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88화 (89/225)

88화 길 위의 것들

***

“여기서 우리도 작별이군요.”

레메론이 말했다. 페일은 뒤에서 크라이에 타고 있는 아엘라시스, 걸어가고 있는 카이와 대화 중이었다. 러셀은 옆에서 나란히 걷는 긴 귀의 엘프를 힐끗 바라봤다.

“러셀은 어디로 가나요?”

“아마 남쪽으로 가지 않을까 싶군.”

에란디스 영지는 아직 북부에 가까운 곳에 있는 영지다. 봄이 성큼 다가서긴 했지만, 영지의 북쪽에서 존재감을 더하고 있는 산맥에서 불어온 바람은 아직 찼다.

“너희들은?”

“저희는 영주가 내준 이 유물들을 가지고 원래 저희의 땅으로 돌아가야지요.”

“엘프들의 땅이 따로 있나?”

“그건 러셀에게도 알려줄 수 없겠는데요.”

레메론이 웃으며 한 말에 러셀도 픽 웃었다. 그가 전생의 매체에서 본 것만큼이나 아름다운 외모와 긴 귀를 지닌 이 종족들은 자신들의 고향에 대해 잘 말하지 않았다.

대수림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말은 있지만, 인간들은 감히 그 광대한 숲을 침범할 수 없다. 마수들이 득시글거리는 그곳은 마경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땅이기에 그렇다.

대사막에는 검은 색, 갈색, 혹은 보라색에 가까운 피부를 지닌 다른 요정들이 사는 땅이 있다고는 한다. 허나 대수림과 마찬가지로 너무 넓고 괴물들이 많은 땅이라 접근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레메론은 뒤에서 꺄르르 웃는 아엘라시스와 페일을 보다가 말했다.

“러셀, 당신에게는 언젠가 우리의 땅에 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당신처럼 신기한 사람은 처음이거든요.”

“그런가.”

러셀은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레메론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인간을 보며 방금 그가 했던 일에 대해 생각해봤다.

인위적으로 마력 회로를 열어주는 것. 사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계속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 따름.

인간들의 귀족이나 왕족들은 태어날 때부터 고명한 마탑의 마스터들에게 마력 회로의 개방을 의뢰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다만 그 과정은 방금 러셀이 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복잡하다. 마력을 받아먹고 자라난 특수한 풀을 짓이겨 즙을 짜내 피부에 바르거나 먹이고, 괴물의 피를 뿌리고, 그마저도 모자라 악마에게 힘을 빌리는 짓거리 또한 있다고 들었다.

힘에 대한 갈망은 어느 누구도 못지않은 욕망이기 때문. 물론 그만큼 큰 대가를 치르게 되고, 특히 악마와 계약을 하게 된 사실이 알려지면 교회에서 성기사들을 보내 영지와 가문을 완전히 짓밟아버리기에 그런 시도는 드물다.

반면 러셀은 그냥 했다. 그 과정이 퍽 범상찮기는 했다. 눈으로 그냥 로빈을 훑더니 손을 대서 등에 얹은 것만으로 끝이라니.

만약 이리 간단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돈을 싸들고 올 부모들이 한둘이 아닐 터이지만.

레메론은 그런 사실을 함부로 떠들고 다닐 만큼 입이 가벼운 엘프가 아니었다. 그는 가능하다면 러셀과 친분을 쌓고 싶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들은 남쪽의 성문에 도달했다. 햇볕을 맞으며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러셀은 그중 나가는 쪽의 줄에 섰다.

사람들은 커다란 러셀과, 그보다 더 큰 오크 카이, 그리고 잘생긴 흑마에 탄 백발의 소녀를 보며 놀람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을 걸 용기를 내지는 못했다.

레메론과 페일은 줄을 서지 않고 물러났다. 러셀은 두 엘프와 차례로 악수를 나눴다.

인간보다 이종족이 많은 일행은 그렇게 둘로 갈라졌다. 성문의 그늘을 지난 러셀은 갑자기 비쳐든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의 눈은 곧 적응했다. 러셀은 성문 밖으로 드넓게 펼쳐진 평야와 구석에서 바람에 흔들거리는 숲과 수풀, 그리고 멀고 먼 곳에 아스라하게 서 있는 산맥을 볼 수 있었다.

이제 말을 잘 타는 아엘라시스가 옆에서 크라이를 끌고 다가왔다.

“이제 어디로 가, 러셀?”

카이도 그를 바라보았다. 러셀은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그의 예민한 감각은 소란스러운 영지의 뒤쪽과 반대로 고요한 앞의 평원을 느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들이 서로의 살을 스치며 내는 소리, 그런 풀의 향기.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위로 커다랗게 솟아있는 회색의 성벽. 이 안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영주는 그에게 남아서 영지를 다스려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지만 러셀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직 그는 가보지 못한 곳이 많았다.

