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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72화 (73/225)

72화 붉은 밤 (3) 유료화 시작

라몬 에란디스는 일어섰다. 그리고 어둔 밤하늘과, 그런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불길과, 바닥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보았다.

괴물들보다 병사들, 영지민들의 죽음이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건 지금 이 순간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문득 그는 고개를 돌려 한 남자를 찾았다. 자신이 직접 초빙했던 마법사들로부터 용살자라는, 믿기지 않는 칭호를 가진 남자를.

그는 뒤편에 쓰러져 있는 오크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문신이 새겨진 갈색 피부 오크가 누워서 하늘을 보며 숨을 색색거리고 있었다. 카이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구나. 카이.”

“아르큘 대장.”

아르큘 대장이라 불린 오크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힘겹게 돌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오크의 눈은 흐려져 있었고, 초점이 맞지 않았다.

“괴물들은?”

카이는 고개를 들어 러셀과,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영주 무리를 쳐다봤다. 그리고 살아남은 한 줌의 아르큘 길드원들도. 그러다가 다시 대장을 봤다.

“다 죽었습니다. 일단 여기 있는 놈들은요.”

“길드원들은?”

“목숨 질긴 놈들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래, 네가 살아있으니까······. 쿨럭.”

아르큘은 한 움큼은 되는 피를 토했다. 카이가 그를 일으키려 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아르큘은 손을 들더니 카이의 명치 쯤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르큘의 갈색 피부에 새겨져 있던 문신들이 카이에게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검은 문양, 글씨, 그림들은 물 속에서 흐느적거리는 부평초 같은 것이 되어 카이에게 흘러갔다. 카이는 기함하며 말했다.

“대장! 뭐하는 겁니까! 당장 멈추십시오!”

카이는 말로만 하지 않고 몸을 비틀려했다. 그럴 수 없었다. 카이는 자신의 몸이 석고상처럼 딱딱해져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대장의 손이 닿은 순간부터, 카이는 움직일 수 없었다.

아르큘이 아직까지 숨이 붙어있을 수 있는 이유는 문신 덕분이었다. 이제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불칸의 대전사. 하지만 그는 확고했다.

눈 몇 번 깜박할 사이에 문신들은 카이에게 완전히 옮겨갔다. 그리고 천천히 스며들었다. 문신과 상처에서, 이제 상처밖에 남지 않은 대장이 말했다.

“이제 네가 대전사다. 카이 그란손. 내 하잘 것 없는 목숨을 부지하겠다고 용쓰지 마라. 다른 이들을 살리고, 원한다면 길드원들의 복수를 해라. 그러나 복수에 매몰되지는 마라. 그 다음은,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

“대장!”

아르큘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입에서 길게 튀어나와 있는 어금니가 좌우로 조금 벌어졌다.

“그리고 네 그 웃기는 어금니도 고쳐보고. 네가 말할 때마다 웃겨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마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일순, 그의 눈에 다시 빛이 돌아왔다. 고통과 출혈에 떨던 몸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아르큘은 옆에 서 있는 러셀을 올려다봤다. 초점이 잡힌 선명한 눈에 러셀의 모습이 비쳤다.

“들었소. 그쪽이 카이를 이렇게 만들어줬지. 고맙소. 덕분에 신나게 웃었으니.”

러셀은 말없이 그를 내려다봤다. 아르큘은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불칸. 내가 갑니다.”

아르큘의 심장이 멈췄다. 카이는 고개를 떨궜다. 그런 그에게, 라몬 에란디스가 천천히 다가왔다.

“미안하네.”

라몬 에란디스가 카이에게 말했다.

“자네가 경비대에게 찾아왔었다는 것을 아네. 미라 같이 변한 시체들. 난 짐작하고 있었지만, 내 짐작이 사실로 판명 나는 게 두려웠네. 그래서 눈을 돌리고, 던전의 발굴과 비밀을 파헤치는 데 힘을 기울였어. 내 아들이 그렇게 되었다면, 그 반대로 다시 되돌리는 방법도 던전에 있지 않을까 하고. 용서와 보상은 그때 제대로 하자고, 마음편하게 생각하고 말았지.”

그는 고개를 떨구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무수한 시체들을 슬픈 눈으로 바라봤다.

“결국은, 이리 되고 말았지만.”

“되었소.”

카이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뒤편에 쓰러져 있는 서인족 톰닌과 묘인족 스튜어트를 바라봤다. 마침 데보라가 둘의 용태를 살피며 치유의 빛을 흘리고 있었다. 카이의 시선을 느낀 데보라가 말했다.

