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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62화 (63/225)

62화 새싹의 계절 속에서 (4)

***

이상 징후는 처음 세 남자들을 만났을 때부터 느꼈다. 친절은 이 세계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태도 중 하나다. 격의 없는 웃음, 순박한 얼굴, 서슴없이 대하는 인사 등.

그리고 스튜와 벌꿀술을 먹고 나서 한 시간 정도가 흘렀을 때, 러셀은 배속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작용을 깨달았다. 그건 수면제였다.

신체의 근육이 노곤해지고 의식이 가물가물해진다. 어둠 깊은 곳에서 수마가 파도처럼 덮쳐왔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저항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잠드는 지도 모르는 채로 잠들어버렸겠지.

하지만 러셀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몸의 이상 작용을 깨닫자마자 마력을 일으켰다. 체내의 회로를 달리는 마력은 주인의 의지에 따라 수면 효과를 일으키는 성분들을 한데 그러모았다. 러셀의 손바닥에 노란 물방울이 샘솟았다.

벌꿀 술에 담겨져 있던 알코올을 배출한 것이었다. 동시에 알코올과 합쳐져 수면 효과를 일으키게 하는 성분도 같이.

러셀은 유적 발굴단들이 그릇에 남겼던 건더기들을 떠올렸다. 짐작컨대 그것이 술과 합쳐지면 이런 작용을 나게 하는 것이겠지.

바스락.

수풀이 밟히는 작은 소리가 귀에 들렸다. 러셀이 시선을 돌리자 머지 않은 거리에서 세 남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까 보았던 것과 달리 차림들이 단출했다. 가방은 모두 어딘가 놓고 왔는지 보이지 않았고, 손에는 비 반사 처리를 한 칼을 들고 있었다.

신발도 가죽신으로 바꿔 신은 듯 했다. 그렇기에 발소리는 무척 작았지만, 러셀의 민감한 귀는 그 작은 소리마저 놓치지 않았다.

러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눈에 마력을 주입했다.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테모시가 쇠뇌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때, 러셀의 눈과 테모시의 눈이 마주쳤지만 테모시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테모시는 여전히 러셀이 나무에 기대어 있는 자세로 있는 것만 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러셀은 천천히 일어났다.

아엘라시스의 자세를 고쳐주고, 약간 내려간 모포를 어깨까지 덮어주었다. 아엘라시스가 뒤척이자 커다란 손으로 하얀 머리카락을 슬슬 쓰다듬었다. 그러자 소녀는 자면서도 히히, 하고 웃었다. 기분 좋은 듯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테모시는 전혀 이상한 걸 느끼지 못하고 쇠뇌를 겨누고 있었다.

러셀이 테모시의 눈을 보는 것과 동시에 환시를 걸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보통 마력을 가진 기사, 마법사들에게는 걸리지 않을 간단한 술수다. 가진 마력이 저항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마력을 더 불어넣으면 가능하긴 하나 비효율적이다. 그럴 바에야 신체나 무기를 강화하는 게 나았다.

하지만 테모시와 기타 남자들에게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유적 발굴이라는 약간은 허황된 꿈을 꾸면서 살아가는.

그러나 지금은 숲에서 만난 남자를 죽이고 소녀를 납치할 계획을 세운 무장 강도일 뿐이었다.

호흡을 가다듬던 테모시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화살이 날아가 러셀의 머리에 꽂혔다. 물론 테모시가 바라보는 가짜 러셀이다.

러셀은 어느새 테모시의 옆에 다다랐다. 테모시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러셀이 환시를 풀어버린 것이다.

“뭐, 뭐야? 어디 간 거야?”

러셀은 말했다.

“여기.”

소스라치게 놀란 테모시는 그 와중에도 바닥에 놓았던 칼을 집어들고 휘둘렀다. 동작이 재빨랐다.

팅, 하고 휘둘러진 칼날이 러셀의 두 손가락에 잡혔다. 마력이 깃들지 않은 무기는 그의 손에 상처 입힐 수 없었다.

테모시는 여전히 놀란 와중에도 힘을 주어 칼을 밀어 넣으려 했다. 허나 칼날은 바위틈에 끼이기라도 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테모시의 얼굴에 러셀의 주먹이 꽂아졌다. 와그작, 하며 뼈 부러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테모시!”

뒤늦게 러셀을 발견한 도이든이 쭈그렸던 다리를 펴며 일어섰다. 레함도 엉거주춤 일어서고 있었다. 두 남자 모두 놀람과 경악이 새겨져 있었다.

털썩, 하고 테모시가 뒤로 쓰러졌다. 완전히 함몰된 얼굴에서 눈알이 시신경에 매달리며 툭 튀어나왔다. 테모시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죽은 것이었다.

“이야아아아!”

도이든은 고함을 지르며 두 손으로 칼을 들고 달려왔다. 얼굴에는 친구이자 동료를 잃은 것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다. 그의 고함에 놀란 산새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도이든이 칼을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단순한 동작. 러셀은 왼발을 오른발 뒤로 옮기고 몸을 약간 옆으로 트는 간단한 동작으로 칼을 피했다.

