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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51화 (52/225)

51화 회상

***

햇빛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인색한 빛. 한 마수가 겨울 숲 사이를 어슬렁거렸다. 놈의 외형은 곰과 비슷했다. 아마 원래는 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북부의 기묘한 마력의 흐름은 때때로 신기한 현상을 낳고, 맹수가 마수로 변하는 것 또한 그런 현상의 일종이었다.

마수는 나흘 전 포식했던 때를 떠올렸다. 비명을 지르던 두 발 달린 것들. 하지만 두 발은 네 발의 보폭을 이길 수 없다. 내리친 강맹한 앞발은 그대로 두 발 달린 것들의 머리를 분리했고, 마수는 배부른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거기다 두 발 달린 것들을 먹을수록 몸속의 힘 또한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식사와 힘의 충원. 두 개 모두 맹수와 마수로서 바라는 것이었고, 지난 한 달은 충분히 두 바램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마수는 냄새를 따라 간 곳에 두 발 달린 것이 있으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머지않아 두 발 달린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발 달린 것은 눈밭 위에 외로이 솟아난 바위에 앉아 있었다. 숱한 두 발 달린 것을 잡아먹으면서 나름대로의 지성을 획득한 마수는, 그 두 발 달린 것이 꽤 기묘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체적으로 검고 푸르렀다. 목을 두텁게 감싼 하얀 색의 동물 털과 그 아래로 뻗은 부드러워 보이는 재질의 망토. 그 속으로는 망토와 마찬가지로 검은 바탕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단추는 금으로 세공되었고 은 밸트와 바지 주머니에 장식된 은사슬이 눈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인간이었다면 그 범상치 않은 복식에서 꽤 높은 신분의, 혹은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하지만 마수의 시선에서는 그저 눈에 잘 띄는 사냥감에 불과했다.

마수는 천천히 두 발 달린 것에 다가갔다. 두 발 달린 것은 뭔가를 보고 있었다. 마수는 그게 뭔지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마수의 관심은 오직 저 두 발 달린 것을 먹으면 얼마나 강해질지, 혹은 똑똑해질지에만 쏠려 있었다.

사냥의 기회를 엿보던 마수가 달렸다. 그리고 두 발 달린 것이 공격을 받아내기 힘들 것이라고 짐작되는 지점에서 바닥을 박찼다.

육중한 거체가 거짓말인 것처럼 공중에 떠올랐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려 높이 쳐든 앞발에는 바위도 부술 만큼 강력한 힘이 담겨 있었다.

허나 마수는 앞발을 내리치지 못했다. 아니, 옴짝달싹 하지도 못했다. 두 발 달린 것의 머리를 터트리기 직전, 자신의 전신을 칭칭 묶어버린 하얀 쇠사슬 때문이었다.

수십 개가 넘는 쇠사슬은 대지에서부터 솟아나와 뒷다리, 몸통, 앞다리, 목, 머리까지 감겨져 있었다. 입의 아래턱과 위턱도 쇠사슬에 고정되었다. 벌릴 수도, 다물 수도 없었다.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신체 부위, 눈알을 굴린 마수는 그것이 처음부터 눈밭에 뿌려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꽈드드드- 가죽을 억지로 쥐어짜는 소리가 났다. 쇠사슬이 마수의 몸에 파고드는 소리였다.

눈앞이 번쩍이는 고통 속에서도 마수는 필사의 힘을 끌어올렸다. 죽음을 직감했기에, 바로 앞의 두 발 달린 것이라도 죽이려는 몸짓이었다.

여태까지 네 발 달린 것, 두 발 달린 것 가리지 않고 먹어치워 쌓은 힘이 폭발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앞발이 움직였다. 굼벵이가 기어가는 속도와 비견됐다.

그러자 여태 눈길 하나 주지 않던 두 발 달린 것이 고개를 들었다.

