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새싹의 계절 속에서 (2)
***
“거기 난로에 불 좀 넣어줘.”
“예, 아가씨.”
하녀가 난로에 불을 지피는 동안 이루실은 망토를 벗고 푹신한 의자에 지친 몸을 뉘였다. 그녀의 몸에 맞춰 맞춤 제작된 의자가 편안하게 그녀를 감쌌다.
웨이브는 이제 마무리 단계다.
아운힐나르의 겨울에 모여드는 마력의 기운은 동물들을 마수로 변화시키고, 기존에 존재하던 괴물들 또한 흉성을 띄게 만들었다. 설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기후에 맞춰 진화한 괴물들도 마찬가지다.
예년보다 살짝 마수들의 공세가 높긴 했지만, 북방을 지키는 6개 대가문은 능숙하게 마수들을 견뎌냈다. 백 년 이상의 저력은 무시 받을 것이 못된다.
이루실은 그 틈바구니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루실. 들어가도 되니?”
“들어오세요, 어머니.”
현숙한 목소리의 주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하드 가의 안주인, 레이라였다.
레이라 유블킨 자하드. 알레드마 가문의 차녀였던 레이라는 라하르트에게 시집을 오면서 자하드의 성을 얻었다.
짙은 금색 머리카락에 연 파랑색 눈동자. 사십 대의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꾸준히 몸매를 가꾸고 관리한 덕에 삼십 대 초반으로도 보였다.
하녀가 고개를 숙이고 나가자 방에는 레이라와 이루실, 둘만 남게 되었다. 레이라는 이루실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일은 다 마치고 온 거니?”
“네. 아버지는요?”
“다른 가주들과 회합하러 갔단다. 보나마나 또 밤늦게까지 술 마시고 들어오겠지. 네 동생들은 공부 마치고 놀러나갔다.”
“속 편하네요.”
“넌 누나이자 언니잖니. 자하드 가문의 다음 주인이기도 하고.”
“결국 원로원에서 러셀은 쳐 낸 건가요?”
러셀이란 이름이 나오자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레이라는 눈을 깜박이다가 말했다.
“어차피 후계 구도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너였어.”
“그랬죠. 몇몇 고루한 분들이나 남자 가주를 선호하셨으니까. 그래도 러셀은······, 특별했잖아요.”
“특별했지. 네 아버지가 실종됐다가 데려온 아이였으니까. 원로원은 정통적인 후계자를 원한다. 넌 더 할 나위 없는 정통 후계자고.”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젊은 라하르트가 겨울에 실종된 적이 있었다. 당시의 토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눈 폭풍이 거세게 불어 닥쳤고, 그때 미처 길을 찾지 못하고 동떨어진 것이었다.
자하드 가문은 총력을 다해 수색을 펼쳤지만 악천기후 탓에 난항을 겪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모두가 그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을 때 라하르트는 극적으로 귀환했다.
얼이 빠진 표정의 라하르트는 실종되었을 때 당시 그대로의 옷차림으로 가문으로 돌아왔다. 어디 하나 다친 곳 없었다.
그리고 그의 품에는 한 남자 아기가 포대에 감싸여진 채 안겨 있었다.
라하르트는 그 아기를 자신의 아들이라 말했다. 그리고 러셀이라고 이름 붙였다.
“어머니는 러셀을 그다지 싫어하지 않았던 것으로 아는데요.”
“싫어하지 않아. 하지만 좋아할 수도 없었지. 도대체 아이가 아이답지 않았잖니.”
“예쁘게 생겼잖아요.”
“아름다운 외모는 첫 인상을 결정하는 지표일 뿐이야. 중요한 건 그 속이지.”
러셀은 외모부터 기이했다. 흑발이야 아버지를 닮아 그렇다 치지만, 자청색의 눈동자는 가계의 누구도 지닌 적이 없던 색깔이었다. 물론 다른 가문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레이라는 처음 라하르트가 아기를 데려왔을 때부터 누가 낳은 것이냐며 물었지만, 라하르트는 자신도 모른다고 답했다.
얼어붙어 가는 몸을 부여잡고 눈발을 해치며 걸을 때 의식을 잃었고, 깨어나 보니 자신의 품에 아기가 안겨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눈 폭풍이 그치고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고.
레이라는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문의 마법사와 의사들은 라하르트에게 별다른 정신 이상이나 조종의 흔적은 없다는 소견을 내놓았다. 라하르트는 정상이었다.
라하르트는 레이라와 결혼하기 전까지 여자관계가 난잡한 사람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라하르트가 북방의 기이한 마력에 홀려 괴물의 아이를 받아온 것은 아닌가 수군거렸다.
하지만 러셀은 자라면서 머리에 뿔이 돋아나지도, 피부에 털이나 비늘이 자라지도 않았다. 그저 평범한 소년으로 자라났다.