“남쪽으로.”

푸르릉. 크라이가 투레질을 하며 발굽을 옮겼다. 러셀과 카이는 옆에서 걸어갔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성벽이 묵묵한 시선으로 여행자들을 배웅했다.

***

카이의 호언장담은 사실이었다. 그는 정말 요리를 잘했다. 러셀은 자신의 손에 들린 빈 그릇과 수저를 내려놓으며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잘하는군.”

“더 드시겠소?”

“사양하지 않지.”

“잠깐만 기다리시오. 여기서 더 걸쭉하게 끓이면 풍미가 더 살아나니까.”

오크의 입에서 풍미라는 말을 듣다니. 러셀은 피식 웃으며 그릇을 풀밭에 내려놓았다.

그들은 작은 개울이 흐르는 평야의 한켠에 야영할 자리를 잡았다. 카이의 가방에는 잡다한 도구가 많았다. 카이는 대못과 망치, 천막을 꺼내더니 금방 뚝딱뚝딱하고 간이 텐트를 만들어버렸다.

아엘라시스가 환호를 올렸음은 당연한 일이다. 혼자 자서 버릇을 가지고 둘러봐야 모포나 침낭을 두르는 것에 충분히 만족하던 러셀과 달리, 아엘라시스는 아직 밤이슬이 차가운 소녀였다.

도로롱, 도로롱 작게 코까지 골며 잠들어있는 텐트 속의 아엘라시스를 보던 러셀에게 카이가 말했다.

“다 됐소.”

러셀은 그릇에 채워진 스튜를 다시 천천히 떠먹었다. 그들의 앞에 있는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그리 크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어차피 러셀에게는 모닥불의 유무가 그리 중요치 않다. 어떤 어둠도 꿰뚫어 볼 수 있는 그에게 불의 유용함은 음식을 덥히는 것과 크라이가 불안해하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장작 타들어 가는 소리뿐이었다.

“물어보지 않소?”

카이가 말했다.

“뭘?”

“내가 당신을 따라가겠다고 한 것 말이오.”

“딱히.”

러셀이 카이를 일행의 동료로 받은 것에는 회색 갑주의 사내를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유 하나가 추가됐다. 잡일을 잘하는 일꾼 겸 요리사.

그는 순식간에 그릇을 다 비우고 내려놨다. 카이가 국자를 들어 보였으나 러셀은 고개를 저었다.

“난 지금은 거의 잊혀 가고 있는 신, 불칸을 따르고 있소. 나 같은 오크들만이 소수로 모시고 있는 신이지.”

“그래서?”

“그분은 거의 계시를 내려주지 않소. 힘을 잃으셔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러셀, 당신을 봤을 때 이런 게 계시인가 싶은 것을 느꼈소. 당신을 따라가라는.”

신이라. 신성력의 존재로 신 또한 존재하는 것은 분명했다. 그건 신이 없거나, 최소한 그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하는 세계에서 온 러셀에게는 호기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제까지 러셀이 만난 신과 비슷한 존재는 근래 만난 그 어둠 속의 소녀뿐이다. 하지만 소녀는 자신이 신이 아니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신들은 무엇일까.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처럼 묘사되는 인격을 가진 신일까.

러셀은 주위에 모아온 삭정이를 그러모아 반으로 뚝 부러트린 다음 모닥불에 넣었다. 기세가 죽어가던 모닥불이 새로이 공급된 연료에 다시 활활 타올랐다.

“그런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하지 않다?”

“그래. 네가 믿는 신이 너에게 계시나 지시를 내리던, 그걸 선택하는 건 네 몫이잖나.”

“······그렇소.”

“그럼 된 거다. 어차피 내가 어디에 도착하게 될지 알고 떠나는 사람은 없어. 목적지가 있다고 해도, 중간에 새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머무르게 될 수도 있겠지. 그러다 다시 출발하면 되는 거고.”

러셀은 지금까지 머물렀던 도시들을 되짚었다. 문득 그의 손이 목에 닿았다. 벌써 반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그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 하나가 손에 잡혔다.

“러셀, 당신은 왜 여행하는 거요?”

러셀은 카이의 물음에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컴퓨터 화면으로, 텔레비전 화면으로는 볼 수 없는 어둠과 별빛이 보였다.

하늘 한쪽에 걸린 푸른 달은 이제 반으로 차올라 옅은 달무리를 그렸다. 그 곁에 반짝이는 별들과 은하수가 먼 거리를 달려온 과거의 빛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둠으로 일렁이는 바다에 잠긴 보석들이 스스로 빛을 내며 반짝이는 듯한 그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그냥.”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거지. 거창한 이유를 대라면 뭔들 못 대겠나. 아까도 말했지만 그런 건 부질없어. 하고 싶고, 할 수 있으면 하는 거지.”

