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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63화 (64/225)

63화 에란디스 영지

***

우거진 아침의 숲 사이를 두 명의 인영이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전신에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철갑을 입었음에도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는 듯이 가볍게 몸을 날렸다.

나무와 나뭇가지, 나뭇잎들은 두 사람의 질주를 전혀 방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슬쩍슬쩍 길을 열어서 더 쉽게 달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때 앞서가던 인영이 손을 들고 멈췄다. 바람에 나부끼던 머리카락 사이로 기다란 귀가 보였다. 나뭇잎 같이 뾰족한 귀였다.

뒤따르던 사람의 귀도 똑같이 길쭉했다. 두 사람 모두 미형의 외모였기에 성별을 알아보는 건 쉽지 않았다.

“레네론? 왜 그래?”

레네론은 손을 내리고 한쪽을 가리켰다.

“저길 봐, 페일.”

페일은 레네론이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시체 세 구가 있었다. 인간 남성의 시체들이었다.

한 구는 얼굴이 박살나 있었고, 한 구는 상체와 하체가 이별을, 한 구는 무릎을 꿇은 채 죽어 있었다. 그들은 천천히 시체들에게 다가가 얼굴이 박살난 시체 앞에서 멈췄다.

“윽.”

페일이 표정을 찌푸렸다. 시체들에는 이미 그들보다 먼저 찾아온 손님들이 있었다. 왱왱거리는 날개와 여섯 개의 다리, 뭉툭한 주둥이와 겹눈을 가진 그들은 신나게 축제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인간 시체잖아. 이게 뭐?”

페일이 물었지만 레네론은 대꾸하지 않고 시체를 살폈다. 페일은 고개를 저었다. 저 죽일 놈의 호기심. 레네론은 궁금한 게 있으면 알 때까지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그렇기에 이번 던전, 혹은 유적 탐사에 그들이 뽑혔는지도 모르겠지만. 페일은 속으로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난 왜 보낸 거냐고.

페일은 당장 시원한 맥주가 마시고 싶었다. 목이 말랐다. 나무잔이든 뭐든 상관없이,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오는 맥주가 그리웠다.

레네론은 그런 페일이나 파리들, 냄새는 신경도 쓰지 않고 시체들의 사인을 알아봤다. 시체가 쓰러진 모양, 향하고 있는 방향. 그 다음은 주의의 땅을 관찰했다.

페일은 거의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을 숙여서 네 발로 기어 다니는 레네론을 보며 다시 한숨을 삼켰다. 길쭉한 귀만 아니면 누구도 엘프라고 생각하지 못할 모습이었다.

레네론은 근처에 작은 공터와 모닥불이 피워져 있던 흔적을 발견했다. 흠.

레네론은 그 답지 않게 침묵에 잠겼다. 금방이라도 자기가 알아낸 것을 속사포처럼 말할 것을 기다리고 있던 페일은 약간 당황했다.

“왜 그래? 모르겠어?”

“아니. 알 건 다 알았어. 죽은 지는 대략 아홉 시간이야. 한 밤중이지. 이 사람들은 누군가를 습격하려던 자들이야.”

“그래?”

페일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인간이 동족들끼리 싸우는데 익숙하며 능숙한 자들인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별로 놀라울 것은 없었다.

“저기 꽂힌 화살 보이지. 조금 이상하지 않아?”

페일은 레네론의 손가락을 따라 공터의 나무에 박혀있는 화살을 보았다. 화살이 박힌 위치는 약간 높았다. 페일이 물었다.

“뭐가 이상한데?”

“이 세 사람은 저기 공터에 있는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 여기에 숨어 있었어. 이 얼굴이 박살난 시체가 쇠뇌를 들고 있었겠지. 그런데 화살을 쐈다는 건 그 누군가가 저기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고 본 거야.”

페일도 레네론이 뭘 말하려는 지 알아차렸다. 눈이 먼 것이 아니라면 애먼 나무에 화살을 쏠 리가 없다.

