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66화 (67/225)

66화 검은 보리 향 여관 (3)

***

레메론과 페일은 에란디스 영지에 가까워지자 여관부터 찾기로 했다. 페일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음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이제까지 네가 하자는 대로 다 해줬지?

덕분에 일주일이면 도착할 게 보름으로 늘었어.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가자는 대로 좀 가자. 어?”

“알았어, 알았다고. 그런데 여기 와본 적 있어?”

페일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그건 아닌데, 내가 아는 사람이 추천해준 곳이 있지. 흑맥주가 기가 막힌데.”

“그 안다는 사람은 술친구?”

“응.”

그러시겠지. 레메론은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친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물론 페일도 탐구 정신이 지나칠 정도로 뛰어난 레메론을 보며 한숨을 쉰 적이 수도 없이 많으니 그야말로 피장파장이라 하겠다.

북문의 경비병은 가까워지는 엘프들을 보며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경비병이 말했다.

“어, 어떻게 오셨습니까?”

페일은 말없이 품에서 어떤 인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뫼비우스 모양의 띠에 나뭇잎이 돋아있는 조각이 새겨진 인장이었다. 그것은 요정 순찰대에게 주어지는 인장이었다.

경비병은 간신히, 아주 간신히 그 인장을 알아보았다.

“순찰대시군요. 던전에 관련해서 오신 겁니까?”

“그렇다.”

“알겠습니다. 영주님께 기별을 넣을까요?”

“그럴 필요는 없다. 알아서 하지.”

경비병은 고개를 끄덕이고 비켜섰다.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성문을 통과한 레메론과 페일은 에란디스 영지의 대로를 걸었다. 정오의 하늘은 맑았고, 구름은 많이 없었다. 무수한 사람들이 햇살을 받으며 길을 걸었다.

“어디야?”

“음, 여관 거리 골목에 서 있다고 했어. 이름이 아마 검은 보리인가 뭔가 했을 걸.”

“그럼 저쪽이겠네.”

레메론과 페일은 수많은 시선을 받으며 여관 거리로 향했다. 엘프가 흔하게 보이는 종족은 아니니 그랬다. 하지만 강철 갑옷과 길쭉한 칼, 커다란 활과 화살통을 매고 있는 두 엘프 기사에게 감히 말을 걸 사람은 없었다.

그때 두 엘프는 맞은편에서 거의 그들과 비슷하게 시선을 받으며 오고 있는 자들을 발견했다. 셋이었는데, 둘은 수인족이었고 하나는 오크였다. 페일이 미간을 찌푸렸다.

“윽, 오크잖아. 재수 없게시리.”

“왜 그래, 피부가 갈색인데. 그린 스킨은 아니잖아. 저 치들도 피부색 다른 동족들 싫어해. 미개하다고.”

“저놈들 옷차림도 썩 문명화되어 있다고 보긴 힘든데. 다 찢어졌잖아. 저 오크는 아예 상의도 없고.”

페일의 말대로 수인족들과 오크는 다 헤지고 찢어진 옷을 입고―혹은 걸치고―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괜찮은 몰골들은 아니었다.

레메론의 눈이 빛나며 순식간에 그들을 훑었다.

“싸운 흔적들인데.”

그중 오크는 거의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코밑과 입가는 물론이고 가슴팍까지도 검게 말라붙은 피딱지가 굳어 있었다.

얼굴은 얼마나 얻어터진 것인지 곳곳에 찢긴 상처와 부어 있었고, 복부에도 타격의 흔적이 있었다. 왼쪽 팔도 잘 움직이지 못하는 듯 했다. 통증 때문인지 약간 어색하게 걷는 오크를 보며 레메론이 턱을 쓰다듬었다.

“저만한 덩치의 오크가 저렇게 처참하게 당하기 쉽지 않은데······. 어쩌다 저리 됐을까?”

“레메론······.”

“아, 알았다고. 그런 무서운 표정 짓지마.”

곧 오크 일행과 엘프들은 서로의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는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땅을 보며 걷던 오크는 문득 코를 벌름거리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엘프 둘이 보였다. 카이의 미간도 페일처럼 찌푸려졌다.

