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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79화 (80/225)

79화 봄비

이럴 수가. 러셀은 눈을 의심했다. 이 몸으로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의 눈앞에 소녀가 서 있었다. 아니,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래서 올려다보고 있는 것일까.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 속에서 방향감각과 공간감의 상실은 당연했다. 하지만 러셀은 그런 것보다도 다른 이유에서 소녀에게 경악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바로 앞에 소녀가 서 있음에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몸의 윤곽조차도 그러했다.

계속해서 풀어헤쳐지는 잉크 자락처럼 소녀의 몸은 어둠 속으로 풀려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소녀는 계속해서 그 자리에 존재했다.

러셀은 떨리는 눈으로 소녀의 얼굴을 보고자 했다.

분명 이목구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얼굴은 흐릿했다. 그 흐릿함은 지금의 그에게는 아주 낯선 것이었지만 동시에 익숙한 것이었다.

낯설면서 동시에 익숙하다는 감각의 흐릿함은 전생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전생의 그는 눈이 나빴다. 마이너스 8에서 9는 되었을 것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꼈던 안경은 도수가 점점 두꺼워지기만 할 뿐 줄어들진 않았다.

잃은 시력을 되찾는 방법은 인공적인 시술밖에 방법이 없으나 그에게 그런 수술을 할 돈은 없었다.

그에게 안경은 세상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창구였다. 그것이 없으면 그는 불투명과 흐릿함, 빛의 착란과 사물의 불분명함만 보아야 했다.

인간은 감각의 80% 이상을 시각에 의존하고 있다. 그만큼 본다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무척이나 중요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불가결인 감각이다. 사람들에게 다른 감각과 시각의 포기 중 무엇을 고를 거냐고 묻는다면 아마 대다수가 시각 외의 감각을 포기할 것이다.

지금 러셀의 눈은 그때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성능을 가지고 있다. 보이는 것이 더 잘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것, 또는 볼 수 없어야 하는 것 또한 볼 수 있다.

이를테면 피부 안쪽의 것이 그랬다. 사람의 겉뿐만 아니라 그 속까지 보인다는 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크나큰 장해물이 된다.

아름답든 못생겼든 미추의 구분은 골격과 피부의 형태, 이목구비의 배치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그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그 속의 뼈, 근육, 신경, 혈관, 꿈틀거리는 내장까지 모두 보인다면?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침착성과 냉정함, 그리고 전생의 지식들이 없었다면 그는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가문의 사람들은 그들과 얼굴도 마주하기 싫어했던 도련님을 두고 걱정과 우려를 보냈지만, 그에게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마음이 놓였다.

걸어 다니는 근육 조형도와 신경 배치도, 쉬지 않고 꿈틀거리는 내장과 허파, 박동하는 심장을 빤히 본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스트레스인지는 그 혼자만의 비밀이었으니.

평범한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적나라한 속들을 눈을 뜰 때부터 감을 때까지 보며 산다는 건 정말 힘들었다. 아니, 눈을 감을 때조차 눈꺼풀의 붉은 핏줄들을 투시하고 너머의 천장과 하늘까지 봐야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여타 가문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어린 나이에 습득한 마나의 감각 뒤에는 정상적인 시야와 편안한 숙면을 위한 러셀의 맹렬한 노력이 있었다.

마나라는 새로운 감각을 깨우치고, 그 감각을 통해 마나를 받아들여 마력으로 전환한 다음 눈에 부여했을 때, 러셀은 비로소 보통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보는 시야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마저 약간만 집중하면 벌의 날갯짓조차 가닥가닥 끊어서 볼 수 있고, 떨어지는 빗방울의 굴곡률과 모양, 부딪쳐서 찬란히 퍼져나가는 세기까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어쨌든 인체의 신비전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러셀에게 있어 큰 수확이었다. 사람을 피하지 않아도 되고 잠도 잘 잘 수 있게 되었다.

대단찮은 투시 능력 외에도 대기나 대지, 동물, 식물 속에서 흐르는 마나의 흐름 또한 러셀에게는 피곤함을 부르는 시각적 폭력이었다. 한을 품은 원혼들의 넋과 백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그 모든 것들을 보아왔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의식적으로 차단해온 지금이었건만.

소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였는데 인식을 못하는 것일까.

러셀은 ‘눈’을 떠보려 했다. 불가능했다. 그의 ‘눈’은 이미 떠져 있었다. 그는 최대한 집중하며 소녀를 보기 위해 노력했다.

소녀는 생글거리는 미소를―확실하진 않지만―지으며 러셀이 자신을 보려는 것을 말없이 지켜봤다.

차츰 흐릿했던 이목구비가 뚜렷해졌다. 그런데 얼굴 형태가 선명해질수록 반대급부로 다른 것들은 흐려졌다. 그럼에도 러셀은 소녀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건 폭포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만큼이나, 바람에 떠밀린 나뭇잎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것만큼이나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는 저 소녀를 봐야 했다.

러셀은 어느새 뺨이 축축해진 것을 느꼈다.

