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경고
이스칼리아는 천천히 공중에서 내려와 섰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듯했다.
‘나는······ 죽은 게 아니었나?’
이스칼리아는 되살아난 몸으로 침대에 앉아있는 러셀을 바라봤다. 방안은 어두웠다. 등불 하나 켜져 있지 않다. 창문 바깥으로 새어 들어오는 푸른 달빛만이 광원의 전부였다.
광원은 러셀의 왼쪽에 있었고, 그래서 러셀의 반신은 푸른 빛 속에, 반대쪽은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그럼에도 이스칼리아는 러셀의 전신이 또렷하게 보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거의 비슷한 모습. 살은 좀 빠진 듯 했다. 볼이 움푹하고, 피부도 창백하다. 이스칼리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러셀의 뺨을 만졌다.
“날 알아보겠나?”
그 물음에 이스칼리아는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을 자각했다. 그녀는 달궈진 쇠를 만지고 있었다는 듯이 화들짝 놀라 손을 떼고 물러섰다.
“난······ 되살아난 건가?”
“그래.”
“어떻게? 난 분명 죽었었다. 그대의······ 어둠에 잡아먹힌 것이 기억난다.”
그때 그녀는 완전한 죽음을 느꼈다. 돌이킬 수 없는 죽음. 또 그걸 넘어서서 거대한 무언가에 잠겨 드는 것 같았다. 빗방울이 바다에 떨어져 소금기를 얻게 되는 것 같은. 결국 바다와 하나가 된 것 같은 기분.
이스칼리아는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뭔가를 만났다.”
이건 러셀도 짐작하지 못했던 부분. 러셀이 물었다.
“만나? 누구를?”
“잘······ 잘 모르겠다. 아주 커다랗고, 어두웠다는 느낌만 받았다. 그 이상은 모르겠다.”
아마 러셀이 만났던 존재와 같은 존재를 만난 모양이었다. 러셀도 그 진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스칼리아는 그저 거대한 뭔가라고만 느꼈을 따름.
그리고 그 거대한 무언가를 보고 느꼈던 것이, 바로 앞의 러셀에서도 일부분이지만 느껴졌다. 깊은 심해, 별 한 점 띄우지 못한 우주, 보는 것만으로 어지러워지는 심연.
허나 이스칼리아는 그 심연에서 공포나 불안함, 꺼림칙함보다는 편안함을 느꼈다. 왜 그럴까?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이건, 예전의 내 몸이 아니구나.”
원래 자신의 몸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러셀의 뒤편에서 나타난 어둠이 자신의 몸을 남김없이 먹어 치웠으니.
그리고 이스칼리아는 이전에 자신의 가슴을 완전히 채우고 있던 충동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막 부활했을 때 느껴졌던 그 충동. 산 것들을 먹고, 종복들을 일으키라는 명령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고 힘차게 맥동하는 심장을 느꼈다.
“그대의 피가 느껴진다. 가득한 생명력, 마력······.”
그때, 이스칼리아의 몸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쓰러졌다. 러셀이 황급히 그녀의 몸을 받았다.
“왜 그러지?”
“······아직 내 영이 육에 완전히 자리 잡지 못한 것 같다.”
완전히 새로 만들어지다시피 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거기다 이스칼리아는 육신을 잃고 혼만이 붉은 구슬에 담겨져 있던 상태였다.
그 정체불명의 존재가 러셀의 피와 마력을 이용해 육체를 수복할 수 있게끔 도와주긴 했어도, 적응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던 것.
“아무래도 조금 쉬어야 할 것 같구나. 그대와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잠시만, 그대의 안에서 쉬고 있겠노라.”
그러면서 이스칼리아의 몸은 천천히 러셀의 몸에 스며들었다. 아니, 그의 그림자에 잠기고 있는 것이었다.
러셀은 그것이 이스칼리아가 곧잘 쓰던 그림자와 관련된 공간 능력임을 알아보았다. 채찍처럼 낭창거리던 검, 사복검을 그림자에 찔러넣고 무수한 방면에서 그를 공격했던 능력. 그건 그조차도 간담이 서늘할 정도의 무서운 공격들이었다.
러셀이 지라크를 남기고 갈 수 있는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이스칼리아를 영지에 둘 수는 없으니까.
그녀는 에란디스 영지를 거의 초토화시킬 뻔한 장본인이고, 그녀로 인해 발생한 사상자는 수백이 넘는다. 영주에게는 물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스칼리아를 살린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의 능력과 마법, 주문에는 러셀도 관심이 많았다. 지금 이렇게 역장을 칠 수 있게 된 것도 그녀와의 전투에서 얻은 것이니까.
