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붉은 밤 (2)
***
크고 넓은 영지의 대로와 달리, 골목길은 좁고 복잡했다. 멋모르고 들어온 초행자라면 바로 길을 잃어버릴 것이었다.
고대의 도시 위에 세워진 여타 영지나 도시들이 그렇듯, 중앙은 깔끔하게 구획과 건물, 길들이 잘 정비되어 있는 반면, 외곽으로 갈수록 계획되지 않은 건물들이 난잡하게 세워져 있었다.
영지의 규모가 팽창하면서 이리저리 잡초처럼 돋아난 건물들과 담장은 안 그래도 복잡한 뒷골목을 거의 미로에 가깝게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골목을 누비고 다녔던 지라크는 손바닥을 보는 것처럼 길을 찾아서 달렸다. 문득 그가 자신의 새 주인이 잘 따라오나 싶어서 고개를 돌렸을 때, 지라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두 눈에서 섬뜩한 자청빛을 흘리는 러셀이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이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다 왔나?”
“아, 아닙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그래. 아, 그리고 궁금했던 게 있는데. 그 리베스, 리도스 자매는 너와 같은 흡혈귀 아닌가? 그런데 뱀피르와 비슷하게 육체를 변신시키던데. 다른 뱀피르들처럼 이성을 잃은 것 같진 않았고.”
지라크가 말했다.
“아, 그건 진혈의 특성에 따라 달라집니다. 저는 그녀들만큼 강한 육체를 가지지 못한 대신 뱀피르를 통솔합니다. 대신 그녀들은 뱀피르들보다 단단하고 강력한 육체를 얻습니다. 대신 저처럼 피를 다루진 못합니다.”
개미 같이 병과가 정해지는 것 같았다. 납득한 러셀은 달리면서 주위를 훑었다.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시체들이 보였다. 피가 다 빨려나간 미라 같은 꼴이었다.
시체는 있지만 피는 한 방울도 없었다. 그런데 거의 모든 공간에서 피비린내가 올라오고 있었다. 피는 한 방울도 보이지 않으나 냄새는 그 어느 때보다 선연했다.
하늘에는 여전히 달이 뜨지 않았고, 별들조차도 자신의 빛을 가리는 듯 했다. 달리길 잠시.
러셀은 밤하늘 구석을 붉게 물들이는 불기운을 발견했다. 그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은 좁은 골목길을 주파해, 한 넓은 대로에 들어섰다.
지라크는 불기운이 하늘로 승천하고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지라크가 말했다.
“······아르큘 길드입니다.”
길드의 문은 훤히 열려 있었다. 그리고 불이 나 있었다. 나무 목재로 만들어진 건물들이 불길에 휩싸여 타올랐다.
안쪽에서는 괴물들과 사람들이 얽혀서 싸우고 있었다. 러셀은 횃불을 들고 뛰어다니는 길드원을 보며 상황을 짐작했다.
어두운 밤이라 시야가 확보되지 않으니 자기네 건물들에다 불을 질러버린 것이었다.
얼마나 급박한 상황이었는지 건물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창문을 깨고 떨어지기도 했다. 그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땅을 기다가 괴물들의 날카로운 손톱에 그대로 명을 달리했다.
전황은 한 눈에 봐도 괴물 쪽이 우세했다. 기실 러셀이 도끼로 토막내버렸던 뱀피르들은 그렇게 쉬운 괴물들이 아니다.
근력은 나무를 찢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손에서 나오는 손톱들은 웬만한 칼날보다도 예기가 날카롭다. 거기다 흡혈귀라는 특성 상 재생력도 있는데다가 피를 빨아먹으면 더 난폭해져서 날뛰기까지 해대니, 그야말로 일반 사람들 입장에서는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러셀은 악몽에게 더한 악몽이 되어줄 수 있는 남자였다.
“지라크. 아까처럼 뱀피르와 그 괴물들의 피를 조종할 수 있나?”
