아당기며 멈춰 섰다.
뒤에서는 대검을 든 러셀, 앞에는 대도를 든 자신들의 대장. 마적들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그들은 그나마 나은 쪽이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씨발,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가자아!”
서른 기가 약간 넘는 마적 무리와 러셀이 서로를 향해 달려갔다. 마적들이 내는 흙먼지는 무지막지했다. 작은 구름을 꼬리에 매달고 뛰는 듯했다.
그때, 대도를 든 놈이 손짓하자 열 기의 인마가 따로 빠졌다. 놈들의 목적은 구릉, 카이와 아엘라시스가 있는 곳이었다.
러셀은 대도를 든 놈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구릉에 있는 덩치와 작은 소녀가 러셀의 동료임을 알고 그의 심중을 흔들려는 계산이었다.
거기다 자신의 무력과 스물의 부하 정도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본 모양.
그는 따로 떨어져 달려가는 마적들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하! 이하아!”
“흐랴아아아!”
뜻을 모르는 괴성을 남발하는 마적들. 놈들의 눈빛은 마약쟁이만큼이나 게게 풀려있었다. 다리 아래로 전해져오는 말의 요동침, 손에 쥐어진 곡도의 감촉, 끝도 없이 샘솟는 마력과 뇌내에서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에 의해 놈들의 정신은 이성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스무 기의 인마들과 러셀은 시시각각 가까워졌다. 그는 놈들의 더러운 얼굴들과 흉흉하게 빛나는 눈들, 땀과 흙먼지에 덩어리진 머리카락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놈들의 체내에서 흐르는 거친 마력의 흐름도. 그건 여타 평범한 마력의 흐름과는 약간 달랐다. 정제되지 않았다. 제대로 된 마력 회로가 아니라, 강제적으로 열린 것 같은 형상.
러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며칠 전 그가 로빈의 마력 회로를 열어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상당수의 회로가 개방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였던 것도 있었다.
아무리 그라도 꽉 닫혀있는 마력 회로를 열려면 상당한 힘이 소모될 터였다. 그가 한 것은 자그마한 틈을 열어 마나가 들어갈 수 있게 해준 것뿐이었다. 물론 마나와 마력을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그의 눈, 그리고 그 정도의 마력 운용력이 없으면 꿈도 못 꾸는 것이기는 했다.
한 인간의 신체를 완전히 뒤바꾼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저놈들은 닫혀있어야 할 놈들이 억지로 열려 있는 상태였다. 무슨 수를 써서 저리 된 건지는 몰라도, 정상적인 흐름은 분명 아니었다.
저렇게 되면 강제로 열린 마력 회로와 몸이 꼬이게 된다. 정상적으로 순환해야 할 마력과 본연의 생명력이 충돌하고, 종국에는 신경과 근육에 이상이 생길 터. 내일은 생각지도 않는 막장 인생들이라면 상관없다는 것일까. 아니면 아예 모르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지금 그 의문을 풀기에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러셀은 묵색의 대검을 들었다. 도끼, 마지막 서리를 던질 수는 없다. 아직 귀환 주문이 복구되지 못했으니. 그러나 대검만으로도 충분했다.
하늘은 광막하고, 구름은 몇 점 없다. 스스로를 불태워 빛을 내는 광명이 천공에서 지상의 모든 것들을 비췄다. 러셀과 스무 기의 인마가, 곧 충돌했다.
별다른 대형도 없이 달려온 것이기에 놈들은 거의 순차적으로 달려왔고, 달려온 순서대로 러셀의 대검에 몸이 조각났다.
“흐아아아!”
“죽어어······! 커러럭!”
검은색의 궤적. 덧없는 비명과 고함. 장난처럼 둥실 떠오르는 목들. 놈들의 표정은 아직 흥분에 차 있다. 아직 자신의 죽음을 깨닫지 못한 얼굴들.
갈색의 대지에 더운 피가 좌르르 뿌려졌다. 초록색 풀들은 자신에게 새로 입혀지는 붉은 수의에 몸체를 가늘게 떨었다.
그렇게 네 놈을 연속으로 베어냈을 때, 대도를 들고 있던 놈이 러셀에게 짓쳐들어왔다.
“크아아아!”
피부 바깥으로 유형화되어 보일 정도의 마력. 마적 우두머리는 이를 악물며 대도를 휘둘렀다. 그 대도에 어린 기세가 어찌나 흉흉한지 공기가 갈라지며 쉬아아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러셀은 겉보기에 평범했다. 어떤 마력도 피어오르지 않았고, 갑옷조차 입고 있지 않았다. 그저 얇고 검은 코트 차림에 긴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모습이었다.
