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겨울의 계절
***
칼리스덴의 북쪽 성문을 책임지는 관리자, 체스딘은 지루했다.
그는 자신의 일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평민으로 태어나 무술에 재능이 있음을 알고 군에 투신한 이후 체스딘의 삶은 그럭저럭 살만한 것이었다.
그가 맡은 일은 성문 앞에서 도시로 들어오는 자들을 관리하는 일이다. 통행자들은 대개 여행자들이거나 상인들, 용병들이었다.
본디 사람 지켜보는 일을 좋아한 체스딘에게 성문 관리는 그야말로 천직이라 할 수 있었다.
또 그에게 굽신 거리는 상인들에게서 약간씩 받는 콩고물은 창관과 도박장의 자본이 되어 주기도 했다.
소란을 피우는 자들은 드물고, 약간의 지루함만을 참는다면 이보다 편한 자리가 없었다. 체스딘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10월의 가을이었고 칼리스덴은 북동부에 위치한 도시였다. 북부는 아랫 지방보다 훨씬 빠르게 낙엽이 떨어지고 서리가 내린다.
여타 가을보다 확연히 추운 계절에 북부의 상인들은 상행을 줄이고, 여행자들도 드물었다.
그래서 체스딘은 어느 때보다 지루했다. 벌써 정오가 다 되어가는 이때까지 어떤 사람도 성문에 오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는 부하 병사들을 갈궜다.
“야.”
“넵!”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체스딘의 물음을 받은 소년과 청소년기 사이, 그 쯤 어딘가로 보이는 병사가 얼빵하게 되물었다.
“아, 제, 제 이름 말씀이십니까?”
“그래, 새꺄. 빨리 대답 안 해?”
“아, 지, 지크입니다!”
“지그?”
“지크입니다!”
“알아 새꺄, 그냥 말해본 거야. 야.”
“넵!”
“새끼, 대답은 잘하네. 뭐 재미난 얘기 없냐?”
“재, 재미난 이야기 말씀이십니까?”
“그래. 넌 안 지루하냐? 난 존나 지루한데.”
체스딘은 보란 듯이 하품했다. 병사, 지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자기도 하품이 나올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똑같이 그 지랄을 했다가는 단순히 얼차려에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지크는 맹렬히 생각한 후, 부자연스런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용살자에 대해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용살자? 뭐 내가 모르는 이야기라도 있냐? 지난 몇 주는 내내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던 것 같은데. 얼굴도 모르는 우리 아버지보다 더 생생해, 아주.”
“아, 그래도 이건 모르실 겁니다. 그 분께서 절 구해주신 이야기입니다.”
체스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지크를 바라봤다.
“네가 용살자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고? 거기다 널 구해줘?”
“네, 네.”
“너 이 새끼!”
“으악!”
지크는 체스딘이 확 하고 팔을 올리자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가리며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체스딘은 그를 때리려 한 것이 아니었다.
지크의 어깨에 손을 척, 얹은 체스딘이 말했다.
“그 얘길 왜 이제 해? 빨랑 해봐. 최대한 길게.”
“···알겠습니다.”
지크가 이야기를 시작하고, 체스딘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사실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소음이 필요했고, 겸사겸사 아직 자기 직책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이놈을 도와줄 생각이었으니까.
하얀 하늘을 보며 코를 후비던 체스딘은 코딱지를 멀리 튕기려 지평선을 노려보다가, 그곳에서 솟아오른 흐릿한 그림자들을 발견했다.
하늘은 흰 구름으로 가득 덮여 있어 푸른 조각 하나 비치지 않았다. 슬슬 누래져 가는 초원을 보던 체스딘은 저들이 말을 타고 있는 것을 보고 머지않아 도착할 것을 내다보았다.
“야, 야. 이제 그만해.”
“그래서 용살자님이 저를··· 네?”
“그만하라고. 손님 오신다. 너도 저기 가서 서.”
코딱지를 튕긴 체스딘은 벗어두었던 장갑을 끼고 의자에서 일어나 선 채로 꾸벅꾸벅 조는 부하 병사들을 쥐어박았다.
“정신 차려, 자식들아! 새끼들이 빠져가지고.”
정강이와 뒤통수를 한 대씩 얻어맞은 부하 병사들이 차렷 자세로 서는 것을 보며, 체스딘은 여행자들을 기다렸다.