“예. 주인님의 피는 강력합니다. 아까보다 더 수월하게 조종하고,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 괴물만 골라 죽이고, 사람들을 살려라.”
“알겠습니다.”
러셀은 지라크와 함께 당장 그 난장판에 뛰어 들었다. 그의 외날 도끼에 아르큘 길드원 하나를 붙잡아 집어삼키려던 뱀피르 하나가 반으로 토막나 죽었다.
신체의 모든 구멍에서 물을 쏟으며 아르큘 길드원은 눈을 꾹 감고 곧 닥칠 고통에 몸을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닥친 건 뺨을 훑는 서늘한 냉기였다. 그건 사방에서 타오르는 불길과는 완전히 다른 감각이었다.
저도 모르게 눈을 뜬 길드원은 목이 날아간 뱀피르를 보며 털썩 주저앉았다. 바지가 축축했지만 그런 걸 느낄 정신도 없었다.
길드원 하나를 살린 러셀은 곧바로 다음 사냥감을 찾아 바닥을 박찼다. 완전히 깨어난 투쟁심이 사방의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백색의 도끼가 어둠 속에서 스산한 궤적을 그어나갔다.
지라크 또한 흡혈귀의 지배력으로 저급한 뱀피르들을 터트렸고, 거기서 나온 피로 무기를 만들어 날렸다. 아까 러셀을 상대할 때 만들었던 핏빛의 창과 검, 철퇴가 사정없이 같은 피를 지니고 있는 뱀피르들을 물리쳤다.
학살당하기 직전에서 겨우 살아난 아르큘 길드원들은, 부르지 않았던, 또 기대할 수도 없었던 지원군의 활약에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그 의문에 오래 빠져 있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의문에 대한 답은 차후로 미루는 것이 편하다. 선실행 후평가는 언제나 삶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것이 죽기 직전의 상황이었다면 더더욱.
양떼 사이를 휘젓던 늑대들은 이제 자신들이 양떼가 되었다는 것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양이 되었다. 늑대의 잔혹한 발톱에 찢겨나가는.
“지라크!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어딘가에서 발해진 외침에 러셀이 고개를 돌렸다.
러셀과 지라크는 어느 새 길드 건물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사방은 환함과 어두움이 공존했다. 불티가 튀기며 타는 건물들과 벽돌이나 석회로 지어진 건물들이 명암을 그리며 서 있었다.
그 안쪽에 수십 뱀피르들의 호위를 받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피부가 깨끗하고 옷차림이 고급스러운 것이, 여느 뒷골목의 부랑자나 길드원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디 귀족가의 자제 같은 모습이었다.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붉은 눈으로 러셀과 지라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뒤로는 붉게 타오르는 건물을 배경으로 신체의 여러 부분이 훼손된, 그리고 죽어나간 자들이 보였다. 놀랍게도 뱀피르들의 시체도 있었다.
시체들의 중심에는 덩치가 커다랗고 갈색 피부에 문신이 가득한 오크 둘과 수인족 둘이 서 있었다. 러셀은 그 중 카이와 묘인족 스튜어트, 서인족 톰닌을 알아봤다.
이름을 모르는 다른 오크는 카이보다 덩치가 조금 더 컸다. 피부에는 붉은 기운이 넘실거렸지만 금방이라도 꺼질 듯 깜박거렸고, 주먹에는 하연 뼈가 드러나 있었다.
손에 난 상처 외에도 가슴팍과 옆구리, 목에 커다란 상흔을 새긴 덩치 큰 갈색 오크는 숨을 몰아쉬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곁에 서서 똑같이 피 묻은 주먹을 들고 있던 카이가 그를 황급히 부축했다.
그때 카이가 러셀을 발견했다. 그는 러셀의 뒤로 죽어 나자빠진 괴물들과 살아남은 길드원들을 보며 놀람을 금치 못했다.
남자는 사납게 말했다.
