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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73화 (74/225)

73화 던전

남자는 네 발로 기다시피 하며 다시 무리에 합류했다. 그가 자신을 구해준 어린 백발의 소녀에게 펑펑 울며 고마움을 표했다. 소녀가 말했다.

“뒤로 가.”

“네, 네!”

아엘라시스는 다시 손을 들어 냉기의 창들을 만들었다. 그 수는 수십이었고, 그만큼의 괴물들이 좁은 길목 사이에서, 담장 위에서, 건물의 창문에서, 환히 열린 식당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인간의 외견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목에 난 상처와 초점 없는 눈, 비척거리는 팔다리가 그들이 이미 죽었음을, 그리고 괴물이 되어버렸음을 증명했다.

아엘라시스는 낮의 영지를 기억했다. 그 활기참을, 싱그러움을, 사람들의 호객 소리와 웃음을 기억했다. 그들 모두는 이제 저 지하에 처박혔다. 이제 아무도 웃지 못하리라.

일순 그녀의 몸이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가운데, 아엘라시스는 어린 소녀의 모습에서, 그보다 성숙한 여인의 몸으로 변화했다.

그녀는 지금의 모습이 일시적인 것임을 알아차렸다. 러셀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넣어준 마력과, 자신의 기분이 용의 몸에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하지만 달라진 시야의 눈높이는 만족스러웠다. 아엘라시스는 지금의 자신을 러셀이 봐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카아아악!”

“캬흐아아크아!”

생각은 괴물들의 덮침으로 끊어졌다. 그리고 아엘라시스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장난처럼 손을 까닥였다. 그 결과는 장난스럽지 않았다. 쏜 화살보다 빠른 속도의 얼음 창들이 괴물들의 몸에 틀어박혔다.

얼음 창은 쏘아지는 대로 다시 허공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다시 괴물의 몸에 틀어박혀 몸을 꽁꽁 얼어붙였다.

순식간에 길 위에는 얼음 동상 수십 개가 자리했다. 괴물들은 금방이라도 냉기를 떨쳐내고 달려들 것처럼 몸을 떨었다. 그런 괴물들을 보며, 아엘라시스는 오른 손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때마침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했다. 그것은 비구름으로 만들어지기까지는 시간도, 양도 부족했다. 그러나 한 용의 의지에 따를 정도는 되었다.

갑자기 소녀가 여인으로 변하고, 얼음 창들이 사방으로 쏘아지며 괴물들을 얼린 상황에서 더 놀랄 것이 없으리라 여겼던 영지민들은 눈을 감았다. 세상일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는 자명한 진리를 되뇌이며.

콰르르릉-!

벼락이 내리치며 얼어붙은 괴물들을 산산이 부쉈다.

아엘라시스는 씩 웃고는 알아서 걸어가고 있던 크라이의 등에 훌쩍 올라탔다. 안장도 제대로 메어있지 않았지만, 용의 신체와 감각은 인간과는 차원이 달랐다. 크라이는 태평하게 어린 주인을 태웠다.

그녀는 한순간에 확 높아진 시야에서 올려다보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모두 뛰어! 이렇게 거북이처럼 가다가는 계속 괴물들이 달려들 뿐이야. 전속력으로 광장까지 간다!”

사람들은 우와아- 소리를 지르며 다리를 놀렸다. 아엘라시스는 길쭉해진 다리로 크라이의 옆구리를 찼다. 크라이가 앞발을 치켜들며 울다가 바닥을 박찼다.

달리는 와중 곳곳에서 괴물들이 날아들었다. 일부는 아직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일부는 이미 그 외형이 괴물 그 자체였다. 덩치는 성인 남성보다 더 커지고, 아래턱이 좌우로 갈라지며 두 줄기로 갈라지는 뱀 같은 혀를 날름거렸다.

손가락에서 튀어나온 손톱은 그 자체로 칼날이었다. 하지만 괴물들의 습격들은 모두 말을 타고 달리는 한 여인의 손길에 분쇄되었다.

“하! 하! 달려, 크라이!”

아엘라시스는 말을 독려하며 달리는 사람들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시야는 넓게 자리잡아 사각에서 뛰쳐나오는 괴물들을 포착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얼음 송곳, 얼음 창이 날아가 괴물들을 꿰뚫고 벼락이 이어나가 괴물을 산산조각냈다.

***

광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빽빽이 몰려 있었다. 영지민들을 중심으로, 바깥으로는 경비대원들과 마탑의 마법사들이 서서 전선을 형성했다.

마법사들은 허약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많지만, 의외로 신체의 수련에도 많은 힘을 기울이는 사람들이다. 정신은 육체에 깃들어있는 것이다. 육체가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정신력은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사십 대의 나이임에도 젊은이 못지않게 움직이며 마법을 난사하는 루넬바스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그는 지팡이를 힘 있게 휘두르며 불꽃의 구를 만들었다.

허공에서 타오르는 불꽃의 구에서, 그보다 작은 불꽃들이 빠져나오더니 그대로 화살이 되었다. 불꽃 화살들이 달려드는 괴물들의 아가리에 꽂히며 폭발했다.

