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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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숲은 고요했다. 이따금씩 부는 바람이 나뭇가지 위에 매달린 눈을 떨어트리는 소리나, 말발굽이 바닥을 디디며 내는 달각거리는 소리만 퍼졌다.
아름드리 나무에서 돋아난 나뭇가지들이 푸른 하늘을 향해 앙상한 손을 뻗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바람이 불면 눈이 떨어지거나, 떨어질 눈이 없으면 촤, 촤하고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들짐승은 물론 날짐승도 찾기 어려운 혹독한 숲 속을 흑마가 걸었다.
다각, 다각, 다각. 푸르릉.
남자, 러셀은 방향만 잡아줄 뿐 그의 말, 크라이를 재촉하진 않았다.
그의 옷차림은 두텁지 않았다. 부츠와 가죽 바지, 얇은 셔츠, 그리고 코트로 끝이었다.
루드비히가 남긴 갑옷, 바엘이 변환된 이 코트는 자체적으로 온도조절기능이 달린 마도구이기도 했다. 덕분에 러셀은 11월의 초겨울 날씨에도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물론 가진 마력으로 몸을 덥히는 수단도 있지만, 그건 계속 신경을 쓰고 있어야 하는 일이다.
러셀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얼마 남지 않은 빵을 꺼내 먹었다. 일주일 전 작은 마을에서 산 빵이었다.
식량은 거의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육포가 조금 남긴 했지만 오늘 저녁이면 끝난다. 러셀은 이 길의 끝에서 마을을 발견하길 기대하고 있었다.
이왕이면 큰 마을이었으면 싶었다. 일주일이나 노숙을 했더니 여간 찝찝한 것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겨울은 쓸 수 있는 물도 적어지니 더욱 그랬다.
잡생각을 이어가던 러셀은 크라이의 안장에 매어둔 가방을 흘낏 내려다봤다.
그 안에는 아직 부화하지 않은 용의 알이 들어 있었다.
이스메니오스가 작은 방에 남겨뒀던 알은 바닥과 천장에 그려진 마법진의 가운데에서 둥둥 떠 있었다.
러셀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마법진은 흐려졌고 알은 천천히 그에게 날아왔다.
그는 아직 방에 있는 주문과 마력이 시간을 국소적인 영역에 한정해서 멈추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이를 위한 어머니의 위대한 집념이었다.
러셀은 슬쩍 가방을 들춰 알을 만졌다. 처음 알의 겉표면을 만졌을 때는 약간 부드럽고 말랑했던 것이 지금은 딱딱해져 있었다.
아마 부화가 머지 않은 듯 싶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누가 용의 알을 부화시켜 본 경험이 있겠는가?
그는 가방을 다시 잘 여민 다음 정면을 바라보았다. 갈림길이 나온 것이었다.
러셀은 좌우를 보다가 왼쪽을 골랐다. 좁지 않은 길 위에 마차의 바퀴가 지나간 자리가 움푹 패어 있었다.
그건 좋은 신호였다. 마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큰 마을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운이 좋으면 오늘 안에 마을에 들어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러셀은 크라이를 달리게 했다.
크라이는 갑작스런 주인의 명령에도 당황하지 않고 네 다리를 힘차게 뻗었다.
말의 근육이 역동적으로 요동치며 단단한 대지를 울렸고, 그에 따라 진동이 러셀에게 전해졌다. 러셀은 능숙하게 말을 탔다.
흔들림은 다리와 허리까지만 전달될 뿐, 그 위로는 전달되지 않았다. 러셀의 훌륭한 기마술이 진동을 허리에서 완전히 상쇄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몇 분을 달렸을까. 러셀의 귀에 작은 비명 소리가 들렸다.
눈살을 찌푸린 러셀은 달리는 와중에 마력을 돌려 청력을 강화했다. 그러자 가느다랐던 비명이 커지며 그 방향을 짐작하게 했다.
그는 크라이를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리게 했다. 그리고 숲이 트이며 길이 넓어지는 자리에서 멈춘 마차와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주범은 산적이나 도적 같은 것이 아니었다.
네 발로 서서 붉은 색의 돌기들이 돋은 검은 피부를 드러낸 괴물들. 바로 구울들이었다. 러셀은 눈을 깜박였다.
“구울?”
러셀은 크라이를 멈추게 했다. 더운 김이 솟아오르는 시체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구울들이 그를 발견했다.
“칵! 카각!”
“깍, 까가각!”
구울들은 갑자기 등장한 러셀의 모습에 커다란 머리를 이리저리 갸웃거렸다.
생김새는 혐오스러웠다. 기괴하게 네 갈래로 갈라지는 주둥이와 양쪽에 달린 두 개의 눈동자. 역관절로 이뤄진 네 개의 다리와 끈적한 체액을 흘리고 있는 피부는 보는 것만으로도 역겨움을 자아냈다.
