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81화 (82/225)

81화 해야 할 일들

이루실은 남동생을 사랑했지만, 모든 걸 이해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의 남동생은 어릴 적부터 좀 별난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어린 나이에 맞지 않은 영특한 말과 행동거지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궁금증이었다. 일단 태생부터가 그러했다. 자신이 6살 때 아버지는 일주일간 실종되었었고, 다시 나타났을 때는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이루실은 아직도 그 갓난아기를 처음 보았을 때를 잊지 못한다. 삭풍이 부는 추위의 계절 속에서, 그 아기는 포대에 감싸인 채 잠들어 있었다.

안아봐도 돼요? 이루실이 물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그 아기를 들려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아기는 가볍고, 따스했다. 여섯 살의 이루실은 품에 가득차는 아기를 안고 어쩔 줄을 몰랐다. 볼은 빨갛고 작은 손은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가 오동통했다. 이루실은 자신의 손보다도 훨씬 작은 그 손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그러자 아기의 작은 손가락들이 움직이며 이루실의 검지를 꼭 잡았다.

그때 아기가 눈을 떴다.

보석같이 찬란한 그 자청색 눈동자를 마주보며, 또 아기의 손에 잡힌 자신의 손가락을 느끼며 이루실은 지금 이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 어린 나이에도 알았다.

아기는 자신을 보자마자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우렁차게 울고 말았지만.

이후 러셀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동생과 어울려 다니고, 여러 사고를 치거나 해결하는 와중에 한 소망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피어났다. 오래도록 이 아이와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을.

그리고 자신은 지금 이 외진 마을, 이름 없는 여관의 작은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루실은 편지 한 장 달랑 남겨놓고 온 집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아마 아버지는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작은 문제는 그녀의 어머니였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이미 승계식은 마무리되었고, 가주의 후계 자리는 자신에게 돌려져 있다. 그녀의 친동생들은 아직 어리다. 가장 큰 경쟁자는 러셀이었지만, 그 스스로가 가주 자리에 질색을 하고 아예 집을 나가버렸다. 어머니가 따로 보낸 기사들이 오지 않은 것을 보니 이번 일탈은 허락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남은 것은 그녀가 사랑하는 남동생을 만나고, 다시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아니, 꼭 당장 데려가지는 않아도 될지 모른다. 계절은 이제 막 봄이 된 참이고 겨울이 오기까지는 멀었으니까.

혼자서 하는 여행은 재미도 없고 지루하지만 그와 함께 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감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보고 싶다.”

잠깐 이루실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다 방금 들린 말이 자신이 내뱉은 말이라는 것을 알고 실소를 흘렸다. 깊은 속내가 저도 모르게 뛰쳐나온 것일까.

“보고 싶다.”

한 번 더 그리 말한 이루실은 눈꺼풀을 닫았다. 암흑이 찾아왔다. 암흑 속에서 그녀는 한 쌍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 보석 같은 눈을 보지 못 한지 너무 오래되었다. 비가 바닥을 때리는 아스라한 소리가 벽 너머에서 들렸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세상은 옅은 물안개에 감싸여 있었다. 밤새 내린 비가 만들어낸 자욱한 흰 안개였다.

이루실은 짐을 챙기고 홀에 내려왔다. 홀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비를 걸었던 용병들은 떠난 것인지, 아니면 아직 방에서 나오지 않은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눈곱도 채 떼지 못한 눈으로 바닥을 쓸던 중노미가 홀에 내려온 이루실을 보더니 황급히 얼굴을 쓸었다.

“아, 안녕하세요. 간밤에는 잘 주무셨습니까?”

“덕분에. 아침 식사 될까?”

“물론이죠! 바로 준비해오겠습니다.”

중노미가 부엌으로 사라지고, 이루실은 어제 앉았던 자리에 똑같이 가방을 두고 앉았다.

아침이라 쌀쌀했지만 그녀는 이보다 더 추운 북부에서 내려온 사람이었다. 오히려 체감상으로는 따뜻하다고도 느끼고 있었다. 그때 계단에서 다른 사람 하나가 내려왔다. 어제 이루실에게 먼저 말을 걸었던 여행자 내지 모험가로 짐작되는 남자였다.

그는 홀에 홀로 앉아있는 이루실을 보더니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일찍 일어나셨군요.”

“그래.”

대화를 거부하는 짤막한 대답은 남자를 무안하게 만들었지만, 그는 곧 개의치 않고 이루실의 옆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그도 아침 식사를 주문했다.

머지않아 끓인 지 얼마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스튜와 베이컨, 삶은 달걀 등이 얹어진 그릇이 식탁에 올려졌다. 어제처럼 이루실은 재빠르게 아침을 해치웠다. 그걸 보고 있던 남자도 허겁지겁 아침 식사를 마쳤다.

