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폭발
무서운 비명을 지르며 마물들이 불타올랐다. 놈들이 지르는 괴성이 절벽에 반사되며 쩌렁쩌렁 울렸다.
두 성기사가 불러낸 광선은 마물들을 불사 지르는 것과 동시에 차원문 자체에도 타격을 주었다.
쿠구구궁, 하는 소리가 나며 차원문의 크기가 작아졌다. 하지만 차원문은 아직은 아니라는 듯 계속해서 마물들을 토해냈다.
성력에 반응한 놈들은 눈을 벌겋게 만들며 당장 눈앞에 있는 러셀과 일행들을 죽이기 위해 이빨과 발톱을 번뜩였다.
러셀은 말없이 양손으로 대검을 쥐고 달려든 마물을 양단했다. 정수리부터 갈라진 놈이 월광에 불타 스러지는 것과 동시에 위와 옆에서 마물들이 달려들었다.
놈들은 대개 맹수와 인간, 그리고 뭔지 모를 짐승들의 외형에서 한 부위들만을 골라 엮은 것 같은 외형이었다.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고, 그래서 러셀은 그 엮음에 한 줄기, 혹은 여러 줄기의 첨삭을 더해주었다.
숭덩숭덩 잘려나가는 자신의 신체 부위들을 보며 마물들은 어처구니없는 신음을 내뱉지도 못했다. 죽었으니까.
러셀은 자신의 첨삭이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쳐주었는지는 관심 없었다. 그저 더 많은 곳에 편집의 손길(혹은 칼질)이 닿길 원했다.
마물들은 그 폭풍 같은 검날의 세례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공포가 거세된 듯 수족들이 잘려나감에도 어떻게든 러셀의 피부에 이빨 하나, 발톱 하나 박으면 소원이 없다는 듯 달려들었다.
사자 머리의 이족 보행 마물, 곤충과 같은 겹눈에 입가 양쪽에 벌어진 이빨이 딱딱 부딪치는 놈, 온몸에서 붉은 진액을 흘리는 놈, 눈코입에서 차가운 숨결을 토하는 놈, 얼굴이 화상이라도 입은 듯 일그러진 마물이 전후좌우에서 각자 가진 무기를 러셀에게 찔렀다.
목과 가슴, 등허리, 허벅지, 어깨, 사타구니를 찌르고 배어오는 공격들 앞에서 러셀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왼발을 지면에 깊숙이 박았다.
발이 바닥을 1센치 넘게 파고드는 감각과 함께 러셀이 크게 회전했다. 그의 길쭉한 팔과 이어지는 손, 그리고 대검이 커다란 원을 그렸다. 마물들은 머리나 허리가 통째로 나뉘며 땅에 툭, 툭 떨어졌다.
서커스단의 곡예사들이나 할 법한 기예였으나 그것이 무시무시한 대검과 월광빛이 서리자 단순히 곡예라 할 수 없었다.
월광에 갈라진 놈들이 비명을 지르고 몸을 바둥거리는 가운데, 매캐한 연기와 냄새 속에서 러셀이 검을 휘둘러 잔여물을 털었다.
맹목적으로 돌진하던 마물들도 그의 위용에 일견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지만 뜻 모를 괴성들도 멈춘 것 같았다. 러셀이 말했다.
“덤벼.”
다시 분노에 몸을 맡긴 마물들이 그에게 칼날과 발톱을 휘둘렀다. 라셀이 씩 웃으며 대검을 고쳐잡았다. 파직, 파직. 검신에 푸른 벼락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흡!”
짧게 숨을 들이킨 울카가 달려든 마물 한 마리를 갈랐다. 거대한 사자 머리의 괴물이 절명하고, 뒤를 이어 악어와 하마를 반반 섞은 듯한 놈이 커다란 어금니를 들이밀었다.
울카는 놈의 벌려진 입을 잡고는 그대로 뒤틀었고, 목이 돌아버린 마물은 그대로 죽었다.
울카는 모든 신체를 자유롭게 활용했다. 주먹과 발뿐만 아니라 어깨, 팔꿈치, 무릎 등의 박투술을 보였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달의 여신을 받드는 그녀의 몸에 성력이 어렸고, 성력은 지하, 혹은 다른 차원의 악마들에게 치명적이었다.
“흐아아아!”
울카가 고함을 질렀다. 일전 먼 공중에 떠 있었던 레이스를 갈라버렸던 다섯 줄기의 날카로운 일격이 그녀의 양손에서 펼쳐졌다. 바닥과 벽, 암석들이 깊게 파였고 그건 마물들도 똑같았다
집주인이 내려준 명징한 힘에 침입자들이 재가 되어 죽어나갔다. 그것은 다른 성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압!”