크기는 네 다리로 서서 몸을 낯추고 있음에도 1미터는 되어보였다. 두 다리로 일어서면 거뜬히 2미터는 될 것 같았다.
러셀은 한숨을 내쉬며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가 환생한 이세계에는 도처에 괴물들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자리하고 있었다.
음습한 마력이 고이는 곳에서는 짐승들이 괴이한 모습으로 변이하거나 악령을 꼬이게 만드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혹은 악마와 계약을 맺어버린 어리석은 자들이 직접 사고를 치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런 자들은 악마숭배자라고 불렸다.
지성체들 또한 마력을 길러 기술을 익힌 다음 괴물들을 몰아내고, 문명의 터를 다져 안전지대를 만들었지만 모든 대륙을 평정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깊은 산골과 숲에는 크고 작은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었고, 길을 걷는 모든 자들은 몸을 지킨 최소한의 방비를 해두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구울의 출현은 예상치 못했다. 지하에서 소환되는 이 괴물들은 사악한 주문과 결부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흑마법사, 혹은 악마숭배자.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카악! 까가가가각!”
칠판 긁는 소리를 내며 구울들이 돌진해왔다. 그 수는 총 여섯.
무시무시한 생김새의 괴물들이 하얀 눈을 마구 흩뿌리며 달려왔지만, 크라이는 여느 순박한 말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호승심이 돋는다는 듯 머리를 흔들고 하얀 콧김을 펑펑 쏟았다.
러셀은 그런 크라이의 투레질에 작게 미소를 짓고는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긴 자루의 외날도끼였다.
어딜 봐도 도끼가 나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지만 러셀은 자연스럽게 꺼냈다.
“하!”
그가 짧고 굵게 외치며 발로 크라이의 옆구리를 차자 히히힝 울며 달려 나갔다.
삽시간에 구울들과 러셀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서리 도끼가 허연 냉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구울들은 질서 없이, 마구잡이로, 참을 수 없다는 듯 달렸다. 그러다 맨 앞에서 오는 놈 한 마리가 다리 근육에 힘을 주더니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러셀은 자신과 크라이를 덮쳐오는 놈을 모습을 가닥가닥 찰나로 끊어서 보았다.
마력이 집중된 그의 눈은 마치 주변 상황을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볼 수 있었다.
크게 벌려진 앞다리와 그 끝에 달린 갈퀴 발톱. 상하좌우로 벌려지는 징그러운 입과 이빨.
러셀의 대처는 지극히 간단했다.
그저 도끼를 올려 도끼날을 구울의 전면부에 갖다 댔다.
그러자 크라이가 달리던 힘과 구울이 달려든 힘에 의해, 그리고 날카로운 도끼날에 의해 구울은 반으로 나뉘어 양옆으로 떨어졌다.
피는 흩뿌려지지 않았다. 서리 도끼의 냉기에 의해 잘리는 동시에 얼어붙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퍼석, 하고 얼음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 마리의 구울은 그렇게 여러 얼음 조각이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구울들은 동족의 죽음에 더욱 흥분하며 똑같이 뛰어들었다.
러셀의 팔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커다란 도끼날이 사방을 점하며 휘몰아치고, 그에 따라 구울들의 사지 중 하나, 혹은 두어 개가 잘려나가 눈밭 위를 굴렀다.
크라이도 뒤에서 달려드는 놈은 뒷발차기로 날려버리며 전투에 한 발을 보탰다.
구울의 잘려나간 신체 부위들은 똑같이 얼어버린 채 날아가다가 부서졌다.
러셀은 크라이에서 내렸다. 남은 구울들은 바닥에서 버르적거리고 있었다.
그는 무감정한 눈빛으로 하나씩 괴물들의 목을 내려쳐 잘랐다. 숙련된 목수가 나무를 자르는 것처럼.
그리고 구울들은 전신에 퍼지는 냉기에 온 몸이 굳어져 저항하지 못한 채 죽었다.
“카악! 카아악!”
그때, 구울 하나가 몸을 일으키더니 달아나기 시작했다.
앞다리의 끄트머리만 잘려나가 냉기를 떨칠 수 있었던 놈은 나머지 세 개의 다리를 힘껏 놀리며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러셀은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목과 어깨를 한바퀴 돌리고는 힘껏 도끼를 던졌다.
얼마나 세게 던졌는지 잔상이 남을 만큼 빠르게 날아간 도끼는 달아나던 구울의 상반신을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잘랐고, 같은 선상에 놓여있던 나무도 세 그루를 베어버린 후에야 멈췄다.
난데없이 잘려나간 나무들이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육중한 몸을 대지에 뉘였다.
