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검은 보리 향 여관 (2)
사람들의 멍한 표정은 위로 올라가다가 아래로 내려갔다. 러셀은 힘이 풀려 오크의 손에서 벗어난 로빈을 공중에서 받아들고 바닥에 내려놨다.
“콜록, 콜록! 콜록!”
콰당탕!
목이 졸려있던 로빈이 무릎을 꿇으며 기침을 하는 것과 동시에 변발 머리 오크가 거창한 소리를 내며 여관 1층 바닥에 뒹굴었다. 톡, 하고 부러진 어금니가 작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카이!””
두 수인족이 외쳤다. 그러고는 바로 칼을 뽑아들어 러셀에게 달려들었다. 거의 한 동작처럼 보일 정도로 능숙했고 재빨랐다.
쥐 수인과 고양이 수인은 수인족들 특유의 몸놀림으로 유연하게 칼을 내질렀다. 인간의 신체보다 골밀도와 근질이 월등하게 좋기에 그 속도는 무척 빨랐다.
평범한 자들이었다면 설사 두 수인족이 덤벼들 것을 알았다고 해도 반응도 못하고 목이 잘려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러셀은 그들 보다 한 박자 이상 먼저 움직였다. 그는 이미 두 달 전에 강력한 늑대 수인을 상대로 한 치도 밀리지 않고 압도한 적이 있었다.
그는 목과 허리를 향해오는 칼날을 각자 손등과 손바닥으로 튕겨냈다. 그러자 칼날은 러셀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절반부터 부러져 버렸다.
각각 위와 아래로 올렸던 손은 곡선을 그리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고,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리고는 칼을 휘두르느라 그대로 비어있는 수인족들의 가슴팍을 향해 포탄처럼 쏘아졌다.
뻐억, 하는 큰 소리가 나고 서인족과 묘인족은 반대방향으로 날아가 여관의 벽에 부딪히고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부러진 칼날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기에 여관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건 번쩍, 하는 검광과 동시에 뒤로 튕겨져 나간 수인족들이었다.
그들은 감히 덤빌 생각도 못하는 강자들이, 저 이름 모를 남자한테는 저리 손쉽게 박살났다.
“컥, 칵, 크학······!”
“케게겍, 켁······.”
명치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쥐와 고양이가 숨넘어가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 쳤다.
기절하지는 않았다. 수인족 특유의 튼튼함이 의식을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허나 차라리 두 수인족은 기절하고 싶었다. 러셀의 주먹에 맞았을 때부터 전신을 찌릿거리면서 내달리는 전격 때문이었다.
신경이 저릿저릿하고 온몸 근육이 펴졌다가 오그라들기를 반복하는 끔찍한 감각. 눈앞은 번쩍이고 침은 주체할 수 없이 흘렀다.
로라와 로빈, 늙은 드워프는 러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믿을 수가 없다는 눈빛들이었다. 그때 그그극 하는 소리가 들렸다.
카이라는 이름의 오크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카이가 손을 들어 입가를 훔쳤다. 그러다가 자신의 오른쪽 어금니가 부러져나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떨리는 손으로 부러진 이빨의 단면을 만지작거리던 카이는, 곧 고함을 질렀다.
“이- 개- 같은- 인간- 놈-!”
오크의 커다란 주먹이 휘둘러졌다. 러셀의 머리보다도 큰 주먹이었다. 러셀의 대응은 아까 두 수인족을 상대할 때와 같았다.
카이의 주먹은 휘둘러지기 전에 차단되거나 휘둘러지는 중간에 흘려졌다. 러셀의 손에 담긴 힘은 딱 카이가 내지르는 주먹에 담긴 힘을 빗겨낼 정도만 실려 있었고, 주먹 한 번을 쳐내면 자신의 주먹을 카이의 몸통에 꽂아 넣었다. 그럴 때마다 카이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크아악!”
아무렇게나 내지른 주먹을 고갯짓만으로 피한 러셀은 짧게 카이의 오른쪽 옆구리와 왼쪽 어깨를 후려쳤다.
돌보다도 단단한 오크의 갈비뼈가 와득 소리를 내며 금이 가고 왼팔 어깨뼈가 탈구됐다. 그 고통과 충격에 카이의 허리가 절로 숙여졌다. 쩍 벌어진 입에서 침방울이 뚝뚝 흐르고 왼팔이 덜렁거렸다.
숙여진 카이의 머리통에 왼다리를 축으로 삼고 몸을 돌린 러셀의 돌려차기가 작렬했다. 입안이 터진 것인지 피를 뿜은 오크가 식탁과 의자를 박살내며 나뒹굴었다.
둘의 싸움에 여관 1층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개판 오 분전에서 개판 그 자체였다.
로라와 드워프가 박살나는 살림살이들에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 시, 식탁들이······!”
