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이스칼리아
던전은 곧았다.
물론 직선으로 뻗어있었다는 건 아니다. 오랜 시간의 사토 속에 묻혀버린 고대의 던전들은 지하의 마력을 받으며 차츰 기괴한 몸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아득한 옛날 사상전쟁 시대의 유적들이 그렇듯이, 혹은 고대의 왕국들이 서로 상잔하다가 무너져 내려 파묻힌 유적들이 그렇듯이.
하지만 러셀은 그 구불구불한 통로도, 섬뜩하리만큼 잔인한 함정들도 무리없이 통과했다. 단연 그의 눈 덕분이다. 어둠 속에서 도깨비불처럼 둥둥 타오르는 불덩이가 타오르고 있었다.
거짓과 환상, 오감의 일그러트림이나 착각은 러셀에게 별다른 영향을 끼치진 못했다. 지하의 뒤틀린 마력을 먹고 사는 괴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키아아악!”
개성 없는 괴성과 함께 지하 괴물들이 러셀에게 달려들었다. 그 생김새는 지상에서 본다면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만큼 혐오스럽다.
눈이 필요 없기에 눈외의 모든 감각을 발달시킨 괴물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체모를 길게 늘어트리거나, 가시를 세우거나, 피부를 물컹거리게 만드는 등의 진화를 이뤘다.
그러나 지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동족을 포식하기 위해, 생존을 위해 이뤄낸 진화들은 가혹한 폭력 앞에 무릎꿇었다. 러셀의 도끼, 마지막 서리는 괴물들의 정수리를 가르고, 허리를 잘랐다.
러셀은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리고 그가 지하 던전에서 만난 건 괴물만이 아니었다. 먼저 들어왔던 용병들, 모험가들, 유적 발굴자들이 있었다.
“사, 사람이다! 아아아,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이보시오, 나, 날 좀 도와주시오.”
길 모퉁이에서 러셀은 벽에 기대고 있던 용병을 만났다. 천과 누비 갑옷, 투구를 눌러쓴 그 용병은 비척거리는 몸짓으로 일어났다.
“벌써 며칠 째 이 답답한 곳에서 옴짝달삭도 못 하던 처지였소. 내가, 내 다리가 조금 다쳤는데······.”
그의 발음은 불안정했다. 입술의 절반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한쪽밖에 남지 않은 눈동자는 러셀이 아니라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손에 들린 칼은 그를 똑바로 겨눴다.
어딜봐도 도와달라는 말과 일치하는 동작은 아니었다. 러셀은 말없이 도끼를 휘둘러 용병의 목을 배었다. 몸의 절반 이상이 뭔지 모를 포자, 촉수, 곤충의 알 같은 것에 덮여있던 자였다.
그리고 이 통로에는 저런 사람들이 많았다. 준비없이, 일확천금만을 기대하며 던전을 찾는 사람들의 말로는 대게 저렇다. 미쳐버린 마법사의 저주나 토굴 등의 복잡한 미로, 그곳에서 서식하는 괴물들의 공격.
금은보화나 유물, 마도구들은 분명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줄 수 있다. 똑같이, 삶과 죽음을 반전시킬 수도 있었다.
그는 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통로의 벽과 천장을 살폈다. 일정한 마력의 흐름이 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이정표였다.
러셀은 계속해서 던전을 내려갔다. 아니, 내려가는 것인지 올라가는 것인지도 조금씩 헷갈렸다. 공간감각의 헷갈림 말고도, 시간감각마저 아리송해졌다.
그는 이제 여기에 들어온지 몇 시간, 혹은 며칠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어졌다. 그러나 그 감각의 혼란에 당황하지는 않았다. 결국 모든 길에는 끝이 있다. 그리고 끝은 곧 시작이다.
러셀의 ‘눈’은 충실히 그 해야 할 일을 다했다. 시간과 공간을 어그러트리는 지하의 짙은 마력도 그 눈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러셀의 눈은 단지 인간의 신체에 딸린 부속기관이 아니라 통로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이 던전의 공간은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만든 것처럼 인위적인 느낌이 강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미로였지만 그에게는 미로가 아니었던 길의 끝에 다다랐다. 그곳은 거대한 공동이었다. 다섯 개의 커다란 열주가 세워져 있었고, 작은 호수가 보였다.
열주가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기에, 러셀은 그 호수의 빛이 붉은 색이라는 것을 알아봤다. 그리고 호수 앞에는 선객이 있었다.
