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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85화 (86/225)

85화 떠날 준비 (2)

***

대련 후, 러셀과 영주는 간단한 술자리를 가졌다. 기분이 꽤 나아진 것인지 영주는 술자리 내내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서 아까의 무기력했던 늙은 남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걸 받아주겠나.”

러셀은 영주가 품에서 꺼내 내민 것을 받아들었다. 그건 자그마한 인장과 증서였다. 러셀이 주를 향해 시선을 올렸다.

“영지의 후계자에게 주어지는 인장이라네. 원래는 에드몬드가 갖고 있어야 할 것이었지만, 그 아이의 방에 덩그러니 놓여 있더군. 증서는 자네가 인장의 적합한 소유주라는 증서이고.”

“영주 님.”

라몬 에란디스는 앉은 자세에서 등을 뒤로 젖혔다. 의자가 끼긱거리면서 우는 소리를 냈다.

하얀 머리카락과 하얀 수염이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지만, 드러나 있는 부분은 술 때문에 붉었다. 세월이 새긴 고랑들 사이에서도 그 눈은 여전히 나이에 맞지 않는 총기로 번쩍였다.

“난 여전히 내 아들을 손수 죽인 것이 뼈에 사무치게 아프네. 다 놔두고 어디론가 훌쩍 가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

“······.”

“하지만 자네 덕분에 깨달았네. 그걸 선택한 건 나라는 것을. 그리고 사람이라면, 자신이 선택한 일에 책임을 져야 하지. 신분과 나이를 막론하고 책임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어. 눈을 돌리는 순간 삶은 더 이상 삶이 아니게 되지.”

러셀은 영주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아내를 잃고, 어린 아들을 홀로 키워냈지만 끝내 아버지인 자신이 직접 아들을 참해야 했던. 그럼에도 결국 버티기로 한 사내의 궤적을.

“사양 말고 받게. 어차피 나한테는 다른 자식도 없어. 이 나이에 새로 아내를 맞이하고 싶지도 않고. 설사 맞이해서 아이를 낳게 한다 쳐도, 그 아이가 장성해서 성인이 될 때까지는 또 누가 이 영지를 관리한단 말인가? 난 이미 육십을 넘게 살았고, 그리 오래 살 자신이 없네.”

“너무 약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타고난 신체와 영지를 지켜오면서 터득한 마력 덕에 영주의 몸은 노쇠하지 않았다. 거기다 러셀이 이길 수 있던 순간에 검을 물렸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검술 또한 뛰어났다.

영주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결심했네. 자네가 갖게. 그리고 언젠가, 자네가 할 일을 모두 마친다면 한 번 들러줬으면 좋겠군. 그때 가서 영주의 자리에 앉든,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대신 섭정에 세우든 마음대로 하게. 그건 후계를 임명할 수 있는 임명권의 역할도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자네가 가져가 준다면 조금 더 편하게 일을 볼 수 있을 것 같군.”

영주의 태도는 강고했고, 러셀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영주는 집사를 시켜 묵직한 주머니와, 하얀 천에 감싸여져 있는 뭔가를 또 하나 내오게 했다.

“이건 영지를 지켜준 구원자에게 주는 보상이네.”

주머니 안에 든 것은 금화와 은화였다. 그리고 천에 싸인 것은 한 쌍의 귀걸이였다.

“이 귀걸이는 뭡니까?”

“던전에서 나온 유물 중 하나라네. 대개는 이미 힘을 잃은 골동품들이었지. 그나마 그 귀걸이가 아직 원형과 마력을 보존하고 있더군.”

“그럼 영주 님이 가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됐네. 내 이번에 느낀 게 있어. 영지의 확장도 좋지만, 그보다도 더욱 중요한 건 내실이야. 그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고, 그 귀걸이는 자네의 아리따운 동료한테 주게나.”