“지라크. 리도스와 리베스는 어디 있지?”
“죽었다.”
“죽었다고?”
남자는 지라크의 옆에 서 있는 러셀을 쳐다봤다.
“주인님을 배신한 것이냐?”
“나는 더 이상 그분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충일하며 기쁘다. 너도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고.”
남자는 지라크의 말에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헛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알겠군. 그분의 잠을 깨우는데 너의 피도 흘러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역할은 내가 맡아야 하겠지.”
남자는 손을 들어 뭔가를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남자는 당연히 느껴져야 할 감각이 잡히지 않자 당황했다.
“뭐, 뭐냐? 왜······?”
그걸 보고 지라크는 누가 자신을 흡혈귀로 만들었는지 깨달았다.
“너였군. 날 피를 빨아먹는 괴물로 만든 것이.”
“괴물이라니! 이건 괴물 같은 것이 아니야! 나약한 몸과 노화 대신 강력한 힘과 영생을 얻은 상위종이지!”
꽤나 취해있는 놈이군. 러셀은 손에서 도끼를 한 바퀴 돌리며 생각했다. 남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어떻게 피의 구속을 떨쳐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없다. 네 피가 흐르든 내 피가 흐르든 일은 예정대로 진행된다. 그렇게 되면 영지는 온전히 주인님의 것이 될 것이다.”
남자가 손을 들어올리자 수십의 뱀피르들이 몸을 돌려 러셀과 지라크를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길게 뽑아든 손톱을 치켜든 그때였다.
다수의 사람들이 내는 발소리가 모두에게 들리기 시작했다. 러셀이 힐끗 돌아보자 갑옷을 차려입은 노인과 기사 셋, 수정구를 들고 있는 한 명의 마법사, 열 명의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갑옷을 입은 노인의 얼굴은 그야말로 강직했다. 하얗게 센 머리와 수염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풍채가 당당했고, 입고 있는 갑옷을 힘겨워하지도 않았다. 허리춤에는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칼집과 칼이 매여 있었다.
러셀은 수정구를 들고 있는 마법사가 이블린의 이모, 데보라임을 알아봤다. 그리고 그 수정구에 비치고 있는 높은 시야를 발견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들이 별빛을 가리고 있는 가운데, 높은 곳에서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올빼미 한 마리가 보였다. 저 새를 통해 이 위치를 알아낸 듯 했다.
데보라 또한 러셀을 알아봤다. 그녀는 앞장서고 있는 노인을 눈짓하며 입술 모양으로 그 정체를 말했다.
러셀은 데보라의 입술 움직임을 읽고 노인을 다시 보게 되었다. 기사와 병사들을 대동한 것을 보며 짐작하긴 했다. 그 노인은 이 영지의 주인, 라몬 에란디스였다.
자리에 도착한 라몬 에란디스는 잠시 러셀을 바라보았다. 라몬 에란디스의 푸른 눈과 러셀의 보랏빛 눈이 잠시 마주쳤다. 그러다가 남자를 쳐다보았다.
“에드몬드.”
에드몬드라고 불린 남자가 라몬 에란디스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턱이 불거진 채로 남자가 말했다.
“아버지.”
이 때 아닌 진실에 술렁거리는 사람은 많이 없었다. 러셀과 지라크만이 놀랐을 뿐이었다. 영주의 자식이라고?
라몬 에란디스가 말했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짓이 무슨 짓인지 알고 하는 것이냐?”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니. 넌 하나도 모르고 있는 것 같구나.”
영주, 라몬 에란디스는 주름진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내며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까지 달려오면서 보았던 참상들을 떠올렸다.
영지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고 뛰쳐나온 괴물들이 영지민들을 죽이고 있는 중이다. 경비대를 집결시키고 마탑의 마법사들, 용병들이 싸우고 있지만 피해는 계속해서 커지고 있었다.