기합성을 토한 하일른과 제스가 눈부신 황금빛의 방패를 높이 치들었다가 바닥에 꽂았다. 그러자 거대한 빛의 장막이 위로 치솟아 길을 가렸다.
“태양의 가호를!”
두 성기사는 장검을 휘두르며 마물들을 배었다. 단단한 성갑은 그 자체로 강력한 방어구이자 무기였다. 성력의 보조로 상승한 근력과 체력이 한낱 인간으로 하여금 지옥의 마물들과 대적할 수 있게 만드는 기적을 선사했다.
방패로 머리를 후려치자 닿은 피부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눈알이 타오르는 고통에 허덕이는 마물에게 검이 날아들어 머리를 날려버렸다.
제스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방패로 마물의 공격을 막고 그 다음 자신이 검을 휘두르는, 일방일공의 공격법을 고수했다.
하일른은 방패 역시 무기라고 말하듯이 움직였다. 대전차처럼 방패를 앞에 세우고 돌격하다가도 다른 일행들과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지 않았고, 그대로 방패날을 휘둘러 마물들의 다리를 갈랐다.
허벅지가 찍힌 마물들이 고통스런 비명을 토하며 허리를 숙일 때 검이 스치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머리나 어깨죽지가 배여 떨어졌다.
하지만 마물들은 아직도 많았다. 제스가 소리쳤다.
“하일른님! 이거 언제 끝납니까!”
하일른이 덮쳐오는 구울 한 마리를 찔러 죽이며 외쳤다.
“차원을 여는 룬석은 보통 시전자의 마력량에 비례한다! 내가 아까 살펴본 바, 헤로케닌의 마력량은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아마 달의 사도 마나가르마님 덕분이겠지.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마력량으로도 위험한-.”
그가가가가강-.
전장을 뒤트는 소음이 차원문에서 울렸다. 점차 작아지고 있던 푸른 테두리의 암흑에서, 한 손이 빠져나왔다. 푸른 피부에 두터운 비늘들이 덮인, 여섯 개의 손가락을 가진 손이었다.
그 다음은 팔이, 그리고 어깨가, 마지막으로 머리가 빠져나왔다. 머리에 두 개의 투명한 얼음 뿔을 단 거인의 얼굴. 가슴팍은 털로 뒤덮였고, 하반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염소의 다리와 발굽을 지닌 체고 3미터의 괴물이 완전히 빠져나오자 차원문이 완전히 닫혔다.
악마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찬미하라. 이 따뜻한 공기. 넘치는 생명의 박동. 현계의 이 아름다운 풍경을.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지 모르겠군.
악마는 곧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백여 마리의 남은 마물들과 네 명의 사람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악마의 시선을 끈 것은 두 성기사였다. 가장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버러지들.
공격을 알아챈 건 러셀뿐이었다. 그는 전류를 몸에 두른 채 가속했고, 늦지 않게 하일른과 제스를 덮친 악마의 공격을 튕겨낼 수 있었다. 그건 푸른 불길이 휘감긴 채찍이었다.
꽈릉!
천둥소리와 함께 하일른과 제스는 갑자기 앞에 나타난 러셀과 그가 오른팔을 위로 크게 올린 것, 그리고 푸른 채찍이 튕겨져 나간 걸 목격했다.
-호.
악마가 감탄사를 흘렸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 아직도 은빛의 사슬들에 결박되어 있는 헤로케닌을 쳐다봤다.
-너, 로고스의 종복아. 꽤 신기한 것들을 적으로 삼았구나.
“큭, 알면 저 좀 도와주시지요.”
헤로케닌이 힘겹게 사슬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악마는 클클 웃으며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네 주인에게 빌어라. 난 너의 무엇도 아니다.
“내가 차원의 문을 열었습니다. 당신을 이곳에 올 수 있게 도왔습니다!
-로고스의 마력이지 네 마력이 아니다. 내게 더 이상 말 걸지 마라. 얼려 버릴 테니.
헤로케닌은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마물들은 달려들지 않고 악마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렇기에 울카도 러셀과 성기사들에게 합류할 수 있었다.
“저 악마는 뭐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뤼플하임에는 여러 악마들이 있고, 그들 하나하나의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일른은 공기 중에 흐르는 악마의 사악한 마력을 피부로 느끼며 입술을 잘게 떨었다.
“꽤 난적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겠군요. 아직 헤로케닌과 로고스도 처치하지 못한 마당에, 또 다른 악마라니.”
“실력 좋은 마법사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제스가 러셀을 쳐다봤지만 러셀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마법사가 아니다.
러셀은 아직 웅웅 떨리고 있는 나힐니르를 세게 잡았다. 칼리스덴의 용 이후로 가장 강한 괴물이었다. 그는 용에 대해 생각했다.
헤로케닌은 거인과 용들을 수호자라 말했다. 그들이 있어서 다른 차원, 세계의 침공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하지만 거인과 용들은 모두 사라졌고, 이제 막을 수 없다고.