눈 같이 하얀 피부에는 잡티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그 자체로 황금비율을 자랑했으며,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칠흑과 같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 남성이라면 넋을 잃고 보았을 미모이나, 안타깝게도 마수에게 인간의 미모를 평할 수 있는 감식안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수들은 대개 단 두 가지로 나와 상대의 위치를 정립한다. 사냥꾼과 사냥감.

하지만 지금 누가 사냥꾼이고 사냥감인지는 명확했다.

두 발 달린 것이 말했다.

“좋은 기개야. 또한 그렇기에, 어리석어.”

마수는 어떻게든 이빨 하나, 발톱 하나라도 두 발 달린 것의 몸에 닿게 하기 위해 용을 썼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결국 뜻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보다 더 많은 쇠사슬이 마수의 몸을 감아가는 것이 더 빨랐다.

마수는 점점 시야를 덮어가는 하얀 어둠의 틈에서 생애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그게 마수가 가졌던 마지막 감정이었다.

마수는 미라 같은 꼴이 되어 눈밭에 떨어졌다. 하얀 쇠사슬이 마수의 붕대요 수의였다. 칭칭 감긴 사슬 틈새에서 검은 핏물이 흘렀다.

한 달이 넘도록 아운힐나르의 소류 산맥에서 악명을 떨치던 마수는 그렇게 죽었다.

마수를 죽인 여자는 설원 위에 흩뿌려진 검은 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는 손 하나 까딱 않고 사슬 뭉치를 움직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얀 설원을 깨끗한 도화지 삼아, 사슬을 붓 삼아, 마수의 피를 물감 삼아.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무 사이를 뚫고 내달렸다.

“아가씨! 이루실 아가씨!”

마수를 죽인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갑주를 입은 기사 다섯과 로브를 입은 젊은 여인. 이루실이라 불린 여자는 그리던 것을 눈으로 쓱쓱 지웠다. 그림은 그렇게 사라졌다.

곧 기사들과 여인이 도착했고, 그 중 젊은 여인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혼자서 이리 멀리 나오시다니요! 훅, 기사들도 대동하지 않으시고!”

“도나. 난 괜찮아. 봐.”

이루실은 마력을 거뒀다. 그러자 하얀 쇠사슬이 흩어지며 그 속에 거미줄의 고치처럼 감추고 있던 내용물이 드러났다. 거대한 곰의 형체로 짐작되는 마수의 시체였다. 도나와 기사들은 놀라지 않았다. 다만 한숨을 쉬었다.

“이루실 아가씨. 아가씨께서 자하드 가문 내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구현 능력을 가지고 계신 건 압니다. 저 같은 마법사 따위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강하시다는 것도 알아요. 그래도 다음에 나가실 때는 귀띔이라도 해주세요. 아침에 깨우러 갔다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시나요?”

이루실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주의하지. 그리고 전달할 소식이 있는 것 같은데. 해봐.”

도나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눈치도 빠르신 분이지만 워낙 주관이 강한지라 따르는 사람들은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럼에도 결국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 있긴 했지만.

하지만 지금 말할 내용은 오랜 시간 이루실의 곁을 지킨 도나도 긴장할 만한 소식이었다. 도나는 입술에 침을 바르고 말했다.

“···헬라 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이루실의 얼굴에 약간이나마 어려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도나의 표정, 다른 기사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도나는 헬라가 돌아왔다고 했다.

“내 동생은 같이 오지 않았군.”

서릿발보다 차가운 목소리에 도나와 기사들의 몸이 떨렸다. 도나는 고개를 숙였다.

“네. 도련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숙인 도나는 바위에 앉아있던 이루실이 뭔가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작은 책이었다. 겉표지에는 아무런 제목도 적혀있지 않았고, 속에도 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종이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누군가의 초상화.

그때 이루실이 쥐고 있던 책을 접고 품에 넣으면서 도나는 초상화의 인물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인물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루실은 바위에서 일어났다.

“어디 있지?”

“자하드 본가에 먼저 오신 걸로 압니다. 수정구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도나.”

“네, 아가씨.”