그리고 그 선객도 러셀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가 몸을 돌려 러셀을 쳐다봤다.
“뭐지? 인간이 여기까지 들어올 수가 없는데.”
그자는 회색빛의 갑주를 입은 자였다. 투구를 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동굴 같이 낮으면서도 깊은 목소리는 남성임을 알리고 있었다. 등에는 거대하고도 구불구불거리는 검신의 장검을 매고 있었다.
회색빛 갑주의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하려던 행동을 계속했다. 그는 뭐라 중얼거리더니, 호수에 검붉은 수정 조각 다섯 개를 뿌렸다.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열주의 숫자와 같았다.
쿠웅.
진동이 울렸다. 검붉은 수정 조각이 호수에 닿자마자 울린 진동이었다. 러셀은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열주의 빛이 한 층 더 강해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 거기 흐르고 있는 것도.
그건 피였다. 러셀은 열주에 흐르고 있는 피들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알았다. 그가 천장이라 생각했던 것은, 천장이 아니었다.
중력을 거스르고 일렁이고 있는 핏물들이었다. 러셀은 저것이 던전 위, 영지에 흐르던 피들이 한 데 모인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핏물들은 폭포처럼 아래로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끊임없이 소용돌이 치고, 끓어오르며 불순물들을 걸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정제된 맑은 핏물들이 가늘지만 끊어지지 않고 내리는 도도한 기세로 열주의 꼭지점에 닿고 있었다.
역 오망성을 그리는 다섯 개의 열주는 자신의 꼭지점을 타고 흐르는 피를 받고, 흘려내며 호수에 보냈다. 호수는 그 많은 피가 들어감에도 수위가 상승하는 일 없이 일정했다.
한 눈에 보아도 불길하고도 사특한 의식이 진행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러셀은 벼락같이 도끼를 던졌다.
콰앙!
러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회색 갑주의 남자는 허공에 손을 뻗고 있었고, 도끼는 공중에 멈췄다. 막아낸 것이었다.
그러나 남자도 러셀의 힘에 놀란 것인지 팔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부들거리는 팔을 억누르며, 남자가 비슷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청난 힘이군. 이 정도 힘을 가진 자라면 여기까지 올 수도······, 아니야. 그렇다고 해도 지하의 마력이 인간을 이형의 존재로 타락시켰을 텐데.”
남자가 중얼거리는 사이 러셀은 도끼를 불러들이려 했다. 그런데 마지막 서리는 그의 손에 되돌아오지 않았다. 어느새 남자의 전신에서 안개처럼 스멀거리며 피어오르는 기운이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다.
러셀은 돌아오지 않는 도끼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에게는 무기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러셀이 코트에서 거대한 묵색 대검, 나힐니르를 꺼내자 회색 갑주의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나힐니르? 설마 네놈이 이스메니오스를 죽인 놈이냐?”
“죽였다기보다는, 자살을 도와준 거지.”
러셀의 대꾸에 남자의 눈이 차분해졌다. 그가 몸에 두르고 있는 회색의 안개가 출렁 요동쳤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 대계를 방해한 자를 만났군. 올가의 인도가 있음인가?”
회색 갑주의 사내는 등 뒤의 칼자루를 잡으려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아니지. 여기라면······. 그래.”
“뭐가 그래야?”
바닥을 박찬 러셀이 냅다 묵빛 대검을 내질렀다. 그 천지를 가를 기세의 공격에 회색 갑주의 남자는 경시하지 못하고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아까 도끼를 막은 것처럼 무형의 기운이 대검을 막아냈다.
까드드득-.
허공에서 쇠가 우그러지는 듯한 소리가 난다. 힘과 힘의 충돌에 공간이 구겨지는 소리였다. 러셀은 한 손만으로 대검을 찌르는 자세였고, 회색 갑주의 남자는 양손을 부들거리며 뻗고 있었다.
힘의 균형이 러셀에게 기울었다. 무형의 힘이 사라진 순간, 남자는 이를 악물며 몸을 비틀었다. 묵빛 대검이 남자의 오른 손바닥부터 팔꿈치까지 긴 상흔을 남겼다.
“크학!”
이어서 후속타를 날린 러셀이었으나, 아까부터 사위를 점해가던 회색의 안개가 급속도로 범위를 좁히더니 남자를 감쌌다.