아직 불안정하고 뭘 할 수 있는지도 감이 잘 잡히지는 않지만, 그녀가 도와준다면 앞으로도 다양한 기술들을 터득하거나 개발할 수 있을 터였다.
그건 지라크가 도와줄 수 없는 분야였기에 러셀은 그를 영지에 남겨둔다는 선택을 했다. 영주의 심려가 깊어 보이는 것도 한몫했지만.
러셀은 마력 역장을 거두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차단되었던 밤공기와 소리가 밀려들었다. 서늘하고, 곤충들의 울음으로 아스라하다.
아엘라시스의 팔이 척, 하고 그의 배 위에 올라왔다. 그러면서 입은 헤죽거리고 있다.
러셀은 조용히 아엘라시스의 머리를 토닥여주었다. 창문 바깥의 검은 밤하늘에서 비죽 미소를 지은 하얀 입이 보인다.
한 번에 너무 많은 피를 뽑아낸 탓일까. 걷잡을 수 없는 졸음이 밀려왔다. 러셀은 눈을 감았고, 까무룩 잠들어버렸다.
***
“오오, 정말이군. 정말 마지막 서리야.”
검은 보리 향 여관의 난쟁이, 루크가 카운터 위에 올려져 있는 백색의 외날 도끼를 보며 감탄사를 흘리고 있었다.
그 앞에서는 러셀이 흑맥주를 홀짝였다. 아침이었고, 아엘라시스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요정들도 마찬가지.
일찍 일어난 러셀만이 홀에 내려와 카운터에서 간단한 아침을 마치고 흑맥주를 마시던 참이었다. 그때 루크가 간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고, 러셀은 저 난쟁이가 왜 저러나, 고민하다가 그 이유를 떠올렸다.
그리고 코트 속에 보관되어 있던 도끼를 꺼내 보여주었다. 늙을 대로 늙은 난쟁이의 눈에 감탄이 어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잔을 닦던 로라가 다가와서 궁금 어린 얼굴로 물었다.
“이게 뭔데요, 할아버지?”
“······전설적인 난쟁이 대장장이인 칼프디르가 만든 마지막 무구. 이걸 봐라.”
루크가 짜리몽땅한 손가락으로 도끼를 가리켰다. 로라와 러셀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별다를 건 없어보였다.
“뭐가요?”
“이음새. 이음새가 없지 않으냐.”
과연 루크의 지적대로였다. 대장간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무구는 이음새가 있다. 하지만 이 마지막 서리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만들어졌을 때부터 이 모양 그대로였다는 듯이.
“······언젠가, 칼프디르는 생의 마지막이 찾아오는 황혼의 한 때에 한 무구의 제작을 요청받았지. 그건 아주 괴상한 요청이었어. 한 서리 거인이 스스로의 몸을 무기로 만들어달라고 온 거야.”
“자신의 몸으로요?”
로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러셀도 맥주잔을 들던 것을 멈추고 루크를 바라봤다. 난쟁이가 말했다.
“그래. 용과 견줄 만큼 신비한 종족인 거인이나, 그 또한 피륙으로 덮여 있는 생명체. 칼프디르는 이 난해한 요청에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않았지. 평생 강철과 금속만 두드려온 자신이었지만 이런 흥미 있는 의뢰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거든.”
“그래서요?”
로라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물었다. 루크가 씩 웃으며 말했다.
“결과는 이미 우리 눈앞에 있지 않으냐. 칼프디르가 대장간에서 나온 건 꼭 한 달 만이었고, 그 손에는 커다란 도끼가 쥐어져 있었지. 처음에는 거인이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거대했지만, 종국에는 스스로 크기가 줄어들어 난쟁이가 쥘 수 있을 정도로 작아졌다고 하더군. 그리고 칼프디르는 이 무기를 끝으로 더 이상 망치를 잡지 않았어.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지.”
루크는 러셀을 바라봤다.
“그래서 이 무기 이름이 마지막 서리라네. 이중적인 의미지. 마지막 남은 서리 거인이 스스로를 바쳐 만든 무구라는 의미와, 칼프디르가 마지막으로 만든 무기.”
흠. 러셀은 로라와는 달리 흥미없는 무표정으로 흑맥주만 홀짝거렸다. 천 년 전 이야기가 지금 그의 무기로 있는 건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겠으나.
그래봤자 사람과 괴물 죽이는 날붙이다. 그런 사연을 덧붙인다고 해서 더 숭고해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러셀은 손을 들어 도끼를 불렀다. 하지만 도끼는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그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쯧, 하고 혀를 찬 러셀은 그냥 손으로 쥐고는 코트에 넣었다. 루크가 그것을 아쉬운 눈길로 쳐다봤다.
