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전조 (3)
이제 밤은 성큼 다가왔다. 황혼은 저물고, 짙은 어둠이 동쪽에서부터 찾아왔다. 어두워지는 바깥과 반비례하며 더 빛을 내는 여관에서, 사람들은 창백한 시체를 내려다봤다.
“······흡혈귀라니.”
페일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블린도 진중한 기색을 띄었다.
“왜 이런 괴물들이 영지에······.”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겠지.”
러셀은 몸을 일으켜 바깥으로 나갔다.
밝았던 여관에서 나오자 보다 짙은 어둠이 그를 반겼다. 앞에는 이블린의 주문에 튕겨져 나갔던 리도스가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금방 자매를 잃고 덮쳐들었던 것과 비교하면 침착한 모습이었다.
허나 머리카락에 가리워져 그늘 진 얼굴에서 빛나는 두 개의 붉은 광채를 보며, 그는 리도스가 단지 분노를 안에 감췄다는 것을 알았다.
리도스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곱게 죽진 못할 것이다.”
“곱게 못 죽은 건 네 동생 쪽인 것 같은데.”
“개자식!”
그때 어둠 속에서 다른 인영들이 걸어 나왔다. 모두 여섯이었고, 눈에서는 붉은 광채를 피어올리고 있었다.
그 중에는 러셀이 낮에 눈을 마주쳤던 남자도 있었다. 그자는 가장 뒤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그가 리도스에게 말했다.
“리베스는?”
리도스는 이를 악물었다.
“저 인간의 무력이 생각한 것보다 강했습니다.”
“죽었다는 건가?”
“······네.”
그들이 대화를 하는 사이 러셀의 뒤로 일행들이 나왔다. 칼을 든 페일과 활과 화살을 든 레메론, 두 손을 늘어트린 이블린. 그리고 무표정한 아엘라시스.
그들을 본 남자가 입을 열었다.
“뭐하다 온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없다. 곧 이 영지는 우리의 것이 될 테니까.”
남자를 중심으로 붉은 눈빛을 흘리는 괴인들이 반원을 그리며 섰다. 모두 외형은 인간이었고, 외모와 옷차림들은 평범했다.
평범한 아낙네처럼 펑퍼짐한 옷차림을 한 여자도 있었고, 상인처럼 화려한 옷, 혹은 도공일을 하는 장인처럼 헐거운 옷을 입은 자도 있었다.
괴인들은 모두 인형처럼 무표정했다. 리도스는 러셀을 노려봤다.
남자가 러셀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남자는 살려둬라. 심장이 아주 싱싱하다. 팔다리를 자른 후 주인님께 가져다드려야겠다.”
리도스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저놈은 제 동생을 죽였습니다.”
“마음대로. 지원은 필요 없나?”
“필요 없습니다..”
리도스는 천천히 걸어나왔다. 나오면서 그녀의 외형은 점점 변해갔다. 검은 머리카락은 더욱 길어져 거의 바닥까지 닿았고, 입에서는 송곳니가 튀어나왔다.
두 손에서는 다섯 개의 길쭉한 손톱이 뻗어 나왔다. 러셀은 그걸 보며 픽 웃었다. 뭐 나이트메어의 프레디냐.
이쁘장했던 얼굴에는 울룩불룩하고 핏줄이 나뭇잎 결처럼 솟있다. 변신을 한 덕분인지, 인간의 형태일 때보다 느껴지는 기세가 사뭇 달라지긴 했다. 대략 두 배에서 세 배 정도 강해졌다.
얼굴만큼이나 흉측해진 목소리로 리도스가 말했다.
“내 동생을 죽인 값을 치루게 해주겠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꼴로 만들어 침을 뱉어주지.”
러셀은 이번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냥 손에 들고 있던 백색 도끼를 던졌다. 그 속도는 피하지 못할 만큼 빨랐고, 그래서 리도스는 황급히 두 손을 들어올렸다. 도합 열 개의 손톱이 교차됐다.
하지만 리도스는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했다. 마지막 서리는 리도스의 손톱들을 수수깡처럼 부러트린 후 리도스의 가슴팍에 꽂혔다.
컥, 하고 리도스가 기침을 뱉었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차가운 숨결이었다. 리도스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가슴팍에 꽂힌 도끼에서 맹렬히 퍼져나가는 냉기를 응시했다.
“어떻게······, 내 손톱과 뼈는 강철보다 단단해졌을 텐데······.”
러셀은 한 손을 들었다. 그러자 마지막 서리는 전처럼 사라졌다 그의 손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형상을 유지하며 날아왔다. 물론 도끼날에는 여전히 리도스가 꿰여있었기에 그녀도 같이 날아왔다.