러셀은 아엘라시스를 떠올렸다. 그가 영주 성에서 사흘간 숙식하는 동안, 아엘라시스는 잘 놀아주지 않는다고 삐져서는 페일이나 레메론과 놀러 다니고 있었다. 이블린은 마탑의 일로 바쁜 듯했고.

“그 아가씨 이름이 아엘라, 뭐라고 했었지?”

“아엘라시스입니다. 영주님.”

“그래. 그 아가씨에게 어떤 별명이 붙었는지 아나?”

별명? 러셀은 고개를 갸웃했다. 깨어나기 전의 그는 던전에서 이스칼리아의 공간에 갇혀 있었고, 그렇기에 바깥 영지에서 아엘라시스가 어떤 활약을 펼쳤는지 모르고 있었다.

“무슨 별명입니까?”

“얼음과 벼락의 여인이라네. 하핫. 믿어지나? 그 작달막한 소녀한테 그런 별명이 붙다니.”

“아······.”

러셀은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알 것 같았다. 황금용 이스메니오스가 낳은 용, 아엘라시스는 어미와는 다르게 비늘이 하얀 백룡이다.

가진 속성은 얼음과 러셀이 불어넣어 준 벼락에 의해 깨우친 번개의 속성, 두 개씩. 러셀은 그가 깨어나고 나서 아엘라시스가 작은 가슴을 펴며 재잘거렸던 자기 자랑이 순 허풍은 아니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긴, 아르큘 길드로 가기 전 그가 마력을 충전해준 것도 있었고. 또 그녀가 없었다면 이스칼리아와의 일전에서 승기를 잡기 어려웠으리라.

“이 귀걸이를 보니 그 소녀가 생각나서 말이야. 선물해주면 좋아할 것 같더군.”

“감사히 받겠습니다.”

술자리가 끝나고, 러셀과 영주는 별채에서 나왔다.

“가보겠습니다. 영주 님.”

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기 전에 들릴 곳이 있나?”

“이전에 머무르던 여관의 맥주 맛이 좋더군요.”

페일이 아엘라시스를 데려갈 곳이야 뻔할 것이다. 그리고 페일이 그곳에 있다면 레메론도 거기에 있을 터였다. 이블린은 마탑에서 부른다며 그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영주가 미소를 지었다.

“검은 보리 향 여관. 우리 영지에서 가장 흑맥주 맛이 일품인 곳이지. 예전에는 나도 가끔 들러서 마셨었는데······. 요즘은 그럴 만한 시간도 못 냈군.”

“지라크가 도울 테니 괜찮아질 겁니다.”

지라크는 영주의 뒤에 서 있었다. 에드몬드의 술수에 걸려 흡혈귀가 되었지만 러셀의 피로 되살아난 이후 흡혈귀의 부작용을 거의 벗겨낸 그였다.

햇빛 아래서도 멀쩡하고 평범한 음식도 먹을 수 있다. 피를 통한 신체 강화와 마법도 할 수 있었다. 그가 영주의 아래서 암흑가를 관리하면 큰 도움이 되리라.

“영주 님을 잘 보필해줘.”

“목숨을 다해 그리하겠습니다.”

지라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서운한 감정 같은 것은 일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러셀의 명에 따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는 듯했다.

“아, 영주 님. 카이에게는······.”

“일어나면 그 여관으로 가라고 말해두겠네.”

“감사합니다.”

“됐네. 잘 가게나.”

러셀은 고개를 숙여 영주에게 인사했다. 살면서 진심으로 인사를 하게 만드는 사람은 드물다. 라몬 에란디스는 충분히 그의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 자였다.

러셀이 막 몸을 돌리려는 찰나, 영주가 말했다.

“러셀 경.”

“예.”

영주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어디서 온 것인지,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리 강한 것인지.

하지만 영주는 단념했다. 저자는 구름과 같은 사내다. 잠시 머물러 뜨거운 햇빛을 가리고, 시원한 그림자를 만들어 줄 수는 있어도. 결국 다시 바람을 따라 가버릴 것이다.