그건 전생의 그는 하지 못했다. 하고 싶어도 따라주지 않는 몸 때문에. 그래서 가상의 세계, 창작물들에서만 대리로 만족해야 했기 때문에.

러셀은 카이를 돌아봤다가 픽 웃고 말았다. 커다란 덩치의 갈색 피부 오크가 주먹에 턱을 받치고 있었다. 그 자세는 러셀에게 전생의 조각상 하나를 떠올리게 했다.

“이제 그만 자라. 내일도 부지런히 걸어야 할 테니.”

“알겠소. 불침번 순서가 되면 깨워주시오.”

“그래.”

카이는 군말 않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맨바닥이나 다름없지만, 원래 오크인 그는 개의치 않았다. 곧 거친 코골이가 들려왔다.

러셀은 가만히 앉아서 밤하늘 아래의 평원을 바라보았다. 이따금 바람이 불면, 풀잎들이 서로를 스치면서 표현할 수 없는 소리를 낸다.

사색을 위해 굳이 눈을 감을 필요는 없다. 모닥불이 밀어내고 있는 어둠의 부피는 두꺼웠지만, 그마저 러셀의 눈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

저 멀리, 이리 떼가 보였다. 암흑 속에서 번들거리는 노란 빛의 눈동자들. 들판을 돌아다니며 여행자를 덮치거나 시체를 뜯어먹는 놈들.

하지만 짐승들은 먼 곳의 모닥불을 발견했음에도 섣불리 다가서지 못했다. 이리 떼는 저기 있는 것이 먹음직한 사냥감이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본능은 무시무시한 야수가 있다고 소리쳤다.

결국 놈들은 포기하고 좀 더 쉬운 사냥감을 찾기로 했다. 열 마리의 이리 떼들은 그렇게 들판과 언덕 너머로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완전히 떠나진 않고 주위에서 기다릴 작정임을 러셀은 알았다.

자연에서 살아온 놈들은 사람들을 따라다니면 어떻게든 먹을 것이 생긴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러셀은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채 해소되지 못한 힘은 그의 안에서 거칠게 꿈틀거리고 있다. 그렇다고 일어나서 칼춤을 출 수도 없는 노릇.

그는 그저 모닥불 안에 삭정이와 장작을 계속 밀어 넣으며 불씨를 되살렸다. 한 차례 크게 일렁이는 모닥불과 그림자가 춤을 추었다.

***

“무슨 소리가 나.”

영지를 떠나온 지 이틀째, 아엘라시스가 문득 말했다. 러셀도 마침 그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소리 말이오? 잘 안 들리는데.”

광막한 평원은 소리를 쉽게 삼켜버린다. 메아리가 쳐질 만한 장애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엘라시스와 러셀은 범상한 존재들이 아니었고, 그래서 희미하게 사그라드는 소리를 포착했다. 그건 비명소리였다.

“왼쪽이군.”

그 비명은 왼쪽의 완만한 구릉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러셀은 바로 크라이에 올라탔다. 그가 높아진 시야에서 아래의 카이를 보며 말했다.

“따라올 수 있겠지?”

“킁. 물론이오.”

크라이가 크게 울부짖으며 달리자 콧바람을 낸 카이도 내달렸다. 두 사람을 태우고 있는데도 다리는 힘차게 움직였다. 카이는 그 옆에서 거의 뒤지지 않는 속도로 달렸다. 지구력에서는 말을 따라오지 못하겠지만, 단거리에서는 충분히 크라이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들은 흙먼지를 뒤로 매단 채로 구릉에 올라섰다. 구릉 위에 올라선 그들은 저 아래에서 열에서 스물 사이의 사람들이 서너 대의 마차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보다 배는 되어 보이는 무리가 말을 타고 마차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어림잡아 서른에서 마흔은 되어 보이는 무리의 정체는 마적 떼들이었다.

아아악!

살려주시오! 살려! 악!

거리가 꽤 되었고 소리가 넓게 퍼지긴 어려운 평원이라 비명들은 모두 아스라했다. 하지만 러셀의 눈에는 단말마를 외치며 죽는 자, 팔이 베이는 자, 가슴에 화살과 투창을 연이어 맞고 뒤로 나가떨어지는 자들 모두가 보였다.

그리고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베거나 죽이면서 신나게 웃어젖히는 도적들의 얼굴도.

영지에서 단 이틀을 걸어왔을 뿐인데도 도처에는 저런 놈들이 기승을 부렸다. 그럴 수 있는 경우는 몇 없다. 아마 놈들의 대장이 근처 도시나 영지에서도 함부로 토벌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 모양.

