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새싹의 계절 속에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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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마을에서 떠난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새끼용은 느닷없이 말을 꺼냈었다.
“맨날 그렇게 야, 너, 나비야, 라고 부르지 말고 이름 좀 지어줘.”
깨어있을 때는 밥을 먹고 그 외의 시간은 모두 자거나, 꼬리로 장난을 치거나, 여물지 못한 날개를 퍼덕거리기만 하는 모습을 봐왔던 러셀로서는 깜짝 놀랄 일이었다.
언제부터 말을 할 수 있었냐고 물으니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아무래도 몸에 아직 익숙지 않았기 때문일까.
러셀은 별 고민 않고 아엘라시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생각에, 용의 이름은 다섯 글자가 어울렸다. 다행히 새끼용은 이름을 마음에 들어 했다.
“좋아. 내 이름은 이제 아엘라시스야.”
이름을 얻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끼용은 갑자기 인간으로 변신해서 또 러셀을 놀라게 했다.
“뭘 그렇게 놀라? 용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알아서 마법과 지혜를 깨우친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세계의 수호자라는 이름을 가질 수 없지.”
하지만 새끼용이 쓸 수 있는 마법은 아직 변신 밖에 없었다. 대신 속성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빙결의 속성과 뇌전의 속성이 그것이었다.
뇌전은 러셀이 아엘라시스를 깨울 때 직접 주입한 것이라 그렇다 쳐도, 빙결 속성은 어떻게 얻은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는 금빛 비늘의 황금용이었다. 아버지는 루드비히, 인간일 것이고. 그런데 아엘라시스는 흰 비늘을 가진 백룡이다.
설마 용의 자식은 그 유전자 형질이 다르게 발현되는 걸까? 아니면 악마와의 거래에서 뭔가가 달라진 걸까.
러셀의 물음에는 아엘라시스도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도 잘 모르겠다면서.
“나 배고파!”
이제 인간으로 변신한 아엘라시스는 나이 대에 맞는 왕성한 호기심과 식욕을 보였다.
길가에 난 꽃에 관심을 보이다가도 바로 건너편의 시냇물에 시선을 뺏기고, 그러다가도 하늘의 구름과 내리는 빗방울을 보며 즐거워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동족과 관련해서 많은 궁금증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테모시가 언급한 유적의 소문에 대해 아엘라시스가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용의 둥지?”
아엘라시스가 러셀을 돌아보았다. 소녀의 눈에는 흥미가 가득 담겨 있었다.
“용의 둥지래.”
“소문이 그렇다는 거잖아. 다른 것일 수도 있지.”
러셀은 말하면서도 아엘라시스의 흥미를 꺼트리기는 어려우리라고 생각했다. 과연 아엘라시스가 외쳤다.
“가보자!”
러셀은 고개를 저었지만, 테모시와 다른 남자들의 표정은 조금 밝아졌다.
“아, 유적에 가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저희와······.”
“괜찮소. 나중에 가서 생각해볼 일이지.”
러셀이 단칼에 거절했지만 테모시는 기분이 나쁘지도 않은 지 빙글거렸다. 그러다가 식사를 마치고 난 다음에는 가방에서 큼직한 수통 하나를 꺼내들었다. 수통에서 출렁, 하고 액체가 흔들리는 맑은 소리가 났다.
테모시가 헛기침을 냈다.
“큼, 달과 별빛도 좋고, 바람도 선선하고. 모닥불 소리도 아스라하니 좋은데, 술 한 잔 어떠십니까? 마침 제게 데나스 지방의 이름 난 벌꿀 술이 있습니다.”
술! 아엘라시스가 다시 한 번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아직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다. 도이든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말했다.
“테모시, 너 그거 죽어라 아껴놓고서는 여기서 꺼낸다고? 에라, 이제까지 우리가 그렇게 달라고 했을 때는 안 주더니.”
“아끼지도 않고 낼름낼름 마신 건 네놈들이잖냐! 나도 이제 이거 한 병 밖에 안 남았다고.”
레함이라는 이름의 마른 얼굴의 사내는 별말 않고 가방에서 개수에 맞게 술잔을 꺼냈다. 테모시가 빙글빙글 웃으며 잔에 벌꿀술을 따랐다.
