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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78화 (79/225)

78화 성장

영지의 남쪽쯤에서 번개 같은 속도로 쏘아져 붉은 구체를 관통한 하얀 선을 알아차린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많지 않았던 사람들 중에는 지붕 위를 달리는 한 엘프가 있었다. 뾰족한 귀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 머리카락을 지닌 그 엘프는 다음 지붕으로 건너뛰다가 그 광선을 목격했고, 결과적으로 발을 헛디뎌 멋지게 나동그라졌다.

우당탕, 콰장창, 와장창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붕과 그 아래 쌓인 나무 상자가 박살났다. 먼지를 뒤집어 쓴 레메론은 다급히 뛰쳐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에게 페일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다가왔다.

“뭐냐? 네가 지붕에서 떨어질 때도 다 있고.”

“너희들, 방금 그거 못 봤어?”

“뭘?”

“그거 말이야!”

“그게 뭔데?”

레메론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퍽퍽 쳤다. 페일도 그만큼이나 답답한 눈으로 레메론을 바라보았다. 카이는 관심 없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말할 거면 빨리 말하고, 아니면 그 불길한 마력이 있었던 곳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으아아! 방금 하늘을 가로지른 하얀 선 말이야! 못 봤어? 나만 본 거야? 그런 거야?”

지상에서 달리고 있었던 페일과 카이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레메론의 말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이제까지 영지 곳곳을 뛰어다니며 남은 흡혈귀들과 괴물들을 처치하는 데에는 레메론의 화살이 큰 몫을 해줬다.

페일이 물었다.

“하얀 광선이라. 거기서 뭐가 느껴진 거야?”

레메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가 느껴지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어. 그런데 그 광선이 향한 곳이 특별한 것이었지.”

“뭔데?”

“붉은 구체 같은 게 하늘에 떠 있었어. 그게 아마 우리가 느꼈던 불길한 마력의 원인인 것 같아.”

“붉은 구체?”

곧 셋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나마 높은 건물의 지붕에 올랐다. 그리고 레메론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했다. 아직 거리가 좀 남아있어 멀게 보이는 영지의 북서쪽 외곽 부분에 분명 이질적인 것이 떠 있었다. 하지만 그 색깔은 달랐다.

“검은색인데?”

“······그러네. 아까까지는 분명 피처럼 붉은색이었는데.”

레메론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카이가 말했다.

“아까까지 느껴졌던 불길한 마력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엘프 둘은 조금 뒤늦게 알아차렸다. 저 멀리 하늘에 떠 있는 검은 구체의 모습은 다른 우선순위를 잠시 잊게 만들 정도의 위용이었기 때문이었다. 레메론이 말했다.

“아까 그 하얀 광선이 뭔가 수를 낸 걸까요?”

“정황상 그렇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멀어서 잘 모르겠지만.”

“일단 가는 수밖에 없군요.”

그들은 다시 출발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외곽에 도착했다. 날랜 엘프와 그보다는 덜해도 만만찮은 각력을 지닌 오크는 빨랐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검은 구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어떤 검은 것을 둘러싸고 있는 일련의 무리가 보였다.

***

하얀 광선을 목격한 사람 중에는 루넬바스도 있었다. 라몬 에란디스 영주와 휘하의 병력들, 마법사들은 구체에 보다 가까이 있었다.

영주와 기사들이 붉은 구체에서 되쏘아낸 공격들에 피해를 추스르고 있을 때, 그리고 다른 마법사들이 부상을 입은 병사들을 치유하고 있을 때 루넬바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구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서 저 멀리서 쏘아진 하얀 광선이 붉은 구체를 관통하고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그 광선에 담긴 막대한 마력의 응축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 순수한 마나도.

루넬바스는 경악한 눈으로 그 광선이 쏘아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리가 멀어서 누가 쏜 건지 식별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루넬바스는 최근에 만났던 마법사들, 아니 마력을 다루는 자들 중 누가 저 광선과 같은 마력을 지녔는지 알 수 있었다.

백발의 머리카락을 지니고, 소녀의 외형이었다가 성숙한 여인의 몸이 되었던 자. 마법이 아무리 신비의 학문이라지만 그런 급격한 성장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루넬바스는 변신이라는 희귀한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종족 하나를 알고 있었다. 용이 그랬다.

신장이 수십 미터가 넘고 날개 또한 폭이 수 미터가 넘어가는 용이 다른 종족에게 다가가는 데에는 큰 애로사항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일단 거대한 파충류라는 외모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지성체가 얼마나 있을까. 자살지망자나 정신착란자가 아니라면 힘들 것이다.

마법의 조종으로서 용은 자신의 몸을 바꾸는 법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땅 위를 걸어 다니는 지성체들의 모습을 취했다. 마법은 그렇게 다가왔다.

그때 붉은 구체에 이변이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알아차렸다. 색이 바뀌고, 작아지기 시작했다.