“재수 없는 귀쟁이.”

카이의 작은 중얼거림은 당연히 페일에게 들렸다. 페일이 멈췄다. 그녀가 말했다.

“야. 니 뭐라 그랬냐?”

카이도 멈춰 섰다.

“그 길쭉한 귀가 다 무소용이구만. 제대로 듣지도 못하니.”

“뭐 새꺄? 이 빡빡이 새끼가, 뒤지고 싶냐?”

카이와 페일이 서로를 무섭게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오크와 엘프의 앙숙지간은 유명하다. 레메론은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패일이 당장이라도 허리춤의 칼을 뽑겠다는 듯이 칼자루에 하얀 손을 얹었다. 그러자 카이도 근육들을 꿈틀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그 험악한 분위기에 당장 주위의 사람들이 멀어졌다. 그런데 아주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되려 일정한 반경 바깥쪽에서 흥미진진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레메론이 페일을 뒤로 잡아끌었다.

“야야, 페일. 그만 해. 왜 칼까지 뽑을라 그래?”

“너 저 새끼가 한 말 못 들었어? 재수 없는 귀쟁이라잖아!”

“우리 귀쟁이 맞잖아, 새삼스럽게 왜 그래. 그리고 너도 아까 재수 없다고 했으면서.”

“야이-”

페일이 네가 그러고도 요정이냐며 레메론을 갈구고 있을 때, 묘인족과 서인족도 오크의 양팔을 잡고 말리고 있었다.

“카이, 그냥 가요! 엘프들이잖아요!”

“빨리 돌아가서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성수 구할 돈도 다 주고 왔잖아요. 골리드나 헬트로피가 또 도발해올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카이는 굳게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방금의 무지막지하게 강한 인간과 싸웠던 여파로 심장이 아직도 두근거리고 있었고, 그래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버렸다.

물론 그가 엘프를 싫어하긴 했지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싸움을 또 만드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당장 오늘 밤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고민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본거지로 돌아가서 몸을 추슬러야 했다.

예의 인간, 러셀이 그의 몸에 남긴 충격은 이제는 잊혀져가는 야만신, 불칸을 따르는 카이조차도 쉽게 해소하지 못하는 성질의 것이었다.

결국 페일과 카이는 동시에 힘을 거뒀다. 페일은 성난 기색으로 쿵쿵 발소리를 내며 앞서 가버렸다. 그리고 구경하던 인파를 향해 버럭 소리 질렀다.

“비켜! 구경났어?”

사람들은 어어, 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아름다운 용모의 엘프라도 인상을 저리 험악하게 만들고 다가오니 물러서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서인족과 묘인족은 레메론에게 작게 고개를 숙이더니 바로 카이를 끌고 뒤로 멀어져갔다.

레메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벌써 저만치 앞서간 페일에게 걸어갔다. 벌써 복잡한 인파 속에서 길을 잃은 페일이 주변을 돌아보며 헷갈려 하고 있었다.

곧 두 엘프는 여관거리 골목에서 검은 보리 향 여관을 발견했다. 뭔가 분주했지만 페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방금 있었던 시비를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 것 때문에 속에서 열불이 치솟고 있었다. 그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고함을 질렀다.

“여기 흑맥주 한 잔!”

그리고 조금 뒤늦게 여관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어라? 뭐야? 왜 이렇게 난장판이야?”

페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난장판이 된 여관 1층을 훑었다. 먼저 흙과 먼지, 엎어진 접시와 그 사이로 흐르는 음식물 찌꺼기 등이 보였다. 여관의 하인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그 쓰레기들을 한데 모아 버리고 있었다.

반면 레메론에게는 전혀 다른 것들이 보였다. 이를 테면 바닥에 움푹 새겨진 발자국들과 핏자국. 여관 벽에 새겨져 있는, 뭔가가 세게 부딪힌 흔적. 그 아래의 부러진 칼날.

새로운 사건의 시작이거나, 혹은 다 끝난 후의 현장을 보며 레메론의 눈이 반짝였다. 그 시선의 끝에는 한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큰 키의 남자가 있었다.