“그런데 시체는 여기 있는 자들뿐이지. 그리고 모두 한 사람한테 당했어.”

“한 사람한테?”

“아마 이들이 습격해서 죽이려 했던 누군가겠지.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쇠뇌를 들고 있던 이 시체는 착각을 하고 나무에 화살을 쐈어.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가 옆으로 칼을 휘둘렀지.”

땅은 감출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레네론은 당황한 기색이 실린 발자국과 힘을 주느라 움푹 들어간 발자국을 보았다.

“칼은 한 번에 막혔고, 뭔가가 얼굴을 때렸어. 아마 주먹인 것 같아.”

“주먹 한 방에 얼굴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페일은 새삼스런 눈으로 아래의 시체를 쳐다봤다. 원래의 이목구비는 알아볼 수도 없이 처참히 구겨져 있는 얼굴. 왼쪽 눈알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시신경에 매달려 빠져 나와 있었다.

레네론은 말을 이었다.

“뒤편에 두 인간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고, 앞의 남자가 죽자 일어났어. 위에서 아래로 칼을 내리쳤지. 상처를 주진 못했어.”

레네론은 바닥에 뒹굴고 있는 칼을 가리켰다. 썩 좋지 않은 칼인지 칼날은 이가 나가고 균열이 가 있었다. 핏자국은 묻어 있지 않았다. 그 옆에는 튀어나온 돌이 흠집을 새긴 채 굳게 서 있었다.

“그리고 상체와 하체가 갈라졌는데······. 이건 뭘로 한 건지 모르겠어. 여기 단면에 얼음 자국 보여?”

페일은 얼어붙은 단면을 볼 수 있었다. 단면은 매끄러웠고 피는 나지 않았다.

“날붙이인 것 같긴 한데. 그리고 가장 신기한 건 여기 있는 마지막 시체야.”

레네론은 둘로 나뉜 시체를 건너뛰고 뒤편의 마지막 시체를 향해 걸어갔다. 무릎을 꿇은 채 죽은 시체.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머리로 받고 있는 시체는 어찌 보면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 남자는 저항을 하지 않았어. 그건 이 사람들이 습격자와 알고 있다는 뜻이지. 적어도 밥은 같이 먹지 않았을까 싶어.”

레네론은 시체의 목을 더듬었다. 그의 손가락에 하얀 서리가 조금 묻어나왔다. 페일이 말했다.

“무슨 변심을 했는지는 몰라도 죽음을 받아들였군.”

“그래. 무엇 때문이었을까? 부끄러움? 수치심?”

“두 감정 다 비슷한 말이야. 이제 추리는 끝났지? 가자.”

페일은 여전히 심드렁한 태도로 현장을 떠났다. 레네론은 아까와는 반대로 페일의 뒤를 따르면서 생각했다.

주먹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완력에 정체불명의 얼음 공격을 쓸 수 있는 자. 그리고 추측이 맞다면 그자는 도시로 향했을 것이다.

근방에 갈 곳이라고는 거기밖에 없으니까. 그 자도 유적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일까?

어쩌면 경쟁자일지도 모를 사람을 생각하면서도 레네론은 즐거운 기분을 느꼈다. 된다면 직접 만나보고 싶다. 그래서 어떻게 화살을 피하고, 소리도 없이 습격자들을 죽일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빨리 와! 나 맥주 먹고 싶어!”

“참나, 페일. 네가 드워프도 아닌데 맥주는 왜 그렇게 좋아하는거야?”

“맛있으니까 좋아하지.”

두 엘프는 다시 숲속을 달려 나갔다. 말보다도 빠른 속도였다. 목적지가 멀지 않았다.

***

도시와 영지의 차이는 영주성의 존재 유무로 나뉜다. 에란디스는 영지가 분명했다. 시장 관저의 저택이 저렇게 클리는 없으니까. 거의 성에 가까웠다.

