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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77화 (78/225)

77화 이스칼리아 (4)

5분 전. 이블린과 지라크는 아엘라시스의 도와달라는 말에 응했다.

“뭘 도와주면 되는데?”

“이블린. 넌 내 마력이 새어나가지 않게, 한 점으로 모일 수 있게 흐름을 제어해줘. 해줄 수 있어?”

이상한 요구였지만, 이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엘라시스는 이번에 지라크를 보며 말했다.

“지라크, 지금 러셀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겠어?”

“러셀 님을 말입니까?”

“응.”

지라크는 저 멀리 떠 있는, 하지만 그 크기 때문에 원근감이 이상해지는 듯한 붉은 구체를 바라봤다. 흡혈귀는 혈기를 끌어올려 주인의 피를 감지하고자 했다. 지라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죄송하지만, 저 안에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잘······.”

“내가 도와줄게. 이 마력을 받아봐.”

아엘라시스의 손에서 가느다란 마력 줄기가 뻗어나와 지라크에게 닿았다. 지라크는 그 마력이 러셀의 것임을 알아차렸다. 아엘라시스를 바라보았다.

“이건, 주인님의 마력이군요.”

그 말에 이블린이 다가왔다.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아엘라시스를 바라보았다.

“정말이네. 어떻게 타인의 마력을 몸에 담을 수 있지? 그것도 이렇게 자연스러운 융화의 형태라니. 무척 어려운 일인데······.”

그건 아엘라시스가 알의 상태일 때 지속적으로 러셀에게 마력을 공급받은 것과, 그의 마력을 받아 알에서 깨어난 것과 관련이 있었다. 또 마력을 자기 수족처럼 다루는 용이라는 종족의 특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걸 설명할 시간도 생각도 없는 아엘라시스가 말했다.

“찾을 수 있어, 없어. 그것만 말해.”

“찾을 수 있습니다. 주인님의 피와 마력이라면, 아까보다 훨씬 그 위치를 특정하기 쉽습니다.”

“좋아. 특정하는 대로 말해줘.”

“아가씨께서는 무얼······?”

지라크의 말끝이 흐려졌다. 아엘라시스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시작은 심장이었다. 심장에서 뻗어 나온 마력이 뿌리와 줄기를 뻗어나가며 그녀의 전신에 들어찼다.

‘용의 형태는 안돼.’

아까 아엘라시스가 러셀에게 전해 받았던 마력은 충분히 그녀의 몸을 아성체까지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마력이었다.

방금까지도 다른 흡혈귀, 뱀피르들을 죽이기 위해 마력과 주문을 썼지만, 그것들은 다른 마력으로 구현한 마법들이었다.

러셀에게 받은 마력을 핵으로 만들어 회전시키고 그 회전으로 빨아들인 대기의 마나. 그렇기에 아엘라시스가 처음 러셀에게 받았던 그의 마력은 거의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아엘라시스는 천천히 마력을 풀어헤쳤다. 용의 형태로 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형태로 고정하지도 않았다. 그 중간의 지점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우득, 우드득.

아엘라시스의 몸에서 섬뜩한 소리가 났다. 겉으로는 잘 표시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그녀의 의지와 용이라는 종족의 특성, 러셀의 마력으로 인해 일대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변화가 시작됐다. 아엘라시스의 머리카락을 해치고 두 개의 뿔이 자라났다. 동공이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거기서 더 나아가진 않았다.

이블린과 지라크는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허나 아엘라시스의 마력이 엄청난 기세로 뿜어져 나오자 퍼뜩 자신의 할 일을 찾아냈다.

“흡!”

이블린은 아엘라시스의 요구대로 그녀의 몸에서 발산되는 마력이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않게 모았다. 아엘라시스는 이블린이 모은 마력을 자신의 제어력으로 다시금 모아 입에 뭉쳤다.

살짝 벌려진 분홍빛 입술과 앙증맞은 이빨들 바로 앞에, 흉악한 기세를 뿌리는 마력의 구체가 응집됐다.

아엘라시스가 그 상태로 말했다.

“러셀은?”

넋을 잃고 있던 지라크는 정신을 차리고 집중했다. 그의 피를 지배하는 러셀의 피와 아엘라시스가 건네준 마력. 둘을 조합하자 저 거대한 붉은 구체 속에 있을 러셀의 위치가 특정되었다.

지라크가 자신의 손목을 물어뜯어 피를 허공에 뿌렸다. 뿌려진 피는 붉은 구체에 날아가지 않고 허공에 고정되었고, 곧 지라크 자신이 보는 이미지를 그려내었다.

