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해야 할 일들 (3)
“전사의 대화?”
“그렇소. 불칸을 믿는 오크가 상대방에게 청하는 신성한 대화요. 지금에는 거의 잊혀져 있지만. 불칸을 따르는 오크 대전사나 사제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오.”
“목적은?”
“당신을 따르고 싶소.”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닦고 어깨에 걸친 러셀은 가만히 카이를 쳐다봤다. 이제 보니 많이 긴장한 듯 승모근이 올라와 있었다. 이도 악물고 있는지 양턱이 불거져 있다.
“그럼 그냥 따르면 되는 것 아닌가?”
“난 아르큘 대장에게 문신과 사명을 넘겨받았소. 그런 이상 그저 마음의 결정만으로는 당신을 따를 수 없소.”
“그래서, 나랑 싸워서 지고 싶다고?”
“성에 퍼져 있는 당신의 소문을 아시오?”
갑자기 카이가 딴 소리를 했다,
“무슨 소문?”
“당신이 진짜 영지의 구원자가 맞는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소. 한 둘이 아니지.”
흠. 러셀은 턱을 쓰다듬었다. 요즘은 바뀐 신체 상태와 수련에만 몰두하고 있다 보니 그런 소문이 돌고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카이가 말했다.
“난 당신이 얼마나 강한지 아오. 그 붉은 구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사히 나온 걸 보면 어렵잖게 이긴 것이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당신의 강함을 모르오.”
“그래서 네가 도와주겠다고?”
“날 때려눕힌 남자가 그딴 말을 듣는 것이 싫었을 뿐이오.”
카이는 다시 심호흡을 하고 주먹을 들어 올렸다.
“당신이 나보다 강한 걸 알고 있소. 하지만 나도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소. 아직 싸울 상태가 아니라면 피해도 되오.”
이 자식이. 러셀은 픽 웃었다.
안 그래도 혼자서 하는 수련만으로는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다. 이렇게 알아서 처맞으러 찾아와 준다니, 원대로 해줘야지 않겠나.
“그래, 뭐. 그 대화 한 번 해보자.”
“방금까지 수련하고 있던 것 아니오? 원한다면 내일 싸워도-.”
뻐억!
카이의 몸이 뒤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러셀이 그를 걷어차 버린 것이다. 러셀은 들었던 발을 내리고 쥐고 있던 나힐니르를 지라크에게 던졌다.
“코트에 넣어놔.”
“알겠습니다.”
지라크는 고이 접어두었던 코트에 나힐니르를 넣었다. 러셀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카이에게 걸어갔다.
“대화하자며. 빨리 하자고. 그런데 그 대화가 이 대화 맞지?”
“······맞소.”
카이는 러셀의 발차기를 막기 위해 교차했던 양팔을 내렸다. 팔이 덜덜 떨렸고, 욱신거리는 통증이 밀려왔다.
2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누워만 있던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위력이 담긴 발차기였다. 오기 전 몇 번이고 다짐했던 결심이 모래성처럼 무너지려 했다.
“푸.”
아니다. 카이는 주먹을 쥐었다. 그는 확인해야 했다. 자신의 대장이자 스승이 물려준 힘과 문신, 스스로가 세운 신념을. 그러기 위해서는 깨져야만 했다. 그냥 깨지는 것도 아니다. 압도적으로 깨져야 했다. 그리고 깨트려줄 자는 이 영지에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후읍!”
카이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자 갈색 피부 위에 난 검은 문신이 더 짙어졌다. 변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근육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더니, 붉은 기운이 뭉클거리며 뿜어져 나왔다.
러셀은 멈춰서서 눈을 가늘게 떴다. 일전 이스칼리아가 피의 호수에 잠겨져 있던 던전의 최심부. 거기서 만났던 회색 갑주의 사내가 떠오른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 새끼도 족쳐야 되는데.’