러셀과 아엘라시스는 기다림 끝에 에란디스 성문에 다다랐다. 영지에는 들어가려는 상인들, 짐마차들, 사람을 태우는 운송마차들이 줄지어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아침이었기에 날씨는 선선했다. 조금 신경을 기울이면 하얀 숨결도 볼 수 있었다.

아엘라시스는 최대한 따뜻한 숨을 그러모아 천천히 불었고, 그에 따라 옅은 안개처럼 흩뿌려지는 숨결을 볼 수 있었다.

소녀가 까르르 웃자 그 맑은 웃음소리에 이끌린 사람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리고 커다란 흑색 갈기의 말에 한 번, 그리고 그 위에 탄 소녀의 미모에 한 번, 마지막으로 소녀의 뒤에 탄 덩치 큰 남자에 놀랐다.

그 흔한 장검 하나도 무장하지 않았지만 남자의 큰 키와 장대한 어깨, 코트 너머로도 보이는 근육 덕에 다가가는 사람은 없었다.

느리지만 꾸준히 줄이 줄어들고, 곧 러셀과 아엘라시스의 차례까 왔다. 둥근 챙의 철 투구와 갑옷을 입은 경비병이 다가와 형식적인 질문을 던졌다.

“어디 쪽에서 오셨소?”

“북쪽에서.”

성문이 북문이었기에 당연한 답이었다. 경비병이 말했다.

“용무는?”

답은 두 갈래로 갈라져 나왔다.

“유적 탐사!”

“관광과 휴식.”

무표정했던 경비병은 이제 약간 당황한 얼굴이 되어 아엘라시스와 러셀을 번갈아봤다. 그러다가 소녀의 얼굴에서 멈췄다.

러셀은 큰 손으로 아엘라시스의 머리를 수그리게 만들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관광, 휴식.”

“익! 이거 놔!”

“어, 유적 탐사는 관심 없으시고? 요즘 그것 때문에 시끌시끌한데.”

러셀은 어깨를 으쓱였다.

“잘 모르겠군.”

“놓으라니까!”

경비병은 성을 내면서도 남자의 손길을 벗어나지 못하는 소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백발의 머리카락에 인형 같은 외모의 미소녀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경비병은 곧 자신의 본분을 떠올렸다.

“관광을 오신 거면 아카서스의 교회를 한 번 들러보시오. 중앙 광장의 분수대나 마탑도. 모두 썩 보기 좋은 것들이니.”

“참고하지.”

“지나가시오.”

경비병이 비켜서자 러셀은 아엘라시스의 머리에 얹고 있던 손을 내리고는 고삐를 잡았다. 멈췄던 크라이가 다시 다리를 옮겼다.

문득 경비병과 러셀의 눈이 마주쳤다. 자청색의 눈. 여간해선 잊기가 어려운 눈동자 색깔이었다. 뭐지? 뭔가 기억날 듯, 말 듯 한데······.

하지만 경비병은 끝내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다. 바로 다음 상단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상단이 싣고 온 물품들을 확인하는 경비병은 방금 지나갔던 남자와 소녀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

골이 났던 것도 잠시, 아엘라시스는 성벽 안쪽의 풍경에 넋을 잃었다. 이때까지 작은 마을만 지나왔기에 이토록 사람들이 많은 영지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물론 알의 상태에 있었을 당시에도 바깥을 살필 수는 있었지만, 영이 받아들이는 감각과 신체가 받아들이는 감각은 다른 법이다.

도로는 판석으로 깔려있어 단단했고, 크라이의 말발굽이 닿을 때마다 다각다각 소리를 냈다.

커다란 대로 위를 많은 인간들이 지나갔다. 그 밖의 종족은 잘 눈에 띄지 않았다.

영지 내의 건물들은 새 것과 오래된 것이 혼재되어 있었다. 오래된 것은 대부분 돌이나 벽돌로 지어진 것이었고, 새것은 나무로 지어진 것이 많았다. 물론 새 돌로 만들어진 것들도 있었으나 수는 많지 않았다.

아엘라시스가 말했다.