흙먼지에 눈을 깜박일 법도 하건만, 러셀은 눈을 감지 않았다. 그는 목을 향해 날아오는 대도를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공기 가르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소리 없는 포효.
쩌엉!
굉음과 함께 둘의 신형이 엇갈렸다. 승패는 확연했다.
대도는 산산이 깨어져 파편이 되어 비산했다. 손목과 팔꿈치, 어깨와 허리를 통해 전달된 충격은 그의 우반신을 완전히 박살내 버렸다.
마적들의 우두머리는 입에서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그가 대장을 고꾸라트리자 놀란 마적들이 러셀을 피해 빙 돌아갔다. 몇몇은 대검의 반경에 걸려 그대로 가슴팍이 쩍 벌어져 죽었다.
마적 무리를 뚫고 나온 러셀은 크라이를 돌렸다. 뒤쪽으로 무릎을 꿇은 채 피를 토하고 있는 마적 우두머리와, 아직 살아남아 얼쩡거리고 있는 마적들이 보였다. 그 수는 이제 열기 남짓했다.
더 뒤로는 주인을 잃은 말들이 기세를 잃고 황야에 서 있었다. 순박한 바람의 아들들은 푸르릉 거리며 지친 숨을 훅훅 몰아쉬었다.
마적들은 그토록 강하다고 생각했던 자기네들의 대장이 한 수에 나가떨어지자 충격을 받은 듯했다. 창백해진 얼굴들로 서로를 돌아보는 꼴들이 가련했다.
아악! 뭐, 뭐야!
마법사다! 마법, 커헉!
그때 구릉 위에서 들리는 비명에 사람들의 눈길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러셀을 제외한 놈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
“흐아압!”
카이는 근육을 부풀리며 전방에서 덮쳐오는 말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마적은 그대로 짓밟으려 했지만, 카이가 훌쩍 뛰어들어 말의 목을 휘감을 줄은 몰랐다.
“쿠에엑!”
“히히히힝!”
마적이 나가떨어져 목이 부러지고, 말은 카이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카이는 러셀의 명을 충실히 지켰다.
“크하아!”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카이가 달려들었다. 아엘라시스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고, 다가오는 놈들의 말을 먼저 붙잡아 바닥에 내리꽂는다. 초원을 달리는 말들은 카이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거칠게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화살! 쇠뇌 들어!”
마적들은 다급히 안장 옆에 미리 장전해두었던 쇠뇌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들이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 얼음으로 된 화살이 날아드는 것이 더 빨랐다.
“칵!”
한 마적의 목과 가슴에 얼음 화살이 꽂혔다. 그놈은 식도 중간에 밀고 들어온 차가운 감촉에 버둥거리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새어 나오는 피는 얼어붙었다.
다른 마적들이 놀라 얼음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쳐다봤다.
“시발, 뭐야!”
“마법사! 마법사야! 저년이 마법사다!”
아엘라시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들어 올렸다. 기껏해야 열여섯의 나이로 보이는 소녀의 손짓이었지만 그 결과는 놀라웠다.
마력이 휘몰아치고, 대기 중의 수분이 급격히 모여들며 응집되었다. 얼어붙었다. 길쭉한 얼음 화살 다섯 발이 마적들에게 쇄도했다.
말에서 떨어지고도 큰 상처를 입지 않은 놈들이 허리춤의 곡도를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에게 날아드는 얼음 화살들을 피하거나 쳐냈다. 일개 마적이 보이기에는 놀라운 신위였지만, 보기보다 얼음 화살의 속도가 빠르지 않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엘라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에란디스 영지에서 괴물들을 상대했을 만큼의 위력과 속도가 나오지 못했다. 그때는 러셀의 마력을 받아 몸이 성장한 상태였고, 지금은 그냥 평상시의 상태였기에 그랬다.
그녀가 아무리 용이라지만 알에서 깨어난 지 이제 막 반년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강해지는 용의 특성은, 다른 말로 하면 나이를 먹어야 강해진다는 것과 같다.
“애새끼는 붙잡아! 생포해야 해!”
백발의 소녀, 아엘라시스의 미모를 본 마적들의 눈에 음심과 탐욕이 어린다. 놈들이 곡도를 치켜든 채 오르막길을 달음박질쳤다.
욕망만큼이나 강하게 힘이 실린 발이 흙덩이를 뒤로 튀게 만들었다.
