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검은 보리 향 여관
“러셀!”
마법사 무리들은 갑자기 이블린이 툭 튀어나가자 당황한 듯 했다. 그런 동료들을 마구 해치던 이블린은 곧 크라이에 타고 있는 러셀 앞까지 달려왔다. 러셀은 크라이에서 내렸다.
“오랜만이군.”
“그러게! 이게 얼마만이야! 거의 반년 만 아니야?”
“넉 달 조금 넘은 것 같은데.”
러셀이 멈추자 자연히 앞서가던 아엘라시스와 로빈도 멈춰섰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로빈과는 다르게 아엘라시스는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마법사 무리가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왔다. 대략 열 명이 조금 안 되었는데, 드러난 얼굴들이 하나 같이 젊거나 어렸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자들은 중년의 여성과 노년의 남성 둘 뿐이었다. 러셀은 그들을 힐끔 보다가 말했다.
“유적 때문에 온 건가?”
이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번에 메디올 에란디스 영주의 요청으로 유적에 대해 탐사하기 위해 찾아왔어. 영주랑 자식, 기사 몇몇만 대동하고 들어갔다가 심상찮은 일이 있어서 마탑에 협조를 구했지.”
“심상찮은 일? 언제?”
“그건 아직 모르겠어. 우리도 막 도착한 거라. 하지만 던전이 나타난 지 이제 한 달이 되간다고 하니까, 그쯤 아닐까 싶어.”
큼큼, 하는 헛기침 소리가 울렸다. 마법사들 중 앞으로 나선 중년의 여성이 낸 소리였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졌고 눈매가 이블린과 비슷했다.
“잠시 실례. 젊은이는 누구인가? 내 조카를 아나?”
“아, 이모님. 이 사람이 제가 말했던 그 사람, 러셀이에요. 용살자. 러셀, 이분은 내 이모, 데보라. 에반테인 마탑의 장로님이셔.”
닮은 구석이 있다 했더니 혈연지간이었나보다. 러셀은 데보라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때 다른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이 남자가 용살자라고?”
마지막에 말한 사람은 노년의 남성이었다. 흰 머리카락을 짧게 치고 수염도 마찬가지로 짧게 기른 그는 척 보기에도 깐깐한 인상이었다. 미간에 깊이 새겨진 주름은 그가 얼마나 눈살을 찌푸렸는지 보여주는 표식과도 같았다.
과연 그는 눈가를 좁히고는 러셀을 위아래로 훑었다. 초면에 보여주기에는 무례한 태도였다.
“키와 덩치는 산만하긴 하다만. 마력도 느껴지지 않고, 별다른 무기도 없고. 이블린, 착각한 거 아니냐?”
당연히 러셀에게서 마력을 느끼긴 힘들 것이다. 그가 갈무리한 상태니까.
그것은 러셀이 그만큼 철저하게 힘을 숨길 수 있다는 것과, 혹은 노년의 남자가 그런 러셀을 꿰뚫어볼 만한 실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블린이 약간 당황하면서 말했다.
“루넬바스 장로님, 러셀은 분명 용을 참살한 사람이 맞습니다. 제가 저번에 용의 비늘도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루넬바스는 코웃음을 쳤다.
“하, 용의 시체도 없는데 무슨 용살자? 그리고 그 비늘 말이냐? 별다른 마력 작용도 일어나지 않고 고작 조금 오래되고 크다는 이유로 용 비늘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바실리스크나 다른 대형 용족의 것일 수도 있지 않느냐?”
이블린은 이미 몇 번이나 논파당한 주장에 입술을 깨물었다. 넉 달 전 그녀가 갖고 간 한 장의 비늘은 용의 것이라고 인정받을 수 없었다.
일단 그게 진짜 용의 것이라고 해도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칼리스덴에서 나타났다가 죽었다는 용도 소문만 무성할 뿐 시체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었다. 어쨌든 용은 너무 오래 전에 모습을 감췄던 종족이었으니까.