칼은 그대로 바닥의 돌에 맞으며 불똥을 튀겼다. 도이든은 검신에서 전달되는 짜릿한 충격에 손바닥이 찢어지는 고통을 받으며 저도 모르게 칼자루를 놓아버렸다.

도대체 검술의 기본도 모르는 한심한 행동이었지만, 그렇다고 러셀의 손속이 약해지진 않았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백색의 도끼, 마지막 서리가 쥐어져 있었다.

서걱, 하고 도이든의 상체와 하체가 이별했다. 피는 튀지 않았다. 얼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상 하체의 단면에 자욱한 서리를 입은 채 도이든이 툭, 툭 두 번 떨어졌다. 도이든의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진 채로 굳었다.

“아아, 아아아······.”

레함은 감히 덤벼들지도 못하고 있었다. 두 다리는 덜덜 떨렸다. 다리가 떨리자 허리가, 상반신이, 손도 마구 떨리고 있었고, 그건 그를 겨눈 칼도 마찬가지였다.

쉴새없이 흔들리는 칼끝을 물끄러미 보던 러셀이 천천히 다가왔다.

숲은 밝으면서 동시에 어두웠다. 막 돋아나기 시작한 나뭇잎들이 달빛과 별빛에 반사되며 은색으로 빛났고, 빛을 가리는 나뭇가지들은 어느 나무에서 뻗어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성했다.

그 아래에서 남자가 기다란 자루의 도끼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두 눈에서는 은은한 자청색의 빛이 꼬리를 그렸다.

레함은 차라리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아플 정도로 뛰는 심장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쿵, 쿵, 쿵!

레함은 마음 같아서는 가슴 속의 심장을 움켜잡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그 박동을 늦추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심장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럴 수 있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레함은 칼을 버리고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살려주십시오!”

“왜?”

러셀의 답은 거의 시간차를 두지 않았고 그래서 레함은 답할 기회를 놓쳤다. 러셀의 물음에 대해 레함은 생각했다.

“더, 던전! 전 유적 바, 발굴자입니다! 예! 발굴자! 지난 두 번 동안 허탕을 치긴 했지만, 그래도, 실력은 우수합니다! 함정 같은 것도 미연에 볼 수 있고, 어, 유적의 고고학적 가치도 조금이지만 확인할 수 있고, 어떤 괴물들이 사는지도······.”

레함의 말은 점점 흐려졌다. 난 여기서 지금 뭘하고 있지?

테모시의 말에 이끌려 일확천금을 쥘 수 있다는 희망에 몇 년간 던전과 미궁, 유적들을 해매고 다녔다. 몇 번 괜찮은 수익을 올릴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적이 훨씬 많았다.

지난 두 번은 소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허탕이었고, 가진 돈은 바닥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또 하나의 던전, 유적이 발견됐다는 소식에 지치고 회의감에 젖은 발을 이끌고 있었다.

그러다 귀중한 마도구로 짐작되는 코트를 입은 남자와 아름다운 소녀를 만났고, 그들은 아틱소 풀과 벌꿀 술을 먹였다.

이전에도 돈이 궁했을 때 두어 번 했던 일이다. 어렵지 않았다. 처음은 그냥 돈과 옷가지만 털었고, 두 번째에는 죽였다. 직접 본 건 아니었지만, 레함이 짐을 챙기고 돌아왔을 때 테모시와 도이든이 칼날을 닦는 것을 봤었다. 아마 죽였을 것이다.

레함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러셀이 말했다.

“더 말할 것 있나?”

“······.”

레함은 고개를 저었다.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번쩍, 하고 도끼가 횡으로 그어졌다. 러셀은 도끼를 코트에 집어넣고 그 안에서 담배를 꺼냈다. 아엘라시스가 담배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오랫동안 피지 못한 담배였다.

곧 러셀은 다 핀 담배꽁초를 버리고 뒤돌아서 걸어갔다.

러셀이 떠난 자리, 레함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목에는 은빛의 실선이 그어져 있었다. 둥그스름한 서리 자국이 실선을 그렸다.

시체는 그렇게 목이 붙어버린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람에 흔들려 떨어지는 몇 장의 나뭇잎이 그에 대한 유일한 조의였다.

***

“흐아아암.”

아엘라시스가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고 있었다.

“잘 잤냐?”

크라이의 등에 안장을 얹고 배끈을 묶던 러셀이 말했다. 아엘라시스는 끄덕였다.

“응. 술 마시면 머리 아프다더니, 안 아픈데? 거짓말 한 거야?”

“거짓말 아냐.”

숙취가 없는 까닭은 아틱소 풀과 벌꿀 술의 특별한 효과 때문이었지만, 아엘라시스는 깨닫지 못했다. 짐작하고 있는 러셀도 굳이 말하진 않았다.

“와, 그럼 어제 그 남자들이 줬던 술이 엄청 좋은 거였나 봐. 어? 그런데 그 사람들은 왜 없어?”