허나 지금 그녀의 곁에는 덩치 커다란 보디가드, 오크 카이가 있었다.
카이는 킁, 하고 커다란 코에서 콧바람을 뿜었다. 갈색 피부에 검은 문신들이 떠오르고, 옅고 붉은 아지랑이가 일렁거렸다. 발을 넓게 잡고, 꾹 쥔 주먹을 들어 올린다. 강철 어금니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불-칸.”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도를 마친 오크가 달려오는 마적들을 상대했다. 마적들의 마력이 깃든 곡도가 목과 가슴 등의 치명적인 급소로 날아들지만, 카이는 피하지 않았다.
피륙을 베는 소리가 나고, 마적들은 당장 오크가 쓰러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곡도는 카이의 피부를 일정 두께 이상 파고들지 못했다.
“뭐야?”
의문성을 내지른 마적의 얼굴이 움푹 패였다.
“꺼어어······.”
코와 입이 완전히 박살난 마적이 마지막 숨을 내쉬고는 뒤로 나자빠졌다. 마적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것과 동시에 웅크렸던 카이가 팔을 휘둘렀다.
“우아악!”
보통 사람들보다 확연히 강한 근력을 가진 마적들이 속수무책으로 떠밀린다. 그리고 곧바로 카이의 주먹질이 내리꽂혔다.
곡도가 먹히지 않음을 확인한 카이가 날뛰었다. 손목을 붙잡아 으스러트리고, 발길질을 날려 마적을 걷어찼다. 걷어차인 놈이 입에서 피를 뿜으며 뒤로 날아가고, 카이는 짜부러진 팔을 부여잡고 우는 마적을 휘둘렀다.
인간 몽둥이에 둘의 마적이 나자빠졌다. 인간 몽둥이가 살점과 뼈만 남은 무언가가 되었을 때 카이는 그걸 던져버리고 다섯 남은 마적들에게 달려들었다.
곡도에 상처가 나고 피가 났지만 카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때 인간 몽둥이에 맞고 쓰러졌던 두 마적이 고개를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이 개같은 새끼-.”
“산 채로 씹어먹어버릴 거야!”
놈들은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카이에게 짓쳐 들었다. 카이는 예상보다 강한 마적들의 마력과 난폭한 움직임에 뒤로 슬슬 물러났다.
불칸의 기운을 폭발시켜야 하나? 하지만 그러면 당분간은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어질 것이다.
저번에 러셀과 싸울 때 썼던 이후, 카이는 하룻밤을 내내 힘의 반동 때문에 골골거려야 했다. 이후에도 주먹이 잘 안 쥐어졌음은 물론이다.
사흘이나 지났기에 다시 쓸 수는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이후 러셀의 명을 다시 받기 어려운 몸 상태가 될 터였다.
그때 아엘라시스가 외쳤다.
“물러서, 카이!”
카이는 이 어린 소녀의 말에 가타부타 않고 뒤로 훌쩍 뛰었다. 그리고 아엘라시스는 충분히 모아든 마력을 변환했다.
파지지지직!
새파란 뇌광이 번뜩였다. 소녀의 자그마한 손에서 뻗어진 벼락은 곧장 마적들이 들고 있는 곡도로 향했다.
“끄그그그극!”
다섯의 이중창이 울려 퍼진다. 벼락의 줄기는 마치 사슬처럼 연결되어 곡도와 곡도의 사이에서 빛나는 선을 그렸다.
마적들은 차마 칼자루도 놓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눈깔이 뒤로 홱 돌아가고 입에서 게거품이 흘러나왔다.
아엘라시스는 얼음 화살이 잘 먹히지 않자 빠르게 미련을 접고 자신이 쓸 수 있는 다른 공격 수단을 떠올린 것이었다. 소녀가 소리쳤다.
“지금!”
카이는 어린 소녀의 마법에 감탄했다. 그는 에란디스 영지에서 성인의 모습이 된 아엘라시스를 본 적이 있지만, 스쳐본 것에 불과했다.
거기다 그때의 아엘라시스와 지금의 소녀 모습이 괴리가 크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아르큘 대장의 죽음에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 얼음과 벼락의 여인이 아엘라시스라는 건 모르고 있었다.
벼락의 줄기가 멈추자 마적들은 피부와 입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남은 전격의 영향으로 몸이 계속 떨렸다. 카이는 쓰러진 놈들의 멱을 손수 따주었다.
마적들은 어떻게든 일어나려 했지만 전격의 여파가 남은 몸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들은 카이의 커다란 갈색 손이 다가오는 것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우둑!