용이라. 용에게서 뻗은 상념은 코트 속에 있는 한 주머니를 향했다. 이스메니오스가 머물렀던 작은 방에 있던 주머니.
그 주머니 안에는 이 난국을 타개할 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당장 쓰기에는 맞지 않았다.
다른 상념은 뒤의 가방으로 향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작게 꿈틀거린 것 같았다.
“이제 슬슬 일어나야지 않겠냐.”
문득 흘러나온 중얼거림에 울카와 하일른, 제스가 러셀을 쳐다봤다. 울카가 말했다.
“뭐가 일어나?”
“아니야.”
러셀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좌우로 높게 솟은 절벽 덕에 하나의 줄무늬처럼 보이는 하늘. 구름이 점차 짙어져 가고 있었다.
내쉬는 입김은 하얬고, 발목을 타고 흐르는 안개 또한 여전했다. 문득 난 여기 왜 있는가, 하는 작은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 피식 웃어넘겼다.
왜긴 왜겠나. 집을 나왔으니 여기 있지.
파직, 파직. 러셀은 자신이 일으키고 남았던 몸의 전류의 일부가 어딘가로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건 자신이 아직까지 어깨와 등에 튼튼히 매고 있는 가방으로 흐르고 있었다. 뒤를 돌아 가방을 살핀 러셀의 눈이 가늘어졌다.
“흠.”
그때, 악마가 걸음을 내딛었다.
-버러지들아. 삶에 대한 회고는 충분히 마쳤느냐?
크르릉, 크아악!
끼아아, 까아아아아!
헤겍, 헤겍, 헤게겍.
악마의 말에 동조하듯이 마물들이 제각기 성대에서 괴성들을 발했다.
울카는 코웃음을 치더니 전신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키가 2미터가 넘게 커지고, 온몸에서 회색의 거친 털이 돋아났다. 주둥이는 길쭉해졌고, 엉덩이에 달렸던 꼬리도 풍성해졌다.
“아우우우우-!”
울카가 하늘을 보며 높이 하울링을 울렸다. 그러자 하얗고 검은 하늘 어딘가에서 푸른 빛의 반점이 생겨났다. 달빛이었다. 그리고 절벽 위의 끄트머리에서 화답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늑대들이었다.
촤르르르륵!
늑대들이 절벽을 타며 협곡 아래로 내려왔다. 절벽 사이사이에 돌출된 암석들을 능숙하게 밟으며 내려오는 모습은 마치 산양 같기도 했다.
내려온 늑대들은 일곱 마리였고, 덩치가 웬만한 황소보다 컸다. 사람이 위에 타도 위화감이 없을 것 같았다.
하일른과 제스가 몸을 추스르며 전투 의지를 다지는 사이, 러셀이 말했다.
“내가 저 악마를 상대하지.”
“예? 안 됩니다! 어떻게 혼자서······!”
하일른이 말을 삼켰다. 러셀은 이미 용을 상대했던 전사였다. 그것도 죽이기까지 한. 세상에 용이 자취를 감춘 지 수백 년이 흐른 가운데 이런 업적을 세운 자는 지금 눈앞에 있는 러셀, 그 밖에 없었다.
“그렇게 알고.”
러셀이 그렇게 말한 순간, 마물들이 다시 바닥을 박차며 달려들어왔다. 그건 3미터 체고의 염소 하반신을 가진 악마 또한 마찬가지였다. 악마는 오른손에 채찍을, 왼손에 얼음의 대검을 형성했다.
러셀과 악마의 신형이 사라진 건 동시였다. 그리고 두 존재는 서로가 가졌던 거리의 중간지점에서 나타났다.
꽈아앙!
러셀의 대검과 악마의 얼음 검이 부딪치며 끔찍한 굉음과 충격파를 토했다. 원형으로 퍼진 충격파가 협곡 바닥을 부수고 균열을 일으켰다. 벽 또한 움푹 패이며 무너졌다.
-인간이, 내 힘을 받다니.
악마가 감탄사를 토하며 오른손을 옆으로 휙 뻗었다. 연결된 채찍이 파공성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러셀이 어떻게 손을 쓸 틈도 없이 채찍이 그의 몸통을 휘감더니 그대로 내던져졌다.
쾅!
머리부터 벽에 박혔던 러셀은 곧바로 악마가 당긴 채찍에 딸려나오며 반대편 벽에 다시 처박혔다. 러셀이 피 섞인 침을 뱉으며 말했다.
“씹.”
-흐하하하하!
악마가 웃음을 터트렸다. 웃기냐? 러셀이 이를 드러내더니 몸통을 감은 채찍을 왼팔로 휘감은 다음 번개를 일으켰다.