이 추운 계절에 말까지 타고서 오는 자들은 뭐하는 사람들일까, 하고 기대와 설렘을 반반 담아 보던 체스딘은 점차 표정이 굳어갔다.
그들은 모두 여덟 명이었고, 윤기가 흐르는 갈기와 피부의 흑마를 타고 있었다.
개중 일곱은 통일된 검은 색의 얇은 사슬 갑옷과 흉갑, 견갑, 망토를 입고 등에는 길쭉한 장검을 장비한 자들이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상태가 좋아 보이는 것이 장인이 만든 고급품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후드로 머리를 덮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성별을 특정하기도 어려웠다.
남은 한 명은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여자였다. 그리고 체스딘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에게 칼스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말하라면 첫 번째는 당연히 성주님의 따님이자 아가씨인 제오나를 말할 것이고, 두 번째로는 붉은 장미 창관의 바넷사, 혹은 란쉬무어의 바람 여관의 여급 샤샤를 말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앞의 여자는 그야말로 차원이 달랐다.
똑같이 흑마를 타고 있었지만 그 위에 탄 몸은 상대적으로 가냘팠다.
등자에 얹은 부츠는 정강이까지 덮고 있었고, 그 위로 검은 가죽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아찔한 각선미에 체스딘은 감히 더 다리를 쳐다보지 못하고 위로 시선을 올렸다.
상체에는 바지와 마찬가지로 검은 색의 질 좋은 셔츠와 보석이 장식된 단추가 달린 푸른 조끼, 그 위에는 여우 목도리가 둘러진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하얗고 매끄러움이 감도는 피부의 얼굴이 보였다. 목에 두른 여우 털처럼 생김새는 언뜻 여우를 생각나게 했다.
날렵한 눈매의 눈꼬리는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가 있었고, 그 아래의 곧은 코와 빨간 입술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대칭적인 미를 보였다.
화룡점정은 단연 눈이었다. 진홍빛의 눈동자.
한 마디로 말하자면 고귀하면서도 기품어린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미인이었다.
“와, 미친.”
체스딘의 뒤로 병사 하나가 저도 모르게 작게 감탄사를 토했다가 황급히 자신의 입을 가렸다.
하지만 체스딘도 병사를 나무라진 못했다. 그도 속으로는 비슷한 욕설을 수십 번은 한 후였으니까.
체스딘은 무슨 용무로 온 것이냐고 말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말에서 아직 내리지 않은 채 그들을 둘러보던 여인이 도톰한 입술을 여는 것이 더 빨랐다..
“당신이 이 성문의 관리자인가?”
“예? 아, 예!”
때를 놓친 체스딘은 엉겁결에 대답하고 말았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이 여인이 신분이 아주 높은 사람임을, 뒤의 후드를 눌러 쓰고 검을 맨 자들은 호위 병력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이 도시가 칼리스덴이 맞나?”
“예, 예! 저희 도시가, 아니 여기가 칼리스덴이 맞습니다! 저, 근데 누구신지···.”
“그냥 여행자들이라고 알아둬. 다른 건 필요 없어. 알아들어?”
“알겠습니다!”
조용히 왔다가겠다는 말에 체스딘은 빠르게 외쳤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여인은 앞에 있는 높다란 성벽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성벽에 흠집들이 가득한데. 무슨 일이 있었지? 마치 괴물들이 기어오른 흔적 같아 보이는데.”
체스딘은 그녀가 무얼 물은 것인지 알았다.
지금으로부터 3주 전, 칼리스덴은 괴물들에게 두 차례의 침공을 받았다.
첫 번째의 것은 사악한 용족이 직접 몬스터들을 주문으로 부린 것이었고, 두 번째는 도시의 아래에 잠들어있던 고대의 광룡이 깨어나면서 괴물들이 난동을 부린 것이었다.
다만 체스딘은 그 모든 이야기를 짧고 함축적으로 말할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간략하게 괴물들이 쳐들어왔다고만 설명했고, 여인은 고개를 까닥였다.
“물을 게 하나 있어.”
“넵! 뭐든 물어주십시오!”
“혹시 며칠, 혹은 몇 주 전에 이 도시에 남자 하나가 오지 않았어?”
무슨 설명도 없이 그저 남자라는 말만 나왔지만, 어째서인지 체스딘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체스딘은 물어봐야 했다.
“저, 그렇게만 말씀하시면 잘 모를···.”