“난 먼저 돌아가겠다. 네가 남아서 상황을 정리해. 마수는 토벌되었고, 주민들은 더 이상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된다고.”

“알겠습니다.”

이루실은 그들을 지나쳤다. 도나는 고개를 숙인 채, 기사들은 경례를 취하며 그녀를 배웅했다.

***

이루실은 바람처럼 달려 본가에 돌아왔다. 경비병의 인사를 본체만체 하면서 그녀는 곧장 정문에 들어섰다. 자하드의 본가, 그 사유지는 광대했다. 자하드의 부와 권력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게끔.

지나가는 모든 사용인, 병사, 기사들이 어린 주인을 향해 인사했다. 이루실은 그것 역시 본 척도 안하면서 지나쳤고, 그들 역시 개의치 않은 채 할 일을 하러 떠났다.

대저택에 든 이루실은 거침없이 복잡한 통로, 계단을 지나 어느 방 앞에 이르렀다. 가주 실이었다. 그녀는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벌컥 열어젖혔다.

넓고 고풍스러운 방에는 단 두 사람만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 현 자하드의 가주, 라하르트와 블라디카의 후계자, 헬라였다.

라하르트는 뒤편에 발코니와 투명한 유리문을 배경으로 두고 정면을 보며 앉아 있었고, 헬라는 그 앞에서 옆얼굴을 보이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라하르트는 올 것이 왔다는 눈빛으로 이루실을 힐끔 보더니 헬라에게 말했다.

“고맙다, 헬라. 이제 돌아가 쉬어라. 별채에 방을 준비해뒀다. 블라디카 가주에게는 내가 말해두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가주님.”

헬라는 의자에서 일어나 라하르트에게 목례한 후 뒤돌았다. 자연히 막 문을 연 이루실과 마주하게 되었고, 헬라는 이루실에게 걸어왔다. 이루실이 말했다.

“헬라.”

헬라는 멈춰 섰다. 이루실이 문 사이에서 가로막고 비켜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루실.”

두 여인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이루실의 입가에 비틀어진 미소가 지어졌다.

“두 달 가까이를 소모하고도 홀로 돌아오다니. 뻔뻔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군.”

라하르트가 노호성을 내질렀다.

“이루실! 그만두거라!”

“아버지.”

“그만. 비켜서거라. 헬라는 먼 길에서 막 돌아온 참이다. 대화는 나중에 나눠라.”

“······.”

“어서.”

이루실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옆으로 비켜섰다. 이루실의 곁을 헬라가 무표정한 얼굴로 지나쳤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사람이 뛰쳐나갈 만 해요. 이리 숨이 막혀서야.”

이루실이 당장 헬라의 머리채를 잡지 않은 이유는, 물론 아버지인 라하르트가 보고 있기도 했지만 스스로도 그런 자신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품위와 교양을 아는 여인이었고, 생각대로만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무시 받아도 싼 인간으로의 지름길로 향하는 행동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이루실은 자하드의 장녀였지만, 상대 또한 블라디카의 차녀였다. 그것도 유력한 후계자. 후일이지만 곧 대등한 위치에 서서 미래를 일구어 나가야하는 동료 중 하나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인생은 원래 뜻대로 되지 않는다.

헬라는 태연한 뒷모습으로 복도를 걷다가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이루실은 가주실로 들어오며 문을 쾅 닫았다. 라하르트는 그런 딸을 보며 책상위에 손깍지를 얽고는 이마를 얹었다.

이루실은 아까 헬라가 앉아있던 자리의 반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가 물었다.

“러셀은요?”

“나도 모른다.”

“아버지.”

“칼리스덴이라는 도시의 흔적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헬라 말로는 서쪽으로 갔다는구나.”

서쪽. 대륙의 중부로 향하는 길이다. 위아래에는 왕국들이 있고, 더 넘어가면 제국이 나온다.