일찍 잠들었기에 유적 발굴자들이 떠난 걸 모르는 아엘라시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러셀이 말했다.

“네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짐 싸서 갔다. 급한 일이 있나보던데.”

“그래? 아쉽다. 그 벌꿀 술 진짜 맛있었는데.”

아엘라시스는 쩝 입맛을 다셨지만 오래 아쉬워하진 않았다. 끄응, 소리를 내며 팔을 위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팔을 편 다음에는 그대로 앞으로 내려가 바닥을 짚고는 다리를 모아 엉덩이를 위로 들어올렸다. 고양이가 기지개를 펴는 자세와 같았다

러셀은 말려 올라간 치마에서 점잖게 시선을 돌렸다. 다음 도시에 들리면 바지를 사줘야겠다고 생각하며.

하지만 아엘라시스는 이미 그 시선을 알아차린 뒤였다. 소녀가 씨익 웃었다. 나이대의 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요망한 웃음이었다.

“봤지?”

“머리 꼬리가 있어야 무슨 고긴지 알지.”

“뭐? 머리 꼬리? 고기?”

아엘라시스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돌리기는 훌륭하게 소녀의 물음을 의식의 저편으로 날려버렸다.

러셀은 안장을 툭툭 두드렸다. 크라이가 히히힝, 하고 울며 투레질했다.

“다 했으면 일어나. 조금만 더 가면 도시가 나올 거다. 거기서 조금만 쉬었다가 가자.”

“좋아! 던전이 나왔다는 그 도시 말이지? 빨리 가보자!”

아엘라시스는 벌떡 일어나 러셀에게 걸어갔다. 아엘라시스가 두 팔을 벌렸다.

“올려줘.”

“이제 네가 올라가도 되지 않겠냐?”

아엘라시스는 팔을 내리지 않았고, 러셀은 픽 웃고는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러자 아엘라시스의 팔과 다리가 문어처럼 그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올려달라며.”

“히히. 응? 킁킁.”

아엘라시스가 코를 러셀의 목에 파묻었다.

“담배 폈어?”

“응.”

“냄새 난다니까.”

“조심할게.”

아엘라시스는 곧 크라이의 안장에 올랐다. 러셀도 등자에 발을 걸고는 훌쩍 몸을 올렸다.

“가자.”

“가자아!”

러셀이 고삐를 툭툭 당기자 크라이는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러셀은 어젯밤 싸움이 일어났던 곳에서 조금 빙 돌아갔다.

하지만 빙 돌아간 수고에도 불구하고 러셀과 아엘라시스는 숲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세 개의 가방을 발견하게 됐다.

“어? 저 가방?”

눈썰미가 좋은 아엘라시스는 당장 그 가방들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기억했다. 커다랗고 옆구리의 고리에는 밧줄이나 망치 같은 도구들이 고리에 매달려 있으니 못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가자.”

러셀은 크라이를 채근했다. 크라이는 투정부리지 않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러셀의 앞에 앉아있던 아엘라시스는 아래를 지나가가는 가방을 보다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동안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그러다 나무가 듬성듬성 해질 때가 돼서야 아엘라시스가 입을 열었다.

“다 죽였어?”

“응.”

“왜?”

“날 죽이려 들어서.”

아엘라시스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러셀이 말했다.

“아엘라.”

“응.”

“널 죽이려 드는 사람이 있으면 되도록 망설이지 마. 네가 죽이지 않으면 상대방이 널 죽일 거다.”

러셀은 말하면서도 이게 맞나 싶었다. 전생에는 폭력 사건 하나에도 휘말리지 않고 얌전히 살았는데, 지금은 앞장서서 사람을 죽이라고 하고 있으니. 그것도 어린 여자애한테.

하지만 이 세상은 도덕률을 들이밀 정도로 만만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엘라시스는 그저 어리기만 한 소녀가 아니었다. 그 본 질에는 알 속에서도 이따금씩 바깥의 세상을 둘러볼 수 있었던 용의 영혼이 있었다.

“원래 그래?”

“······그래.”

“알았어.”

다행히 아엘라시스는 거기서 더 뭐라 묻거나 말을 걸진 않았다. 러셀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고 계속 크라이를 걷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숲이 끝나고, 그들은 한 언덕 위에 서게 되었다. 이제 3월 초가 된 하늘은 봄의 싱그러움에 젖어 푸르고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머리에 하얀 만년설을 얹은 아운힐나르 산맥이 먼 시야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아래로 한 도시가 성에 둘러싸인 채 서 있었다. 성문을 통과하려는 일련의 상단, 마차, 사람들이 개미때처럼 꾸물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엘라시스가 말했다.

“왜 도시에는 저렇게 높다란 담장이 세워져 있어?”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지.”

“누구로부터?”

러셀은 언덕을 내려갔다. 완만한 언덕을 거의 다 내려가고서야 러셀이 답했다.

“자신, 혹은 바깥의 누군가로부터.”

“뺏어가? 다른 사람들이?”

“그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통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자기보다 약한 사람이 갖고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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