쩌엉-!
공동에 엄청난 소리가 울리며 반향이 메아리 쳤다. 회색 안개는 나힐니르를 막아냈다. 그리고 막아낸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나선의 형상을 그리며 대검을 타고 올라와 러셀을 옭아맸다. 그리고 엄청난 압력으로 그의 몸을 짜부러트리려 했다.
“흡!”
러셀은 기합성을 내지르며 전신의 마력을 내뿜었다. 회색 안개는 잠깐 저항하다가, 힘에 거스르지 않고 물러나 다시 남자에게 뭉쳤다.
둘의 격돌에도 천장의 피와 아래의 호수, 어디에도 영향이 있지는 않았다. 피는 여전히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호수에서도 검붉은 빛의 파동이 천천히 퍼지기 시작했다.
회색 안개의 틈 속에서 오른 팔을 부여잡은 남자가 말했다.
“······과연, 대단한 전사군. 하지만 너도 여기서는 살아나갈 수 없을 거다. 새벽을 물어뜯는 송곳니가, 널 영원히 잠재우거나 꼭두각시로 만들 테니.”
뭘 저리 중얼거려. 러셀이 다시 마력을 끌어올리려는 찰나, 안개가 빠른 속도로 회전하더니 완전한 구체가 되었다. 그리고 점차 작아지더니 훅 하고 사라져버렸다. 러셀은 눈을 껌벅거렸다.
“시발 놈이. 도망친 건가?”
남자가 행한 건 텔레포트, 공간이동 마법의 최고 주문 중 하나였다. 하지만 러셀의 눈에 마력 흐름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내뿜었던 안개도 마력의 안개가 아니라 다른 성질의 기운에 가까웠다.
러셀은 그 기운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최근에 비슷한 기운을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카이의 붉은 기운. 비주류 신, 불칸의 기운과 그 느낌이 비슷했다.
물론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공통점만 있을 뿐, 두 기운의 성질은 완전히 달랐다. 카이의 것에서 투쟁심과 분노를 느꼈다면 방금 회색 갑주 남자의 것에선 음습함과 사악한 기운만이 느껴졌다. 그 기운으로도 마법을 행할 수 있는 건가?
아니, 신성력으로만 행할 수 있는 마법도 있으니 그런 주문을 쓴 건지도 몰랐다.
그때 러셀은 더 이상 사라진 남자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러셀과 남자가 싸우고, 남자가 도망치는 동안 피의 추락이 끝난 것이었다.
쿠구구구구.
진동과 함께 호수가 요동쳤다. 위를 보니 천장의 핏물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질감의 천장만이 보였다. 모든 핏물들이 호수에 스며든 듯 했다.
호수 주변의 역 오망성을 그리던 열주들도 가루가 되어 아래로 풀썩 내려앉았다. 그리고 요동치는 호수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솟아올랐다.
아니, 솟아오르는 건 호수 그 자체였다. 붉은 호수는 매끈한 몸체에서 점점 하나의 형태를 띄기 시작했다. 그건 커다란 뱀이었다.
러셀은 예전에 죽였던 바실리스크를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의 뱀은 그놈보다 더 큰 듯 했다. 그때, 뱀으로 변한 호수에게서 변화가 일어났다.
허물을 벗었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붉은 피부가 순식간에 새까맣게 변하더니 후두둑 떨어졌다. 그 안에서 새로운 붉은 뱀이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허물을 벗었다.
뱀이 그 짓을 다섯 번쯤 반복했을 때, 마지막으로 나온 것은 뱀이 아니었다. 하얀 피부의 한 여인이었다.
검붉은 머리카락이 발까지 닿을 정도로 길고, 잘 짜인 몸매는 극상의 미를 침범한 듯 했다. 부드러운 눈썹과 오똑한 코, 아래의 붉은 입술은 조화를 이루면서도 대칭을 간직했다. 아름다운 외모였다.
여인은 눈을 감은 채로 둥둥 떠 있다가 지면에 천천히 닿았다. 그녀가 눈을 떴다. 검은 눈동자에, 일순 붉은 광채가 선연히 빛났다가 사라졌다. 여인의 시선이 홀로 서 있는 러셀에게 닿았다.
“그대가 본녀를 깨운 자인가?”
“아니.”
여인은 고개를 기울였다.
“여기에는 그대 혼자 밖에 없는데?”
“널 깨운 놈은 도망쳤다. 나랑 싸우다가.”