이제까지 러셀과 싸우고 별다른 피해없이 도망친 놈은 그 놈이 처음이었다. 거기다 공간을 넘는 텔레포트 주문까지 사용할 수 있는.
그 사내도 지금 카이의 것과 비슷한 기운을 내뿜었었다. 물론 그때의 회색 갑주 사내가 가진 기운이 훨씬 흉흉하고 강했다. 안개처럼 퍼트리는가 하면 다른 사물로 조형해서 공격할 수 있는 등, 다양한 공격 수법이 있는 듯 했다.
반면 지금 카이의 붉은 기운은 그저 아지랑이처럼 타오를 뿐. 다른 형태로 조형할 수 있는 건 아닌 듯 했다. 근육과 골격이 일순 커지고, 근력은 그보다도 더 상승하는 것 같기는 했다.
카이의 몸은 이제 2미터를 넘어서 있었다. 190을 약간 넘는 러셀보다 더 큰 키였다. 아직 충분히 몸을 만들지 못한 러셀이었기에, 겉으로 보면 그 덩치의 차이는 더 커보였다.
“후욱, 후욱.”
카이는 뜨거운 콧바람을 내쉬며 불타는 눈으로 러셀을 노려봤다. 붉은 기운이 서린 눈은 여타 괴물들의 것과는 약간 달랐다.
괴물들의 것에선 다만 그 흉성과 난폭한 마력이 느껴졌다면, 카이의 눈에서는 투지와 신념, 명예, 그리고 약간이지만 신성력도 느껴졌다.
또 러셀은 카이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이전보다 더 강해졌음을 알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카이를 봤을 때를 떠올려보았다.
지라크의 안내에 따라 아르큘 길드에 도착했을 때, 길드의 대장 아르큘이 죽고 그가 카이에게 힘을 건네줬었다.
카이가 디디고 있는 연무장의 단단한 바닥이 우직우직 소리를 내며 깨졌다. 흙과 먼지, 떨어진 나뭇잎 따위가 휘몰아치는 바람을 따라 퍼지거나 허공으로 흩날렸다.
러셀도 그를 보며 마주 마력을 끌어올렸다. 보다 더 정순해진 마력이 더 넓어지고 깨끗해진 마력 회로를 거침없이 내달렸다.
러셀과 카이가 서로 투기를 내뿜자 그 중간의 허공에서 파칫, 파칫하고 불똥이 튀었다.
“불-칸-!”
잊혀진, 그리고 잊혀져 가는 신을 향한 카이의 외침이 전투의 시작을 우레처럼 알렸다.
***
라몬 에란디스는 성의 맨 윗층, 집무실에 있었다.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종이들은 이미 결재를 마친 것과 결재를 기다리고 있는 것들로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장성한 성인 남자보다도 커다란 덩치의 노인이 화려한 의자에 앉아 펜대를 굴리는 모습은 어찌 보면 희극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그런 희극적 모습을 떠올릴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크흠.”
라몬 에란디스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60년 넘게 영지를 지키고 다스려온 영주는 오랜 기간 몸에 각인시켜놓은 마력과 마력 회로가 있었다. 웬만한 잡병은 그의 몸에 침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방금 느껴진 관자놀이의 통증은 정신적인 문제에 기인한다. 그는 잠시 펜대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뭉게구름이 지나가는 덕에 창문의 유리에 자신의 모습이 옅게나마 비쳐 보였다. 그 얼굴에서 피로와 슬픔을 읽혔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꾹 쥐었다. 아들의 목숨을 직접 취한 아비의 주먹이다.
설령 그 아들이 언젠가 자신이 다스려야 했을 영지의 사람들을 죽이고, 괴물로 만들고, 종국에는 고대의 괴물에게 넘기려 했다고 해도. 그가 아들을 죽인 아버지라는 사실은 죽을 때까지 벗겨지지 않을 것이었다.