“자, 자 한 잔 받으시지요. 이게 첫 맛은 달달하면서도 중간은 상큼하고, 끝은 끈적끈적한 맛이 일품입니다. 마셔도 마셔도 또 마시게 되고 싶어진다고 할까요.”
러셀은 여기서 거절하는 것도 이상하다 생각해 그냥 그들이 내미는 술잔을 받아들었다. 문득 아엘라시스가 술을 먹어도 되나 싶어 보았지만.
이미 아엘라시스도 희희낙락한 얼굴로 술잔을 받고 있었다. 러셀은 그냥 놔뒀다. 아침에 머리 한 번 깨져봐야 술의 무서움을 아는 법이다. 아엘라시스가 술잔을 받으며 말했다.
“고마워, 인간!”
“예? 아, 하하. 예.”
아엘라시스의 외침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테모시는 주위를 둘러보며 쑥스럽게 웃었다.
“음, 뭔가 건배사라도 할까요?”
도이든은 손사래를 쳤다. 레함도 거들었다.
“됐어, 건배사는 무슨. 그냥 건강이나 기원하자고.”
“그럼, 우리의 유적 발굴의 성공과 러셀, 아엘라시스의 건강을 기원하며.”
러셀은 술을 마셨다. 벌꿀 술이라는 이름답게 달짝지근한 맛이었다. 도수가 약한 건 아닌지 화끈한 기운이 식도를 덥혔다. 위장이 부글부글 끓는 듯 했다.
러셀도 술은 오랜만에 마시는 것이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아엘라시스는 조심스럽게 술잔에 도톰한 빨간 입술을 대고는 홀짝거렸다. 그러다가 마음에 들었는지 꼴깍꼴깍 마셨다.
순식간에 소녀의 얼굴이 발개졌다.
“우우와아, 이거어 맛 조타아? 달아!”
늘어진 혓소리에 사람들이 웃음을 지었다. 하얀 머리카락에 인형 같은 외모의 소녀가 양반다리로 앉아서 두 손으로 술잔을 들어 마시는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술잔이 돌아가자 분위기는 조금씩 풀려갔다. 테모시는 이번 유적에서 괜찮은 유물을 얻으면 비싸게 팔아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도이든은 면직점을 차린다고 했고, 레함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이든이 이 녀석이 마음에 둔 여자가 있다며 폭로해 웃음을 자아냈다. 레함은 얼굴이 조금 빨개졌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사람이 다섯이나 되자 많았던 벌꿀술도 거의 다 비워졌다. 테모시는 남은 술을 모두 러셀과 아엘라시스에게 부어주었다.
아엘라시스는 그렇게 주는 대로 넙죽넙죽 다 마셔버리더니, 앞뒤로 고개를 꾸벅 꾸벅 흔들었다. 졸린 모양이었다.
“아엘라.”
러셀이 조용히 부르자 아엘라시스는 퍼뜩 고개를 들더니 무릎걸음으로 러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겨드랑이 아래로 파고들어 머리를 뉘였다.
코- 하고 작게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잠든 것이었다. 테모시가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퍽 빨리 잠드는군요?”
“그런 편이지. 당신들은?”
“아,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먼저 불침번을 서겠습니다. 러셀님을 마지막에 깨워드리죠.”
러셀은 고개를 저었다.
“식사를 해줘서 고맙긴 하지만 다른 자들과 같이 밤을 보내고 싶진 않소. 불씨를 챙겨서 다른 곳으로 가주길 원하오. 사례를 원한다면 드리지.”
그러자 도이든이 당장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벌건 얼굴이 된 도이든이 소리쳤다.
“뭐요? 아니, 이 오밤중에 돈을 줄 테니 떠나라니, 그 무슨 경우 없는······.”
도이든의 말끝이 흐려졌다. 러셀이 코트 안에서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꺼낸 것이다. 동전이 서로 몸을 부딪치며 내는 맑은 소리에 남자들의 눈이 커졌다. 주머니 입구가 열리며 금빛과 은빛이 물결치자 입까지 벌어졌다.
러셀은 그 안에서 은화 세 개를 집었다. 이 정도면 썩 괜찮은 여관에서 닷새는 묵을 수 있는 큰돈이었다. 혹은 창관에서 여자를 끼고 하룻밤을 질펀하게 뒹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러셀은 은화가 동화라도 된다는 듯이 가볍게 건넸다.
“받으시오.”
테모시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어, 그,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만······.”