세 사람이 모여 호랑이를 만들어낸다고 하더라도, 마법사는 직접 눈앞에 들이밀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는 족속들이다.
“뭐야? 왜 안가?”
다가온 아엘라시스가 러셀의 옷깃을 툭툭 당겼다. 마법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백발의 소녀에 놀랐다.
첫 번째로는 어려보이는 외견에도 거침없는 반말에, 두 번째로는 그 미모에, 세 번째로는 자그마한 몸에서 느껴진다고는 믿기지 않는 정순한 마력 때문이었다.
이블린은 입을 살짝 벌렸다.
“······뭐야. 딸이야?”
러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냥 일이 있어서 데리고 다니는 녀석이지.”
“저번에는 혼자 다니는 게 편하다더니.”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나?”
데보라와 루넬바스도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동시에 허리를 약간 숙였다. 그 눈들에는 마법적인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대단한 아이구나. 이토록 어린 나이인데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정순한 마력이라니. 어디 귀족가의 여식인게냐?”
“아닌데.”
데보라는 아엘라시스의 반말에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물론 아엘라시스는 귀여웠다. 루넬바스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
아엘라시스는 러셀을 힐끔 올려다봤다. 허락이라도 구하는 듯한 몸짓이었고, 그걸 깨달은 자 또한 많았다.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엘라시스. 너는요?”
“난 루넬바스라고 한다. 혹시 마법을 배워볼 생각이 있느냐?”
루넬바스의 질문은 러셀을 픽 웃게 만들었다. 용에게 마법을 배우지 않겠냐고 묻다니.
물론 루넬바스는 상상도 못하고 건넨 질문이긴 했지만. 아엘라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 아니. 굳이 배우지 않아도 난 요- 웁!”
러셀이 아엘라시스의 입을 막았기 때문에 그녀의 정체가 대낮 한복판에 공표되는 일은 없었다. 러셀이 말했다.
“상당히 다급하시군. 무례하기도 하고.”
루넬바스는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는 러셀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처음에 보였던 태도와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미안하오. 나이가 들어 보니 재능 있는 아이들을 보면 가만히 놔둘 수가 없어서. 실례했소. 선생께서 이 소녀의 보호자요?”
선생이라. 단박에 호칭이 개선되는군. 러셀은 자신의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무는 아엘라시스를 힐끗 보다가 말했다.
“일단은.”
“마법사는 아닌 듯 한데. 이 소녀가 가진 잠재력을 아시오?”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가 직접 마력을 불어넣어 부화할 수 있게 도와줬고, 그 부모와도 직접 싸웠던 사람인데. 모르면 이상한 일이다. 러셀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넬바스가 갈망이 서린 표정이 되어 말했다.
“잘 알지.”
“그렇다면-.”
“괜한 참견이오. 아엘라의 일은 아엘라가 알아서 정할 일이고, 그걸 바라지 않소. 그리고 난 이제 가봐야 하는데.”
저편에서 로빈이 불안한 얼굴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제야 마법사들은 그들이 길가에서 러셀을 너무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좌우로 길이 넓긴 했지만 워낙 사람이 많다보니 길 한쪽을 아예 틀어막고 있던 모양새였다.
행인들은 여기서 뭐하는 지랄들이냐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다만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이기에 대놓고 불평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 이런. 미안하오.”
데보라와 루넬바스는 길을 비켜줬다. 러셀은 고개를 한 번 숙이고 그들을 지나쳤다. 이블린이 말했다.
“어디 여관에서 묵어? 나중에 일 끝나면 찾아갈게.”
“검은 보리 향이라고 하더군.”
그녀는 빙긋 웃으며 끄덕였다.
“알았어. 만나서 반가웠어. 나중에 봐.”
러셀도 옅은 미소를 지어주고는 아엘라시스와 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고 있던 로빈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 다시 앞장섰다. 혹여나 러셀 일행이 마법사들을 따라갈까 봐 마음을 졸였던 모양이다.