러셀은 손아귀에 부드럽게 잡히는 시원한 감촉을 느끼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점점 얼어붙어가는 리도스가 파들거리고 있었다.
말도 될 수 없는 신음을 하며 어떻게든 도끼를 밀어내려 했지만, 근육과 관절을 얼리는 냉기와 차츰 굳어지는 심장은 그녀를 도우지 못했다. 결국 리도스는 얼음 동상이 되어 죽었다. 허옇게 물들어버린 눈은 끝까지 러셀이 있는 방향을 향했다.
러셀이 마지막 서리를 비틀어 빼내자 리도스의 시체는 산산이 부서져 바닥을 뒹굴었다. 그 하얀 얼음 덩이들에서 본래의 모습을 연상하기는 힘들었다.
러셀의 뒤에 있던 사람들은 놀란 얼굴로 러셀과 그의 도끼를 쳐다봤다. 그 중에는 드워프, 루크도 있었다. 그는 입을 쩍 벌린 채 마지막 서리를 보고 있었다.
그때 리도스가 죽는 걸 보고 있던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움바르간테.”
남자의 주문에 괴인들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골격과 근육이 부풀고, 팔과 다리가 길어졌다. 그 다음은 다섯 개의 손가락에서 길쭉한 손톱이 쭉 뻗어 나왔다.
아까까지는 평범한 옷차림의 인간들이 삽시간에 그런 괴물들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괴인들의 얼굴들은 흉측하게 일그러지더니 날카로운 이빨들이 상어의 것처럼 삐죽삐죽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여관의 앞마당에 괴물들이 꽉 들어찼다.
러셀은 빛이 새어나오는 여관을 등지고 서 있었기에 그의 앞으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옆으로 레메론과 페일, 이블린, 아엘라시스가 섰다. 그림자들이 배로 늘어났지만, 그럼에도 괴물들보다는 적었다.
그들 앞으로 괴물들이 서서 다섯 개의 길쭉한 손톱을 치켜들었다. 놈들은 입가를 길게 찢었다. 아래턱이 두 갈래로 벌려지며 끈적한 붉은 침을 흘렸다.
러셀은 악몽에나 나올 법한 괴물들을 보고도 미소를 지었다. 오랫동안 나오지 못해 근질거렸던 투쟁심이 그와 같은 웃음을 띄웠다. 야수와도 같은 미소였다.
레메론이 활 시위에 화살을 걸며 외쳤다.
“돕겠습니다!”
“아니. 끼어들지 마.”
레메론은 러셀의 말에 주춤거렸다. 페일과 이블린도 놀란 눈으로 러셀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뒤통수로 느껴지는 시선들은 아랑곳 않고 앞으로 달렸다.
남자가 말했다.
“가라.”
괴물로 변태한 괴인들이 입을 쩍 벌리며 마주 돌진했다.
그리고 레메론은 추론으로만 상상했던 러셀의 실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다섯의 커다란 흡혈귀들은 제각기 지닌 손톱을 휘둘렀다. 앞과 좌우, 위에서 덮쳐드는 날카로운 칼날과 같은 공격들에 러셀은 금방이라도 수십 갈래로 찢겨져 나갈 것 같았다.
그러나 놈들은 합격술 같은 것을 배우지 않았고, 그렇기에 공격과 공격의 사이에는 적지만 분명한 시간차가 존재했다. 그리고 러셀은 그 시간차를 눈으로 본 동시에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실력자였다.
그의 도끼가 왼쪽과 앞, 위와 오른쪽을 순서대로 지나가자 합을 맞춘 것 마냥 흡혈귀들의 칼날 손톱들이 튕겨져 나갔다. 눈으로 봤음에도 믿기 힘든 묘기였다.
튕겨져 나간 탓에 몸이 훤히 열린 흡혈귀들의 가슴과 복부에 반 바퀴를 돈 도끼가 쇄도했다. 허공에 하얀 꼬리를 그리는 외날 도끼가 흡혈귀 하나를 절단내고 다른 하나는 거의 끊어질 지경으로 만들었다..
처음 리베스를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가르고, 이후 리도스를 얼려서 죽인 후로 러셀은 이 흡혈귀 괴물들을 어떻게 죽여야 할지 깨달았다.
절단된 흡혈귀는 도끼에 가득 들어찬 냉기에 직격으로 얻어맞고 꽁꽁 얼어붙어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러셀의 발길질에 박살났다.
그가 척추가 보일 정도로 배를 갈랐던 놈을 마무리하려 할 때 위와 좌우에서 다시 흡혈귀들이 달려들었다. 가장 먼저 달려든 위의 놈은 그의 머리통을 통째로 집어삼키겠다는 것인지 입을 어마어마하게 벌리고 있었다.