“건물들이 왜 섞여 있어?“

“옛 도시 위에 그대로 지어서 그래.”

“그럼 뭐가 좋은데?”

“또 땅 팔 일이 없어서 좋지. 상하수도가 다 지어져 있으니까 편하거든.”

그때, 어디선가 꼬마들이 우루루 몰려나왔다. 어디 숨어있다 나온 것인지 삽시간에 서넛 정도의 아이들이 크라이 옆에서 함께 걸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여행자님! 여관 찾지 않으세요? 저희 라모네 여관은 1층에서 식당도 겸하고 있습니다! 닭 통구이가 기가 막혀요!”

“저희 여관은 돼지 넓적다리 살에 비장의 소스가······!”

“저, 저희는 맥주가 맛있습니다······.”

아엘라시스가 마지막 아이의 말에 눈을 반짝였다. 옆에서 다른 아이들이 고함을 지르다시피 하는 탓에 들리지도 않을 만큼 소곤거리는 목소리였는데, 용케 들은 것이었다.

“맥주? 그것도 술 맞지?”

러셀은 이마를 짚었다. 벌꿀 술을 마시고 난 후부터 이 꼬마는 술이란 술은 다 맛볼 기세였다. 아엘라시스는 아랑곳 않고 목소리가 작은 아이를 내려다봤다.

“꼬마야! 네 여관이 어딘데?”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 아이는 갑자기 엄청나게 예쁜 여자애가 말을 걸자 어버버거렸다. 러셀은 꼬마가 꼬마라고 부르는 걸 보며 픽 웃었다.

다른 아이들은 일찌감치 텄음을 알고 눈치껏 다른 여행자들을 향해 달려갔다. 아스라하게 들리는 호객소리를 들으며, 때 아닌 행운을 맞이한 남자 아이가 말했다.

“저, 저기 안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됩니다. 저희 검은 보리향 여관이 맥주는 진짜 맛있어요. 무, 물론 맥주만 맛있는 게 아니고 음식도 좋고, 잠자리도 좋아요. 마구간도 있어요!”

남자 아이는 그들이 타고 있는 말에 생각이 미쳤는지 마지막에 크게 외쳤다.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내해라.”

남자 아이는 표정이 밝아지더니 허리를 넙죽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크라이의 말 고삐를 쥐고 이끌어 갔다. 아엘라시스가 폴짝 뛰어내리더니 남자 아이의 곁에 섰다. 둘의 키는 고만고만했지만 그래도 아엘라시스가 조금은 더 컸다.

“너 이름이 뭐야?”

“예, 예?”

“이름. 난 아엘라시스야.”

“아, 저. 제 이름은 로빈입니다.”

두 아이가 재잘대며 걸어가는 동안, 러셀은 안장 위에서 편안하게 주위를 훑었다.

하늘 위의 구름은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산맥에서 달려온 북풍이 매서운 속력으로 구름을 밀어내는 것이 분명했다. 반면 지상은 이따금씩 선선하게 부는 바람이 아니고서는 잘 불지 않았다.

골목길을 지날 때야 좁은 틈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느껴졌다. 힐끔 본 골목길에는 여럿의 부랑자들이 벽에 기대어있거나 그냥 누워서 길가를 맹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부랑자들이 사람들을 보는 건지, 아니면 골목 바깥의 길을 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러셀은 골목에서 길로 시선을 돌렸다가 대로 한 켠에서 걸어가는 일련의 무리를 발견했다. 모두 문양이 새겨진 로브를 입고 있었다. 러셀은 그들이 마법사들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의 눈은 로브를 입은 무리에서 새어나오는 마력의 기척을 빠짐없이 읽어냈다. 강한 것도 있었고 약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눈에 익은 빨간 머리칼을 가진 마법사가 있었다.

“이블린?”

러셀이 중얼거렸다. 그때 그의 중얼거림을 듣기라도 한 것인지 빨간 머리카락의 마법사가 고개를 돌렸다. 러셀을 발견한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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