영주는 그저 소소한 인연을 맺어놓은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고, 그렇기에 하려던 말을 삼켰다.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좋겠군.”

“저도 그렇습니다.”

영주는 손을 흔들었고, 지라크는 재차 허리를 깊게 숙였다. 러셀은 영주성을 나왔다.

지라크도 영주에게 인사하고 물러나자, 남은 건 영주 혼자 밖에 없었다. 영주는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다시 별관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적막하다. 이미 깨끗이 치워진 식탁을 일별한 영주는 벽에 커다랗게 걸린 그림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그림이 흐리게 보였다.

***

러셀은 에란디스 영지를 걸었다. 성의 경비병들은 그가 나가는 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아마 이미 언질을 받아놨던 모양.

하늘에는 별과 초승달이 떠올랐다. 아직 서쪽 하늘에는 미처 빛을 뿌리지 못한 노을이 처연한 얼굴로 가라앉고 있었다.

몇몇 식당들은 조금 이르게 정문 앞의 등불에 불을 붙였다. 가판대를 내놓은 상점들과 상품들을 파는 상인들은 목소리를 높이며 호객했다.

야시장이 열리고 있었고, 거리는 혼잡했고 활기가 가득했다. 2주 전의 그 끔찍했던 밤은 모두 잊은 듯했다. 평화로웠다.

러셀은 머지않아 검은 보리 향 여관 앞에 도착했다. 여관 오른편에 딸린 마구간에서 그를 알아본 크라이가 푸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크라이에게 다가가 갈기를 쓰다듬었다.

“잘 지냈냐?”

크라이는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까딱거렸다.

여물통을 살폈다. 로빈과 로라가 잘 보살펴주었는지 귀리와 콩이 듬뿍 들어간 질 좋은 여물들이 들어 있었다. 물통의 물도 여러 번 갈았는지 깨끗했다.

갈기와 털도 빗질해서인지 매끄러웠다. 뒤편에 누워서 쉬거나 잘 수 있는 큼직한 공간에는 깔짚도 가득 채워져 있었다.

크라이의 콧잔등을 툭툭 두드려준 러셀은 여관 1층 홀에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거의 꽉 찬 홀이 보였다. 여덟 개 정도의 원형 테이블에 손님들이 앉아서 고기를 뜯거나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 번잡한 틈을 로빈이 재주 좋게 휘젓고 다니며 접시를 나르고 있었다.

“러셀 님!”

러셀은 로빈의 인사에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다.”

“예, 정말요! 몸은 이제 괜찮으신 건가요?”

“그럭저럭.”

그때, 러셀의 눈에 색다른 광경 하나가 보였다. 바로 앞치마를 매고 서빙 중인 수인, 톰과 스튜어트였다. 덩치도 커다란 놈들이 저런 복장을 하고 접시와 맥주잔을 나르고 있으니 헛웃음이 나왔다.

러셀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아챈 로빈이 말했다.

“아, 저희 여관에서 보름 전부터 일하고 있어요.”

“저 둘이?”

“네. 카이가 직접 저 둘 데리고 왔어요. 쓸만하면 계속 쓰고, 못 써먹겠으면 그냥 내쳐도 상관없다고. 그런데, 뭐. 곧잘 해요.”

“흠.”

러셀은 픽 웃었다. 그래도 취직자리는 잡아주고 가는군.

“아엘라는?”

“아, 저기 요정님들이랑 같이 있어요.”

로빈이 가리킨 곳을 보자 구석의 자리한 레메론이 손을 들어 러셀을 반겼다. 그의 자리에는 이미 페일과 아엘라시스가 앉아있었다.

“나도 흑맥주 한 잔.”

“옙, 바로 갖다 드릴게요!”