이루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내내 부엌에 있던 여관 주인과 중노미가 나와서 배웅했다.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금화를 준 손님이라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거기다 어제 크게 일어날 뻔 했던 소란도 잘 넘어가지 않았는가.

“잘 먹었어.”

“예! 안녕히 가십시오!”

중노미가 건네주는 말 고삐를 건네받은 이루실은 가방을 안장 옆에 매달고는 여관을 떠났다. 그때, 그 뒤로 입가에 묻은 국물 자국을 급하게 지우며 남자가 따라붙었다.

“어휴, 엄청 빨리 드시는군요.”

“뭐지?”

“아, 저도 남쪽으로 가는 길입니다. 저번에 아래쪽 영지 어디에서 던전인지, 유적인지가 발견되었다는 말을 들어가지고요. 자세한 건 가까이 가 봐야 알겠습니다만.”

“그래서 날 따라오겠다고?”

“혼자서 하는 여행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어제 보여주신 모습을 보면 충분히 혼자서도 가능하신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말동무가 있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저 이래봬도 요리도 웬만큼 하고, 칼질 솜씨도 나쁘지 않습니다. 아, 그리고 길도 꽤 잘 보는 편입니다.”

이루실은 자신을 소개하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어제는 보는 둥 마는 둥 해서 스쳐 지나가듯 보고 바로 기억에서 잊어버린 얼굴이었다.

반짝이는 금발과 푸른 눈. 그녀의 검은 머리만큼이나 드문 특징들이다. 거기다 얼굴도 그럭저럭 생긴 것이, 말투나 행동만 교정하면 어디의 귀족 자제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다 어제 맥없이 물러났던 것에 비하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권유.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남자의 이마와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작은 땀방울이 보였다. 긴장한 것일까.

이루실은 마지막 말에서 조금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녀는 지도나 길을 잘 읽지는 못하는 편이었다. 눈이 나쁜 것이 아닌데도 막상 길을 걷기 시작하면 지도에 표시된 것과는 전혀 다른 장소에 도착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직전 들렀던 작은 마을도 주위를 빙빙 돌다가 겨우 발견한 마을이었으니. 만약 어제도 마을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오랫동안 굶은 그녀의 말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루실이 말했다.

“같은 방향이라니 뭐라 할 수는 없지. 마음대로 해. 되도록 말은 걸지 말고.”

남자는 그것만으로도 족한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아, 알겠습니다. 제 이름은 파렐스입니다.”

“이루실.”

공기 중에는 비 냄새와 차가운 새벽 공기가 공존했다. 마을의 남쪽으로 향하는 곳에는 숲이 가로막고 있었다.

꽤 규모가 있는 숲이라 빙 둘러 가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듯 했고, 그래서 이루실과 파렐스는 숲으로 들어섰다.

숲속에도 길이 없는 건 아니다. 들짐승이 낸 길이든 사람이 낸 길이든, 오랜 시간 발자국이 남은 길은 옅게나마 그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었다.

“이쪽입니다. 여기 길이 있군요.”

‘괜찮은데.’

이루실은 파렐스가 따라오게 놔둔 결정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단 그녀라면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길잡이의 필요성을 슬슬 인식하고 있던 시점이기도 했다.

어두운 숲속은 간신히 시야가 확보될 정도였다. 해가 떴지만 옅은 비구름들이 아직 하늘 곳곳에 남아있었고, 숲의 나무들이 드리운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촘촘히 천장을 치고 있었기에 그랬다.

밤새 내린 비 덕에 축축한 흙바닥은 밟을 때마다 비 내음과 풀향을 짙게 풍겼다. 사위는 옅은 물안개가 하얗게 떠다녔다.

하얀 배일 같은 안개가 나무 사이사이를 감싸며 돌아다니는 모습은 언뜻 몽환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현실은 세 발의 화살로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파렐스는 볼을 스치고 간 화살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엎드렸고, 이루실은 번개 같은 몸놀림으로 허리춤의 칼을 뽑아 화살을 튕겨냈다.

하지만 말은 화살을 그대로 정수리에 맞고 말았다. 말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죽었다. 이루실은 옆에 쓰러진 말을 내려다보다가 안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시선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솜씨가 더 좋으시군. 쇠뇌 화살도 튕겨내다니.”

“뭐, 잡기 어려운 사냥감일수록 잡고 나서 더 큰 성취감이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대장?”

“그건 그렇지.”

말을 걸며 나타난 자들은 어제 여관의 패거리들이었다. 죄다 한 덩치 하는 남자들은 모두 여덟명.