마지막 서리는 이스칼리아와의 전투 이후 그에게 돌아오는 귀환 주문에 타격을 받았다. 러셀이 의지와 마력을 보냈는데도 몸체가 떨리기만 할 뿐, 예전처럼 빛이 되어 사라졌다가 다시 손에 쥐어지거나, 빙글빙글 돌며 돌아오는 기능이 잘 작동되지 않았다.
“거기에 한 번 가보는 건 어떤가?”
“마탑 말씀이십니까?”
“그래. 자네 친구 중에 그 마법사 아가씨도 있지 않은가. 그 아가씨가 마탑 소속 아니었나?”
러셀은 턱을 짚었다. 마탑에서 그의 도끼를 고쳐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마지막 서리를 보고 눈독이나 들이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눈독을 들인다고 해도 감히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이왕이면 난쟁이 대장장이에게 가는 게 나을 것 같지만······. 저번 사태 이후로 아직 영지의 대장간들의 보수가 완전히 이뤄지지 못했다.
그래도 마탑에 한 번 가보긴 해야 했다. 이블린과도 작별 인사를 나누고. 루넬바스라는 노인도 만나보고.
러셀은 보통이면 노인에게 공경을 대하는 편이다. 특히 이 세계에서 오래 산다는 것은 쉬운 바가 아니다. 특출난 무언가가 없다면 그리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
하지만 그 특출남도 특출함 나름인 법. 러셀은 그 특출함이 자신에게 방해나, 장애물이 된다면 노인 공경이고 뭐고 대가리에 도끼를 꽂아줄 수도 있다.
물론 마스터라는 직함을 다는 마법사이니만큼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일단은 가 봐야 무엇이든 진척이 될 듯 싶었다.
그때 여관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섰다.
“어서 오세······ 카이?”
러셀이 뒤를 돌아보자 카이가 그곳에 있었다. 러셀은 맥주잔을 들어 보였다.
“어제는 올 줄 알았는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카이는 아직도 얼얼한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불칸의 신성력으로 강화되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머리가 뽑혀져 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일격이었다.
“형님!”
구석에서 눈치를 보며 청소하고 있던 톰과 스튜어트가 카이에게 다가갔다. 전 아르큘 길드원들이 못 다한 이야기를 하며 회포를 푸는 사이, 계단에서 하품을 하며 아엘라시스가 내려왔다.
귀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귀걸이가 걸려 있었다.
“흐아암···.”
아직 속눈썹에 졸음을 대롱대롱 매단 채로 비틀거리며 걸어온 아엘라시스가 카이를 발견했다. 그리고 러셀은 아직 아엘라시스에게 카이가 새로 합류한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건 카이도 마찬가지였다. 카이는 바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러셀보다도 커다란 덩치의 오크가 작은 백발의 소녀 앞에 서자 그야말로 미녀와 야수가 따로 없었다.
모두가 긴장어린 얼굴로 바라보는 가운데, 아엘라시스의 얼굴은 평온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안전할 거라는 믿음이 어린 얼굴이다. 물론 그 믿음의 원천은 그녀 뒤에서 눈을 번쩍이고 있는 러셀이다.
카이가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시오.”
“어, 안녕?”
“이번에 같이 가게 된 카이라고 하오. 잘 부탁드리겠소.”
“같이?”
아엘라시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러셀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그녀에게 말을 못 했기에 조금 불안했다.
하지만 아엘라시스는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너 요리 잘해?”
카이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당황했다.
“어······, 그럭저럭 잘하는 편이오. 톰이나 스튜어트도 맛없다고는 안 했고······.”
놀랍게도 톰과 스튜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이 스튜는 기가 막히게 잘 끓이긴 하셨지.”
“스프나 통구이도 그렇고. 생긴 거와는 다르게 말이야.”
“조용히 해라, 이것들아······.”
의외로 상황이 잘 풀리자 러셀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조금 내쉬었다. 아마 아엘라시스는 쓸 만한 하인이 하나 더 늘어서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러셀은 다 마신 맥주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시오?”
“갔다 올 곳이 있어서. 이르면 오늘 안에 떠날 거니까 너도 준비해둬라.”
“알겠소.”
“아엘라,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레메론이랑 페일 내려오면 같이 밥 먹고.”
“난 같이 안 가도 돼?”
“괜찮아. 여기서 맥주 마시고 있어.”
맥주! 아엘라시스가 눈을 반짝이며 카운터를 돌아봤다. 루크가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늦은 감이 없잖아 있네만, 괜찮은 건가?”
“괜찮아!”
아엘라시스가 먼저 대답했다. 어제 그렇게 마셔놓고도 또 마실 생각이 만만했다. 콧김이 훙훙 나온다.
그때 레메론과 페일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러셀은 이러다가는 또 계속 붙잡힐 것 같아 얼른 다리를 옮겼다.