마법사들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일단은 에란디스 영지의 마탑을 향해서였다. 걸어가면서 이블린이 데보라에게 말했다.
“이모님, 아까 그 아엘라시스라는 애가 그렇게 대단했나요?”
“그래. 인간이라면 누구나 쌓여 있을 탁한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더구나. 그만큼 몸이 깨끗하고 마력회로가 잘 발달되어 있다는 뜻이지.”
데보라는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꼬며 말했다.
“그리고 특이하게 심장 주변의 마력이 아주 강하고 정순했어. 주문을 얼마나 조합하고 외울 수 있는지는 직접 가르쳐봐야 알겠지만, 보통 마력에 대한 재능이 타고나면 머리 또한 좋은 경우가 있으니. 대단한 마법사가 될지도 모르지.”
“이모님이 그렇게 칭찬하는 경우는 처음 보는데요. 대단하네요.”
옆에 서 있던 루넬바스가 중얼거렸다.
“대단하지. 저런 남자와 함께 다니는 게 아까울 정도로.”
루넬바스의 눈에서 알 수 없는 빛이 잠깐 번쩍였다가 사라졌다.
***
이제 막 정오를 향해가고 있는 길 위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영지에 사는 영지민들보다는 가볍게라도 무장을 한 자들이었다. 던전, 유적에 대한 소문 때문인 듯 했다.
이 중 몇이나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던전이나 숨겨져 있던 유적이 발생하면 필연적으로 근처에 괴물들 또한 꼬이게 된다.
그런 괴물들을 잡고 부수익을 올리는 것 또한 용병들의 일거리 중 하나이니 이상하진 않았다.
검은 보리 향 여관은 여관 거리의 안쪽 골목 중 한 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토대를 단단히 다지고 그 위에 튼튼한 돌기둥과 벽돌이 잘 마감되어 있었다. 건물의 외관도 튼튼함만큼이나 멋들어져서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듯 싶었다.
4층 정도 되어 보이는 건물에는 여관의 이름이 정갈하게 쓰인 커다란 간판이 걸려 있었는데, 보리 이삭 그림이 좌우 대각선의 대칭으로 그려져 있어 특색을 돋보였다.
말에 오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가던 러셀은 멀리서도 그 간판을 발견하고 말했다.
“간판이 멋진데.”
“에? 여기서 간판이 보이세요?”
로빈이 놀란 표정을 짓자 러셀은 끄덕였다.
“눈이 좋아서. 글씨가 정갈하니 멋지다.”
“헤헤, 그렇죠? 할아버지가 손수 쓰신 거예요. 손재주가 좋으시거든요. 근처의 간판들도 할아버지가 써 준 게 많아요. 수리도 가끔 해주시고, 맥주도 잘 만드세요. 특히 흑맥주요.”
로빈은 자랑스럽다는 듯 웃었다. 러셀도 픽 웃다가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소란스러운 대로의 소음 속에서 작은 비명 소리 같은 것이 들린 것이다.
그러나 주위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정확히 어디서 나는지 특정하기는 어려웠다. 걸으면서 청력에 집중하던 러셀은 곧 그 비명이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있었다.
가까워지는 검은 보리 향 여관에서 때 아닌 비명과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비명 중에는 여자의 새된 목소리도 있었다. 싱글거리던 로빈도 차츰 표정이 굳어지더니 여자의 비명을 듣고는 고함을 쳤다.
“누나!”
로빈은 고삐를 팽개치고 여관 안으로 달려갔다. 러셀이 아까 입을 막아서 삐져 있던 아엘라시스는 놀란 눈이 되어 달려가는 소년을 바라봤다.
“뭐야?”
러셀은 이제 확연히 우당탕탕 소리가 나는 여관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작게 ‘뭐야! 왜 벌써 온 거야! 저번 달에 납부했잖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멈춰버린 크라이의 갈기를 쓰다듬어주고 고삐를 아엘라시스의 손에 쥐여 줬다.