“그 쪽 요리 솜씨가 썩 괜찮았으니 됐소. 거기다 술도 주었잖소.”
결국 테모시가 대표로 은화를 받았다. 다른 두 남자의 표정도 밝아지는 것이 역시 돈은 어떤 상황에서든 만병통치약이었다.
테모시와 도이든이 가방을 챙기는 동안 레함은 스튜가 담겼던 그릇과 술잔을 수거했다. 러셀과 아엘라시스는 깨끗하게 비운 반면, 테모시 일행의 것은 군데군데 먹지 않고 남긴 건더기가 조금 있었다.
러셀은 말없이 치우는 것들을 보다가 코트를 여미고 자세를 풀어 아엘라시스가 더 편히 자게 만들었다. 백발의 소녀는 우웅, 하고 잠꼬대를 하며 몸을 웅크렸다. 레함이 말했다.
“가족 관계도 아닌데 많이 아끼시는 모양이오?”
“어쨌든 내가 책임지게 되었으니까.”
“흠. 사정이 있으신가 보군?”
“누구나 그렇지.”
레함은 러셀의 단답에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다는 뜻을 읽고 물러갔다. 짐을 모두 챙긴 테모시가 모닥불에서 장작 하나를 집어 횃불을 만들었다. 도이든과 레함도 각자 횃불을 만들어 곁에 섰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가시오. 술 잘 마셨소.”
테모시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유적 발굴자들은 떠났다. 러셀은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까지 떠난 방향을 주시했다.
곧 사위는 다시 조용해졌다. 아니, 조용하지 않았다.
싱그러운 계절에서 잊고 있었던 곤충들이 저마다 소리를 내며 울었다. 바람은 잔잔했고, 모닥불은 여전히 탁탁 거리며 타올랐다.
러셀은 모닥불 속으로 장작을 몇 개 더 던져 넣었다. 이미 까맣게 탄 숯과 생나무가 만나며 무수한 불티를 튀어올렸다.
푸르릉, 하고 크라이가 입소리를 내며 머리를 뒤척였다. 다리를 움찔움찔 하는 것이 꿈속에서 너른 초원이라도 달리는 듯 싶었다.
러셀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 시간 후, 눈을 떴다.
***
“정말 할 거야?”
“그럼 안 하냐? 아까 그 돈주머니 못 봤어? 레함 너, 마을로 돌아가면 노라에게 청혼한다며.”
“······.”
테모시가 가방에서 쇠뇌를 꺼내드는 동안, 도이든은 레함을 설득 중이었다. 레함은 망설이고 있었다.
“이미 아틱소 풀이랑 벌꿀 술까지 먹였어. 지금쯤이면 다 소화되고도 남았을 시간이야.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자고 있을 거라고. 그냥 가서 코트랑 여자애만 빼돌리면 되잖아.”
“여자애까지?”
“그래! 아까 그 계집애가 얼마나 예뻤는지 봤잖아? 노예로 팔기만 해도 큰돈이 떨어질 거야. 코트는 어떻고? 그 코트에서 고기랑 돈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거 봤잖아! 딱 봐도 엄청난 마도구라고!”
“······그래도, 그런 마도구를 갖고 있을 정도면 뭔가 한 수가 있는 자가 아닐까.”
“레함.”
그때 쇠뇌를 들고 화살을 시위에 장전하던 테모시가 말했다.
“이미 우린 두 번이나 던전과 유적에서 허탕을 쳤어. 이번 유적은 뭔가 다르다는 말이 있다지만, 그래봤자 우리 같은 뜨내기들한테 기회가 돌아올까? 저번과 마찬가지로 귀족들, 마법사들, 뒷배 있는 모험가, 용병들이나 재미 보겠지.”
“그래도.”
“뭘 그렇게 망설여?”
레함은 어쩐지 감이 좋지 않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의 감이란 것은 누구나 그렇듯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는 것이었으니까. 일례로 도박장에서 그는 별로 돈을 따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리는 느낌. 입밖으로 꺼낼 수는 없지만, 레함은 어쩐지 늪 안쪽으로 걸어들어가고 있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테모시가 다가와 레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특유의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을에서 함께 자란 세 사람이 결국 따를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미소다.