자기 손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뺨을 타고 흐르는, 물과는 질감이 다른 진득하고 무거운 액체. 그건 피였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게 심장이 있었던가. 새삼스레 가슴 안쪽에서 세차게 뛰는 박동이 느껴진다.

팔다리의 근육이 오그라들고 숨이 가빠졌다. 온몸의 땀구멍에서 땀이 솟아 흘렀다. 전신이 흠뻑 젖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러셀은 소녀의 얼굴을 보는 데 성공했다. 하얀 피부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나이를 먹으면 분명 여러 남자를 되돌아 보게 만들 미모다.

하지만 그 미모에는 크나큰 결점이 존재했다. 소녀의 눈구멍에는 눈이 없었다. 시커먼 암흑만이 존재했다.

암흑은 갑자기 모습을 바꿨다. 수없는 부속지가 달린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늪과도 같은 어둠. 천 마리의 가축이 내뱉는 울음소리. 무수히 빛나는 별들을 삼키고 호곡하는 그림자의 눈이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러셀이 고개를 올리면 올릴수록 더 커지고 거대해졌다. 러셀이 말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당신입니까?”

어둠은 말했다.

“넌 아직 나를 못 봤다. 뭐, 앞으로도 못 볼 것 같진 않지만.”

“예?”

그때 러셀은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느꼈고, 참지 못했다. 러셀은 허리를 확 숙여 토사물이 섞인 핏물을 토했다.

그런데 고통스럽진 않았다. 도리어 속이 시원해지는 걸 안 것과 동시에, 러셀은 눈에서 흐르던 피가 멈췄음을 깨달았다. 땀범벅이던 전신도 깨끗해졌다.

세차게 뛰던 심장은 평온을 되찾고, 한없이 오그라들어 경련을 일으키던 근육도 잠잠하다.

“네 속에 있던 독을 빼냈어.”

“독?”

“너랑 싸웠던 아이의 것 말이야. 전통적인 방식이지. 네 피에 잡아먹혀 결국 사라졌겠지만, 그래도 그 과정이 빠르진 않았을 테니까. 속도 더부룩해지고, 잠깐 동안은 피만 먹어야 했을 거고. 그걸 바라진 않았겠지?”

러셀은 어둠이 자신을 도와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둠은 다시 흐릿한 소녀가 되어 있었다.

잘 인식되지 않는다. 비문증처럼. 분명 눈의 한쪽 시야에 떠다니는 것이 보이지만 초점을 옮겨 자세히 보려 하면 어느새 흐릿해져 잘 보이지 않게 되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감히 반말을 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불가해한 것이다. 러셀의 눈으로도 짐작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앞에 있었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두 가지의 상반된 현상이 동시에 존재하는.

“우리는 누구일까?”

소녀는 한가로우면서도 나긋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잠시라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잠에 빠질 것 같은 몽환적인 목소리다. 그래서 러셀은 ‘우리’라는 소녀의 이상한 되물음을 약간 늦게 알아차렸다.

“······.”

‘우리’라니. 그건 나와 당신을 일컫는 말일까. 아니면, 지금 무수히 많은 당신 스스로를 우리라는 대명사로 말한 것일까.

소녀의 몸은 분열해 있었다. 사방에 소녀의 형태가 가득하다. 무엇이 가짜고 진실인지도 알 수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구별되는 반짝거리는 머리카락. 다시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뭉개지고 일그러진 이목구비. 허나 그 안에는 여전히 눈이 없는 텅 빈 눈구멍이 러셀을 직시하고 있을 것이었다.

러셀은 질문했다.

“그 우리에 나도 포함되는 겁니까?”

“스스로 생각하렴. 머리는 생각하라고 달려있는 거야. 어깨 위가 허전해서 얹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소녀의 말은 신랄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세상에는 하나로는 부족한 건지 둘이나 그 이상을 얹고 다니는 괴물도 있고, 또는 머리를 떼서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시체 기사 둘라한도 있지만 지금 그런 말을 꺼내기엔 상황이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러셀은 생각했다. 그는 언제 저 소녀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되돌아보았다. 내면을 돌아보며 상승한 마나의 질과 마력의 양. 그에 따라 더 강화될 준비를 마친 신체능력.

오감과 육감을 점검하며 이 알 수 없는 공간을 부유하던 차, 익숙하다고 생각되는 인기척을 느꼈고, 눈을 떠보니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있었다.

익숙하다라. 왜 익숙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왜 이 어두운 공간이 어머니의 품처럼, 혹은 따뜻한 물에 잠긴 것처럼 편안하다고 느꼈을까.

러셀은 주저하면서 말했다.

“제······ 어머니이십니까?”

“그럴지도.”

소녀의 긍정에 러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하지만 소녀의 중첩되는 목소리는 끝난 게 아니었다.

“아니면 네 딸일지도 모르지.”

“예?”

“어쩌면 네 손녀일지도 모르고. 그건 모르는 거야.”