쿠웅, 하고 바닥이 부르르 떨리고 서 있는 나무들의 나뭇가지에서 눈이 우수수 떨어졌다.
잠시 그렇게 흩날리던 눈발을 맞던 러셀은 손을 뻗었다. 그러자 멀리 날아갔던 도끼가 어느새 그의 손에 잡혀있었다.
러셀은 도끼를 다시 코트 안주머니에 갈무리하고는 쯧쯧, 소리를 냈다.
크라이가 다가와 그의 볼에 머리를 비볐다. 아까 괴물들 앞에서 우렁차게 포효했던 것과는 달리 순박한 태도였다.
러셀은 볼에 닿는 부드러운 갈기를 쓰다듬다가 고삐를 쥐고 마차에 다가갔다. 마차를 이끌던 두 마리의 회색 말은 목이 쩍 갈라져 죽어 있었다.
마차는 완전히 부서져 바퀴는 나가떨어졌고, 축대도 부러져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바닥에는 마차의 일행이었던 듯한 사람들이 몸속을 내보인 채 쓰러져 있었다. 훤히 드러난 내장 조각과 뼛조각들이 눈을 붉게 물들였다.
러셀은 크라이를 근처에 세워두고 시체들을 이리저리 살폈다. 모두 죽은 것 같이 보였는데, 개 중 한 곳에서 꿈틀, 하는 것을 발견했다.
“거기 산 사람 있나?”
러셀이 묻자 거의 죽어가는 소리가 간신히 들려왔다.
“여, 여기 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러셀이 여기저기 쌓인 시체를 치웠다. 서너 명을 치우자 그 안에 사람이 엎드려 있는 것이 보였다.
중년의 남자였는데, 등짝에 커다란 상처가 있었다. 구울의 발톱에 입은 상처 같았다. 등에서 새어나온 피에 상의는 완전히 젖어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품에 안고 웅크린 자세로 그렇게 시체의 틈에서 버티고 있었다.
러셀이 말했다.
“괜찮으니 일어나. 괴물들은 다 죽었다.”
“죄, 죄송하지만 팔이 말을 안 듣습니다.”
러셀은 굳어버린 남자를 들어 올린 다음 뒤로 눕혔다. 중년의 남자가 안고 있던 것은 어린 소년이었다.
갈색 머리칼의 소년은 눈을 감고 축 늘어져 있었다.
외상은 보이지 않고 가슴팍이 호흡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기절한 것 같았다.
러셀이 물었다.
“아들인가?”
남자는 러셀의 물음에 창백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예. 하나밖에 없는 자식입니다. 쿨럭, 쿨럭!”
중년 남자는 갑자기 피 섞인 기침을 토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이 추운 날씨에 괴물에게 상처를 입고, 시체들 틈에 숨어들어서 아들을 껴안은 채 버티고 있었다니. 이대로 있다가는 얼마 안 있어 죽을 터였다.
중년 남자가 손을 들어 러셀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아주 억셌다.
중년 남자는 갈색 눈을 들어 러셀의 자안을 똑바로 마주봤다.
“부, 부탁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 길을 타고 조금만 더 걸어가면 로고스라는 마을이 나옵니다. 거기에 아이의 어미가 있습니다. 이미 괴물들을 죽여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지만, 제발, 제발. 제 아들을 마을까지 데려다주시겠습니까?”
“······.”
“애엄마의 이름은 샐리, 입니다. 그녀에게 데려가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어떤 대가든 치를 테니, 부디···.”
조용히 듣던 러셀은 자신의 팔뚝을 쥔 중년 남자의 손을 떼었다. 남자는 그것이 거절하려는 것인 줄 알고 처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러셀은 거절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잠깐 뒤돌아봐.”
“예?”
러셀은 더 말하지 않았고, 중년 남자는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옆으로 돌았다. 몸을 움직이자 자연히 등 근육이 당겼고, 그에 따라 상처에서 고통이 밀려들었다.
덜덜 떨며 신음을 내뱉던 중년 남자는, 곧 고통이 줄어들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중년 남자는 고개를 돌려 살피자 러셀이 손을 뻗어 등에 난 상처에 대고 있었다.
손바닥에서 하얀 빛이 흘러나와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흐르던 피가 조금씩 멎고 갈라졌던 살이 붙어 아물었다.
그렇게 아래서부터 천천히 손을 올리자 위의 상처도 봉합되었다. 중년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 마법사셨습니까?”
“아니.”
러셀은 대강 상처를 치료하자 남자를 일으켰다. 중년 남자는 여전히 한 팔에 소년을 안은 채 엉거주춤 일어섰다.
러셀이 말했다.