삽시간에 일어난 번개가 채찍을 타고 악마를 감전시켰다. 웃고 있던 악마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벌레 같은 놈이 수작을 부리는구나!
악마가 다시 채찍을 휘두르려는 찰나, 러셀이 먼저 대검으로 채찍을 끊고 벽을 박찼다. 다리와 발에 실린 힘을 견디지 못한 벽면이 와르르 부서지고, 러셀의 몸이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쏘아졌다.
놀란 악마가 얼음의 검을 틀어 검면을 세웠다. 나힐니르의 검극이 검면을 찔렀다.
까앙!
쇳소리와 함께 검이 튕겨졌다. 러셀의 왼주먹이 대포처럼 쏘아져 악마의 얼굴을 후려쳤다.
콰아앙!
고개가 크게 돌아간 악마가 벽에 처박혔다. 파고든 모양 그대로의 벽에서 악마가 웃음을 흘렸다.
-인간 따위가, 대단하구나! 넌 내 이름을 들을 자격이 있다. 난 퓨메론스칸이다!
“네 이름 따윈 궁금하지 않아.”
러셀은 조용히 서 있었다. 그의 주위로 마물들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마치 러셀이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악마의 명령에 의해 러셀을 놔둔 마물들은 뒤의 성기사와 수인화를 한 울카, 그리고 늑대들에게 덤볐다.
태양과 달의 성력을 두른 사제이자 전사인 그들은 막강했지만, 얼음의 괴물들 또한 강했다. 협곡 바닥에 가득 찬 안개는 시시각각 그들의 몸을 굳게 만들었고, 그렇기에 그들은 보다 더 많은 성력을 받아들여 싸울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신력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아니다. 마력과는 달리 천상에서 오는 힘은 체력과 근력, 순발력을 돋우며 전투를 도왔지만 그와 별개로 빠르게 지쳐가게 만들기도 했다.
러셀은 생각을 굳히고, 가진 마력의 절반을 벼락으로 바꿨다.
콰지지지직-!
러셀의 전신에서 막대한 전류가 치솟았다. 벽에서 완전히 나온 악마, 퓨메론스칸도 경악할 정도의 마력이었다.
-엄청나군······.
악마는 커다란 얼음 검과 채찍을 단단히 쥐었다. 현세에 나오자마자 이런 강력한 인간 전사를 만난 건 행운이자 불행이었다. 타고난 전투종족으로서는 얼음 심장마저 뛰게 만들 정도의 행운이었으나, 동시에 현세를 지옥으로 만들고자 하는 악마로서는 불행이었다.
허나 자세를 잡아도 인간은 달려들지도, 벼락을 뿜어대지도 않았다. 내심 벼락을 어디로 쏘아낼지, 그 방향을 짐작하기 위해 러셀의 발, 허리, 어깨와 팔을 유심히 살피던 퓨메론스칸은 러셀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의문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 뭐하는······.
일순 러셀의 전신에서 뾰족한 가지 끝을 뻗어내던 전류가 한데 뭉쳤다. 그것은 악마에게 향하지 않았다. 러셀이 매고 있는 가방으로 향했다.
그 막대한 벼락은 하나도 남김없이 가방 속으로 스며들더니, 자취를 감췄다. 수만 마리의 새가 동시에 지저귀는 듯한 소음이 일시에 사라졌다. 고요 속에서 러셀이 말했다.
“이제 늦잠은 그만 부리고 일어나라.”
러셀의 가방이 섬광과 함께 폭발했다.
***
울카가 두 손에 둘로 나뉜 마물의 시체를 들며 굳어버렸다. 하일른과 제스가 다급히 달려와 막 그녀를 덮치려던 마물 두 마리를 떨쳐냈다.
“울카! 갑자기 왜 그러는 겁니까!”
울카는 말없이 마물 시체를 바닥에 떨어트리더니, 공중을 가리켰다. 하일른과 제스가 의문을 가득 품은 얼굴로 울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두 성기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제스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세상에.”
어느덧 마물들도 맹목적인 공격을 멈췄다. 그건 본능 깊숙이 새겨진 하나의 공포 때문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들에게 맞섰던 적수에 대한 공포.
늑대들도 꼬리를 말며 울카에게 가까이 다가와 몸을 떨었다.
악마, 퓨메론스칸의 손에서 얼음 검이 떨어졌다. 칼이 떨어지며 떨그렁하는 소리가 났지만 악마는 그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건, 이건 말도 안돼.
탓탓탓탓탓!
전격이 뭉치는 소리가 났다. 눈부신 흰 빛을 뿜어대는 커다란 구체. 그것은 더 없이 빛나지만, 닿는 모든 것을 한줌 가루로 만들 정도의 파괴력이 내재되어 있었다.
악마는 비명을 질렀다.
-왜, 용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냐-!
벼락의 숨결이 악마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