“그 웃기지도 않는 세계 여행을, 정말 하려는 것이군요.”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여차하면 우리와의 연을 완전히 끊어버릴 지도 모르지. 너도 알다시피, 러셀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이루실은 앉은 의자의 팔걸이를 꾸욱 쥐었다. 단단한 마호가니 나무의 적갈색 팔걸이에 그녀의 손자국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라하르트는 그것을 우울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믿기 어려운 말 또한 들었다.”

“···무슨 말이요.”

“칼리스덴에 용이 나타났었다는구나.”

이루실은 거세게 고개를 돌렸다. 라하르트는 흔들리는 딸의 검은 눈동자를 보며 끄덕였다.

“헬라가 확인했다. 두 달 전의 칼리스덴에는 엄청난 일이 연달아 일어났던 모양이다. 갑작스런 괴물들의 대규모 침공, 그 배후의 용족, 제국의 황녀. 화룡점정으로-그야말로 어울리는 말이 아닐 수 없겠구나-고대에 봉인 되었었다는 용까지. 거 참, 사고를 몰고 다니는 놈인 줄은 알고 있었다만.”

“러셀은요?”

“용을 죽였다.”

빠직. 기어코 마호가니 나무 의자 팔걸이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라하르트는 생각했다. 오랜만에 의자를 다 바꾸는군.

“···러셀이 용살자가 되었다고요?”

“정황상, 그리고 사실상 그렇다. 큰 키와 커다란 덩치에 자청색 눈빛을 흘리던 남자. 준수한 얼굴. 헷갈리기 쉬운 용모는 아니지.”

“물론 그렇죠.”

이루실은 마치 자기가 칭찬을 받은 것인 양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라하르트는 딸이 어느 누가 자신의 미모를 칭송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라하르트는 픽 웃더니 말을 이었다.

“자하드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은 걸로 보아 본명을 밝히고 다니지는 않는 것 같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내 생각에 초장부터 그런 거대한 사건을 겪었다면, 앞으로 그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을 것 같구나.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루실은 아버지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지금은 안 된다는 뜻이군요.”

“그래. 곧 완연한 겨울이다. 북부의 마수들이 활개 칠 시간이지. 너도 갖다오지 않았느냐.”

“···네. 마수는 처리했습니다.”

“잘했다. 러셀에 대한 추적은 잠시 중단한다. 지금은 모든 가문이 힘을 모아야 할 때야. 우리 내부의 일로 중대사를 그르칠 수는 없어. 이해하겠지?”

“···네. 아버지.”

“이해해줘서 고맙다. 러셀은 이미 용살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소문은 바람보다 빠르고 물처럼 어디에나 스며드는 법. 거기다 외모도 특출 나니 행방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잡아오는 건 또 다른 문제이긴 하다만.”

이루실은 결연한 얼굴을 들었다.

“그때는 제가 직접 다녀오겠습니다. 사지를 분질러서라도 데려오겠습니다.”

“그럼 힘을 키워라. 남동생에게 따라잡히지 않으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네.”

“이제 나가서 쉬어라. 난 이제 블라디카 가주에게 내 아들 놈 험담을 두 시간은 떠들어야 하니.”

이루실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풀썩 누웠다. 자하드의 권위에 걸맞게 방은 넓고 화려했다. 이국의 예술품들이 벽과 탁자 곳곳에 장식되어 있었다. 사용인들의 철저한 검수로 바닥과 벽지, 천장과 조화를 이루게 배치된 가구들 또한 방의 품격을 높였다.

허나 지금 그런 것들은 이루실의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일말의 희망이나마 품고 있던 헬라의 수탐은 실패로 돌아왔다.

까득.

이빨이 부딪치며 갈리는 소리가 났다. 이루실은 이를 갈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품에서 작은 책을 꺼냈다.

그건 그림, 삽화들이 들어가 있는 책이었다. 이루실은 첫 장부터 종이를 넘겼다.

어린 아기의 얼굴이 보인다. 아기는 점차 소년이 되고, 청년으로 자라더니 늠름한 남자가 되었다. 그림 솜씨가 썩 괜찮아 얼굴은 섬세하며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그려져 있었다. 물론 그녀 자신의 작품이다.