“다녀올게.”
“다녀와!”
***
루넬바스가 아엘라시스의 특별함을 알아본 것은 첫 만남에서부터였다.
데보라는 그저 아엘라시스의 체내에서 마력 회로의 정순함만을 보았지만, 루넬바스는 다른 것을 보았다. 오래된 고문서에 기록된 형상.
마력을 다루는 자는 무릇 심장을 요체로 삼는다. 그 이유는 마법이 용으로부터 파생된 학문이기에 그렇다.
용이 거체를 움직이는데 필요한 혈액량과 혈류는 가히 엄청났을 터. 그렇다면 그걸 지탱하기 위한 심장 또한 무지막지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요즘에 와서는 머리나 신체의 다른 부위를 쓰는 학파들도 늘어가고 있지만, 보수적이고 정통을 위시하는 학파들은 여전히 심장을 고집하고 있다.
용의 심장은 다른 어떤 지성체, 마법 종족과는 다른 결과 형태를 지녔고, 루넬바스는 단편적으로나마 그 지식을 알았다.
아엘라시스는 그 단편적인 지식에 부합하는 아주 이상적인 마나 흐름과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소녀를 옆에 두고 주문을 가르치면서 비밀을 알아낼 작정이었는데.
이후 영지에서 벌어진 일들은 노회한 마법사인 그로서도 기상천외한 것들이었다. 흡혈귀가 날뛰기 시작하고, 괴물들이 사람을 죽이며 그 핏물들은 어디론가로 흘러간다.
거기에 외곽에서 떠오른 정체불명의 붉은 구체. 어딘가에서 날아든 하얀 광선. 그 후 붉은 구체는 검은 고치가 되고, 그 안에는 아엘라시스의 보호자인 러셀이라는 자가 들어있다고 했다.
마법사로서, 루넬바스는 그 검은 고치를 조사하고, 연구하고 싶었지만.
그는 자신의 마력과 주문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라몬 에란디스 영주의 호의와 러셀의 동료들이 막아섬으로써 이루어지진 못했다. 거기다 영지의 수복에 대해 정식으로 요청까지 해오니, 마탑의 마법사들을 이끌고 온 그로서는 달리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아엘라시스라는 이름의 소녀와 접촉을 하려 했지만.
막상 러셀의 앞에 서자, 그는 그것이 아주 어렵겠다라는 것을 눈치챘다. 아니, 아주 어려운 수준이 아니었다.
“···큭.”
평생 동안 마나를 주무르고 마력을 몸에 쌓아 마탑의 장로, 마스터의 자리에까지 오른 루넬바스였지만. 지금 앞에 선 러셀의 기세는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단지 마력의 적고 많음이 승부를 결정하진 않는다. 그렇게 따지면 러셀은 이미 용과의 싸움에서, 악마와의 전투에서, 이스칼리아의 공간 속에서 죽었어야 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마력의 운용이다. 한 줌의 마력으로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가는 시전자, 술사의 역량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기에 루넬바스가 평생 쌓은 강력한 마력도, 러셀이 아주 가볍게 뿜어낸 기세의 능숙한 받아넘기는 기술에는 미처 닿을 수 없었다.
러셀이 말했다.
“난 보통 노인을 공경하는 편이오. 루넬바스. 이런 세계에서 그토록 오래 살아남은 데에는 어떤 지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
“마스터 루넬바스. 당신에게도 그런 지혜가 있다는 것을 난 믿소.”
이건 협박이었다. 아엘라시스를 건들지 말라는. 루넬바스를 죽일 수는 없다. 아직 그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으니까.
거기다 이곳은 에란디스 영지고, 영지 내에서 그런 살인 사건을 벌였다가는 영주가 아주 난처해질 것이다. 러셀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자신을 아들로서 대우하겠다고 나선 사내를 곤경에 빠트리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경고에서 머물렀다. 마탑의 한 마스터에게 경고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떤 이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고, 혹은 주제 넘은 짓거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짜고짜 와서 이게 무슨 행패고 말인지 모르겠군.”
“정말 모르시오?”
“무얼?”
말하면서도 루넬바스는 왜 러셀이 먼저 찾아왔는지 짐작이 갔다. 아마 그 백발의 소녀, 아엘라시스에 대해서 일 것이다. 과연 러셀이 말했다.
“아엘라에게 접근하지 마시오.”
“그 소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내가 왜 그 아엘라라는 소녀에게 관심을 보이겠는가?”
시치미를 떼는군. 러셀의 눈이 스산한 빛을 띄기 시작했다. 불길한 광채를 띄는 눈앞에서 루넬바스의 피부에 오돌토돌 소름이 돋았다.
마치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