“피를 많이 흘렸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네. 정양하면 괜찮을 거야.”

카이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다시 얼굴을 든 그의 눈은 분노에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 괴물들, 아직 바깥에 많이 있소?”

많이 있었다. 지금도 아스라하게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바람결을 타고 풍기는 피 냄새가 증명했다. 카이는 대답을 듣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문득 그가 러셀 앞에서 멈췄다.

“우리 길드원들을 구해줘서 고맙소.”

“별말씀을.”

카이는 훌쩍 자리를 벗어났다. 굳게 쥔 주먹에 붉은 기운이 일렁거리고, 스며들어 사라졌던 문신들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커다란 덩치의 오크는 골목길의 어둠으로 파고들었다.

러셀은 영주에게 걸어가 말했다.

“이 소요를 없애기 위해선 그 던전이라는 곳을 공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내 생각도 그렇소. 하지만 어제부터 던전은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 되었소. 이제까지 쉽게 들여보내줬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어디 있는지 안내만 해주시면 됩니다.”

“알겠소.”

러셀은 지라크를 바라봤다.

“넌 최대한 뱀피르들을 죽이고, 너와 같은 흡혈귀들을 저지해라.”

“알겠습니다.”

그때, 기사 하나가 아직 칼집에 넣지 않은 칼을 들어 지라크를 겨눴다.

“잠깐, 저자는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피를 조종하던데. 그렇다면 흡혈귀와 같은 괴물 아닙니까?”

기사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흠칫하며 물러섰다. 기사 셋과 병사들, 길드원들이 지라크를 보며 무기를 쥐었다.

러셀이 말했다.

“맞소. 하지만 지금 그는 본래 주인을 따르지 않고, 내 명령을 따르고 있소. 당신은 피를 조종하는 것만 보고, 그 피로 괴물들을 죽인 것은 보지 못한 것이오?”

“괴물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당신 또한 믿을 수 있는 자임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고든!”

라몬 에란디스가 고함을 쳤다.

“영주님. 저는 영주님의 기사로서 영주님을 보호하고 영지를 수호할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제 불경을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고든은 러셀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법사들은 당신이 용을 죽인 사람이라는 허무맹랑한 말을 했습니다. 물론 방금 당신이 괴물들을 죽이는 실력은 저조차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러셀은 더 이상 듣지 않고 코트 안주머니에서 오랫동안 꺼내지 않았던 것을 꺼냈다. 그건 언젠가 제국의 황녀가 주었던 제국의 인장이었다.

“이, 이건?”

효과는 확실했다. 러셀은 제국이라는 이름이 이 시대에서, 그리고 제국과는 거리가 있는 이 영지에서조차 통용된다는 사실을 생각 한 곳에 묻어두었다. 러셀은 라몬 에란디스에게 말했다.

“이 남자의 이름은 지라크. 에란디스 영지의 뒷골목 토박이였고, 에드몬드에 의해 타의로 흡혈귀가 된 사람입니다.”

라몬 에란디스는 지라크를 쳐다보았다. 지라크는 고개를 약간 숙임으로서 영주에게 인사했다.

“하지만 지금은 제 명령을 따르고 있고, 원한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의 권한을 제게 대리하고 있습니다. 방금도 보았다시피 지라크의 능력은 다른 흡혈귀들과 같습니다. 뱀피르라는 이 이형의 괴물들을 조종하고, 피와 관련된 주문을 쓸 수 있습니다. 이자가 참전한다면 지금의 소요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기사들과 병사들은 아까보다 조금 더 경의와 배려 어린 동작이 되어 러셀을 바라봤다.

라몬 에란디스 영주도 마법사들이 용살자라는, 아주 허무맹랑한 말을 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주는 영주의 일을 해야하는 사람이었다.

“흡혈귀라면 사람의 피를 먹어야 할 텐데. 다른 사람들이 무수한 피를 흘리고 있는 지금, 흡혈귀로서의 충동이 발현되진 않겠소?”

러셀은 지라크를 쳐다보았다. 지라크가 말했다.

“그때 이후부터 인간을 향한 흡혈 충동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짐작일 뿐이지만, 주인님의 피가 제 충동을 억제하거나, 다른 효과를 내고 있는 것 같지 않나 생각합니다.”

러셀은 이해했다. 그는 영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만약 일어난다면, 제가 책임지고 죽이겠습니다.”

라몬 에란디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러셀의 눈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던전은 어디에 있습니까?”

“영지 외곽에 있네.”

***

“으아아아!”

“카아아악!”