“잠깐 여기 있어. 알아보고 올게.”
“나도 보고 싶은데.”
“여기 있어.”
“체. 알았어.”
아엘라시스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녀는 나서야 할 때와 말아야 할 때를 잘 구분한다고 자부했다.
“다치지 마! 다치면 죽어!”
러셀은 손 한 번 흔들고는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1층은 난장판이었다. 식탁과 의자는 옆으로 쓰러져 있었고, 음식이 담겨있던 접시들도 떨어져 있었다.
바닥은 발자국에 뭉개진 음식들로 지저분했다. 러셀은 천천히 1층을 둘러봤다.
다양한 종족들이 그곳에 있었다.
마치 북방계 유목민들처럼 정수리를 휑하게 비우고 남은 뒷머리를 땋아 내린 근육질 거구의 오크 하나. 러셀은 오크의 피부 색깔이 갈색인 걸 보고 생각했다. 도시 오크로군.
숲과 초원보다 인간의 도시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한 오크. 초록 피부의 동족들과도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그들은 거의 인간만큼이나 사회에 적응한 종족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크의 일행으로 보이는 천과 가죽 갑옷을 입고 허리춤에 칼을 찬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수인인 듯 귀의 형태가 인간과는 달랐다.
한 놈은 쥐의 것을, 한 놈은 고양이 귀였다. 쥐 수인은 얼굴이 갸름하면서도 얄팍했고, 고양이 수인은 볼 한쪽에 흉터가 그어져 있었다.
미물들은 서로 먹이사슬에 놓여있는데 이놈들은 동업자로 있는 듯 했다. 신기했다.
그 밖에는 대걸레 자루를 마치 창처럼 들고 있는 여자와 곁에 서 있는 로빈, 그리고 낡은 도끼를 짚고 헉헉거리는 늙은 드워프가 있었다.
그들 뒤로는 하인들로 보이는 중년의 남녀들이 식탁을 바리케이드 삼아 몸을 숨기고 덜덜 떨었다. 물론 오크와 수인족들을 상대하는데 썩 좋은 방어 시설이라 하긴 어려울 것이다.
러셀은 인간보다 비인간 종족이 더 많은 것에 헛웃음을 흘렸다. 무슨 상황이야, 이게? 개판 오 분전도 이것보단 나을 터였다.
그때 변발 머리의 오크가 여관 1층에 들어선 러셀을 발견했다. 오크가 툭 튀어나온 어금니를 벌리며 말했다.
“뭐야, 넌? 손님인가?”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손님의 위치로 온 건 맞았으니까. 오크는 피식 웃더니 자기 일행들을 둘러봤다.
“이야, 여기까지 손님도 끌어올 수도 있고. 장사 되잖아? 그런데 왜 돈을 못 낸다는 거야? 엉?”
오크는 근처의 의자를 발로 밟았다. 육중한 거체의 무게에 의자는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산산이 박살났다. 쥐와 고양이 수인이 낄낄거렸다.
“누가 꼬셔서 데려왔나? 로라? 너야?”
“아니, 로빈 저 꼬마일수도 있지. 괜찮아, 손님. 우리는 그런 거 다 이해하니까.”
로빈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며 악다구니를 외쳤다.
“이 나쁜 놈들아! 이미 우리가 내는 돈이 얼만데, 거기서 더 내라고 하면 우리는 어쩌라고? 뭐 먹고 살라고!”
오크가 정수리를 긁적였다.
“미안하긴 한데. 그런 것까지 내가 알아봐줘야 하냐? 알아서들 먹고 살아야지. 그게 네들이 말하는 인생 아니냐.”
“이이익!”
분노한 로빈이 숨을 몰아쉬던 드워프에게서 도끼를 빼앗았다. 드워프가 깜짝 놀라 말했다.
“야 이 녀석아! 그거 안 내려놔! 쿨럭, 쿨럭!”