“여보게들!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주면 안 될까! 우리 집 거덜나겠어!”
러셀이 그들을 힐끔 본 사이, 그를 기회라고 본 카이가 입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온몸을 내던졌다.
카이는 덜렁거리는 왼팔은 놔두고 오른팔만으로 러셀의 허리를 붙잡고는 전신의 근육을 부풀렸다. 그가 고함을 질렀다.
“불- 칸-!”
갈색 피부 위로 붉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마력은 아니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신성력에 가까웠다. 약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일순 카이의 힘이 세 배는 넘게 증폭됐다. 카이는 이번에야말로 러셀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러셀은 카이의 증폭된 힘으로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돌벽을 밀어도 이보다는 미는 느낌이 들 것이었다.
러셀의 팔꿈치가 카이의 등을 내려찍음과 동시에 왼쪽 무릎이 복부를 올려쳤다. 위아래로 전해지는 충격에 카이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피부 위로 어른거리던 붉은 기운도 꺼져버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카이가 비틀거리자 러셀은 그의 뒷목을 잡고 바깥으로 집어던졌다.
콰앙!
여관의 문이 박살나고 카이가 바닥을 굴렀다. 골목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갑자기 뛰쳐나온 피 칠갑을 한 오크의 모습에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밖에 있던 아엘라시스는 약간 놀란 표정이었지만 크라이는 익숙한지 시큰둥해 보였다. 소녀가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러셀을 보며 물었다.
“괜찮아?”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엘라시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크라이에 기댔다. 둘 다 러셀에 대한 걱정은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카이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입에서 피와 침을 질질 흘리던 그가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넌 뭐냐? 어디서 온 놈이야? 골리드에서 보낸 놈이냐? 아니면 헬트로피?”
“아니.”
“그럼?”
“손님이라니까.”
카이는 생각도 못한 답변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길드나 건달패들이 보낸 해결사, 혹은 암살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암살자치고는 너무 눈에 띄는 외견이긴 했지만.
그는 이제야 러셀을 똑바로 살필 수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바로 고개를 돌렸고, 이후에 얻어맞았을 때는 그럴 경황이 아니었다.
오크인 자신과 필적할 정도로 커다란 키에 검은 코트자락. 탄탄한 근육들.
그러나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건 기이한 색깔의 눈동자였다. 밝은 대낮 아래서 반짝이는 자청색의 눈빛은 감히 고개를 돌릴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러셀은 카이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뛰어갈 필요도 없다는 듯이 느긋한 걸음에 카이는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덜덜 떨리는 오른손으로 축 늘어진 왼 팔뚝을 잡았다.
훕, 하고 숨을 들이킨 카이는 그대로 탈구된 어깨뼈를 끼워 맞췄다.
“끄하아악······!”
뇌리가 번쩍이는 고통이 찾아왔다. 하지만 카이는 통증을 털어내고 어깨를 돌렸다.
뼈에서 삐걱삐걱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눈앞의 인간은 그런 통증에 신경도 쓰지 못할 만큼 강했다. 어쩌면 대장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러셀은 그걸 보며 씨익 웃었다. 고통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놈은 간만이었다. 때리는 맛이 있는 놈도.
불칸이라는 이름을 외치니 신성력 비스무리한 게 생겨나는 것도 그렇고, 트롤보다 강력한 완력도 그렇고. 이 오크도 여간 신기한 놈이 아니었다.
카이는 부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줬다. 그럼에도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두려웠다. 저 인간은 인간 같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카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직 여관 안쪽에 그의 동료들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믿고 따르는 신에게 기도했다.
“불- 칸.”
그러자 예의 붉은 기운이 다시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러셀은 그런 카이를 보며 손을 들어 까딱거렸다. 짐승을 도발하듯 가벼운 손짓이었다.
오크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
오크와 쥐, 고양이 수인은 신기한 방식으로 하늘과 땅을 경배하고 있었다.
하늘을 향하던 머리는 굳센 대지를 향해 숙였고, 땅에 누이던 엉덩이는 하늘을 향해 자신의 크기를 과시했다. 두 팔은 지금 허리 뒤에 엇갈려 손목을 꽉 잡고 있는 중이다.
거대한 덩치의 갈색 피부 오크와 두 수인족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머리를 박고 있는 모습은 자체만으로 많은 시선을 끌었다. 그 앞에는 한 검은 머리 남자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저거 카이 아냐? 왜 저러고 있어?”
“얼씨구, 그 옆의 놈들은 스튜어트랑 톰닌이잖아? 뭐하는 거야, 지금?”
“아, 내가 봤지. 겁나게 얻어터지더라고, 저 검은 머리한테. 그래서 저 꼴이지.”
“짜아식들······. 거들먹거리더니, 꼴좋다!”