마탑의 다른 마법사들, 수련생들도 마력을 쥐어짜내며 주문을 외우고 마법을 구현했다. 파괴적이진 못하더라도 그들의 마법은 분명 도움이 되었다.

괴물들은 갑자기 미끄러워진 바닥에 넘어져 동족들끼리 부딪쳤다. 무너진 잔해와 돌들이 한데 모여들어 골렘이 일어서고, 바람이 뭉쳐 날카로운 칼날이 되었다.

이블린이 주문으로 한 괴물의 가슴팍을 우그러트리고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주위는 환했다. 영지 곳곳에서 작은 화재가 일어난 탓도 있지만, 마법사들이 하늘 여기저기에 불의 구를 띄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붉은 잔영이 사람들과 바닥, 건물들 사이에서 일렁거렸다. 빛이 강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둠 또한 짙어진다. 괴물들은 많은 수가 줄었지만, 아직 그들을 조종하는 흡혈귀들은 해치우지 못했다.

러셀이 살린 지라크의 말에 따르면 디섯은 된다는 소린데. 그때, 하늘 저편의 구름이 번뜩이더니 섬광과 함께 우레를 쏟아냈다. 벼락이었다.

이블린도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는 마력의 격류가 느껴졌다. 누구지? 러셀인가?

그리고 그 벼락을 불러낸 주인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녀의 뒤로 수십 명은 넘는 사람들이 땀범벅이 되어 같이 뛰고 있었다.

“아엘라시스?”

이블린은 확신하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말에 타고 있는 여인은, 분명 그 흰 색 머리카락이나 인형 같은 외모나 아엘라시스와 닮았다. 하지만 헤어지기 전까지는 분명 소녀의 작은 몸이었는데?

그녀는 가로막는 괴물들을 냉기의 창과 벼락의 그물로 찢어버리며 광장에 도착했다. 도저히 아까 그 소녀가 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과연 러셀이 데리고 다니는 이유가 있었던 건가, 싶었다.

크라이를 천천히 걷게 한 아엘라시스도 이블린을 발견했다.

“에블린?”

“······이블린이야. 아엘라시스, 맞지? 그 모습은 어떻게 된 거야?”

아엘라시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설명하기 싫어.”

“······그래.”

마법은 신비다. 그녀가 마나를 다루고 마력으로 가공하여 몸속에 회로를 만들어 일주시킨 후 세상에 쏟아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마법은 신비였다.

또 그녀는 말하기 싫어하는 자를 두고 억지로 캐묻는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 어울리는 행동도 아니기도 했다.

하지만 루넬바스는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행동을 실천할 수 있는 마법사였다.

“네가 그 꼬마애라고? 어, 어떻게?”

루넬바스는 화등잔해진 눈으로 아엘라시스의 전신을 훑었다. 그 눈길에 불쾌해진 아엘라시스는 크라이를 이끌고 저편으로 걸어 가버렸다.

루넬바스가 다급히 뒤따라가려 했지만, 이블린이 막았다.

“잠시만요, 루넬바스 님.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잖아요.”

“상황이 아니라니? 어떻게, 이틀 전까지만 해도 작은 소녀였잖으냐? 그런데 왜 지금은······.”

그때 이번에는 다른 길에서 새로운 무리들이 등장했다. 갑옷을 입고 은빛 칼을 든 강직한 얼굴의 노인, 라몬 에란디스였다. 그의 곁에는 기사 둘과 데보라, 병사들, 그리고 지라크가 있었다.

다른 편에서는 경비대장 젠슨 오트발과 경비대원들, 레메론, 페일, 카이가 오고 있었다.

영주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일단 영지민들은 모두 영주성으로 보낸다. 호르고! 자네가 병사들과 함께 영지민들을 성으로 이끌게.”

기사 하나가 고개를 숙이고 달려갔다. 영지민들이 대로를 따라 피신하는 과정을 보던 영주가 지라크에게 말했다.

“자네는 흡혈귀라고 했지. 혹시 자네와 같은 흡혈귀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겠나?”

“그건 힘듭니다. 하지만 뱀피르들의 위치는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뱀피르 주위에는 통솔하고 있을 흡혈귀가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남은 자들은 몇 정도로 보나?”

“제가 알기로 저를 제외하면 다섯입니다만······”

“넷이야.”

페일이 다가와 말했다. 젠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엘프들의 도움으로 흡혈귀 하나를 처치했다고 알렸다. 라몬 에란디스 영주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아직도 네 명의 흡혈귀가 있다는 뜻이군. 그들의 목적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지라크가 대답했다.

“저희들, 그러니까 그들은 소모품입니다.”

“소모품?”

“네. 우리의 목적은 그저 피를 뿌리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한 많이.”

지라크의 말에 전투를 치뤘던 모두가 현장을 떠올렸다. 시체만 가득한 바닥. 시체와 같이 있어야 할 피는 한 방울도 없이 사라져 있던, 괴기스러운 살해의 현장.

턱을 짚고 있던 이블린이 말했다.