물론 그 평범함도 비약을 맞은 식물처럼 불쑥불쑥 커지는 신체나 장정 서넛도 넘어트리는 완력, 마력에 대한 탁월한 재능으로 멀리 사라졌지만.
레이라의 우려와는 달리 러셀은 그녀의 자식들과 잘 어울렸다. 동생들은 물론이고 여섯 살 터울인 누나, 이루실까지도.
“난 그 아이가 집을 나가준 게 고맙다는 생각까지 드는구나.”
“어머니.”
이루실이 검은 눈동자를 번뜩였다. 허나 레이라는 그 야수와도 같은 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분명히 말해두마, 이루실. 그 아이는 내 자식은 아니다만, 분명 네 아버지의 피를 이었다. 원한다면 이 자하드 가의 가주가 될 수도 있어.”
“러셀은 그런 걸 원하지 않았어요.”
“사람의 생각은 변하는 법이야. 방랑을 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느냐?”
“저희들과 같이 키운 러셀을 그렇게 보고도 모르세요?”
레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모르겠다. 그 아이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살았는지. 이따금씩 어린 아이는 생각할 수도 없는 지점을 곧잘 짚었지. 사람과 사람 간의 알력 관계, 미묘한 대화에서 벌어지는 신경전 같은 것들. 다른 자들은 어린 나이에 그렇게 총명할 수 없다고 했지만, 난 나이든 사람이 아이의 몸에 갇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다.”
러셀이 들었다면 놀랄만한 통찰력이었으나, 아쉽게도 그 자리에 있는 건 레이라와 이루실 뿐이었다. 이루실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얘기 다 하셨으면 돌아가 주세요. 쉬고 싶네요.”
“아직 다 안 했다. 네 아버지에게 들었어. 봄이 오면 러셀을 찾으러 가겠다면서.”
“······하여튼, 입 싼 아버지. 네, 왜요. 그러면 안 되나요?”
“당연히 안 되지. 봄에 네 승계식이 치러지는데 그 주인공이 빠지면 되겠니?”
“올해 봄이요? 너무 이른 거 아닌가요.”
“오히려 늦은 거지. 러셀을 찾아가는 건 그만둬라. 블라디카에서도 파혼을 고려하고 있다는구나. 헬라가 반대하고 있다지만.”
파혼이라. 어머니와의 대화중에서 그나마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이루실은 내색하지 않았다.
“이만 가 보마. 쉬거라.”
레이라는 방을 나갔다. 이루실은 일어서서 어머니를 배웅하고 문을 닫았다.
타닥거리며 난로의 장작들이 타는 소리를 냈다. 이루실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창가에 다가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하늘에 무수한 별이 떠 있었다.
저 어딘가에는 그녀의 남동생도 똑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었다. 이루실은 주먹을 꼬옥 쥐었다.
***
별빛 밤하늘 아래 찾아온 낯선 이들은 총 세 명이었다. 모두 남자였고, 가죽 갑옷과 칼로 무장했다. 등에는 커다란 가방이 매여 있었다.
그 중 선두에 선 사슬 조끼를 입은 남자가 재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작달막한 공터에 난 모닥불, 나무 젓가락에 꽂힌 고기들. 그 앞에서 고기만 보며 다른 이들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 소녀.
소녀의 외모는 아름다웠다. 백발의 머리카락도 특이했지만,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모여든 이목구비는 그야말로 인형 같았다. 마치 엘프나 드래코니안 같았다.
하지만 귀는 둥글었고, 머리에 뿔도 나지 않았다. 엉덩이에도 꼬리는 보이지 않았다. 외모만 제외하면 평범한 십대의 소녀 같았다.
한 쪽에는 잘생긴 흑색의 말이 다리를 굽히고 앉아있었다. 검은 갈기에 탄탄한 근육들이 맥동치는 것이, 한 눈에 보아도 비싼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근처의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남자는 키와 덩치가 대단했다. 검은 머리카락에 신기한 빛깔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사슬 조끼는 남자의 덩치에 놀란 눈빛을 띄웠다가도, 그가 어떤 무장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입고 있는 것은 그저 검은 색에 은빛 문양이 새겨진 코트와 단출한 옷차림이었다.
장검 한 자루도 가지고 있지 않다니. 혹시 마법사인가? 하지만 곁은 물론이고 어디에도 지팡이나 룬북으로 보이는 마도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삭정이와 오래된 나뭇가지, 약간의 장작들 뿐이었다.
순식간에 탐색을 마친 사슬 조끼 남자는 두 손을 들었다. 위협적이지 않다는 몸짓이었고, 여전히 모닥불의 불빛이 닿는 반경에 들지 않은 채였다. 사슬 조끼가 코트를 입은 남자의 물음에 답했다.
“네, 저 앞에서 불빛이 보이길래 찾아온 길입니다. 이 낯선 숲속에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동석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코트를 입은 남자는 물끄러미 그들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낯선 세 사람은 조심스럽게 모닥불의 불빛이 닿는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 동작은 자신들이 위험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혹시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저희에게 솥과 약간의 식재료들이 있어서 스튜를 끓이려 합니다만.”