“우린 세 명이야. 저쪽은 겨우 두 명이고. 거기다 하나는 잡히면 부러질 것 같은 가냘픈 여자애인데다가, 남자한테는 불면증 환자도 이틀은 재울 수 있는 약을 먹였잖아. 우리는 먹지 않았고.”
테모시는 방금 만났던 이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저 여자애, 남자라고 불렀다.
레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릇을 수거하면서 러셀과 아엘라시스가 스튜의 건더기까지 싹싹 긁어먹은 것을 확인했다.
반면 그들은 의도적으로 아틱소 풀을 먹지 않았다. 아틱소 풀은 그냥 음식에 넣으면 잡내를 제거해주고 독특한 향을 내주는 풀이지만, 벌꿀 술과 같이 먹으면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해주는 약초이기도 했다.
효과가 완전히 나기까지 한 시간 정도가 걸리고, 그 시간이 지나면 귀에 고함을 질러도 깨지 않는다.
레함이 말했다.
“그런데 굳이 무장까지 해가는 이유는 뭐야?”
“보험이지. 가다가 짐승이라도 만날 수도 있잖아. 알았으면 너도 칼 챙겨. 칼날에 숯가루 바르는 거 잊지 말고.”
이미 도이든은 챙겨온 횃불로 만든 모닥불에서 숯을 끄집어내어 검은 가루를 만들고 있었다. 레함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도 칼을 꺼내 칼날에 숯가루를 발랐다.
비 반사 처리된 칼은 더 이상 달빛과 별빛에 빛나지 않았다. 지금부터 그들이 할 무도한 일이 하늘의 시선에 띄지 않기 위해서.
세 사람은 신발까지 가죽신으로 갈아 신고 천천히 나아갔다. 발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왔던 길을 돌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횃불로 나뭇잎과 가지를 그을리면서 표시를 남겼으니까.
곧 테모시, 도이든, 레함은 한 시간 전 그들이 먹고 마시며 떠들었던 작은 공터에 도착했다. 손에는 하나같이 검게 물든 칼을 들고 있었다.
공터 중앙의 모닥불은 장작이 보충되지 않아 연기를 피우고만 있었다. 벌건 숯이 열기를 내뿜고 있었기에 그리 춥진 않을 터였다.
선두에 서서 가던 테모시가 주먹을 들어올려 도이든과 레함을 멈춰 세웠다. 그는 쥐고 있던 칼을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더니, 등에 매어두었던 장전된 쇠뇌를 옮겨 쥐었다.
그 모습을 본 레함이 자기도 모르게 일어서려 하자, 도이든이 우악스레 그의 어깨를 붙잡아 아래로 내렸다. 레함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하려는 거야! 그냥 코트랑 여자애만 챙기고 간다면서!”
“너 이럴까봐 미리 말 안한 거야, 임마! 저 자식이 깨어나면 당연히 말을 타고 우릴 쫓아오지 않겠냐? 미리 죽여 놔야지!”
“아니, 그런······!”
뒤의 소란과는 아랑곳 않고 테모시는 조용히 쇠뇌를 나무에 기대어 누워있는 러셀에게 겨눴다. 그의 왼편에는 백발의 소녀, 아엘라시스가 모포를 덮은 채 자고 있었다.
쇠뇌를 겨누는 테모시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냉막했다. 아까의 싱그러운 미소와 존댓말을 하던 사내의 순박했던 얼굴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테모시는 침착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며 가늠자를 러셀의 머리에 조준했다. 손가락이 방아쇠에 닿았다.
퉁!
작은 소리와 함께 방아쇠가 당겨지자 쇠뇌의 복잡한 톱니, 도르래가 풀리며 팽팽히 당겨져 있던 시위를 놓았다. 그러자 장전되어 있던 화살이 맹렬한 기세로 쏘아져 러셀의 머리에 꽂혔다.
러셀은 축 늘어졌다.
“후우.”
테모시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는 겉으로도, 속으로도 사과하지 않았다. 어차피 세상은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관계다. 먼저 먹지 않으면 먹힌다. 그것이 테모시가 마을을 나와 세상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그때, 축 늘어져 있던 러셀의 시체가 흔들렸다. 뭐지?
테모시가 눈을 찌푸린 순간 러셀의 몸은 안개처럼 훅, 하고 사라졌다. 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테모시는 벌떡 일어섰다.
“뭐, 뭐야? 어디 간 거야?”
그리고 죽어서도 잊지 못할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