영주, 라몬 에란디스는 오랫동안 부정해왔던 진실을 이제는 인정해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널 데리고 그 던전에 내려가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오. 아버지. 그건 이제까지 성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던 제가 평생에 내린 결정 중 가장 옳은 것이었습니다.”
라몬 에란디스가 역정을 냈다.
“그런 괴물이 되어서까지 말이냐! 넌 이제 산 사람의 피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괴물이 되었다! 밝은 태양 아래서 활보할 수 없는 괴물이 되었단 말이다!”
“아버지.”
에드몬드는 그에 반대되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해가 뜬 낮이나 달이 뜬 밤이나 제대로 나가지도 못했던 나약한 몸이었습니다. 하루 온종일을 창문 바깥만 바라보며 살았죠. 그런 제게 절반의 시간이나마 바깥을 향유할 수 있다면. 거닐 수 있다면. 제가 어떻게 그 기회를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지라크는 자신이 왜 에드몬드가 영주의 아들임을 못 알아봤는지 깨달았다. 얼굴을 몰랐기 때문이다. 영주의 자식은 몸이 약해 성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렇기에 자식이 있다는 것만 알뿐, 영지민들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 절반의 자유 아래에 내 영지와 사람들을 깔고 말이냐.”
“이제는 주인님의 것이 될 영지입니다.”
라몬 에란디스는 두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기뻤지. 말 타는 것도 힘겨워 하던 네가, 던전을 나오면서부터 갑자기 몸이 가볍다며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던전에서 나온 갖가지 유물들. 그리고 내 아들이 건강해진 것을 보며, 난 일말의 불안을 애써 떨쳤다. 영지는 더욱 부강해지고, 내 후계자인 너도 건강해지니 모두 괜찮은 것이라고.”
“······.”
“하지만 네가 낮에 나오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하고, 밤마다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애써 외면했을 때, 난 알아차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던전을 붙잡고 씨름할 것이 아니라.”
그는 눈을 떴다. 노인의 눈에 더 이상 미혹은 존재하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제 보이는구나. 내 아들은 그 저주스런 던전에서 이미 죽었음을.”
에드몬드는 입을 다물었다.
라몬 에란디스가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었다. 곳곳에서 이글거리는 화염에 비친 칼날은 요사스럽게 밝은 은빛을 뿌렸다. 은을 칼날에 덮은 것이었다.
기사와 병사들도 칼을 뽑았다. 마찬가지로 은이 발라진 시퍼런 칼날들이었다.
라몬 에란디스가 은빛 칼을 들어 아들이었던 괴물을 향해 겨눴다.
“무기를 들어라. 괴물들을 척살하라. 영지를 수호하라!”
초인적인 육체를 지닌 기사들이 먼저 달려 나갔다. 뒤를 병사들이 따랐다. 에드몬드 또한 뱀피르들을 달려 나가게 했다.
충돌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검과 손톱, 이빨과 방패, 단단한 몸뚱아리와 갑옷이 부딪쳤다. 사방이 붉게 타오르고 이글거리는 한복판에서, 인간과 괴물들은 건조하게 각자가 지닌 무기를 휘둘렀다.
아직도 숫적 우세는 에드몬드와 뱀피르들이 약간 더 우세했다. 라몬 에란디스는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믿기지 않는 용력으로 괴물들과 맞섰다. 기사들과 병사들, 마법사인 데보라도 주문을 쏘아내며 분투했다. 그럼에도 괴물들은 파도와도 같은 기세로 병사들을 죽죽였다.
그러나 하나의 거대한 추로 인해 괴물들은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바로 러셀과 지라크라는, 에드몬드도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들 때문이었다.
백색 도끼가 광포하게 휘둘러지자 서릿발 같은 냉기에 의해 달궈진 공기가 착 가라앉았다.
기사들은 자신들보다 빠르게 움직이면서 동시에 괴물을 죽이는 러셀을 보며 경악했다.