여지 껏 관심도 보이지 않던 백발의 소녀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사슬 조끼의 남자가 보란 듯이 큼직한 가방을 열더니 무쇠솥과 잡다한 요리 재료들을 꺼냈다.
고기 약간과 콩, 양파, 감자 등 채소도 다양했다. 코트의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나도 보태지.”
그러고는 코트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남자들은 뭐하나, 싶은 눈초리로 보다가 곧 그 작은 안주머니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고기들을 보면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 하하. 고기를 많이 가지고 계시는군요?”
“꼬마애가 식욕이 넘쳐서.”
“꼬마 아니거든! 너가 이름까지 지어주고는 왜 꼬마라고 불러?”
백발의 소녀가 성을 냈다.
“키도 작은 주제에. 꼬마면 꼬마지.”
“키 클거야! 그리고 난 321살이야!”
“나이의 증명은 살아온 세월이 아니라 경험한 시간이야. 그리고 내가 볼 땐 넌 아직 꼬마야.”
“으!”
남자와 백발 소녀의 대화는 어쩐지 현학적인 뭔가가 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사슬 조끼의 남자가 말을 건넸다.
“저, 삼백 살이라뇨?”
“신경 쓰지 마시오. 어린 아이의 투정일 뿐이니.”
“안 어리다니까!”
“시끄러.”
답을 듣지 못한 남자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스튜를 끓이기 시작했다. 장작을 더 넣어 불의 세기를 키우고, 솥 아래 부착된 거치대를 편 다음 물과 아까보다 많아진 고기, 채소들을 넣고 끓였다.
금세 맛있는 냄새가 솔솔 피어났다. 사슬조끼의 남자는 가방에서 그릇을 꺼내 스튜를 담고는 나무 수저까지 담아 소녀에게 건넸다.
백발 소녀는 냉큼 받고는 바로 수저를 들어 스튜를 떠먹으려 했다. 그때 남자가 말했다.
“아엘라시스. 감사하다고 해야지.”
“······꼭 이럴 때만 이름을 부르지. 짜증나.”
“어서.”
아엘라시스라는 이름의 소녀가 사슬 조끼의 남자에게 인사했다.
“고마워. 죽었다 깨도 알지 못하겠지만, 정말 위대한 업적 하나를 이뤘다는 것을 기억하고.”
코트를 입은 남자는 고개를 살살 저었다. 사슬조끼의 남자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아, 제 이름은 테모시라고 합니다. 이쪽은 각각 도이든, 레함이라고 합니다.”
“러셀.”
통성명을 마치고 난 다음에는 식사 하는 소리만 들렸다. 러셀도 스튜를 후루룩 먹었다. 요리 솜씨가 나쁘지 않은 것인지 맛이 좋았다. 테모시가 물었다.
“혹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 따님이십니까?”
물으면서도 테모시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일단 머리카락 색깔과 외모가 확연히 달랐으니까.
과연 두 개의 답이 동시에 나왔다.
“아니오.”
“아니거든?!”
“······어, 그러시다면?”
이번에도 두 개의 답이 같이 나왔다.
“떽떽거리는 짐덩이.”
“불친절한 하인!”
러셀과 아엘라시스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테모시는 더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잠시 후, 테모시는 다시 질문했다.
“큼. 혹시 어디로 가십니까?”
남은 스튜를 들이킨 러셀이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남쪽으로.”
“남쪽? 당신도 던전에 찾아가는 길입니까?”
던전? 러셀이 알기로 던전은 지하 감옥이었다. 그건 여기서도 같은 말이긴 했지만, 의미는 좀 더 포괄적이었다.
던전은 보통 고대의 마법사가 남긴 실험실이나 연구실, 혹은 마법적인 유물들이 들어있는 공간이었다. 그도 아니면 미궁이거나 유적을 일컫기도 했다.
물론 그만큼 수많은 위험이 산재했다. 미치광이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키메라, 끔찍한 괴물들, 물리적, 마법적 함정, 미로, 기타 등등.
그러나 잘만 하면 인생 여럿 필 수 있을 만큼의 보물들이 발견되기도 해서 수많은 자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곳이기도 했다.
러셀은 나머지 남자들의 허리춤이나 가방 고리에 묶여있는 잡다한 도구들, 작은 망치, 질긴 밧줄, 정, 끌 등의 것을 보면서 납득했다. 유적 발굴자들인가 보군.
“아니오. 여기서 처음 듣는군. 그게 어디 나타나기라도 했소?”
“그렇습니다. 여기서 하루거리의 도시 근처에서 던전으로 보이는 곳의 입구가 열렸다는군요. 규모가 꽤 큰 모양이라 여러 소문도 돌고 있습니다. 고대 요정 왕국의 유적이라는 둥, 용의 둥지라는 둥······.”
용의 둥지라는 말에 아엘라시스의 눈이 반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