불투명한 장면 속에서 러셀과 누군가가 대치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러셀의 적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아엘라시스는 더 기다리지 않았다. 위치를 알았으면 충분하다.

가슴을 크게 부풀린 아엘라시스는 힘껏 용의 숨결을 뿜어내었다. 이블린의 도움으로 전방위로 폭사되는 것이 아니라 가느다란 빛줄기가 된, 러셀이 보았다면 레이저 같다고 생각했을 광선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붉은 구체에 직격했다.

***

하얀 광선이 이스칼리아의 심장에 직격하고. 붉은 수정들의 연계가 깨져나간 순간, 공간이 뒤흔들렸다.

이스칼리아는 가슴을 움켜잡고 비틀거리다 한쪽 무릎을 꿇었다. 상처를 입은 것이 처음은 아니다. 이제까지 수도 없이 재생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지금의 것은 달랐다. 흡수할 수 없었다. 몸에 녹일 수 없었다. 이스칼리아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용의 마력이었다.

악마를 대적하는 데 있어 신성력 다음으로 치명적인 용의 마나.

그런 용의 마나가 극도로 응축되고, 응집되어 10센티 남짓할 정도의 작은 직경이 되었다. 거기다 심장을 정통으로 맞은 것이 치명적이었다. 그녀의 심장을 둘러싸고 있던 수정 중 하나가 완전히 박살 나고, 세 개가 금이 갔다.

피가, 필요했다.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이스칼리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러셀이 쇄도하고 있었다. 아까까지 지친 기색이 역력했던 것이 거짓말 같다. 범인은 인지할 수도 없는 찰나의 시간 속에서 이스칼리아는 반응했다.

곧았던 사복검이 일제히 분열하고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공간이 흔들리고 있지만, 아직 균열은 크지 않다. 조금만 시간을 들이고, 피를 보충하면 되었다. 문제는 어디서 피를 보충하느냐다. 답은 바로 앞에 있었다.

러셀이 있었다.

이 공간은 자신의 일생에 있어 가장 눈부신, 혹은 어두운 순간. 그때의 심상을 고정시켜 직시하는 것과 동시에 가공할 힘을 얻는 것.

그것이 이스칼리아가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얻은 흡혈귀의 힘에서 발전시킨, 그리고 자신의 마법과 쌓아 올린 무를 결합시켜 만든 공간이었다.

일단은 쇄도해 오는 러셀을 사복검을 통해 막는다. 그 다음 다시 한번 전방위에서 피보라와 피의 가시, 파도를 이용해 움직임을 봉쇄하고, 틈을 찾아 상처를 낸다. 이스칼리아는 찰나 속에서도 그렇게 계획을 세웠다.

그렇기에, 러셀이 갑자기 갑옷을 해제하고 코트를 벗어 던졌을 때 눈을 깜박거렸다.

뭐지? 갑자기 지금까지 두르고 있던 방어구를 모두 버린다고?

노림수가 있다, 뭔가 이상하다, 물러나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은 떠오른 것만큼이나 빠르게 가라앉았다.

지금 그의 몸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 없다. 기껏해야 바지와 얇은 셔츠뿐. 칼날, 아니 핏방울만으로도 손쉽게 찢어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냄새. 이스칼리아의 코가 킁킁거렸다. 몇 시간이 넘는 전투 동안 러셀은 많은 땀을 흘렸다. 검은 머리카락은 축 늘어져 뺨에 달라붙었고, 드러나 있는 매끈한 피부는 반짝이며 번들거렸다.

아름답다. 이스칼리아는 멍한 얼굴로 가까워져 오는 러셀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땀을 흘리는 남자가 아름답게 느껴지다니.

왕의 자리에 올라 숱한 중매를 뿌리치고, 멸망까지 함께한 군주로서 이성을 두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자청색 눈동자. 밝게 빛나는. 이스칼리아는 그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대지를 폭발시켰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사복검의 칼날들이 솟아올랐고, 그대로 러셀을 꿰뚫었다. 이스칼리아는 도대체 그의 속셈을 알 수가 없었다.

갑옷을 버린 것도 그렇지만 회피 자체를 하지 않다니. 피하지 않은 대가는 참혹했다. 러셀의 다리와 배, 가슴, 어깨, 파에 무수한 칼날들이 박혔다.

피가 흘렀다. 붉디 붉은 피. 생명의 정수. 누구도 흘리고 싶어하지 않는. 그리고 이스칼리아는 아직 대지에 떨어진 그의 피를 흡수하지 않았다. 미식가는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 먹지 않는 법이었다.