하나같이 무장을 했고, 그중 셋은 쇠뇌를 들고 있었다. 쇠뇌를 들고 있던 자 한 명이 다른 남자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야 이 병신아, 저런 놈 하나 못 맞추냐!”

“시발, 안개가 이렇게 심한데 어쩌라고!”

“난 맞췄잖아!”

“말이 사람보다 큰 건 당연한 거 아니냐, 시발아?”

패거리의 수준을 알 수 있게 만드는 대화였다. 맨 처음 말을 했던 패거리의 대장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더니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지금 내가 얘기하고 있는 거 안 보이냐! 다 닥쳐!”

부하들은 닥쳤다. 그때 이루실이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무슨 짓이긴. 내 부하 손을 으스러트린 죗값을 받아내는 짓이지.”

뒤편에서 손에 붕대를 감은 도적 하나가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다른 손에는 큼직한 칼이 쥐어져 있었고, 옆에는 어제 그녀에게 맞았던 놈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닐 테지.”

“물론, 겸사겸사 그 몸뚱이와 돈도 받아내야지. 밤에 잠 못 이루느라 혼났다고.”

그리 말하는 대장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음심과 탐욕이 엿보였다. 이루실이 물었다.

“왜 여관에서 덮치지 않고?”

“귀찮아지잖나. 우리는 순찰대들에게 쫓기고 싶지 않거든. 여기 숲을 보라고.”

대장은 숲을 안으려는 듯이 양팔을 펼쳤다.

“누구 하나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곳이지. 저번 임무에서 우리 애들이 많이 굶주렸어. 안 그래도 도시에 들리면 허리띠부터 풀 생각 만만이었는데, 이렇게 일찍 미인을 안겨주다니. 이번 주는 운수가 그득한 한 주구만.”

여지껏 엎어져 있던 파렐스가 분노를 숨기지 않고 일어나 외쳤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당신들이 그러고도 사람입니까!”

“그럼 사람이니까 이런 짓도 할 수 있는 거지. 너 병신이냐?”

졸지에 도적놈들에게 병신 취급을 받은 파렐스가 칼을 촹 뽑았다. 손질을 게을리하지 않았는지 칼날에는 서늘한 푸른 빛이 흘렀다.

“돕겠습니다, 이루실. 함께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겁니다.”

“필요 없어.”

“이루실!”

파렐스를 무시한 이루실은 칼을 뽑아든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거의 무방비하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걸어오는 그녀를 보며 때로는 용병, 때로는 도적이 되는 야인들이 흉한 미소를 지었다.

“얼굴은 상처나지 않게 해라. 사지는 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난 없는 게 더 좋던데.”

“너도? 나도.”

끔찍한 대화들에 파렐스의 얼굴이 희게 질렸지만 이루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대장이 쇠뇌를 장전한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부하들은 쇠뇌를 이루실의 팔다리에 겨눴다. 퉁, 하고 방아쇠가 당겨지자 당겨졌던 시위가 풀리며 화살을 쏘아냈다. 이루실은 그 화살들을 막지 않았다. 어느 순간, 훅 하고 사라졌다.

“어?”

상황을 파악 못 하던 도적 중 하나의 몸이 대각선으로 갈라졌다. 푸확, 하고 엄청난 양의 핏불이 허공을 물들였다.

“뭐야! 어디 간 거야!”

“뭉쳐! 야! 뭉치라고 새꺄!”

일곱 명 남은 도적들이 다급히 서로를 향해 모여들려 했다. 그때 하얀 안개 속에서 무언가가 도적 하나를 낚아채 끌어당겼다.

“우아악!”

단말마를 내지른 용병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뭔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가죽 찢어지는 것과 비슷했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무시무시한 비명도 같이 터져 나오다가 뚝 그쳤다.

도적들은 끌려간 자의 바닥에서 뭔가가 흘러오는 것을 보았다. 빗물에 배부른 땅이 마시지 못한 핏물이었다.

대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어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그들의 몸울 숨겨주고 기습하게 도와주었던 안개는 이제 적이 되어 그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사냥감이라 생각했던 미인은 이제 그들을 사냥하는 포식자가 되어 공포 속에서 그들을 낚아챘다. 단칼에 죽이는 것도 아니었다.

절망을 새겨주겠다는 듯 잘근잘근 행해지는 죽음. 비명만 들으면 고문과도 같았다. 허나 흰 안개 때문에 어떻게 죽는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직 귀로만 찢어지는 소리, 끊어지는 소리, 와드득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처절한 비명만이 들렸고 그 소리들은 머릿속에서 증폭되어 메아리쳤다.

그리고 대장은 어느새 자신 혼자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음을 깨달았다. 하나하나 부하들이 사라지더니 그가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었다. 그의 뇌리에는 한 가지 문장만이 계속해서 떠다녔다.