들판과 황야를 집으로 삼고 떠돌아다니는 저런 마적 떼들은 영지에서도 쉽사리 기사나 병사들을 보내어 토벌하기가 쉽지 않다.

일단 저들의 주무대인 평야가 무척 넓기 때문이고, 토벌한다 치면 바로 깊은 숲속이나 산맥으로 파고 들어가 버리니 더 까다롭다.

거기다 저렇게 대놓고 노략질을 한다는 것에는 그만큼 뒷받침되는 것, 마력의 각성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저들 모두를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을 만한 무력을 가진 기사는 대륙에서도 드물었고, 자연히 저렇게 사람 목숨 우습게 아는 놈들이 넘쳐났다.

저 상단 또한 열 명 조금 넘는 용병을 고용한 듯했는데, 막상 남은 자들은 얼마 없었다.

몇몇은 마차 주위에서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었고, 몇몇은 평원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달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달아나지도 못하고 마적들의 칼날에 등이 깊숙이 베여 죽었다.

이히히히히히!

아후우우우우!

귀신 같은 함성, 짐승의 포효 비슷한 소리가 마적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이번 사냥이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

그때, 한 놈이 러셀이 서 있는 곳을 창으로 가리키는 것이 보였다. 한쪽 앞니가 없고 땟국물이 말라붙은 지저분한 얼굴.

러셀은 그들 모두가 희미하게나마 마력을 각성한 놈들임을 알아보았다.

마적들은 곧 말머리를 돌려세우고는 러셀 일행이 있는 구릉으로 돌격해오기 시작했다.

“카이.”

“말하시오.”

“아엘라를 지켜라. 상처 나게 하지 마.”

“알겠소.”

러셀이 아엘라시스에게 말했다.

“아엘라, 내려가.”

“같이 가면 안돼? 나 이제 얼음송곳 잘 쏘는데.”

아엘라시스는 말로 그치지 않고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그러자 대기의 수분이 뭉쳐 들며 허연 냉기를 흘리는 송곳 한 개가 만들어졌다.

“칼 휘두르는 데 불편해. 여기서 카이랑 있어. 다가오는 놈들 있으면 그 얼음송곳 머리에다 꽂아주고.”

아엘라시스는 못내 싫은 표정으로 러셀의 품에서 벗어났다. 소녀가 내린 것을 확인한 러셀은 크라이의 고삐를 당겼다.

“이랴!”

크라이는 구릉 아래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한 사람분이 줄어서 그런지, 아니면 내리막길이라 그런지 속도가 엄청났다.

마적들은 무기도 없이 말을 타고 내려오는 러셀을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쇠뇌를 든 놈들이 달리는 말 위에서도 안정감 넘치는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투두두둥!

쇠뇌에 장전되어 있던 화살들이 한꺼번에 시위를 벗어나며 허공에 검은 선들을 그렸다. 목표는 러셀과 말 크라이. 둘은 당장 그 화살들에 고슴도치 신세가 될 것 같았다.

그러지 않았다. 마적들은 러셀과 크라이의 근처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버린 화살들을 보며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중 가장 앞의 놈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조심! 마법-”

사라는 말이 기도를 넘기도 전에 대검이 먼저 기도를 베었다. 가장 먼저 목이 날아간 놈은, 뇌에 전달된 산소가 고갈되기 전의 짦은 의식을 유지했다.

놈은 하늘이 바닥에 있고 땅이 위에 있는 역전된 세계에서 대검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것을 목격했다. 휘말린 그의 동료들은 무슨 수를 쓰기도 전에 갈가리 찢어져 육편이 되어 바닥에 흩뿌려졌다.

몇 놈들이 급하게 마력을 일으켰지만 그 마력이 채 칼에 담기기도 전에 먼저 러셀의 대검이 상반신을 두 쪽으로 갈랐다.

툭, 데구르르.

처음 베여 둥실 떠올랐던 목이 그제야 바닥에 떨어졌다.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그럼에도 청각은 살아있어 동료들이 내는 고함소리, 그리고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곧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러셀은 마적들답게 아무런 대형도 갖추지 못한 놈들을 무인지경으로 돌파했다. 그의 뒤로는 일곱 기의 인마가 더운 피를 쏟아내며 죽어있었다.

평원의 갈색 흙바닥이 붉고 검은 핏물을 한껏 빨아들였다.

먼저 달려 나간 동료들 뒤로 오던 마적들은 그 광경을 보고는 말머리를 뒤로 돌려 달음박질쳤다. 그 뒤를 흥분한 크라이가 콧김을 펑펑 뿜으며 쫓아갔다.

흑마에 탄 채 검은 코트를 휘날리고, 검은 대검을 들고 쫓아오는 검은 머리의 남자를 보며 마적들의 얼굴이 검게 죽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