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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82화 (83/225)

82화 해야 할 일들 (2)

러셀이 느끼는 라몬 에란디스 영주의 피로감은 단연 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닌 듯 했다. 하지만 그 정체까지 짐작하는 건 어려웠다. 그의 눈이 사람의 마음까지 꿰뚫어 볼 수 있게 해주는 건 아니니까.

영주는 러셀에게 원한다면 식당과 연무장 등 영주 성의 시설을 자유롭게 써도 좋다고 했다. 바라마지 않았던 일이다. 그는 약간 시간을 들이더라도 영지에서 몸의 상태 확인을 마치고 떠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하나였다.

“밥 좀 먹을 수 있겠습니까? 고기도 많이 먹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린 배가 아까부터 배고프다고 아우성이었다. 2주간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못했으니 당연했다. 그것도 러셀이니 지금 의식도 유지하는 것이지, 보통 같았으면 진작에 탈수나 허기로 죽었을 것이다.

영주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괜찮겠나? 갑자기 음식을 배에 넣으면 탈이 날 텐데.”

이블린도 맞장구쳤다.

“그래. 조금 쉬었다가 먹어. 지금 네 몸을 봐. 완전 말랐다고.”

오랜 시간 동안 제대로 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했기에 러셀의 몸은 전과는 달리 꽤 말라 있었다. 큰 키 덕분에 더 그렇게 보였다.

“난 괜찮아. 먹어도 돼.”

보통의 인간이라면 조금씩 몸조리를 하며 영양분을 섭취해야 할 것이다. 처음에는 죽이나 미음 같은 간편한 음식으로 위를 달래고, 그 이후 차츰 음식물의 양을 늘려야겠지.

하지만 태어나서 21년을 살아온 러셀은 알고 있었다. 이 몸이 얼마나 인간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는 것인지. 자신의 위는 그 정도로 망가지지 않는다. 술을 궤짝으로 처넣어도 멀쩡했던 것이 러셀의 몸이다.

“정말 괜찮겠나?”

“걱정에 감사드립니다만, 제 몸은 제가 잘 압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영주는 러셀의 부탁을 들어줬다. 그는 러셀의 방에 요리를 가져오라고 지시하려 했지만 러셀은 직접 식당에 가서 먹겠다고 하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이 자가 러셀이라네. 날 대하는 것처럼 만들어주게.”

“알겠습니다, 영주님.”

주방장 반스는 소문의 남자가 생각보다 마른 것에, 그리고 약해 보이는 것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얼굴은 쉼없이 달궈지는 후라이펜 앞에선 땀 흘리는 얼굴이 되었다.

식당에 페일과 아엘라시스는 없었다. 아마 밖으로 나간 듯 했다.

러셀은 성인 남성이 하루에 먹는 양의 세 배를 먹고 나서야 식사를 그만뒀다. 맞은편에서 같이 밥을 먹던 이블린이 질린 얼굴로 물었다.

“그렇게 먹었는데 배가 안 터져?”

“응.”

정말 그의 배는 튀어나온 구석도 없었다. 이블린은 그의 위장이 허수 공간으로 이뤄져 있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러셀.”

“응?”

“나, 그 아이에 대해서 알아.”

컵에 담긴 물을 마시던 러셀이 이블린을 바라봤다. 여기서 그 아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아엘라?”

“어? 어. 아엘라시스. 저번에, 그러니까 2주 전에 그 전투에서 알게 됐어.”

“어떻게?”

“그······ 입에서 광선 같은 걸······. 뿜는 걸 도와줬거든. 지라크는 네 위치를 찾는데 도움을 줬고.”

“맞아. 지라크는 어디 있지?”

“아, 그 말을 깜박했네. 영주의 요청으로 영지 외곽을 돌면서 남은 괴물들은 없나 수색 중이야. 네가 깨어났다는 걸 들었으니 빨리 찾아오겠지.”

“그렇군. 그건 그렇고, 네가 용의 숨결을 뿜는데 도움을 줬다고?”

이블린은 쌍심지를 켰다.

“왜 이래? 나도 전도유망한 마녀라고.”

하긴. 러셀은 꽤 예전, 칼리스덴에서의 전투를 떠올렸다. 성곽 위의 전투에서 이블린은 다른 마법사, 마녀들과는 다른 기량을 선보였다.

다른 마법사들이 두 가지 이상의 주문을 하는 것도 쩔쩔매는 와중에 그녀는 불덩이를 날리고 성곽을 오르는 괴물의 머리를 터트리면서 동시에 치유 주문도 구사할 수 있었으니까.