사람의 비명과 괴물의 괴성이 묘한 화음을 이루며 울렸다. 비명과 건물이 무너지는 소음에 놀란 영지민들이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건물의 그림자에서 뛰쳐나오는 괴물들을 볼 수 있었다.

낮의 활기차던 영지는 이제 죽음과 신음, 핏물로 자신을 치장하려는 듯 했다. 하지만 그를 막는 이들 또한 적지 않았다.

“밀어붙여! 창을 찔러라!”

“턱! 턱 조심해!”

“악! 내 팔!”

퇴근했던 경비대원들은 급작스러운 습격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준비를 갖췄다. 하지만 뱀피르들은 강력한 괴물들이었다. 라몬 에란디스 영주가 경비대원 모두에게 지급한 단단한 갑옷들이 아니었으면 그들은 종잇장처럼 찢겨져 나갔을 것이었다.

뱀피르들의 수 자체는 많지 않았지만, 그 덩치와 날카로운 칼날 손톱의 무시무시한 거리 때문에 경비대원들은 쉽게 다가갈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지원군이 있었다.

레메론은 지붕과 지붕을 가벼운 몸놀림으로 넘나들며 동시에 화살을 날렸다. 공중에서의 곡예에 가까운 동작이었지만, 화살은 무리 없이 경비대원 하나를 덮치려 들던 괴물의 머리를 꿰뚫었다.

“깩!”

뇌가 곤죽이 된 뱀피르는 일순 모든 시야와 감각을 잃었고, 그걸 수복하기도 전에 다른 경비대원들의 창과 칼에 찔려 난자당했다. 심장과 머리가 파괴된 뱀피르는 더 이상 재생하지 못하고 죽었다.

화살은 단 한 발로 끝나지 않았다. 숨도 쉬지 않고 날리는 화살들은 그대로 뱀피르들의 머리나 심장에 틀어박혔다.

어떤 생명체든 뇌와 심장은 급소 중의 급소고, 재생력이 있는 괴물이라 하더라도 수복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경비대원들은 레메론이 만들어준 시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레메론은 위에서의 지원사격이 얼마나 전황에 도움이 되는지를 몸소 알려줬다. 경비대원들은 수십 번은 족히 넘나드는 사선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여기 끝났습니다!”

경비대장, 젠슨 오트발이 지붕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이 구역의 괴물들은 모두 격퇴했다는 신호였다.

그때, 경비대원들의 다리 아래에 흐르던 핏물들이 서서히 솟구쳤다. 경비대원들은 전투가 끝났다는 안도감에 무기를 늘어트린 채 방심하고 있었다.

사각에서 들어오는 공격이 가장 위협적인 법. 핏물들이 날카로운 송곳의 모양으로 조형되어 발출되기 직전이었다.

“끄아아아악!”

커다란 비명 소리에 경비대원들의 고개가 다급히 돌려졌다. 아무도 신경 쓰지 못했던 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흡혈귀 하나가 가슴을 뚫고 나온 칼날을 부여잡고 있었다.

흡혈귀는 등뒤에서 자신을 찌른 습격자를 찾기 위해 얼굴을 이리저리 돌렸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흡!”

기합소리와 함께 흡혈귀의 상반신이 쩍 벌어졌다. 가슴뼈 안의 심장이 드러났고, 습격자는 칼을 날렸다. 거리가 모자랐다. 흡혈귀는 빠르게 가슴을 수복시키고 습격자, 페일에게 달려들었다.

페일이 이를 갈며 칼을 곧추세웠을 때, 그녀의 지원군이 지붕 저편에서 화살을 날렸다.

흡혈귀는 피를 일으켜 세우며 장막을 만들었다. 그러나 마력이 담긴 화살은 피의 장막을 박살내며 바닥에 꽂혔다. 단단한 판석이 쾅쾅 바스러졌다.

그 위력에 놀란 흡혈귀가 피를 다시 끌어모아 둥근 방패를 만드는 한 편, 다른 피로는 커다란 송곳을 만들어 지붕으로 날렸다.

레메론이 몸을 날리자마자 지붕 한쪽이 터져나갔다. 그때 기회를 노리던 페일이 몸을 땅에 닿을 정도로 낮게 숙인 채 달려들었다.

엘프의 날카로운 검이 흡혈귀의 다리를 갈랐지만, 러셀의 도끼와는 달리 그냥 강철 칼날이었기 때문에 잘린 즉시 재생해버렸다. 트롤과 마찬가지로 이 괴물들은 철퇴나 메이스 같은 둔기 계열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그걸 깨달은 건 경비대장 젠슨 오트발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자신의 허리춤에 메어놓았던 철퇴를 페일에게 던졌다.