오랜 시간 문지르고 머무른 덕에 종이의 군데군데는 변색되어 있었다. 모서리는 조금 닳았다. 일견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시장에서도 팔리지 않을 삽화집 같았다.

하지만 이루실에게는 방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그녀는 한참을 침대에서 그림을 들여다보다가 잠들었다.

***

“뭘 그렇게 봐?”

울카가 러셀이 보고 있는 삽화집을 보면서 말했다. 러셀은 시선을 들었다가 내렸다.

“추억.”

“추억? 그림이?”

“누가 그렸는지, 누가 그려져 있는지에 따라 다르겠지. 이건 내게 추억이야.”

“봐도 돼?”

러셀은 울카에게 삽화집을 넘겨줬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 첫 장부터 넘겨보기 시작했다. 러셀은 삭정이를 집어 모닥불에 넣었다.

마을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밤이 됐다. 겨울의 해는 경주를 일찍 마친다. 더군다나 깊은 숲속이라면 햇빛은 더욱 빠르게 물러간다.

밤눈이 밝은 울카 덕에 그들은 어렵지 않게 야영할 수 있는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서로를 기대고 선 두 개의 커다란 바위 덕에 외풍이 적게 들고, 근처에 식수로 활용가능한 시냇물까지 흐르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가져온 식량으로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 불침번 순서를 정했다. 러셀은 자진해서 중간에 선다고 말했고, 하일른과 제스는 초번과 둘번을 섰다.

제스가 미안해하는 기색으로 러셀을 깨웠고, 러셀은 괜찮다고 답했다.

불침번을 서는 동안 담배나 필까 하여 코트 속의 가방을 뒤지다가 집에서 가지고 나온 것 중 하나인 삽화집을 발견했다.

늦은 밤과 타닥거리며 타는 모닥불, 밤하늘에 수없이 펼쳐진 별빛들은 오랜 추억을 회상시키는 장작이 되어주었다. 그러다 잠든 줄 알았던 울카가 잠이 안 온다며 슬쩍 일어났고, 그게 작금의 상황이었다.

러셀은 종이에 그려진 인물들을 보는 울카에게 천천히 설명했다.

“그건 내 아버지.”

“이 사람은?”

“어머니.”

“이 여자는?”

러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 스스로가 그렸음에도 미모는 퇴색되지 않았다. 애초에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내 누나.”

이루실. 속마음과는 다르게 나오는 말은 담담했고, 그렇기에 울카도 바로 다음으로 넘어갔다.

“응. 이 아이들은?”

“동생들.”

“흐응. 이건?”

울카는 러셀의 얼굴이 그려진 종이를 들며 짓궂게 웃었다. 색이 바랜 종이에 그려진 러셀은 머리에 큼직한 뿔을 달고 얼굴 이곳저곳에 흉터가 그려진 흉악한 생김새의 몰골이었다.

울카가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던 건 눈만 자청색으로 색칠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러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

“헤에. 그렇구나.”

울카는 그림과 현실의 러셀을 대조해가며 키득거렸다. 러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모닥불을 살피며 깜부기불을 살렸다.

마력을 조금 불어넣자 불꽃은 다시 맹렬하게 타올라 하늘로 승천했다. 타오르는 불씨가 하루살이보다 못한 생을 빛내며 살았다. 그리고 죽었다.

그 불티를 보며 러셀은 누나, 이루실을 생각했다. 그 못지않게 뛰어난 재능을 지닌 여인. 스물여섯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약혼이나 결혼은 하지 않았다.

가진 미모와 재능이 빼어난 만큼 북방뿐만 아니라 다른 가문들에서도 매파가 수없이 왔으나, 그녀는 모두 거부했다. 자신은 결혼할 생각이 없다면서.

러셀은 불티를 바라봤다. 잘 살고 있겠지.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나와 동생들도.

그때, 그림을 보며 실실 웃던 울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늑대 귀는 쫑긋 서고 작아진 동공이 밤하늘을 훑었다. 울카가 말했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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