거기다 용족 카루곤의 마법에서도 그녀만이 방어막을 넓게 펼쳐 다른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뭘 어떻게 도와줬는데?”

“마력의 집중, 응축, 꿰뚫는 성질을 부여해줬지.”

러셀은 이블린의 말을 들으면서 그녀가 뭘 도와줬는지 알게 됐다. 평상시의 용의 숨결을 뿜었다면 방사형으로 나갔을 것을, 그녀의 도움으로 곧은 일직선의 광선으로 조형할 수 있게 된 모양.

이블린은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목숨을 살린 데는 나도 지분이 있는 것 같은데?”

러셀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마워.”

이블린은 러셀의 말투가 이전보다 편해졌음을 알아차렸다.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다 문득 해야 할 말이 있음을 상기했다. 이블린이 러셀에게 말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뭐야? 어떻게······.”

이블린은 잠시 주위를 살펴 사람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작게 말했다.

“용을 데리고 다니는 거야? 그것도 그렇게 어린 용을.”

“내가 그 도시에서 뭐와 마지막으로 싸웠는지 잊었나?”

이블린은 입을 벌렸다.

“그럼 진짜.”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용의 자식이야. 나한테 부탁해서 데리고 있는 중이지.”

“세상에.”

이블린은 한 번 더 말했다.

“세상에.”

“그렇게 놀랄 일인가?”

“그럼 안 놀라게 생겼어? 용이라구. 수백 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에 자취를 감춰버린 용. 안 그래도 내가 그것 때문에 칼리스덴 가려고 개고생하고, 겨우겨우 비늘 얻어도 대학에선 인정받지도 못했었는데······. 만약 사람들이 알면 발칵 뒤집힐걸. 어쩌면 용족들도 찾아올지도 모르고.”

“용족들이라.”

러셀은 생각에 잠겼다. 용족의 수가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았다. 칼리스덴에서 카루곤이라는 드라칸과 만나고 싸운 이후로는 여행하면서 한 번도 만나지 못했으니.

‘기후와 연관이 있나?’

카루곤의 외견은 파충류와 비슷했다. 물론 완전한 파충류는 아닐 것이고, 변온동물도 아닐 것이다. 그래도 아예 연관이 없지는 않을까, 하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어쩌면 여기보다 더 아래, 남쪽에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보다도 네가 알아둬야 할 게 하나 있어.”

“뭔데?

”장로님······. 루넬바스 님이 뭔가 알아차린 것 같아.“

”아엘라?“

”응.“

그건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러셀은 그 꼬장꼬장한 노인을 떠올려보았다. 짧게 친 흰 머리와 수염. 얼마나 표정을 찌푸리고 다녔는지 미간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었다.

”아엘라한테 접근했어?“

”아직은. 걔는 워낙에 네 주위만 빙빙 돌고 있으니까 다가서기 어려웠을 거야. 거기다 마법사들은 모두 영주님의 요청으로 파괴된 영지민들의 집이나 건물을 복구하는데 동원돼서 더 힘들었을 거고.“

러셀은 예상치 못한 영주의 도움에 슬쩍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군. 알려줘서 고마워.“

”어? 어, 어.“

신경 써야 할 일이 늘었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러셀은 걱정을 일으키는 쪽이지 그 반대가 아니었고, 그건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그럼 먼저 일어나지.“

”어디 가게? 안 쉬어?“

”먹었으니 이제 운동해야지. 몸 상태가 말이 아니야.“

이블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사들이란. 연무장은 식당 뒤로 돌아가면 있어.“

러셀은 고개를 끄덕이고 식당을 나섰다. 겨우 조리에서 해방된 주방장이 지친 얼굴로 그를 배웅했다.

”식사 잘 했소.“

”하하, 다행입니다. 정말 잘 드시더군요.“

그리고 러셀은 주방장에게 잊을 수 없는 부탁을 남겼다.

”그럼 앞으로도 지금처럼 부탁하지.“

”네······. 네?!“

턱, 턱 하고 그의 어깨를 두드려준 러셀은 식당을 빠져나갔다. 주방장 반스는 옆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앞으로도 이렇게 먹을 거라고······?“

***

러셀은 성 내의 연무장에 있었다. 말랐던 몸에는 벌써 살이 차올랐다. 사흘 전보다는 훨씬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그는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일정한 호흡을 반복했다. 러셀의 훈련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독특하게 보일 것이다.

연무장 주변에 먼지바람이 일 정도로 폭풍같이 빠르게 전신을 움직이며 가상의 적을 베다가도, 점점 속도가 느려져 종국에는 움직이나 싶을 정도로 조용해지는 것이다.