“받으십시오!”

빈손으로 철퇴를 잡은 페일이 허리를 크게 돌리며 커다란 원을 그렸다. 그 원의 반경에 있던 흡혈귀가 허리에 철퇴를 직격으로 맞으며 나가 떨어졌다.

“크악!”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던 그에게, 자리를 잡은 레메론이 수십 발의 화살을 날렸다. 흡혈귀는 순식간에 화살꽂이가 되어 벽에 고정되었다.

“하압!”

페일의 검이 흡혈귀의 목을 베었고, 이어 발차기가 머리를 날려버렸다. 머리는 위로 치솟아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직도 꿈틀거리는 그 머리에, 엘프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헉, 헉, 헉.”

페일은 숨을 몰아쉬다가 겨우 호흡을 되찾았다. 도대체, 레메론과 자신 둘이 달려들어 겨우 이긴 흡혈귀를 그 인간은 혼자서 이겨버리다니. 그녀는 러셀이라는 인간의 강함이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흡혈귀의 뇌를 자근자근 밟아버리더니 자신을 창백한 얼굴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휴우. 왜?”

“······아니오. 빨리 다음 구역으로 갑시다.”

젠슨 오트발은 몸을 부르르 떨며 칼을 들고 앞장섰다. 그리고 그들이 막 진입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우오오오-!”

우레와 같은 고함을 지르며 두 주먹을 휘두르는 거구. 전신에 어린 붉은 기운에 뱀피르들은 제대로 된 힘을 쓰지 못했고, 그대로 피떡이 되어 죽었다.

“불-칸!”

이제는 잊혀져가는 신을 다시 부르겠다는 듯 힘찬 외침을 뿜어내는 자는 오크, 카이였다. 세 마리의 뱀피르들을 곤죽으로 만든 카이가 숨을 헐떡이다가 경비대원과 페일을 발견했다.

“엘프.”

“오크.”

둘은 서로를 쏘아봤지만, 처음 만났을 때처럼 으르렁거리진 않았다. 그러기에는 상황도, 때도 맞지 않았다. 멀리 지붕에서 활을 들고 있던 레메론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젠슨 오트발이 카이를 알아보고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카이! 너도 왔구나. 그런데 아르큘과 다른 길드원들은?”

“···젠슨. 아르큘은 죽었다. 우리 길드도 와해됐고.”

젠슨의 표정이 굳었다.

“······미안하다. 그때는 우리도······.”

“됐어.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야. 난 떠난 배를 향해 손을 뻗는 행동에 감성은 있어도, 의미는 없단 사실을 안다. 지금은 다른 일에 신경 쓰자.”

그리고 카이의 말이 끝나자 그림자들 속에서 괴물들이 기어나왔다. 그들은 아직 완전히 변형되지 않은 뱀피르들이었다. 흡혈귀 인자만 주입당한 피해자들. 눈에 초점은 사라지고, 질질 흐르는 침에서 더 이상의 이성은 찾아볼 수 없다.

젠슨 오트발은 어제까지 평범한 영지민이었던 자들을 향해 칼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렇게 원통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해야만 했다. 그는 경비대장이니까.

“알겠다. 카이, 우리도 돕겠다. 너도 도와다오.”

카이는 말없이 주먹을 들어올렸다. 뜻은 명백했다. 사람들과 괴물들이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괴물들은 자신의 신체를 돌보지 않고 뛰어들었고, 그들을 주먹과 창, 칼, 화살이 마중 나갔다.

다시 한 번, 괴성과 비명, 신음, 피가 어우러졌다.

***

상대적으로 외곽에 가까운 곳에 집이 있거나, 여관이나 식당을 운영했던 영지민들은 중앙으로 몰렸다. 로라와 로빈, 루크 일행들도 영지 중앙, 광장으로 가고 있었다.

“으아악!”

건물과 건물, 벽과 벽 사이의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사냥감을 노리던 괴물들이 길쭉한 팔을 뻗어 사람 하나를 낚아챘다.

“살려줘!”

남자가 비명을 질렀지만 영지민들은 얼어붙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때 아닌 밤중에 잠을 자다가 뛰쳐나온 그들은 아직도 이게 꿈인지, 악몽인지 구분 못하는 얼굴들이었다.

그때 허공에 냉기가 휘몰아치더니 하얀 창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그건 모두 세 개였고, 엄청난 속도로 쏘아졌다. 남자를 끌고 가려던 괴물이 머리와 양 어깨에 창을 얻어맞고 뒤로 나자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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