그때 로라가 새로 들어온 그들을 발견하고 응대했다.

“어서 오세요! 두 분이신가요?”

“응. 아까도 말했지만, 흑맥주부터 부탁해.”

“알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시면 바로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지금 좀 엉망이라······.”

레메론이 놓치지 않고 질문했다.

“뭔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어, 그게. 별 일 아니에요.”

하지만 레메론은 로라의 눈이 잠깐 저편의 남자에게 향하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로빈은 러셀에게 돈주머니 두 개를 돌려줬다.

“너무 많습니다, 나리. 이거 하나면 충분해요.”

러셀은 하나만 받아 품에 넣고는 남은 것을 다시 로빈에게 줬다.

“그럼 이걸로 숙박비랑 식사를 계산하지. 부족하면 다시 말해.”

로빈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돈주머니를 바에 서 있는 늙은 드워프에게 건넸다. 그리고 로라가 벽에 기대어 놓았던 빗자루로 다시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드워프가 러셀에게 흑맥주가 가득 담긴 맥주잔을 주며 말했다.

“아까는 고마웠네.”

러셀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흑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드워프는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키는 러셀을 보며 미소를 짓고는 새로운 맥주잔을 가지러 주방에 들어갔다. 그가 막 나왔을 때 러셀은 맥주를 다 비우고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고 있었다.

“맛이 좋군요.”

“그럼 난쟁이가 만드는 맥주인데. 맛이 없으면 안되지.”

“맞아! 맞다구! 킥킥킥!”

러셀과 드워프의 고개가 한쪽으로 쏠렸다. 백발의 소녀, 아엘라시스가 고개를 바에 처박고 있었다. 눌린 볼 때문에 입이 붕어입이 되어 있었다.

“딸인가?”

“······아닙니다. 그냥 동행인이지요.”

“오해해서 미안하네. 아, 은인한테 이름도 말하지 않았군. 루크 하쿰데인일세. 루크라고 부르게.”

“러셀입니다.”

그들이 얘기를 하는 사이 바닥이 모두 닦아지고 넘어졌던 식탁과 의자도 바로 세워졌다. 레메론과 페일은 로라가 내온 의자에 앉아 바에 팔을 걸텼다.

주문을 받은 루크가 두 개의 흑맥주를 각각 내놓자 당장 페일은 맥주잔 속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레메론은 맥주에 관심이 없는지 잔을 쓱 밀고는 러셀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천천히 흑맥주를 음미하고 있던 러셀이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엘프가 싱글거리며 그를 보고 있었다. 러셀이 얼떨떨한 얼굴과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오만.”

“저는 레메론이라고 합니다. 유적을 조사하러 왔습니다.”

러셀도 이름을 밝혔다.

“러셀이오.”

“네. 러셀 씨. 혹시 여기 영지에 오기 전에 별일 없으셨습니까?”

“무슨 일?”

“밤중의 때 아닌 습격이라던가, 하는 일 말 입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레메론은 조용히 자신을 쳐다보는 러셀의 시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마치 두 개의 칼끝에 겨눠진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눈을 뚫고 들어와 안와를 넘어 뇌를 헤집어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레메론은 짐작도 못했지만, 러셀은 실제로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 레메론이 말을 이었다.

“여, 여기 바닥을 치우기 전에 발자국들을 조금 보았지요. 격렬히 움직였던 건 네 개뿐이었고, 그 중 하나는 당신의 것과 비슷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눈썰미와 기억력이 좋거든요. 저와 제 일행은 오늘 아침에 숲에서 세 구의 시체를 발견했었습니다. 영지로 이어지는 숲길 중 하나였지요.”

러셀은 대꾸 않고 흑맥주를 홀짝였다.

여관은 조용했다. 손님은 러셀과 아엘라시스, 레메론이라는 이름의 엘프와 아직 이름 모르는 엘프 여자 하나 뿐이었다. 엘프 여자는 동료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흑맥주만 맛나게 들이키고 있었다.