라몬 에란디스는 가능하다면 죄책감을 관장하는 머리 부분을 잘라버리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것 자체에 자괴감을 느꼈다.
“평생 이고 가야 할 속죄지.”
그가 중얼거리던 그때, 쿵- 하고 굉음이 울렸다. 퍼뜩 고개를 든 라몬 에란디스는 그것이 마력을 다루는 자들이 부딪쳤을 때 울리는 마력의 파동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지체없이 집무실을 나왔다.
“무슨 일이냐! 습격인가?”
바로 달려온 기사는 눈에 핏발이 선 영주의 모습에 약간 당황했지만, 상황을 알리는 데 주저하지는 않았다.
“아닙니다. 러셀 경과 오크 카이가 연무장에서 결투를 하고 있습니다.”
“러셀 경과 카이가? 왜?”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검을 들고 하는 싸움은 아니고, 맨몸으로 박투를 벌이는 중입니다. 살기도 없었습니다. 아마 대련 형식의 결투로 보입니다.”
라몬 에란디스는 죽고 죽이는 싸움은 아니라는 것에는 안도했다. 하지만 마력을 다루는 전사들의 싸움은 그저 무기를 들지 않았다고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내려가 보겠다. 성내의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병사들은 부르지 마라.”
“알겠습니다.”
그는 연무장에 내려왔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구경꾼들이 있었다. 그처럼 굉음에 놀라 나온 사람들이었다. 라몬 에란디스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집무실에서 그가 느낀 마력의 파동은 이런 일반인들이 견딜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같았으면 이미 이 주변은 초토화가 되어 있어야 했다.
“영주님!”
“영주님이시다! 길을 비켜라!”
하인과 하녀들이 영주를 알아보고 분분히 자리를 비켜주는 가운데. 라몬 에란디스는 연무장에서 벌어지는 결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거인과 거인의 싸움이라 할 만했다. 러셀과 카이, 둘 모두 각 종족에서 한계에 이를 정도로 덩치가 커다란 자들이었다. 거기다 카이는 붉은 기운의 영향 때문인지 더 커져 있었다.
뻑! 뻐억!
살과 살이 아니라 두꺼운 가죽이 부딪치는 듯한 소리. 그러나 영주는 본래 이보다 더 큰 굉음이 울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영주의 궁금증은 바로 풀렸다. 앞에 투명한 막 같은 것이 보였다.
그 방어막은 러셀과 카이를 반구형으로 감싸고 있었고, 그 덕분에 구경하는 사람들의 고막을 터트리거나 몸을 날려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이 투명한 마력 막의 진원지는 분명했다. 러셀이었다. 그가 퍼트린 마력이 둘의 싸움에서 일어나는 굉음과 충격파를 막고 있는 것이었다.
“허.”
감탄한 영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처럼 이런 기예를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들은 그저 검은 머리 청년과 거대한 오크가 싸우는 것을 조마조마하게 쳐다봤다.
머릿수건을 두르고 앞치마를 맨 젊은 하녀들은 러셀이 맞을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반면 남자들은 전투 자체에 몰입한 듯 멍한 표정들이었다. 하인들은 물론이고 기사, 병사들마저 놀라운 전투를 보며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들은 감히 숨소리도 내지 못 한 채 거인들의 싸움을 지켜봤다.
***
카이의 몸이 움직였다. 붉은 기운이 실린 강맹한 주먹이었다.
뻐억!
러셀은 옆구리를 향해 날아드는 주먹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주먹이 쏘아지기도 전, 어깨가 잠깐 움찔하는 것만으로 카이가 어딜 노릴지 알 수 있었다.
그가 피하지 않은 건 맞아도 별 피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되도록이면 피하는 것이 좋으나 러셀은 이번 기회에 자신의 육체를 다른 방식으로 시험해보기로 했다.