“지금 내가 한 건 임시방편 밖에 되지 않아. 마력으로 인한 치유는 효율이 너무 낮으니까. 격하게 움직이면 다시 터질 수도 있으니 몸 사리고. 마을에 사제나 의사가 있다면 제대로 봐달라고 하는 게 좋을 거야.”
중년 남자는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짐 챙겨. 같이 가지.”
“가, 같이요?”
“나도 마을에 갈 생각이었으니까. 뭐해? 빨리 챙겨.”
러셀의 말에 중년 남자는 얼른 소년을 고쳐 안고는 부서진 마차에 들어가 자신의 가방을 챙겨들었다.
그때 소년이 정신을 차렸다.
“아빠···?”
“어어, 나 여기 있다. 괜찮아. 괜찮아.”
중년 남자가 소년을 달래는 동안 러셀은 이곳저곳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던 시체들을 한 데 모았다. 모두 여덟이었다.
평범한 차림의 여자도 있었고, 가죽 갑옷을 입은 용병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죽은 시체일 뿐이었다. 러셀은 차마 감지 못하고 부릅뜨고 있는 눈들을 일일이 감겨주었다.
세계는 달라도, 사람의 목숨은 여전히 덧없었다.
“마차의 말이 다 죽었으니 내 말에 타.”
“예? 아, 아닙니다. 저랑 제 아들이 걸어갈 테니 마법사님은 말에 타셔서···.”
“그냥 타. 환자를 걷게 하고 싶진 않아. 그리고 아직 저런 괴물들이 더 남아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내려와 있는 편이 더 상대하기 쉬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마법사님.”
러셀은 마법사가 아니라고 말할까, 하다가 관뒀다. 어쨌든 자신이 쓴 게 마법이 맞긴 했으니까.
예전, 그러니까 한 달하고도 반쯤 전 칼리스덴에서 이블린이 어떤 병사에게 했던 마법을 따라한 것뿐이었다.
···그때 그 병사 이름이 뭐였더라.
러셀은 고개를 젓고는 다시 쯧쯧, 소리를 내서 크라이를 불렀다. 중년 남자와 소년은 놀란 눈으로 커다란 흑마를 바라봤다. 그러다 퍼뜩 중년 남자가 말했다.
“아, 아직 제 이름도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제 이름은 에놀드입니다. 아들 이름은 에단이라고 합니다.”
에단이라는 이름의 소년은 러셀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비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조그만 가방을 매고 있는 에단의 표정은 아이답지 않게 표정이 굳어 있었다.
러셀은 그것이 아빠와 살아서 엄마를 만나겠다는 의지의 발로인지, 아니면 영문 모를 낯선 사내에 대한 두려움인지 알지 못했다.
“러셀. 타. 성질부리지는 않을 거다.”
에놀드가 먼저 등자를 밟고 올라 타고, 그 다음 에단을 러셀이 올려주었다.
러셀은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걸었다. 그러자 크라이는 별다른 신호 없이도 알아서 그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천천히 마차와 시체, 그리고 죽어 나자빠진 구울들을 지나쳤다.
에놀드는 그 풍경을 눈에 담다가 앞에서 걸어가는 러셀을 바라보았다.
근처의 이웃마을에 들렸다가 돌아오는 도중 괴물들의 습격을 받았을 때는 그야말로 죽었다고 생각했다.
아들만은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시체 속으로 파고들어 웅크렸다. 하지만 구울은 잔인한 괴물이다. 굳이 먹이가 필요한 신체가 아님에도 살육하고 고기를 뜯는다.
기절한 아들을 꼭 품에 안고 자신의 시체만 뜯어먹고 그냥 가주기를 간절히 빌던 찰나, 시체를 파구 파헤치던 괴물들의 움직임이 멈춘 것이 느껴졌다.
거기다가 이어지는 괴물들의 비명소리까지.
괴물을 참살한 사람은 추운 날씨에 코트 하나만 걸친 차림이었고, 입가에는 다듬지 않은 수염이 수북한 남자였다.
괴물들을 뭘로 죽였는지 무기라 할 만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맨손이었다.
놀랍게도 남자는 마법사이기까지 했고, 마을에 데려다준다며 말까지 빌려줬다.
충분히 버리고 떠난다거나 시체들의 돈만 챙기고 갈 수도 있었을 텐데, 러셀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그때 품에 안겨있던 아들이 고개를 들고 작게 속삭였다.
“아빠, 아까 그 괴물들, 다 저 아저씨가 죽인 거예요?”
에놀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루테온님께서 우리를 비춰주신 것 같구나.”
에놀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벌써 마차에서부터 많이 멀어져 있었다. 시체들도 흐릿하게 보였다.
이제 저 시체들은 자연에 스러져 갈 것이다. 먹이를 찾아 배회하는 들짐승, 혹은 날짐승들에게 먹혀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대지로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