빠르게 몸을 움직이는 것은 보통 기사들이나 병사들도 납득 할만한 수련법이다. 전장에서도 연습할 때처럼 비슷하게 움직일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빠름과 정확함. 어떤 상황에서도 중요시 되는 항목이다.

상반신을 탈의하고 바지만 입고 있는 그의 몸에는 땀이 번들거렸다. 빠르게 움직일 때보다도 지금이 더 많은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몸에 새로 받아들인 마나를 마력으로 정제하고, 그 순도와 양을 높이는 작업이다.

가만히 앉아서 호흡과 함께 내면을 돌아보는 것도 도움이 될 테지만, 러셀은 일어나서 운동을 하는 것을 택했다.

그가 서 있는 연무장의 바닥은 이미 그가 흘린 땀으로 젖어 있었다. 전신의 근육들은 이제 그만 좀 하고 쉬자고 아우성을 질렀다. 하지만 러셀은 그 요청을 무시하고 다시 대검을 휘둘렀다.

2주 만에 쥐게 된 검은 이전과는 다른 무게를 지닌 듯 했다. 더 무거워진 것 같기도, 혹은 가벼워진 것 같기도 했다.

러셀은 전투 이후 바뀐 몸의 상태를 체감 중이었다. 2주 동안 느슨해져 있던 근육은 언제 그랬냐는 듯 팽팽해졌다.

발디딤 하나하나, 허리를 트는 각도 하나하나, 어깨와 팔꿈치, 그리고 끝의 손목과 손에 쥐여져 있는 나힐니르의 검끝을 움직이기까지.

초가 아니라 분 단위로 세야 마땅한 움직임이 거기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본다면 왜 저런 이상한 자세로 허공을 찌르고 있는 건지 의아하게 볼 것이다.

러셀은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고 왼발로 뒤를 받친 다음, 허리는 숙이고 상체는 꼿꼿이 세워 양손으로 잡은 대검을 앞으로 쭉 뻗은 자세였다.

근육이 부들부들 떨리고 머리에는 고통이 작렬했지만, 러셀은 그 동작에서 다음 동작으로 아주 천천히, 그러나 끊어지지 않고 이어가고 있었다.

동적이 아니라 정적인 움직임 속에서 신체의 통제는 더 빛을 발하는 법이다. 빠르게 앉았다 일어나기를 하는 것보다 느리게 앉았다 일어나는 것이 힘든 건 당연한 일.

그리고 러셀은 이전보다 확연히 통제하기 쉬워진 육체를 보며 이전보다 얼마나 강해졌는지 가늠해 보았다.

쉽지 않았다. 2주간 검은 막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그가 죽지 않을 수 있던 것은, 자신의 어머니나 그 비슷한 것으로 추정되는 존재가 마나를 불어 넣어주었기 때문이었다.

궤를 달리하는 자신의 몸뚱아리는 그것만으로도 죽지 않았다. 근육이 좀 빠지긴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라고 2주나 가만히 누워있을 거라고는 예상했겠는가.”

러셀은 팔과 손목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사흘 전 일어났을 때보다는 많이 두꺼워졌지만 역시 원래의 몸보다는 가늘었다.

사흘간 주방장을 실신하게 만들 만큼 많은 양의 음식을 먹어도 그게 바로바로 살과 근육으로 만들어지진 않는다. 그래도 살인적에 가까운 그의 훈련 덕분에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몸을 만들고 있기는 했다.

또 나쁜 일만 있던 것도 아니다.

마력의 질과 양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했다. 강렬한 전투는 필히 정신적, 육체적 고양高揚을 부르고, 또 마나를 부른다.

마나는 그러한 전투의 과정 속에서 전사에게 녹아들어 더 강력한 육체와 마력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준다. 지금 러셀의 육체는 그 과정에 있었고, 앞으로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임을 알았다.

적당히 몸을 만들고 나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출력을 뿜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스칼리아와의 전투 이전의 자신과 비교해보면 어떨까. 러셀은 아마 스무 합 이내에 결판이 나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지금 자신의 승리일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가정형인 것은 전투의 승패는 단연 서로간의 실력으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력이 구십 퍼센트를 차지하지만, 나머지 십 퍼센트 차이로도 얼마든지 승부는 날 수 있다.

자신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전날 밤 잠들기 전에 ‘꼭 아침 6시에 일어나야지!’하고 다짐해도 막상 그 시간이 되면 ‘조금만 더 자자’, 하고 타협하기 마련이니. 꼭 그런 스스로와의 약속이 아니어도 매 순간 사람은 자신과 싸우며 이기고 지고를 반복한다.