러셀은 사복검에 꿰뚫려 고정되어 있었다. 축 늘어진 팔다리와 얼굴. 검은 머리카락이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어 표정을 볼 수는 없다. 묵색의 대검은 그럼에도 굳게 쥐어져 있다.

이스칼리아는 홀린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러셀에게 다가갔다. 홀려야 할 흡혈귀가 도로 홀려버린다니. 토끼를 사랑한 늑대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검은 갑옷에 뒤덮여 보이지 않았던 그의 목덜미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고, 이스칼리아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녀는 고정된 러셀을 안았다. 연인을 애무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로 얼굴과 가슴을 어루만졌다. 땀과 피가 가득 묻어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스칼리아는 아예 자신의 가슴과 그의 가슴을 붙였다. 두근, 두근하고 맥박치는 러셀의 힘찬 심장 고동이 느껴졌다. 오래전에 멈춰 버린 자신의 차가운 심장과는 완전히 다른 고동이었다.

그녀의 손이 러셀의 등 뒤로 돌아가 깍지를 꼈다. 방금까지 서로의 목을, 심장을 노리고 싸웠던 자들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애정 어린 몸짓이었다.

그녀의 입이 벌어지고, 앙증맞은 송곳니가 러셀의 목을 물었다. 고대하던 피가 혀와 이빨을 적시고 목구멍으로 타 넘어갔다.

멈출 수 없었다. 이제까지 먹었던 그 어떤 것보다 달콤하고, 차갑고, 뜨거운 것이 몸속에 퍼졌다. 그 강렬한 생명력에 이스칼리아는 전율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전능감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화산처럼 용출했다.

그녀는 정신없이 피를 빨아먹었다. 그때, 이스칼리아의 심장이 두근, 하고 크게 뛰었다.

그녀의 심장은 뛰지 않는다. 모든 흡혈귀가 그러하듯이 산 것의 피를 마실 때만 잠깐 따스해질 뿐, 박동을 내지는 않았다.

“어?”

그녀는 러셀의 목에서 얼굴을 뗐다. 뭔가 이상했다. 몸에 흡수되어야 할 피가 흡수되지 않았다. 따로 놀았다. 기름과 물처럼. 그리고 도리어 그녀를 공격했다.

“크, 학.”

이스칼리아는 혈기를 끌어올리려 했다. 불가능했다. 바이러스를 공격하는 백신처럼 러셀의 피가 불안정해진 그녀의 피를 공격했다.

전능감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남은 건 고통이었다. 몸 곳곳에 퍼졌던 러셀의 피가 거센 반란군처럼 그녀의 몸을 내달렸다. 반란군은 파죽지세의 기세로 온몸에 퍼져나갔다. 바람을 만난 불길처럼 사납고 거칠었다.

이스칼리아는 피를 통제하려 했으나 그마저 되지 않았다. 러셀의 피는 한 곳으로, 그녀의 심장으로 몰려들었다.

박살나고 깨져나간 붉은 수정을 집어삼켰다. 그건 이스칼리아가 원한 것이었으나 동시에 원하지 않던 것이기도 했다.

“이스칼리아.”

그때, 완전히 기절한 줄 알았던 러셀에게서 그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이스칼리아.”

두 번의 부름.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고개를 들면 안 된다. 그의 눈을 쳐다봐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스칼리아.”

그녀는 그 목소리를,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부름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건 그의 피를 거부할 수 없던 것만큼이나 달콤한 폭력이었다.

이스칼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것을 보았다. 자청색의 눈. 오롯이 빛나는.

그녀의 의식은 그 너머를 보았다. 그건 무저갱이었다. 암흑이었고 심해였으며 동굴이었다. 경계 너머였다.

시작은 러셀의 뒤에서부터였다. 다른 세계의 문이 열리는 것 같은 광경. 안개처럼, 혹은 촉수처럼 흘러나오는 어둠이 그녀의 공간을 집어 삼켜갔다.

수복 되어 가는 듯 했던 공간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고정된 황혼의 조각들이 오래된 건물의 천장처럼 부서져 조각조각 떨어지고 있었다.

지평선이 무너지고, 들판이 꺼졌다. 시체가 꽂힌 말뚝들이 쓰러져 재로 부서졌다.

끊임없이 시체를 찾아 퍼덕이던 까마귀들은 깨지고 조각나는 공간 속에서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스러졌다.

이스칼리아는 지금의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그건 그녀의 마법이었다. 그녀의 마법이 러셀에게서 거꾸로 펼쳐지고 있었다. 그녀의 세계가 부서지고 부서진 세계에 새로운 세계가 덧칠되었다.