이제 점심시간이 넘긴 때였고, 투숙을 하려는 손님들이 밀려들기에는 일렀다. 로빈과 로라는 러셀이 준 돈주머니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힘쓰는 하인들도 같이 나간 것으로 보아 아마 부서진 식탁과 의자를 사러 나간 듯 했다.

레메론이 말했다.

“정말 대단한 솜씨였습니다. 뭔지도 모르는 수로 쇠뇌를 들고 있던 자의 방심을 유도하고 일격에 처리한 것 하며, 뒤에서 달려들던 남자를 단번에 반으로 쪼갠 것. 그리고 세 번째 습격자의 목을 배었음에도 떨어지지 않게 하는 엄청난 무기술까지. 처음 보자마자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리 만나니 정말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왜 나라고 확신하지?”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발자국의 크기, 보폭, 무기를 휘둘렀을 때의 몸동작을 계산해보면 나오는 신장. 하지만 그런 건 다 차치하고서라도.”

레메론은 자기만 아는 보물을 발견한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눈망울로 러셀을 쳐다봤다.

“그냥 감입니다. 그리고 탐정은 무릇 감을 무시하면 안 되는 법이지요.”

탐정이라. 러셀은 피식 웃고는 다시 흑맥주를 마셨다. 점점 더 이 맥주가 좋아지고 있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오래 머무를지도 모른다.

“살인죄 같은 걸로 날 잡아넣으려는 건 아닌 것 같군.”

레메론은 크게 손을 저었다.

“전혀요! 그건 습격에 대한 정당방위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무슨 권한으로 감히 그러겠습니까. 그냥 제가 강한 사람들을 좋아해서 그렇습니다. 특히 당신 같은 인간······. 실례합니다. 인간 같은 단명종이 그런 무력을 쌓는다는 게 제게는 정말 불가사의한 것 중 하나라서요.”

“신기한가?”

“그럼요. 백 년도 채 못 사는 종족이 무시무시한 괴물들을 압도하는 장면을 직접 보면, 정말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짧게 살기에 더 화려하게 불타오를 수 있는지도 모르지.”

“오오······.”

감명을 받은 듯한 레메론이 생각에 잠긴 사이, 러셀은 다 비운 맥주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그리고 아엘라시스에게 걸어가 어깨를 흔들었다.

“아엘라. 옷이랑 이것저것 사러 갈 건데, 같이 갈 거냐?”

“아니이.”

그럴 줄 알았지. 러셀이 방을 달라고 하자 루크는 4층의 특실을 안내해줬다. 2층의 다인실과 3층의 1인실보다 훨씬 좋고 넓으면서 도시까지 내려다볼 수 있는 방이었다.

창가 바깥으로 낮아진 건물들과 그보다 낮은 사람들의 머리통들이 보였다. 알록달록한 머리카락들.

계단을 타고 내려온 러셀은 루크에게 아엘라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레메론이 말했다.

“어디 가십니까?”

“물건 좀 살 게 있어서. 옷도 좀 사고.”

“같이 가도 될까요?”

“마음대로 하시오.”

레메론은 맥주만 마시고 있는 페일에게 다녀온다고 말했다. 페일은 맥주잔을 입에 댄 채 손만 흔들었다.

결론적으로 레메론을 대동한 건 옳은 선택이었다. 여자 옷을 볼 줄 모르는 러셀과 달리 레메론은 그야말로 빠삭했다.

거기다 그 대단한 눈썰미로 벌써 아엘라시스의 키와 몸집을 봐두었던 것인지 치수가 딱딱 맞는 상의와 하의들을 골라주기까지 했다. 러셀은 조용히 그가 골라주는 대로 옷을 샀다.

러셀이 입고 있는 코트가 마도구라는 것을 안 레메론이 놀라는 일이 있었지만, 둘은 저녁 시간이 되어 다시 검은 보리 향 여관에 돌아왔다.

1층 식당은 횅했던 아까와 달리 사람들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로빈과 로라가 공수해온 식탁과 의자보다 사람 수가 더 많았다.

천장의 샹들리에와 선반에 초가 빼곡이 서서 빛나고 있었기에 안은 그야말로 대낮같이 환했다. 옆에 있는 사람 모공도 보일 듯 했다.