이미 아침 식사를 마친 이후 4시간 넘게 검을 휘둘러 육체를 혹사시켰다. 전신의 근육은 아까부터 그만두라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허나 러셀은 고작 이 정도로 멈추고 싶지 않았다. 몸이 내지르는 약한 외침은 무시했다. 지금 필요한 건 강철을 제련하는 끊임없는 망치질이었다. 그리고 아주 훌륭한 망치가 눈앞에 있었다.
러셀의 옆구리를 직격한 카이의 주먹은 묵직했다. 그의 몸이 일순 바닥에서 떠오를 정도로. 지금 카이의 힘은 예전 검은 보리 향 여관에서 붉은 기운을 일으켰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잠깐의 체공 시간 중 러셀은 지금 카이의 힘이 자신보다 약간 더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 저 붉은 기운이 사그라들면 다시 줄어들 힘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놀랍기는 했다.
체공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순간에도 카이의 주먹이 덮쳐왔다. 러셀은 이번에 그 주먹을 팔뚝으로 막았다.
아직 공중에 떠 있었기에 러셀의 몸은 뒤로 확 밀려났다. 카이는 러셀이 밀려난 것을 놓치지 않고 크게 앞으로 나섰다. 거리는 충분했고, 카이의 근육질 팔은 길었다.
다음 공격이 연속적으로 찾아왔다. 러셀의 얼굴, 어깨, 가슴, 옆구리, 허리, 고간, 무릎, 정강이까지 전신을 난타하는 주먹질이었다.
카이의 덩치는 지금 러셀보다도 컸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작은 러셀의 몸에 내리꽂히는 일격들은 하나하나가 커다란 돌덩이가 날아드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헌데 러셀은 그것들을 마치 솜방망이인 것 마냥 맞고도 아무렇지 않아 했다. 맞으며 버티는 것도 있었고 팔뚝이나 손등, 까딱이며 작게 튼 움직임만으로 어렵잖게 주먹을 흘려내기도 했다.
카이는 숨이 차는 것을 느꼈다. 허나 그마저 붉은 기운으로 대체하며 연속해서 공격을 날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막상 공격을 받는 러셀의 신체는 더없이 평온하고 고요했으니까.
카이의 오른 주먹을 왼손등으로 흘려낸 러셀의 오른주먹이 카이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아까 러셀이 맞은 곳과 같은 부위였다.
러셀은 맞았을 때 신음도 내지 않았으나, 카이는 그럴 수 없었다. 당장 갈비뼈와 횡격막이 오그라들고 허파가 쪼그라들었다. 컥, 하고 헛숨이 토해졌다.
잠깐의 비틀거림. 러셀은 틈을 놓치지 않고 뒤돌아차기를 날렸다. 카이는 간신히 손바닥을 펼쳐 러셀의 발차기를 막아냈으나, 찬다기보다는 미는 것에 가까운 일격에 뒤로 열 걸음을 물러섰다.
카이의 양 주먹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러셀의 손이 멀쩡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허억, 허억, 허억.”
카이는 손마디를 붉은 기운으로 감쌌다. 금이 간 손마디가 천천히 아물었다. 허나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다시 부딪히면 부러질 것이다.
러셀도 손을 주억거렸다. 2주간 검은 막에 둘러싸여 있던 그의 신체는 단지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이전보다 더 마나를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뼈와 근육, 신경도 마찬가지. 무협 식으로 치면 약간의 환골탈태와도 비슷한 것 같았다.
무협 소설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피부가 벗겨져 새로운 피부가 생성되고, 뼈가 부러졌다 다시 맞붙었다는 등의 드라마틱한 효과는 없었지만.
이 정도만 하더라도 이전보다 더 강해질 수 있을 듯 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나와 마력에 대한 제어력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갔다.
지금 반구형으로 넓게 퍼트린 것이 그 예다. 예전에는 하지 못했던 짓거리지만, 지금은 가능했다.
그리고 언제나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성취감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쾌감이었다.