목소리는 그 무수해진 숫자만큼이나 겹쳐서 들려왔다. 온 사방에서 들려오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정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다. 러셀은 굳세게 의식을 다잡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들’에게 시간과 피에 대한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따지면 세상의 모든 부속물들이 나의 형제자매이며 아들이고 손자이니까.”

‘나들’? 이번에는 일인칭 대명사 뒤에 복수의 접미사가 붙었다. 괴상한 호칭이지만, 또 이렇게 무수히 분열해 있는 소녀를 보자니 틀린 말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러셀은 소녀가 스스로를 표현한 것에 대해 생각하고 물었다.

“······당신이 신이라는 말씀입니까?”

“글쎄.”

소녀는 의뭉스런 웃음만 지을 뿐 답을 해주진 않았다. 러셀도 그녀가 신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신성력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부재가 완벽성을 침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소녀는 홀로 존재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다른 것을 물었다.

“여긴 어디입니까?”

“여긴 네가 만든 세계다. 멋진 이름도 붙였던데. 무저갱이라고.”

여기가 자신이 만들었던 그 공간이었나, 하는 의문보다도 먼저 러셀은 얼굴을 붉혔다.

“······아직 이름 붙인 건 아닙니다.”

“아니야. 난 멋지다고 생각해.”

러셀은 헛기침을 했다.

“큼. 전 아직 그 공간을 만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맞아. 이곳은 너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내가 만든 것이기도 해. 네 눈이 나로 하여금 널 관측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니까. 내가 볼 수 있으면 그건 존재할 수 있어. 아, 이건 선물.”

고개를 떨구고 있던 러셀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흐릿한 소녀는 작은 손에 큼직한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그건 언뜻 보기에 주먹만 한 붉은 구슬로 보였다.

소녀는 구슬을 러셀에게 보냈다. 허공을 유영하던 구슬은 천천히 그의 손에 내려앉았다.

“무슨 선물입니까?”

“엄밀히 말하면 네가 스스로 얻은 거야. 스스로 열어보렴.”

그때 공간이 흔들렸다. 러셀은 그것이 자신의 의식이 깨어나려는 신호임을 깨달았다.

“러셀.”

소녀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되도록 죽지 마.”

러셀은 소녀를 바라봤다.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도 죽지 마. 네가 죽으면 큰일이 벌어지니까.”

“무슨 큰일 말입니까?”

“말할 수 없어. 들으면 넌 폭발해버리고 말걸.”

소녀의 어조는 장난스러워서 그게 감정의 상태를 비유한 것인지 실제로 몸이 터져버린다는 것인지 헷갈렸다. 그래도 들어주기 어려운 요구는 아니었기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싱긋, 웃었다가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소녀가 말했다.

“내 말을 허투루 듣지 마.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어. 이제까지와는 다른 시대가 찾아올 거다. 불청객의 손에 무엇이 들려 있을지 모르지만, 부르지 않은 자가 가져온 것이 대개 그렇듯이 좋은 소식은 아니야. 단단히 대비해야 해.”

“······알겠습니다.”

“네 눈은 우리와 나들을 세계와 이어주는 창구야. 많은 걸 봐. 많은 걸 보고, 느껴.”

러셀은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위로 멀어지는 소녀를 보려 애썼지만, 소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가라앉던 러셀은 어느새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고, 또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는 그 순간을 특정할 수 없었다.

러셀은 눈을 떴다.

***

처음 보인 것은 낯선 방이었다. 호화로운 방이다. 여관이나 민가에는 없는 귀족적인 사치가 그 방에 있었다. 그는 그 방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낮인 듯 했다. 하늘은 구름이 짙게 끼어 있어 흐릿했다. 창문에는 투명한 파문이 하나 둘씩 그려지다가 아래로 주륵 미끄러졌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들어선 것은 하얀 머리카락의 소녀였다. 그녀는 깨어난 러셀을 보고 입과 눈을 벌리더니, 도도도 하고 작은 발소리를 내며 침대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나! 이 바보야!”

러셀은 품에 안겨든 아엘라시스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아엘라?”

“그래! 나 아엘라시스다! 이 멍청이, 멍청한 놈아!”

아엘라시스의 목소리는 바깥의 빗소리만큼이나 축축했다. 그 목소리에 담겨 있는 안도감에 러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났냐는 말을 떠올렸다.

“내가 며칠 만에 일어났는데?”

아엘라시스는 그의 품에서 얼굴을 들었다. 눈가가 약간 빨갰다. 아엘라시스는 코를 훌쩍이더니 말했다.

“넌 2주 만에 깨어난 거야. 진짜 영영 안 일어나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2주라니. 대화를 나눈 건 잠깐이었다. 한 시간, 아니 삼십 분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느낀 체감 시간과 바깥 시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다만 러셀은 그런 것을 일일이 말하지 않았다. 변명은 무가치하다.

“미안해. 늦잠 자서.”

아엘라시스는 다시 그를 꼭 껴안았다. 러셀은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투둑, 투두둑 하고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강해졌다. 봄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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