춥다. 이스칼리아는 추위를 느꼈고, ‘느꼈다’라는 사실 자체에 전율했다. 추위는 흡혈귀가 되면서 잊은 감각이다.

언제나 차갑기에 따뜻한 피를 마셔야만 몸이 데워지는, 마치 뱀과 비슷한 몸이, 추위를 느끼고 있었다. 신체가 느끼는 감각이 아니다. 영이, 혼이 느끼는 감각이었다.

무겁다. 방금까지 가벼웠던 팔다리는 이제 온몸에 납덩어리를 단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러셀의 공간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춥고, 무겁고, 숨쉬기가 버거웠다. 깊은 심해에 떨어진 것처럼. 외딴 우주에 홀로 버려진 것처럼.

콰자작!

거친 분쇄음과 함께 러셀의 몸을 꿰뚫고, 구속하던 칼날들이 일제히 깨져나갔다. 그의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다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피부가 잔인하리만치 창백해져 있었다.

러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며 앞으로 걸어갔다. 조금 비틀거리긴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러셀이 발을 디딜 때마다 닿은 곳에서부터 검은 파문이 일었다. 공간이 검게 물들었다. 그의 뒤는 이미 무저갱의 커다란 입이었다.

그녀는 저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저 끔찍한. 형용할 수 없는. 표현할 수 없는. 볼 수도, 들을 수도, 맡을 수도, 맛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어둠. 마법사로서도, 무인으로서도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미지 앞에서 이스칼리아는 가만히 섰다. 러셀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절반 이상이 아직 그녀의 세계였지만, 빠른 속도로 무저갱에게 잡아먹히고 있었다. 그녀는 웃었다.

허탈한 웃음은 아니었다. 도리어 후련한 미소였다. 모든 걸 쏟아내고, 불태운 미소였다.

“······더 없는 부활의 영약으로 여겼건만. 도리어 날 중독시키는 극독이었군······, 그대의 피는.”

만약 그녀가 온전할 때, 그러니까 심장에 용의 숨결이 꽂히지 않았을 때 러셀이 피를 흘렸다면 상황은 나빠졌을 것이다.

지라크의 경우와는 달랐다. 지라크는 러셀에게 사지가 다 잘리고 죽어가는 상황에서 그의 피를 받고 소생했다.

흡혈귀의 특성과 러셀의 인간과는 다른 피, 그리고 마안이 합쳐져 일어난 특수한 경우였다.

반면 이스칼리아는 러셀을 자신의 심상 공간에 끌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신과의 연결도 차단해버릴 만큼 수준 높은 마법사이자 전사였다.

지금도 나힐니르에 달의 성력이 담기지 않는 것이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인지 보여준다.

러셀은 그녀의 앞에 섰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키는 의외로 작았다. 그 정수리가 겨우 러셀의 턱에 닿을까 말까 했다.

그럼에도, 이스칼리아는 군주였다. 러셀의 피가 온몸을 잠식하고, 그의 공간이 세계를 잡아먹은 지금의 상황에서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꼿꼿이 서 있었다.

턱을 치켜들고 거만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러셀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훌륭해. 내가 이제까지 만난 누구보다도. 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었다.”

이스칼리아는 씨익 웃었다.

“영광이군. 나 또한 살면서 그대보다 강한 인간은 본 적이 없다. 내 죽음조차도 내가 선택한 결과였거늘.”

“널 되살린 게 누구인지 기억하나?”

러셀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내가 깨어나고 가장 처음 만난 건 그대 하나뿐이니라. 그리고 그 사실에 난 감사함을 느낀다. 이렇게 아름답고, 또 강한 남자와 싸우고 졌다는 것에.”

“······그래. 나도 너와 싸울 수 있어서 좋았다.”

그건 러셀의 진심이었다. 용과도, 악마와도 달랐던 전투. 그녀의 마법과 검술은 높은 경지에 이른 무인의 것과 같았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수 싸움에서 짜릿함을 느낀 건 비단 그녀 혼자만이 아니었다.

러셀은 나힐니르를 높게 들었다. 완전히 어둠에 물들어 암흑이 되어버린 공간에서 그의 묵색 대검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중간의 하얀 검신 만이 밝게 빛나고 있어서 언뜻 보면 아주 얇고 날카로운 바늘 같은 칼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얀 섬광이 어두운 공간을 찢었다. 공간의 찢어짐은 점점 더 커졌고, 종국에는 모든 것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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