러셀은 그 입에 자신의 주먹을 대신 먹여주었다. 잇몸과 입천장, 혀가 뭉개진 놈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때 러셀 좌우의 흡혈귀들이 각기 다른 위치에서 칼날 손톱을 뿌렸다.
러셀은 뒤로 발을 빼며 물러섬과 동시에 상체를 뒤로 젖혔다.. 아슬아슬하게 그의 앞으로 칼날 손톱의 궤적이 빗겨나갔다. 그리고 다시 도끼가 날았다.
오른쪽의 놈을 대각선 방향으로 갈라줬을 때 왼쪽의 흡혈귀가 무기가 쥐여져 있지 않은 쪽으로 돌격했다. 전방에서는 낑낑거리면서도 결국 쩍 벌려졌던 복부를 봉합하는 데 성공한 놈이 두 손을 쫙 펼친 채 짓쳐왔다.
그는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걸음을 내디뎠다. 왼쪽의 흡혈귀가 내지른 칼날 손톱은 무방비한 러셀의 왼쪽 어깨를 내리쳤다.
놈은 지금까지 인간이 그들의 손톱을 피하려 하던 움직임을 기억하고, 인간이 아무런 보호 장비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당장 그가 내지른 손톱에 의해 어깨가 썩둑 잘려나갈 거라 믿었다.
믿음은 배신당했다. 갑자기 인간의 어깨를 덮고 있던 코트의 일부가 칠흑의 갑주로 변했다. 그리고 칼날 손톱은 그 갑주를 배지 못한 채 오히려 부러져버렸다.
손가락에서 전해지는 끔찍한 고통에 흡혈귀가 비명을 지르다가 뚝 멈췄다. 그 정수리에는 도끼가 꽂혀 있었다.
전방에서 달려들던 놈은 잠시라도 시간을 끌어줄 줄 알았던 동료가 허무하게 죽자 주춤거렸다. 여전히 두 팔을 앞으로 쭉 내민 채 엉덩이만 뒤로 빠져 있어서 꼴이 우스웠다.
그때 뒤에서 관망만 하던 남자가 뭐라 속삭이자 갑자기 주춤거리던 흡혈귀의 몸이 부풀어 올랐고, 펑 터졌다. 그리고 그건 죽은 괴물들, 아직 살아있는-입을 잡고 끙끙거리고 있는 놈, 주춤 거리고 있는 놈-괴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안에서 뭔가가 살을 찢고 나오려는 것처럼 피부가 울긋불긋 해지더니 피가 터져버렸다. 붉은 피는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의지를 가진 생명체처럼 허공을 유영하며 공중에 떠올랐다.
부하들을 가차없이 소모시킨 남자는 다시 주문을 외웠고, 핏물은 다섯 개의 거대한 핏빛 창이 되었다.
“켈루니스!”
남자가 외치자 핏빛 창 다섯 개가 쏜살 같이 날아왔다. 러셀은 피하지 않았다. 의지에 따라 코트가 칠흑의 갑주로 전환되며 다섯 개의 창들을 막아냈다.
다섯 번의 충격이 그를 덮쳤다. 러셀의 발이 바닥에 짧은 고랑을 만들었다. 그러나 남자의 공격은 창을 날린 것 뿐이 아니었다.
“스페락토!”
갑주를 뚫지 못하고 깨졌던 핏빛 창들은 붉은 모래 알갱이처럼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붉은 모래들은 남자가 주문을 읊자 흐물흐물해지더니 물속에서 폭탄이 터진 것마냥 솟구처 러셀의 온몸을 덮었다.
끈끈이주걱처럼 끈적거리고 탄력 있는 검붉은 물질에 그는 잠시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와중에도 피는 영역을 넓히며 러셀을 핏빛 수정을 만들어 그 안에 갇히게 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때 핏물의 꿈틀거림이 멈췄다. 그리고 하얗게 얼어붙어가기 시작했다. 남자가 목과 얼굴에 핏대를 세우며 마력을 쏟아부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쾅, 하고 굉음이 울리며 반절 쯤 완성되어가던 핏빛 수정이 깨져나갔다. 남자는 피의 지배력으로 어떻게든 피를 다스리려했지만 쉽지 않았다.
러셀의 도끼가 뿜어낸 냉기와 마력이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더 이상 주문에만 신경 쓸 수 없게 되었다.
절삭음과 함께 남자의 시야가 갑자기 푹 꺼졌다. 엉덩방아를 찧은 남자가 당황해서 아래를 봤다. 그의 두 다리가 무릎 아래부터 모두 잘려나가 있었다. 주범은 당연히 러셀이 던진 도끼였다.