지라크는 가진 특성과 러셀이 떨어트린 피 몇 방울에 의해 더 강해진 지배력으로 뱀피르들을 죽였다. 죽은 뱀피르의 사체에서 피를 뽑아내고 그걸로 다시 괴물을 죽였다.
에드몬드 또한 영주의 병사들이 쓰러지며 내뿜는 피, 뱀피르들의 피를 조종하려 했지만 지라크가 조금 더 우위에 있었다. 에드몬드는 자신이 만든 종복이, 어떻게 자신보다 더 강력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러셀이 지라크에게 명령을 내렸다.
“길을 열어라.”
“예!”
지라크가 손을 내젓자 피의 길이 열렸다. 러셀은 그 길 끝의 에드몬드에게 돌진해 도끼를 휘둘렀다.
에드몬드의 저항은 부질없었다. 순식간에 스쳐나간 도끼는 그의 팔, 다리를 뚝뚝 떼어버렸다.
정육점의 고기를 가르듯이 무정하고 무참한 공격에 에드몬드는 몸뚱이만 남아 바닥을 나뒹굴었다. 비명이 밤하늘을 울렸다.
러셀이 도끼를 번쩍 치켜든 찰나, 라몬 에란디스가 고함을 질렀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주게.”
그가 영주를 보자 영주는 힘겹게 걸음을 내디디며 다가왔다.
“자네에 대한 말을 들었네. 이름이, 러셀이라 했던가?”
“그렇소.”
“······부탁이네. 부디 내가 마무리할 수 있게 해주게. 내가 저지른 죗값을, 나는 치러야 하네.”
러셀은 그 죗값이 무엇인지 짐작했다.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려지고, 부정했던 영지민들에 대한 죽음.
그 죽음에 대한 죗값을, 평생 자신이 직접 피붙이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사는 것으로 치르겠다는 것이었다. 러셀은 라몬 에란디스의 눈을 쳐다봤다.
고통에 얼룩져있는 눈. 허나 자신이 치러야 할 책임을 바라보기 시작한 눈이었다. 러셀은 고개를 끄덕이고 비켜섰다.
영주는 고개를 숙였다.
“고맙네.”
라몬 에란디스는 팔다리가 잘려나간 에드몬드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자신의 칼을 들어 에드몬드의 어깨를 찔렀다.
“으아아악!”
에드몬드의 상처에서 연기가 짙게 피어올랐다. 은에 상극인 흡혈귀의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에드몬드의 재생력이 강력한 것인지, 혹은 완전히 순수한 은으로 제련한 칼날이 아니기 때문인지 그는 바로 죽지 않았다. 허나 그렇다고 편안한 상태라는 건 물론 아니었고, 에드몬드는 몸 내부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고기 타는 냄새에 살아남은 병사, 기사들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라몬 에란디스는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어깨를 찔렀던 칼을 뽑으며 참담한 얼굴을 무표정으로 가렸다.
에드몬드가 몸부림쳤다. 허나 러셀의 도끼에 잘려나간 팔다리는 얼어붙어 재생되지 못했다. 그가 외쳤다.
“아버지! 당신은 저를 알았잖습니까! 제가 얼마나 자유를 갈구했는지!”
“······그게 내 영지와, 다른 사람들의 피와 목숨으로만 이뤄져야 하는 자유라면. 나는 인정하지 않겠다.”
라몬 에란디스는 칼을 높이 들었다.
“그것이 설사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할지라도.”
칼날이 은빛 궤적을 그렸다. 울부짖던 에드몬드의 머리통은, 이제 한낱 돌멩이도 낼 수 있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시체는 불길에 활활 타올랐다. 종국에는 재만을 남겼다.
털썩, 하고 라몬 에란디스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바닥에 흩뿌려진 재를 움켜쥐었다. 눈물은 없었다. 미세한 떨림만이 남았다.
그 모습을 러셀이 묵묵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문득 담배를 피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피지 않았다. 이미 사위에 연기가 가득했다. 긴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