지름이 20미터가 넘었던 구체가 차츰 줄어드는 것은 눈앞에서 직접 보고 있음에도 믿기 어려웠다.

라몬 에란디스 영주가 다가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마스터 루넬바스, 뭔가 짐작가는 게 있소?”

루넬바스는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 자리에서 그걸 말할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에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영주님.”

영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위가 조용했다. 부상자들의 신음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릴 뿐이었다. 마법사들이 치유 주문을 행했지만, 신성력보다는 약할 수밖에 없다. 교회에서 찾아낸 성수는 소용이 없었다.

영주는 한숨을 쉬었다. 아카서스 교회의 사제들 때문이다. 악마를 상대하는 데에는 사제의 도움이 필연적이다. 그렇기에 영주와 기사들은 붉은 구체가 떠오르기 전, 아직도 굳게 닫혀 있던 교회문을 박살 내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제들은 교회의 지하에 숨어 있었다. 숨어서 끊임없이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외우고 신상에 대고 절을 했다.

“정의, 정의, 정의, 정의, 정의······.”

한 없이 정의만 부르짖는 자들. 하지만 그들 모습 어디에도 정의는 보이지 않았다.

영주는 그들의 몸에서 나는 알싸하면서도 달큰한 냄새를 맡고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리븐소 약초의 향. 적게 쓰면 마취제로 쓰이는 풀이지만 적정 함량 이상을 쓰면 환각을 만든다.

쉬지 않고 절하는 사제들은 눈이 풀려 있었다. 마약. 애초부터 성력이 부족했던 주교와 그 휘하 사제들은 마약에 정신과 몸을 맡겼다. 그 중에는 카이를 문전박대했던 젊은 사제도 있었다.

에드몬드가 얼마나 강력한 흡혈귀였던 간에 매혹을 이기지 못할 정도의 사제들은 그들이 얼마나 방종한 신앙생활을 해왔는지에 대한 증거다.

영주는 참담한 심정으로 병사들을 시켜 그들을 묶어두기만 하고 성수를 찾아보라 이른 다음 교회를 나왔다. 한숨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영지의 내부에 관심을 두지 못했던 대가는 뼈저렸다. 영주는 기사가 찾아온 성수 한 병을 마셔보았다. 맹물에 가까웠다.

사제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대교회에게 정식으로 항의 서한을 보내겠지만, 실질적인 보답이 오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라몬 에란디스는 자신이 왜 던전과 유적을 발굴하고, 영지 외곽을 개간하려 했는지를 생각했다.

괴물들이 날로 그 흉포함을 더 하는 이 시기에 곡물을 길러 식량을 쌓고, 그 식량으로 병력들을 길러내기 위함이다. 지금같이 어수선한 시기에는 힘만이 평화를 위한 화폐가 된다.

상념을 마친 영주의 시야에 아까처럼 영지의 길 위로 달려오는 자들이 보였다. 영지 곳곳에 흩어져서 피를 자아내던 흡혈귀들을 척살하기 위해 떠났던 요격대들이었다.

마법사 데보라와 경비 대장 젠슨 오트발, 카이와 레메론, 페일, 말을 타고 온 아엘라시스와 이블린, 지라크.

그들은 확연히 작아져 하강하는 검은 구체를 바라봤다.

그것은 이제 2미터 정도의 길쭉한 타원형이 되어 있었다. 사람 하나가 들어가면 딱 그 정도 크기가 될 것 같았다.

검은 타원형의 물체는 조용히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뿐이었다. 알처럼 깨져서 그 속의 것을 보여주진 않았다. 사람들은 당황했다.

“이게 뭐지?”

“레메론, 네가 아까 800년 전의 고대 군주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어?”

“그렇긴 한데······. 상식적으로 완전히 깨어났다면 당장이라도 저걸 찢고 나와 우리를 죽이려 들지 않을까. 지금은 조용하잖아.”

“저건 러셀이야.”

마지막 말에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아엘라시스가 말에서 힘겹게 내려 다가갔다. 마력을 다 쓴 그녀는 다시 소녀로 돌아가 있었다. 아엘라시스는 작아진 가슴과 짧아진 다리에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다리를 놀려 타원형의 검은 고체 앞에 섰다.

레메론은 다시 작아진 그녀의 모습에, 그리고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마나의 흐름에 놀람을 느꼈다. 그건 아까 그가 지붕에서 목격한 광선의 것과 비슷했다.

설마, 저 소녀가 아까 그 광선을 쏘아냈던 자일까?

루넬바스는 눈을 번뜩이며 아엘라시스와 그녀가 보고 있는 검은 고체를 번갈아 봤다.

“이게 러셀이라고?”

마찬가지로 걸어온 이블린이 조심스럽게 고체를 쓰다듬었다.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영주, 라몬 에란디스가 말했다.