“그러느냐. 뭐, 별 상관없다.”
여인의 발밑에서 붉은 피가 오르더니 순식간에 의복을 갖췄다. 목깃과 소매가 길고 치렁거리며, 바지의 품도 넓은 고풍스런 예복이었다.
“비키거라. 날 처음 영접한 대가로, 그대의 목숨은 살려주겠다.”
“나가서 뭘 하려고?”
“글쎄. 일단은 허기를 좀 채워야 할 것 같구나. 배가 고프다. 내 몸을 수육하는 것만으로는 피가 부족해. 더, 더 많은 피가 필요하다. ······그런데 내가 왜 이걸 다 설명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비켜라. 난 세 번 이상 말하지 않는다.”
“세 번이나 말할 필요는 없어.”
러셀은 저편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도끼를 불렀다. 도끼는 언제나처럼 빠르게 그의 손에 잡혔다.
“······나랑 싸우겠다고?”
“그럼 피 빨아먹는 괴물을 밖에 내보내겠냐.”
그의 말에 여인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녀의 손이 번개같이 내뻗어지며 러셀의 목을 노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인식도 못하고 머리가 뜯겨져나갈 공격이었으나 러셀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누가 뒤에서 확 잡아당긴 것처럼 허리를 뒤로 젖혀 피한 동시에 오른손의 대검과 왼손의 도끼가 교차하며 여인의 팔을 잘라버리려 했다.
깡!
허나 여인의 팔은 잘리지 않았다. 부드러워 보이는 외견과 다르게, 무슨 강철이 부딪친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대검과 도끼날을 견뎌냈다.
여인의 몸이 가속했다. 눈으로도 좆기 힘든 속도였으나, 마찬가지로 러셀은 응수했다. 초당 수십 번의 연격이 부딪쳤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놀라운 점은 러셀은 무기를 들었지만, 여인은 무기 하나 없이 맨손만으로 칼날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콰앙!
동시에 서로를 떨쳐낸 둘이 바닥에 내렸다. 러셀은 별다른 상처가 없었다. 반면 여인은 표정을 조금 찌푸렸다. 그녀와 러셀의 눈에 피부 여기저기 난 잔 상처들이 보였다. 피가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그건 그녀에게 그리 좋은 신호가 아니었고, 그녀로 하여금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예사 인간이 아니로구나. 좋다. 내 부족하게나마 그대를 예우하겠다.”
그녀가 발을 굴렀다.
쿵, 하는 울림과 함께 그녀의 발밑에서부터 다른 풍경이 공간을 잠식해나간다.
몸을 일으킨 러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까지 던전의 지하 공동에 있던 그는, 이제 어느 들판에 서 있었다.
하늘에는 황혼의 붉은 빛이 찬란하게 구름을 찢으며 지평선에 살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구름 아래에 까마귀들이 까악 거리며 울고 검은 깃털을 들판에 흩뿌렸다.
들판 아래에 수많은 시체들이 있었다. 하나 같이 말뚝에 꿰인 시체들. 엉덩이를 뚫고 입으로 빠져나온 나무 말뚝의 끝은 피에 절여져 본래 색을 잃은 지 오래다.
짙은 혈향이 사방에서 진저리를 쳤다. 그 냄새에 홀린 까마귀들은 하늘을 빙빙 돌기만 할 뿐 시체에 내려앉아 눈알이나 내장을 파먹지 못했다.
한 존재 때문이다.
검은 머리카락을 얼굴 앞에 드리우고, 시체 더미에 앉아있는 여인. 핏빛의 갑주를 두르고, 하얀 손에는 뱀처럼 길게 늘어서있는 사복검이 쥐여져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시체 더미에서 일어났다. 시체더미가 우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지더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는 이스갈드의 적합한 지배자. 피의 왕. 석양 끝에서 나타나는 자. 새벽을 찢는 송곳니, 이스칼리아다. 인간, 너의 이름을 말해라.”
러셀은 목을 한 바퀴 돌렸다. 뚜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방자한 모습에 여인이 눈을 찌푸릴 때, 그가 말했다.
“러셀.”
이스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러셀. 그대를 먹겠다. 내 모든 백성들을 먹어치운 것처럼, 그대 또한 내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게 해주마.”
아, 그러셔. 러셀은 피식거렸다.
“그래. 어디 네 피가 이기나, 내 피가 이기나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