러셀이 구석의 자리로 가서 앉자 아엘라시스는 그를 힐끔 보더니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볼이 빵빵했다. 같이 다녀주지 않았다고 삐친 것이 분명했다.

러셀은 피식 웃었다.

“아엘라.”

“······.”

“삐졌어?”

“삐지긴, 내가 뭘 삐져.”

러셀은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 볼을 한껏 부풀린 소녀를 보다가 고개를 젓다가 로빈이 내온 흑맥주를 받아 마셨다. 레메론이 말했다.

“성에서 나왔군요?”

“그래. 이제 다시 떠나야지. 너무 오래 머물렀어.”

처음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날짜로만 세면 거의 삼주에 가까운 시간을 이 영지에서 머물렀다. 그중 2주는 잠들어 있었기에 러셀의 체감 시간은 기껏해야 사나흘에 불과했지만.

“너희들은?”

러셀이 레메론과 페일을 보며 물었다. 레메론이 어깨를 으쓱하고, 맥주잔을 들던 페일이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고는 말했다.

“우리의 목적은 애초에 던전에서 발견되었다는 유물들의 조사였어. 아주 오래전, 요정 왕국의 유물들이 나왔다는 소문 때문에 온 거지.”

“소득은 있었나?”

러셀의 물음에 페일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건 월계관이었다. 하지만 생기를 잃고 시들시들했고, 나뭇가지도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영주에게서 정령수로 만들어진 월계관을 받았지. 다른 것들도 있었지만, 대개 녹슨 갑옷이나 무기 따위였어.”

“요정들의 대장장이 기술은 꽤 괜찮다고 아는데.”

“그래도 너무 오래전이야. 계속 손질해줬다면 괜찮았겠지만, 800년 넘게 음습한 지하 마력이 솟는 곳에 있었으니. 그나마 이 월계관이라도 건져서 다행이지.”

“그것보다도 말입니다.”

레메론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도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주어가 없었지만, 러셀은 레메론의 질문을 짐작했다. 이스칼리아의 공간에 있었던 것을 말함이겠지.

“고대의 흡혈귀 군주를 만났지.”

“세상에! 어, 어떤 사람이었나요? 아니, 사람이라고 하면 이상한가.”

“검은 머리카락에 아름다운 용모의 여자였다. 채찍처럼 늘어나는 검을 썼고, 피와 관련된 공격법들을 많이 알고 있더군.”

러셀은 간략하게 그 안의 일을 설명해주었다. 오랜만에 탐구심이 솟구치는지 레메론은 연신 감탄사를 흘리며 더 자세한 묘사를 요구했다.

고정된 황혼빛을 온 하늘에 뿌리는 것 하며, 들판에 무수히 꽂혀 있던 나무 말뚝과 거기 꿰어있던 병사들. 호시탐탐 시체의 눈알과 살점을 파먹기 위해 둥글게 날아다녔던 까마귀들.

그리고 핏빛의 갑주와 붉은 망토를 두르고 기이한 검을 휘두르며 몇 번이고 재생을 반복한 고대의 흡혈귀.

레메론은 그 러셀조차 재생력을 막지 못하고 수세에 밀렸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생각보다 더 엄청난 괴물이었군요.”

“맞아. 아엘라가 없었으면 나도 살아남기 힘들었을 거야.”

내내 고개를 돌리고 있음에도 다 듣고 있던 아엘라시스가 러셀의 칭찬에 귀를 쫑긋했다. 그러다 슬그머니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랬어?”

“그래.”

그러고는 러셀은 품에서 귀걸이 한 쌍을 꺼냈다. 당장 아엘라시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용과 소녀의 공통점에는 반짝이는 보석을 좋아한다는 것이 있고, 아엘라시스는 두 요소를 모두 충족시키는 소녀였다.

“뭐야, 그건?”

“이리 와봐.”