‘좆됐다, 좆됐다, 좆됐다, 좆됐다······.’

그는 좆된 것이 맞았다.

대장은 모든 이들이 돌이킬 수 없는 낭떠러지에서 흔히 하는 생각, ‘언제부터 일이 잘못되기 시작한 거지?’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대개 자신이 살아온 궤적과 맞닿아 있는 경우가 많다.

대장의 몸이 덜컥 떨렸다. 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오른 무언가가 그를 꿰뚫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사슬들이었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력으로 이뤄져 있는 사슬들.

“끄아아아아!”

사슬들은 하나 같이 급소를 피한 곳 만을 꿰뚫고 있었다. 대장은 팔과 다리에도 감기는 사슬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곧 그는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박제된 곤충 같은 꼴이 된 그의 앞에 이루실이 나타났다.

“사, 살, 려······. 잘못······.”

이루실은 다 듣지도 않고 사슬들에 힘을 줬다. 소름끼치는 소리가 나고, 인간이었던 고깃덩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파렐스는 덜덜 떨면서 그 모든 것들을 지켜보았다. 안개는 이제 붉게 물들었다. 사위는 조용했다. 벌레 울음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루실은 죽은 말의 안장에서 가방을 들어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말의 눈을 감겨줬다. 파렐스는 그 모습에서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동족들을 잡아먹은 맹수가 어린 초식 동물을 보내주는 듯한 신기한 광경.

“어디로 가야 하지?”

목소리는 평온했다. 파렐스는 침을 한 번 삼키고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면 될 겁니다.”

“안내해.”

“아, 알겠습니다.”

파렐스는 뒤편에 무시무시한 괴물을 두는 기분을 느끼며 길을 따라 걸었다.

그들이 떠나고 난 자리에는 육편과 붉은 피만이 남았다. 곧 피 냄새를 맡은 곤충과 들짐승들이 다가와 예상하지 못한 만찬을 즐겼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아직 걷히지 않은 안개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활발하게 일어났다.

***

러셀이 깨어났다는 소식은 금방 성 내에 퍼졌다. 영주 성의 사람들은 모두 이 2주 넘게 깨어나지 않았던 남자가 영지를 구원해준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이블린, 레메론과 페일 등이 찾아왔다. 이블린은 안 그런 척 했지만 눈가가 조금 빨갰다.

“에이씨. 너무 늦게 일어났잖아. 우리 이모님이랑 장로님 막는다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고맙다.”

레메론은 그의 손을 붙잡으며 기뻐했다.

“이야, 일어나셔서 다행입니다. 아, 이거 받으십쇼.”

레메론은 러셀에게 코트를 건네줬다. 러셀은 코트를 받아 입었다. 익숙한 감각이 찾아왔다. 코트 안주머니의 아공간도 무리없이 작동했고, 안에는 나힐니르와 마지막 서리가 들어 있었다.

“당신을 덮고 있던 검은 막이 사라진 걸 제일 먼저 발견한 게 저였거든요. 그때 가슴팍에 고이 접혀져 있더군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 전에 제가 보관하고 있었죠.”

“고맙군.”

“뭘요.”

아직 러셀과 그렇게까지 친하지 않은 페일은 고생했다고 한마디 하고는 아엘라시스와 밖으로 나갔다.

아엘라시스가 러셀이 일어날 때까지 거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해서 먹이러 간다고 했다. 저번 검은 보리 향 여관에서 같이 술을 마시고 난 후부터 둘은 썩 잘 맞는 듯 했다.

라몬 에란디스 영주는 2주간 가열 차게 영지의 상황을 정리하고 영지민들을 다독였다. 그리고 곧바로 장례식 겸 축제가 열렸고, 막 마무리가 된 시점이었다.

영주는 러셀을 영지의 구원자라고 대대적으로 공표하고 싶어했지만 러셀이 거부했다. 이미 축제도 다 지난 마당에 무슨. 영주는 뭔가를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겠네. 그래도 성 내에서 쉬어주지 않겠나? 바로 떠날 것은 아니지?”

아니었다. 일단 전투 이후 늘어난 마력의 질과 양을 가다듬어야 했다. 거기다 암흑 공간, 무저갱에서 만났던 정체불명의 존재와의 대화, 그의 눈, 그리고 붉은 구슬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했다. 2주간 늘어져 버린 몸 상태는 또 어떤가. 해야 할 것이 많았다.

“다행이군. 푹 쉬게나. 이번 일에 대해서도 그렇고, 내 개인적으로 자네한테 주고 싶은 것들도 그렇고. 해야 할 얘기가 많네.”

“알겠습니다.”

문득 러셀은 이 늙은 영주의 얼굴에서 숨길 수 없는 피로감을 읽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