사람들의 중심에는 한 엘프 여자와 소녀가 있었다. 둘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고, 앞의 식탁에는 흑맥주가 가득 채워진 커다란 맥주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럼··· 시작!”

신호와 함께 페일과 아엘라시스는 동시에 맥주잔을 들어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상대방의 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이야아아! 가자고, 엘프 아가씨! 나 당신한테 돈 걸었어!”

“이런 멍청한 놈! 백발 아가씨를 보라고! 벌써 저게 다섯 잔 째야!”

“저 작은 배 어디로 사라지는 건지 원!”

내용물이 비워질수록 손님들의 환호소리가 높아졌다.

이건 또 뭐야. 러셀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레메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안합니다···. 제 일행이 발동이 걸렸나 보군요. 보시다시피 술을 무척 좋아해서.”

“저 녀석도 맛을 들인 듯 하니 사과는 됐소.”

크아아아!

거친 기합 소리와 함께 페일과 아엘라시스가 잔을 내려놨다. 사람들이 맥주잔에 남은 액체의 양을 비교해봤다. 놀랍게도, 아엘라시스가 약간 더 적었다.

페일이 비명을 질렀다.

“마, 말도, 끅. 안돼. 내가 고작 인간 소녀한테, 끅! 주량이 밀린다고? 끅.”

“헤헹! 용의 주량을 얕보지 말라고! 딸꾹!”

저 녀석이. 러셀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다행히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주정뱅이 소녀의 헛소리쯤이라 생각하는 듯 했다.

그때 아엘라시스가 러셀을 발견하고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야! 러셀! 여기! 빨리 와 빨리!”

러셀은 피식 웃고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방인을 향한 경계 어린 시선은, 곧 그가 모두에게 돌린 흑맥주 한 잔에 눈 녹듯이 사라졌다.

흥겨운 음악과 춤판이 벌어지고, 웃음소리가 식당을 가득 채웠다.

***

몇 군데의 불빛을 제외 하면 영지는 어두웠다. 밤하늘에서 교교하게 흐르는 달빛만이 지상을 비추고 있었다.

깊은 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들어 있었다. 그때 여지껏 켜져 있던 불빛이 가려지고, 잡아먹으려다 되려 잡아먹혀진 남자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건물에서 나왔다.

술자리를 파하고 집에 돌아가던 남자는, 문득 이 골목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집의 뒤편이 나온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럼 아내한테 구박받지 않고 방으로 기어들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 남자는 스스로를 칭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지름길로 걸어갔다.

중부의 따뜻한 날씨라고 해도 밤은 서늘했다. 자연히 뒷골목 깊숙한 곳에서 걷던 남자의 방광이 쪼그라들었다.

몸을 부르르 떤 남자는 어느 이름 모를 벽 앞에 서서 바지춤을 내렸다. 월광에 금빛 물줄기가 찬연히 빛났다.

그때, 어디선가 끄륵, 끄륵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혼미한 정신 가운데 남자는 그 소리가 오른편 골목 안쪽에서 들린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바지춤을 내린 상태에서 게걸음으로 움직였다. 그가 막 골목을 살피려는 찰나, 지나가던 구름이 달빛을 가렸다. 골목 안쪽은 어두워졌고, 남자가 본 건 뭔가가 웅크려있는 실루엣이었다.

“끄윽, 거기 뉘쇼? 거서 자면 입 돌아가오······.”

남자의 말끝이 흐려졌다.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이 걷히고, 다시 달빛이 골목 안쪽을 비추기 시작했다.

구름이 걷히는 속도에 맞춰 실루엣의 그림자가 걷혔다. 남자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사람의 다리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남자의 생각이 맞았다.

아까보다 더 커다란 구름이 다시 달을 가렸다. 골목 안쪽은 다시 어둠으로 차올랐다. 어둠 속에서 붉은 한 쌍의 눈이 번들거렸다. 그리고 붉은 눈은 어둠 속에서 더 늘어났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그 남자가 있는 곳이 어디라고?”

누군가가 답했다.

“검은 보리 향 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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