“크하아아악······!”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잘려나간 다리를 움켜잡았다. 피는 튀지 않았다. 단면은 허옇게 얼어붙어 있었고, 시시각각 날카로운 쇠바늘로 상처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머리털을 곤두서게 만들고 있었다.
남자는 처절한 신음을 내뱉으며 앞에서 나뒹구는 다리를 향해 한 손을 뻗었다. 어떻게든 다시 가져와 붙이기만 하면 멀쩡해진다는 것 같았다. 러셀은 그걸 가만히 두고보지 않았다.
두 번의 절삭음이 다시 울리고, 남자는 팔다리가 완전히 잘려나간 채 바닥에 쓰러졌다. 팔꿈치 아래부터의 팔뚝이 바닥에 부딪치며 퍼덕거렸다.
처음 러셀을 보고 남자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준 것이었다.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러셀을 올려다봤다.
“도, 도대체 네놈은 누구냐······. 제국의 기사라도 되는 것이냐?
러셀은 대꾸하지 않고 놈의 가슴팍을 짓밟았다. 힘을 주며 지그시 누르자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잘려나간 팔다리의 단면에서 핏줄기가 뿜어졌다. 갈비뼈가 부러지며 폐를 찌른 것인지 남자의 입에서도 피가 왈칵 내뱉어졌다.
레메론과 페일, 이블린, 아엘라시스가 전투가 끝난 것을 보고 다가왔다. 러셀의 무력을 처음 본 두 엘프의 표정은 가히 볼 만 했다. 이블린도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아엘라시스는 하품을 하고 있었다.
러셀이 발을 내리지 않은 채 말했다.
“질문은 내가 한다. 넌 뭐하는 놈이야? 흡혈귀들은 어떻게 데리고 있는 거지?”
남자는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입을 열기는 했다. 러셀은 볼에 묻은 핏방울을 닦아내고는 발에 힘을 더 줬다.
피 끓는 비명이 낮게 흘렀다. 피를 빠는 괴물답지 않게 남자는 전신의 피를 다 내보내고 있었다. 바닥이 도끼의 영향으로 차갑게 얼어있었기에 핏방울은 닿는 즉시 알갱이가 되어 굴렀다. 붉은 사막의 모래, 혹은 빨갛게 녹슨 철가루 같았다.
남자는 그럼에도 입을 열지 않았고, 차라리 그냥 죽겠다는 듯 했다. 러셀은 남자의 가슴팍에서 발을 치우지 않은 채 허리를 숙였다.
마력을 받은 그의 눈이 천천히 빛나기 시작했다. 남자는 시야를 가득 채우기 시작하는 자청빛 눈을 보며 얼굴을 덜덜 떨었다.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주박에라도 사로잡힌 듯 돌릴 수 없었다.
“다시 묻겠다. 이름이 뭔지, 영지 내에서 괴물들을 데리고 뭘 하고 있던 건지, 네 주인이란 자는 누구인지 말해.”
남자는 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한 것에 가까웠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보통 성인 남성이 지니고 있는 피보다 배는 많은 양을 가지고 있던 괴물이었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였다.
남자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피······. 피를······.”
남자의 초점이 점점 흐려졌다. 버둥거리던 짤막한 팔다리도 점차 힘을 잃고 늘어졌다.
러셀은 물끄러미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자신의 손바닥을 쳐다봤다. 그가 아는 흡혈귀의 특성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도끼를 들어 손바닥을 그었다. 길게 그어진 상처는 서리의 영향으로 피가 흐르지 않았다.
"러셀!"
"뭐하는 겁니까?"
다른 사람들이 깜짝 놀랐지만 러셀은 아랑곳 않고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러자 상처의 서리가 녹으며 피가 흘렀다.
핏방울이 남자의 입술에 툭 떨어졌다. 곧 고운 모래에 스며드는 것처럼 피가 남자에게 흡수됐다.
덜컥, 하고 남자의 몸이 흔들렸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잘려나간 팔다리에서 허연 뼈가 돋아나고, 신경과 근육, 피부가 위에 덮였다. 엄청난 재생 속도였다. 트롤의 재생보다도 빠른 것 같았다.
남자는 눈을 떴다. 나는 죽은 게 아니었나? 직전까지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고 심장이 얼음덩이가 되어가는 것을 느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그의 눈과 러셀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남자는 자신이 러셀에게 거스를 수 없음을 알았다. 산자의 피밖에 마실 수 없는 흡혈귀의 본능과 러셀의 피, 마안이 합쳐졌다. 남자의 피를 지배하고 있던 원 주인의 구속력이 사라졌다. 러셀이 이제 남자의 피를 지배하는 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