***
마적 우두머리가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쿨럭, 뭐하냐 병신들아······. 저놈 멍하니 서 있는 거 안 보이냐. 놈도 지친 게 분명, 해! 가서 칼로, 저놈의 심장을 찔러!”
마적 우두머리의 말과는 달리 러셀은 하나도 지치지 않았다. 그건 그의 말, 크라이도 마찬가지였다.
러셀은 크라이에서 내렸다. 크라이가 저 말대로 정말 지친 것이냐는 듯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는 웃으며 크라이를 밀어내고 대검을 휘휘 돌렸다. 말에 탄 채로 휘두르는 것도 괜찮았지만, 역시 단단한 바닥이 주는 안정감은 또 다른 법이었다.
그가 말에서 내리자 다른 마적들도 말에서 내렸다. 놈들의 말은 이전부터 상단을 쫓았던 것과, 방금의 러셀을 향한 돌격 때문에 전신에서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었다.
마적들은 안장에서 쇠뇌, 투창, 도끼 창 따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우아아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말에 타고 있을 때와 같이 진형이나 전위, 후위 구분은 안중에도 없는 무식한 돌격이었다.
러셀은 번개같이 움직였다. 최소한 마적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자신들도 분명 빠르다. 꿈에도 그리던 마력을 각성했고, 남다른 신체 능력을 가지게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짜에는 닿을 수 없었다.
창날과 도끼가 러셀에게 교차했다. 그의 커다랗고 긴 대검의 바깥 반경에서 공격할 심산이었다.
창날은 금방이라도 러셀의 배를 꿰뚫을 것 같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러셀은 대검을 아래에서 위로 올렸다.
그 간단한 동작만으로 창대와 도끼날이 달린 창대가 잘려 나갔다. 그 주인들도 마찬가지로 허리가 끊어진 채 쓰러졌다. 바닥 위로 내장들이 죽 늘어졌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마적들이 그 모습에 질려버리기도 전에 러셀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러셀은 야수가 사냥감을 덮치듯 다른 매서운 몸놀림으로 짓쳐들어갔다.
표적이 된 마적이 비명과 신음이 섞인 괴이한 소리를 내며 곡도를 내리쳤다. 나힐니르가 더 빨랐다. 사타구니부터 정수리까지 갈라진 시체가 양옆으로 나뉘어 죽었다.
남은 마적들이 죽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10초. 한 사람당 1초씩. 그게 그들에게 부여된 남은 생의 끝자락이었다.
도망치려 했지만, 바닥을 미끄러지는 것처럼 달리는 러셀의 손아귀에서 달아날 수는 없었다. 결국 모두가 시체가 되어 바닥에 누웠다. 서 있는 사람은 러셀 혼자뿐이었다.
휘이이잉. 바람이 불며 머리카락과 코트 자락이 휘날렸다. 러셀은 잠시 온몸으로 바람을 느꼈다. 짙은 혈향이 씻겨가는 듯했다.
그는 아직까지 살아있는 놈에게 다가갔다. 마적의 우두머리였다. 놈은 눈과 코, 입, 귀에서 쉴새없이 피를 흘렸다.
러셀은 가만히 죽어가는 놈을 내려다봤다. 인위적이고 강제적으로 열린 마력 회로가 놈을 좀먹고 있었다. 회생은 힘들어 보였다.
러셀이 말했다.
“어떻게 마력을 각성한 거지? 너도 알 텐데. 지금 네 회로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쯤은.”
마적 우두머리가 킥킥 웃었다.
“좆까, 시벌놈아······.”
실실 웃던 놈은 기침을 컥, 컥 하더니 곧 숨을 멈췄다. 죽은 것이었다. 러셀은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나힐니르를 휙 털었다. 피가 묻어있진 않았지만, 습관에 가까운 것이었다. 러셀은 나힐니르를 코트 안에 갈무리하고 구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에 마력을 집중하니 멀리 떨어진 구릉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확, 하고 다가왔다. 카이와 아엘라시스 모두 멀쩡했다. 그때 시선을 느낀 것인지 아엘라시스가 폴짝폴짝 뛰며 손을 흔들었다.
시체들 사이에서 지나치게 발랄한 모습이었지만, 어차피 용이다. 그리고 사람이라고 딱히 다르게 행동해야 하는 법도 없다.
러셀은 피식 웃고는 뒤로 고개를 돌렸다. 살아남은 상단의 사람들이 입을 쩍 벌린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