마지막은 대낮부터 술을 마신 건지 거나하게 취한 목소리였다. 그 사람은 오크와 쥐, 고양이 수인의 날카로운 시선을 동시에 받자 딸꾹질을 하더니 줄행랑을 쳤다.
가만히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던 러셀은 생각했다. 생각보다 영지 사람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정말 서로 목숨을 해칠 정도로 사이가 험악했으면 저런 말들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러셀이 쥐와 고양이 수인에게 물었다.
“누가 스튜어트고 누가 톰닌이냐?”
머리를 박고 있는 쥐 수인이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 제가 톰닌입니다.”
마찬가지의 고양이 수인이 말했다.
“제가 스, 스튜어트입니다.”
러셀은 픽 웃고는 다리를 펴고 몸을 세웠다.
“일어나.”
카이와 톰닌, 스튜어트는 벌떡 일어섰다.
여기저기 부러진 뼈와 상한 근육들이 그런 과격한 움직임에 미친 거 아니냐며 항의의 신호를 전달했지만, 셋은 눈앞의 인간이 더 무서웠다.
그들의 앞, 러셀의 뒤로는 검은 보리 향 여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부서진 문과 식탁, 의자들을 치우고 빗자루로 먼지 등을 쓸어내는 중이었다.
로빈은 크라이를 마구간에 데려다주고 여물통에 여물을 한껏 채워준 다음, 아엘라시스에게는 그들의 자랑인 흑맥주를 맥주잔에 담아 주었다. 아엘라시스는 곧바로 흑맥주의 맛에 흠뻑 빠져 바에 앉아 홀짝거리고 있었다.
로빈은 중간 중간 러셀을 힐끔거렸는데, 말을 걸 분위기가 아니라 느낀 건지 잠자코 있었다. 대신 차렷 자세로 선 셋에게 감자를 먹이는 시늉을 하며 소소한 복수를 했다.
“왜 보호세를 더 받아가려고 했지? 들어보니까 저번 달에 이미 냈다는데.”
러셀의 물음에 셋은 눈알만 뒹굴뒹굴 굴렸다. 입을 꾹 다문 그들의 모습은 당사자도 아닌 생판 남인 그에게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러셀은 말없이 중지와 검지를 붙인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파직, 파직 하고 전깃불이 춤을 췄다.
후읍,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톰닌과 스튜어트는 이미 저 전기 맛을 충분히 맛봤다. 혓바닥에서 쇠맛이 돌았다.
전신 근육이 오그라들며 수축하는 고통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어떤 통증과도 비교가 불가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허나 둘은 덜덜 떨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카이를 쳐다봤다. 부하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침묵하던 카이가 입을 열었다.
“성수를 구하기 위해서요.”
“성수?”
딱 봐도 뒷골목 왈패로 보이는 놈들이 성수는 왜 필요한 것일까. 인간 사제랑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얼굴들도 아닌데.
“성수는 왜?”
“상처 치료에 좋지 않소.”
러셀은 카이가 빼놓은 다른 활용법을 지적했다.
“그리고 부정한 것들을 상대하는데도 유용하지.”
“······.”
사실 뒤의 것이 더 성수의 필요성을 입증한다. 상처를 치료하는데는 마탑과 연금길드가 파는 치유 물약과 생명수도 있다. 거기에 성수보다 싸다.
성수를 구입하는 용병들도 악령이나 저주를 상대하는데 쓰지 치료에는 잘 쓰지 않았다. 치유 물약과 생명수보다 훨씬 비싼 성수를 상처에다 들이부을 사람은 많이 없다. 물론 생명이 경각에 달한 경우라면 쓰긴 하겠지만.
카이가 다른 말을 했다.
“교회가 성수의 값을 갑자기 두 배 이상 올렸소. 그래서 보호세를 조금 더 걷으려고 한 거요.”
“무슨 교회?”
“아카서스 교회요. 정의의 신이지. 사제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러셀은 아까 성문을 통과할 때 경비병이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분명 그 이름의 교회와 중앙 분수대가 괜찮다고 했었지.
“말 돌리지 말고. 성수가 왜 필요하냐니까.”
카이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어금니가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입을 열었다.
“삼주 전 부터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소. 뒷골목 여기저기에 시체들이 굴러다니기 시작했지. 시체들은 대부분 부랑자, 노숙자, 건달들이었소.”
러셀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래서.”
“···그건, 지금 당장도 뒷골목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이긴 하오. 하지만 이상한 건 그 시체들의 상태였소. 모두 미라 같은 꼴이 되어 있었지. 살짝만 힘을 줘도 바스라질 정도로.”
카이는 그때의 감촉을 떠올렸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라 러셀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래서.”
“이제까지 이 영지에서 우리들은 나름대로의 생태계를 유지하며 잘 지내고 있었소. 약간의 보호세를 받고, 버릇없는 손님들을 잡아주는. 영주도 우리를 완전히 뿌리 뽑을 순 없다는 걸 알기에 여간해서는 눈감아주고 있지. 우리도 정도 이상으로 나대지는 않았고.”