“흡혈귀의 본질은 결국 혈액에 있습니다. 그들은 피 속에서 태어나고, 피 속에서 저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피가 필요한 경우라면, 보통 의식이나 제물로서의 이용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의식, 제물?”

“부활이죠.”

레메론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너무······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지금에서야 기억이 났습니다만. 800년 전 쯤에, 이 근방에 강력한 군주가 통치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의 고대 왕국들과도 자웅을 겨울 정도로 강력했던 왕······. 결국 왕국들의 연합 공격에 스러졌고, 아무도 살지 못하는 땅이 되었다는······. 백성과 땅을 잃은 군주는 결국 악마와 계약을 해서 괴물이 되었다는······. 그런 전설이 지금 막 생각났습니다.”

“그 괴물이?”

“아마 흡혈귀의 시조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그때 루넬바스가 손가락으로 지라크를 가리켰다.

“잠깐.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저 남자가 자신을 흡혈귀라고 했던 것 같은데.”

가리킴에서 그치지 않은 루넬바스는 바로 주문을 외웠다. 머리 위에 불꽃의 구가 형성되어 위협적으로 타올랐다.

라몬 에란디스가 다급히 앞으로 나섰다.

“그만! 마스터 루넬바스! 이 자는 흡혈귀이긴 하나 우리 편이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십니까?”

“이 자는 용살자 러셀에 의해 본래의 주인에게서 벗어난 자요. 그리고 지금은 우리를 도와 영지 내의 다른 흡혈귀들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오.”

“믿을 수 없습니다. 아니, 그 러셀이라는 자는 어디 있단 말입니까?”

루넬바스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말했다.

“제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만. 설마 이 상황에서 저 혼자 살겠다고 꼬리를 말고 도망간 건 아닌지―.”

“말 조심하시오, 마스터 루넬바스.”

루넬바스는 라몬 에란디스를 쳐다봤고, 놀랐다. 영주는 시퍼런 눈에서 불길을 토하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지금 이 모든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홀로 떠난 참이오. 내 아들을 영면에 들게 도와준 자이기도 하고, 이 영지와 영지민들을 지키고 있는 명예 있는 기사이기도 하오. 그를 모욕하지 마시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정정한 라몬 에란디스의 목소리는 맹수가 그르렁 거리는 듯 했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칠 뻔 했던 루넬바스는, 곧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원······.”

다시금 주변을 보며 작은 동의나마 얻으려 했던 루넬바스는, 자신을 형형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기사들, 두 명의 엘프, 오크 하나, 백발의 여인, 친우이자 라이벌의 조카의 시선을 보게 되었다.

루넬바스는 약간 하얘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때가 좋지 않은 듯 했다. 마법적인 능력 말고도 정치적인 감각도 탁월해 마스터의 자리에 오른 루넬바스는 그를 본능적으로 느꼈다.

라몬 에란디스는 지시를 내렸다. 그의 지시에 맞춰 사람들은 삼삼오오로 나뉘었다. 지라크의 추적 능력을 바탕으로 최대한의 속도를 유지하며 흡혈귀를 잡아야 했다. 그게 조금이라도 러셀을 돕는 길이었다.

***

“여긴가?”

바람처럼 달려 러셀은 고든의 안내를 따라 영지의 서쪽 외곽에 이르렀다. 던전은 영지의 외곽을 넓히는 공사에서 숲을 개간하다가 발견됐다고 했다.

나무를 자르고 땅을 파내던 도중 인부의 삽에 걸린 것이었다. 그 후 완전히 정리된 땅에서 라몬 에란디스는 지하로 통하는 입구, 던전을 발견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시작됐다.

던전 주위는 진입 금지를 위한 바리케이드와 장해물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폐쇄 명령이 내려지고 취해진 조치다.

영주는 아마 이때부터 아들의 상태와 영지 내에 암약하던 것을 똑바로 바라보기로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했지만.

“그렇습니다. 던전의 탐색에 힘을 기울이고, 마탑의 마법사들도 초빙했지만 소용 없었습니다. 던전은 날이 갈수록 길이 복잡해지고 해괴한 함정들이 나타났습니다. 마치 스스로 살아있는 것처럼 구조가 연일 바뀌어서, 결국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조치가 내려진 것입니다.”

러셀은 지하로 향하는 입구와 계단을 내려다봤다. 누구라도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마련된 입구 같다. 하지만 계단의 어느 지점 부터는 칠흑 같은 암흑이 넘실거렸다.

고든이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혼자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단신으로는, 마법사라도 같이 가야하는 것이 아닐지.”

“괜찮소.”

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동이 트려면 아직 멀었다. 짙게 흐르는 구름들 덕에 별빛 하나도 비치지 않는, 깊은 어둠이 주위에 만연했다. 영지 내에 가득했던 피비린내는 이곳에서 하나도 나지 않았다. 그것이 더 섬뜩했다.

러셀은 코트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 무시무시한 도끼를 꺼내려나, 하고 기대하던 고든은 그가 담배 한 개피를 들자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러셀은 태평하게 마력으로 불꽃까지 만든 다음 담배 끄트머리에 댔다. 한 줄기 연기가 소담스럽게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럼 가보지.”

그는 고든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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