“다른 흡혈귀들은?”

젠슨 오트발이 경례하며 말했다.

“여기 계신 데보라님 덕분에 모두 척살했습니다. 이제 영지에 남은 괴물들은 없습니다.”

“고맙소, 마스터 데보라.”

“천만의 말씀입니다, 영주님.”

라몬 에란디스는 지라크를 쳐다보았다. 지라크는 영지 내에 남아있는 뱀피르들을 탐지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남은 뱀피르들이 없는지 확인하려는 몸짓이었다. 지라크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해주었다. 영주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남은 문제는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타원형의 검은 고체였다. 백발의 아름다운 소녀가 저것이 러셀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에게는 그게 사실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걸 아가씨가 어떻게 아는가?”

루넬바스가 아엘라시스에게 물었다. 아엘라시스는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말했다.

“······그냥 알아.”

러셀의 마력을 받아 알에서 깨어나고, 용으로서 자신의 보호자를 특정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러셀은 그녀가 충분한 힘을 얻기 전에는 정체를 밝히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그 판단에는 아엘라시스도 동의한 바였다.

루넬바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영주님. 혹시 모르니 저것을 지하 감옥에 두고 봉마진을 펼쳐두는 것이 안전할 것 같습니다만. 저게 그 남자일지, 아니면 전사를 죽이고 힘을 비축하는 고대의 흡혈귀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무슨 소리십니까!”

지라크가 나서서 크게 외쳤다.

“저건 주인, 그러니까 러셀님이 맞습니다. 제 피가 그걸 알고 있습니다.”

“아직 영지에 흡혈귀가 남아 있었군.”

루넬바스가 서늘한 얼굴과 음성으로 말하며 손을 들었다. 당장이라도 수인을 맺어 주문을 날릴 기세에 지라크가 뒤로 물러섰다.

다른 자들은 앞서가는 상황을 바로 따라가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그때 영주가 손을 들었다.

“마스터 루넬바스. 당신의 염려를 이해하오. 마법사는 준비하는 자이지. 하지만 저 지라크라는 자는 이제까지 우리를 도와 흡혈귀를 잡아 죽였고, 러셀을 주인으로 모시는 자요. 그자가 이제 와서 거짓말을 할 것 같지는 않소.”

그리고 루넬바스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병사들을 시켜 검은 고체를 옮기라고 지시했다. 무거웠지만, 병사 여럿이 달려들자 들 수 있었다.

루넬바스는 입을 꾹 다물고 그것을 노려봤다. 검은 고체. 아엘라시스. 하얀 광선,

하나 같이 마법사의 탐구심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영주는 자신의 영지를 구해준 러셀에게 더 큰 호의를 갖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괜찮다. 마법사는 준비하는 자이며 동시에 기다리는 자이기도 하다.

밤하늘은 이제 확연히 푸른 물빛이었다. 동쪽에서 주황색의 빛줄기가 영지에 닿았다.

***

러셀은 자신의 상태를 자각했다.

그는 검은 우주를 떠돌고 있었다. 중력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서 있는 것인지, 누워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왜 여기 있는 것일까. 그는 마지막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떠올렸다.

강력했던 흡혈귀, 이스칼리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그녀의 공간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검을 휘둘렀다. 공간이 깨져나갔지만, 러셀은 다시 새로운 공간에 있었다.

러셀은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위협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치 따뜻한 물에 잠겨 있는 것처럼 포근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았다. 완전히 고갈되었던 마력이 빠른 속도로 차오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스칼리아와의 전투는 격렬한 것이었고, 고양된 정신과 육체는 세계의 마나를 빨아들여 마력으로 전환했다.

그는 한층 강해진 자신을 느꼈다. 단지 마나의 질과 마력의 양이 늘어난 것을 뜻함이 아니다.

이스칼리아의 전투는 이제까지의 전투와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는 마법의 새로운 지평을 보았다.

자신의 심상을 투영해 새로운 차원을 만들고, 그곳에서만큼은 자신이 정한 법칙을 휘두르는 것이 가능했다. 러셀조차도 바깥의 아엘라시스가 뿜어낸 용의 숨결이 아니었다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긴 것은 그였다. 그리고 그 전투에서 러셀은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자각했다. 이스칼리아의 공간을 집어삼켰던 어둠.

무저갱. 러셀 스스로에게도 적용되었던 그것은 차갑고, 무거우며 숨쉬기 어려운 우주와도 같은 환경의 공간이었다. 다시 그 무저갱을 불러낼 수 있을까?

러셀은 계속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그때의 감각을 깨워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몽둥이로 풀을 배는 것만큼이나 막막한 기분만 들 뿐이었다.

그때, 러셀은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 속에서 인기척을 발견했다. 그것은 익숙한 것이었고, 그래서 눈을 떴다.

“안녕?”

러셀의 앞에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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