카이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던전이 나타나고 나서부터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소. 용병들, 모험가들, 유적 발굴자들이 대거 밀려오면서 바빠졌지. 그런데 그 와중에 하루가 멀다하고 미라 시체들이 계속 발견되는 거요. ······그 중에는 우리 식구들도 있었소.”
“경비대는? 신고 해봤나?”
카이가 으르렁거렸다.
“해봤소! 하지만 묵살 당했지! 아무리 돈을 모아서 찔러봐도 뭣 하나 해주는 게 없었어! 미라 꼴이 된 시체를 직접 들고 가 봐도 재수 없다고 내쫒기기만 하고! 영주는 지금 던전, 그 안의 유적 발굴에만 눈이 벌게져 있소! 시발, 우리 같은 놈들은 사람도 아니라 이거지···.”
으르렁거리던 카이는, 곧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우리끼리 자구책을 마련해보려고 한 거요. 시체를 미라 같이 만든다는 건 생명력이나 피를 갈취한다는 거고, 그런 짓거리를 하는 놈들은 흑마법사나 키메라, 언데드 같은 놈들일 테니까. 성수는 거기다 쓰려고 한 거요. 쥐약일 테니.”
바로 옆에 쥐 수인이 있는데 말해도 되나 싶었지만, 톰닌은 익숙한 듯 했다.
“교회는? 네 말대로 흑마법사 같은 게 연루되어 있으면 사제나 성기사들이 나서야 할 텐데.”
“영주와 똑같소. 아무런 조치도 안 하고 있지. 그냥 성수 값만 높여서 팔아먹을 뿐.”
러셀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던전의 발생과 사람들의 몰림. 뒷골목에서 버젓이 죽어나가는 사람들. 미라처럼 부스러진다는 시체. 신경 쓰지 않는 영주. 교회의 침묵.
그러다 그는 귀찮아져서 고개를 저었다. 도시에 오자마자 싸우고 나니 목도 조금 마른 듯 했다. 러셀은 다 핀 담배꽁초를 뱉고는 발로 밟았다.
“됐다. 가라.”
러셀의 말에 셋은 눈을 끔벅거렸다.
“가, 가라고? 살려주는 거요?”
“그럼 죽을래? 난 어느 쪽이든 상관없긴 한데.”
많은 상관이 있는 세 사람은 다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아니오! 가, 가겠소.”
“가기 전에 안의 사람들한테 사과하고 가.”
“알겠소.”
카이를 필두로 두 수인족은 검은 보리 향 여관 사람들에게 사과 했다. 허리와 고개까지 푹 숙여가면서.
드워프와 로라, 로빈은 얼떨떨한 기색이긴 했지만 사과를 받아줬다. 확실히 이전까지는 관계가 나쁘지 않은 듯 했다.
사과를 마치고 나온 카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가보겠소.”
“그냥 가냐?”
“예?”
“가진 돈 싹 다 내놓고 가야지. 니들이 여기 살림살이 다 부쉈잖아.”
“······.”
감히 그 중 절반은 러셀이 부쉈다고 말할 간 큰 사람은 없었다. 카이와 톰닌, 스튜어트는 잠자코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러셀에게 건넸다. 러셀이 묵직한 돈주머니를 가늠하며 말했다.
“이게 다야?”
“그, 그렇소. 그게 다요.”
“그럼 가.”
스튜어트와 톰닌은 시무룩한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뒤따라가던 카이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묵을 거요?”
“어. 왜? 친구들 데리고 오게?”
“아니오. ······살려줘서 고맙소.”
“고마우면 다음부턴 머리 감고 다녀라. 냄새 나더라.”
“······알겠소.”
카이는 몇 발자국을 걷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는 러셀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난 카이라고 하오.”
러셀은 그 시선을 받아주다가 말했다.
“러셀.”
“러셀······. 다시 한 번 고맙소.”
카이는 러셀에게도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골목을 빠져나갔다. 뒤통수의 땋은 머리가 걸음에 맞춰 흔들거렸다.
러셀은 인파 너머로 사라지는 그들을 보다가 몸을 돌려 여관에 들어갔다. 그리고 세 개의 돈주머니를 모두 로빈에게 안겨줬다. 로빈은 놀란 눈으로 품에 안긴 돈주머니와 그를 번갈아 봤다.
“나, 나리? 이건?”
“그걸로 수리해. 그리고-.”
“여기 흑맥주 두 잔! ······어라? 뭐야? 왜 이렇게 난장판이야?”
자기가 할 말을 대신 해버린 난입자를 향해 러셀이 고개를 돌렸다.
여관 입구에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강철 갑옷을 입은 두 명의 엘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