러셀은 씩 웃고는 몸을 날렸다. 미끄러지듯이 바닥을 스친 그의 신형은 일순 길쭉이 늘어지는 것 같았다. 카이는 다급히 팔을 들고 몸을 웅크렸다.
예견한 충격이 카이의 몸에 작렬했다. 예견했음에도 카이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러셀이 다시 달려들려는 찰나, 이번에는 카이가 먼저 몸을 일으키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난 불곰처럼 돌진해왔다.
“우어어엉!”
내뱉는 고함마저 불곰 같다. 부지불식간에 러셀은 카이의 양손에 허리가 잡혀 높이 들렸다가 그대로 연무장 바닥에 내리꽂혔다. 콰아앙!
“큭.”
등에서부터 전달된 막대한 충격에 작은 신음을 내뱉은 것과 동시에, 러셀의 마력 방어막을 뚫고 충격파와 굉음이 연무장을 휩쓸었다. 연무장 바깥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반구형으로 패인 연무장에서 카이가 연신 주먹을 날렸다.
주먹에 맞을 때마다 러셀의 고개가 옆으로 휙휙 돌아갔다. 그리고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는지, 카이가 깍지 낀 주먹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손에 막대하다 싶을 정도의 붉은 기운이 응축되었다. 누구라도 저 일격을 맞으면 가루가 되어버릴 것 같이 무시무시했다.
“이런!”
“영주님!”
지켜보던 영주와 기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 달려들려 했다. 그러나 카이의 공격은 그들보다 더욱 빨리 내려꽂혔다. 모두가 이후 이어질 피보라를 예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턱.
거대한 힘이 담긴 주먹에 맞은 것 치고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러셀의 한 손이 카이의 깍지 낀 주먹을 막은 소리였다.
“크, 흐아아악······.”
카이는 이를 악물고 근육질의 팔에 힘을 주며 어떻게든 그 손을 떨쳐내려 했다. 불가능했다. 고정된 것처럼 카이는 팔을 뺄 수 없었다.
카이는 주먹을 막은 러셀을 떨리는 눈으로 내려다봤다.
하늘에 짙은 구름이 흘러 햇빛을 가리고, 카이가 2차적으로 러셀의 마운트 자세로 올라타 가리고 있었기에 러셀의 몸은 그림자로 어두웠다.
그림자 속에서 러셀은 멍 하나 들지 않은 얼굴로 그를 조용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청색의 눈동자가 일순 마력을 받아 반짝였다.
쾅!
러셀의 다른 주먹이 인지할 수 없는 속도로 카이를 올려쳤다. 거대한 몸이 무색하게 카이는 붕 떠올랐다가 뒤로 떨어졌다.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일격에 카이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턱에 정통으로 맞은 듯 머리가 왱왱 울리고 시야는 현기증이 일어 제대로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결국 카이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구덩이에서 나온 러셀이 발걸음 소리를 내지 않고 카이의 앞에 섰다. 카이는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잡으려 노력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때 구름이 걷히고, 다시 햇살이 지상을 비췄다. 햇빛을 등으로 받는 러셀의 전면은 어두웠다. 카이는 아까처럼 그림자 속에서 형형히 빛나는 눈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내가 이겼냐?”
카이는 어느새 붉은 기운이 완전히 사그라든 것을 느꼈다. 신체는 다시 본래 모습으로 줄어들었다. 카이는 지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렇소.”
러셀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이는 흐, 하고 웃더니 그대로 앞으로 철푸덕 쓰러졌다. 한계를 넘은 충격에 기절해 버린 것이었다.
러셀은 퍼트려놓았던 마력을 회수했다. 싸움은 만족스러웠다. 상승한 신체능력, 마력 제어력을 확인할 수 있는 보람찬 시간이었다.
특히 마력 제어력은 그를 충분히 만족시켰다. 이스칼리아와의 전투에서 얻은 것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쓸만한 짐꾼도 얻었다.
“오늘만 같으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