아엘라시스는 냉큼 자리를 옮겨 러셀 옆에 앉았다. 러셀은 귀걸이를 들어 아엘라시스의 귀에 가져갔다. 그의 손이 닿자 아엘라시스가 목을 조금 움츠렸다.

“가만히 있어.”

“응······.”

마법의 귀걸이는 귓불에 대자마자 저절로 찰칵, 소리를 내며 걸렸다.

“됐어?”

“응. 예쁘다.”

아엘라시스는 고개를 돌려가며 귀걸이를 확인하려 했다. 제 꼬리를 잡으려는 강아지 같은 귀여운 꼴을 보며 미소를 짓던 레메론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잔에 담겨 있던 물이 저절로 허공에 떠오르더니 작은 거울이 되었다.

“간단한 정령술입니다. 이것 말고는 별달리 쓸 것도 없어요.”

아엘라시스는 레메론이 만들어준 거울을 보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백발의 소녀에게 달린 흰 보석의 귀걸이는 썩 잘 어울렸다.

아엘라시스가 러셀에게 폭 안겼다.

“고마워!”

러셀은 등을 몇 번 두드려주다가 말했다.

“뭐 달라진 거 없어?”

“음? 음······. 몸이 좀 가벼워진 것 같기도 하고.”

영주는 귀걸이의 효능을 몰랐지만, 러셀에게는 귀걸이에 내장된 마력의 흐름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

귀걸이에는 장착되었을 때부터 소유주의 마력 흐름을 원활하게 해주고, 몸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약한 정도의 신체 강화가 깃들어 있었다.

효과가 겨우 그게 다 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애초에 이 세계에는 주문이 부여된 무기나 방어구, 장신구가 아주 드물었다. 자연의 마나는 한 곳에 집중적으로 고이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 그런 만큼 마법이 걸린 유물은 부르는 게 값이다.

아무리 착용할 자가 없다곤 하나, 가져가가 팔았어도 꽤 큰 이익을 남겼을 텐데. 러셀은 영주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감사를 느꼈는지 대략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늦은 밤, 러셀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레메론과 페일은 다른 방에서 자고 있다. 아엘라시스는 웬일로 용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간 형태의 몸으로 자고 있다.

귀에는 여전히 그 귀걸이가 걸려 있었다.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

러셀은 빙긋 웃다가 마력을 풀었다. 카이와 싸울 때 펼쳤던 마력 역장이었다. 이것으로 혹시나 있을 충격이나 소리는 차단되었다.

마력 역장을 펼친 후, 러셀은 코트에서 붉은 구슬을 꺼내 들었다. 핏빛과 같은 마력이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

이걸 어떻게 처리할지는 이미 생각을 해두었다. 그의 눈이 자청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러셀은 손가락에 마력을 집중시킨 다음, 손바닥을 그었다. 베인 단면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피가 흐르는 손바닥으로 구슬을 쥐었다.

피와 마력이 흡수되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많은 양이 흘러 들어갔다.

붉은 구슬은 곧 태아가 되었다. 아주 작은 태아였지만, 러셀의 피와 마력이 들어가자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몇 주, 혹은 몇 달에 걸쳐 임산부의 태내에서 진행되어야 할 과정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진다. 머리가 커지고, 팔과 다리가 자라나며 쑥쑥 성장하던 태아는 어느새 갓난 아기를 넘어섰다.

마치 사람의 생성 과정을 매우 빠르게 진행하는 과정 같았다. 러셀은 피가 빨려 나가면서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그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모든 과정이 완료됐다. 그의 앞에는 검은 머리카락에 백옥 같은 피부를 지닌 여자가 둥둥 떠 있었다. 나이대는 대략 소녀와 성인의 중간쯤 되어보였다.

그리고 여자가 눈을 떴다. 진홍빛의 눈동자에, 어렴풋이 자색이 물들어 있는 눈동자가, 천천히 러셀을 바라봤다.

그 눈에 혼란, 놀라움이 어렸다.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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