‘상태창이란 게 있으면 편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한 러셀은 입꼬리만 당겨 웃었다.

몸이 약한 그가 할 수 있는 취미 생활은 많지 않았다. 돈을 벌 때, 그리고 여행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을 때면 그는 게임을 하거나 소설을 읽었다. 그 외에 할 수 있는 취미도 많지 않았지만.

그는 다 때려 부수는 주인공을 좋아했다. 게임에서는 꼭 남자 전사를 골랐고, 소설에서도 힘으로 밀고 나가는 주인공을 좋아했다.

마법을 쓸 수 있음에도 검을 놓지 못하는 것은 그런 기저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본래라면 휘두르기는커녕 들지도 못했을 쇳덩이를 마음껏 다룰 수 있다는 감각은, 직접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감각이었다. 그리고 러셀은 그 감각이 좋았다.

어쨌든 그는 상태창이란 것이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생각했다. 직관적이니까.

소설에서도 상태창이란 요소는 주인공과 적들의 강함을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편리한 것이다.

거기다 나만 상태창이 있고 볼 수 있는데, 상대방은 없다면 그만큼 알기 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정보의 우위는 곧 힘의 우위인 법.

하지만 여긴 또 다른 현실이고, 게임 시스템이 관여하는 것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나 괴물들은 잘 짜인 인공지능, 혹은 NPC가 아니었다. 머리와 심장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명들이었다.

그리고 러셀 또한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한 명의 사람이었다. 그 속에 담긴 것은 좀 이질적일지 몰라도.

그때 묵색의 대검, 나힐니르의 검 끝에 나비가 앉았다. 그만큼 그의 동작이 느리다는 증거였다. 러셀은 나비가 날아가지 않게,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나비를 바라보며 그는 일전에 치뤘던 전투를 상기했다. 집을 나서고 나서 지금까지 이 정도의 강함이면 그럭저럭 여행을 하는 데 큰 무리는 없다고 여겨왔다.

태어날 때부터 강건했던 육신과 뛰어난 재능, 그리고 마안이라는 기이한 힘을 지닌 눈까지. 그래서 러셀은 홀로 모험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 이스칼리아와의 싸움은 아엘라시스가 없었다면 지거나,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경각심을 새겨주었다.

그리고 무저갱에서 만난 존재 또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세상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고, 대비해야 한다는.

그건 그 혼자로서는 상대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난이나 적들이 나타난다는 경고일 것이다. 이번에 아엘라시스의 용의 숨결이 아니었다면 위기를 헤쳐나가지 못했던 것처럼.

그 사실은 그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때 누군가 러셀에게 말을 걸었다.

“신기한 동작이군. 그렇게 느리게 움직이는 게 훈련이 되오?”

러셀은 미세하게 움직이던 동작을 멈추지 않고 눈만 돌렸다. 그의 시야에 말을 건 사람이 들어왔다.

러셀과 필적하는 덩치에 울퉁불퉁 드러난 갈색 피부의 근육. 거기다 언뜻언뜻 드러나는 검은 문신들. 드러난 정수리와는 다르게 뒤로 길게 땋아져 있는 머리카락.

검은 보리 향 여관에서 처음 만나 신나게 얻어터졌던 오크, 카이였다.

“그래.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지.”

“어째서 그렇소?”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이니까.”

러셀은 자세를 풀고 머리카락을 털었다. 칼에 앉아있던 나비가 날개를 저편으로 훨훨 날아갔다.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이 햇빛에 땀방울을 튕기며 반짝였다.

“여기 있습니다, 러셀 님.”

저편에서 수건을 들고 대기 중이던 지라크가 달려와 수건을 건넸다. 그의 피로 다시 생명을 얻은 지라크는 햇빛 아래서도 멀쩡했다.

그만큼 산 자의 피를 통해 생명력이나 마력을 전처럼 얻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그는 다시 살아나고 러셀을 주인으로 모실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행복해 보였다.

러셀은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닦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다. 머리는 감고 다니지?”

“······그날부터 빠짐없이 감고 다니고 있소. 그쪽이야말로 감아야 할 것 같은데.”

이 새끼 봐라. 러셀은 피식 웃었다.

“나한테 용건이 있는 것 같군.”

“그렇소.”

카이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러셀은 문득 그의 어금니 한쪽이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러셀이 부러트렸던 어금니는 강철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나, 카이 그란손. 러셀, 당신에게 전사의 대화를 청하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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