로빈은 끙끙거리면서 도끼를 들어올렸다. 몇 번 무게에 밀려 넘어질 뻔 했지만, 결국 소년은 도끼 자루를 어깨에 걸친 채 도끼를 들 수 있었다.
오크는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야, 로빈. 언제 이렇게 힘이 세졌어? 이제 남자 다 됐는데? 여자도 안을 수 있겠어.”
“으아아아!”
로빈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갔다. 하지만 소년이 휘두르는 도끼는 오크의 커다랗고 짙은 갈색 피부의 손에 너무 손쉽게 잡혔다.
“어이쿠. 잡아버렸네.”
오크는 그대로 도끼를 들어올렸다. 자연히 자루를 쥐고 있던 로빈이 대롱대롱 매달려 올라갔다. 오크의 손이 도끼를 툭 내던지고는 로빈의 목줄기를 틀어잡았다.
“컥!”
로빈이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버둥거리자 대걸레를 들고 있던 로라가 비명을 질렀다.
“로빈!”
“그 아이를 가만 놔둬라, 이 망할 놈아! 쿨럭!”
늙은 드워프가 힘겹게 허리를 폈지만 곧 다시 기침을 했다. 가슴팍에 큼직하게 발자국이 찍힌 것을 보니 오크에게 걷어차였던 모양이다.
오크가 고개를 저었다.
“영감, 방금 이 녀석이 내게 도끼 날린 거 못 봤어? 거의 날 죽일 기세던데. 죽일 각오를 했으면 죽을 각오도 했겠지. 안 그러냐, 로빈?”
오크가 살짝 힘을 주는 것만으로 로빈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갔다. 로빈의 짤막한 팔다리가 마구 그를 쳤지만 돌처럼 단단한 근육에는 안마만큼의 효과도 나지 않았다.
대충 상황을 보던 오크가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조금 과하게 겁을 주긴 했지만 진짜로 로빈을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이번만 돈을 일찍 받고, 다음 번에 차감을 해준다는 식으로 하면 잘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니, 도끼를 들고 덤벼든 것 정도는 관대하게 넘어가 줄 수 있었다. 그는 딱 그 정도만 생각했다.
“야. 빡빡이.”
그때, 조용한 목소리가 여관 1층을 울렸다. 모두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어느새 그들의 뇌리에서 잊혀 있던 러셀이었다. 그가 말했다.
“어린애 상대로 힘자랑하지 말고, 내려놔. 처 맞기 싫으면.”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러셀을 쳐다봤다. 로라와 늙은 드워프, 쥐와 고양이 수인은 물론이고 오크도 눈을 깜박이며 러셀을 봤다. 그러다 오크가 헛웃음을 흘렸다. 종족 특유의 짜증과 분노의 감정이 일기 시작했다.
“하, 이 매끈한 새끼가 돌았나······. 야. 상황 파악 안 돼? 가만있으면 알아서 지나가는 거 갖고, 뭐? 내려놔? 처 맞기 싫으면?”
갈색 피부의 오크가 쿵쿵 발걸음 소리를 크게 내며 걸어왔다. 오크의 눈높이는 러셀과 비슷했다. 드러난 근육도 오크가 배는 많아 보였다.
“쳐봐. 쳐봐, 새끼야. 어? 쳐보라고.”
오크가 고개를 숙이더니 머리로 러셀의 가슴팍을 툭툭 쳤다. 그러다 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막 비벼대기 시작했다.
러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냄새가 고약해서였다. 이 새끼, 머리 안 감았어.
“못 치겠냐? 쳐보라니깍!”
오크의 말 끝마디는 까마귀 울음소리 비슷한 것으로 변했다. 러셀의 주먹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며 오크의 큼직한 턱주가리를 날려버린 탓이다.
오크의 거대한 덩치가 일순 10센티는 넘게 위로 떠올랐다. 부러진 어금니 한 개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아갔다.
인간 비인간 할 것 없이 모두의 입이 쩍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