“이름은 러셀. 키가 아주 커. 덩치도 있는 편이지. 올해로 스무 살이 됐고···.”
여인은 잠깐 말을 멈췄다. 잠깐 입술에 힘을 주다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다른 남자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이 있어. 눈이 자청색이야.”
“어?”
그때 한 병사가 저도 모르게 의문성을 흘렸다. 남자라기에는 아직 앳된 얼굴의 소년 병사, 지크였다. 여인의 진홍빛 눈이 어린 병사에게 향했다.
“뭘 알고 있나?”
“어, 저. 용살자··· 님이 그런 눈동자를 가지고 계시긴 했는데요.”
여인의 무표정이 깨지고, 눈이 커졌다.
“용살자? 무슨 소리지?”
체스딘이 지크를 보며 눈을 빠르게 좌우로 굴렸지만, 지크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왜 체스딘이 눈알을 빙글빙글 돌리는 것일까 생각하다가 여인의 물음에 아직 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말했다.
“몇 주 전에 제 목숨을 구해주셨던 분이 자청색 눈동자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도시 지하에서 용이 뛰쳐나오고, 또 그 용을 참살한 영웅이 그분이라는 것도 알고요···.”
지크는 뒷말을 흐렸다. 여인이 훌쩍 말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체스딘과 병사들은 그녀의 키가 꽤 크다는 것을 알았다.
잘 짜인 다리를 휘적거리며 순식간에 다가온 여인이 말했다.
“조금 더 자세히, 간략하게.”
자세히와 간략히라는 서로 성립이 가능한지 의문이 드는 조건이었지만, 지크는 침을 삼키고 또렷한 발음으로 체스딘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아까는 최대한 길게 말하라는 주문에 이런저런 미사여구를 붙였었지만, 이번에는 그런 수식어를 모두 빼고 자신이 겪은 사실의 나열만 말했다.
“···이게 단데요.”
눈만 깜박이며 조용히 듣던 여인은 중얼거렸다.
“역시. 여기 왔었어.”
여인은 품에 손을 넣더니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 내밀었다. 체스딘과 다른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지금의 지크만큼은 아닐 것이다.
“어, 저, 이, 이건···?”
“사례금. 받아.”
지크는 양손을 덜덜 떨며 앞으로 내밀었다. 여인은 그 손바닥 위에 서너 개의 금화들을 떨어트렸다. 좌르르르···. 딸그랑, 딸그랑.
동전 부딪히는 소리가 이리 황홀했던가. 구리나 은화랑은 차원이 달랐다.
여인은 체스딘에게도 금화 한 장을 건넸다.
“당신도.”
“아, 네, 넵. 감사, 감사합니다.”
“저 아이의 것은 빼앗지 않아줬으면 좋겠는데.”
“넵! 여부가 있겠습니까!”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돌아 다시 말에 올랐다. 그녀가 말에서 내리고 다시 오를 때까지 뒤의 후드를 쓴 남자들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대기했다.
체스딘은 그 정렬된 모습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며 그들을 통과시켰다.
말을 탄 여덟 명의 여행자들은 그렇게 칼리스덴의 북문을 통과했다.
체스딘과 부하 병사들은 멍하니 서서 성문 안쪽으로 들어가 멀어지는 그들을 말없이 지켜봤다.
***
8명의 여행자들은 도시를 가로질러 어느 커다란 장원 앞에 다가갔다.
장원의 현관 위에는 레필리아 검술관이라는 이름이 크게 적힌 간판이 달려 있었다.
문 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길드원은 갑자기 여덟 명이나 되는 대 인원이, 거기다가 모두 거대한 흑마를 타고 오자 입을 떡 벌리고 쳐다봤다.
하얀 하늘 아래서 대로를 가로지르는 그들은 단연 시민들의 눈길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무시로 일관하면서, 여덟 명은 직선으로 곧게 레필리아 검술관에 도착했다.
“모두 말에서 내리도록.”
그렇게 말하며 여인이 먼저 내리자, 뒤의 일곱 명도 일사불란하게 말에서 내렸다. 망토가 크게 펄럭였지만 추위를 막기 위해 재질이 무거운 것이라 금방 가라앉았다.
여인은 아까처럼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다. 문을 지키고 있던 길드원이 그 미모와 고귀한 분위기에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는 당당하게 말했다.
“카렌 레필리아를 불러와라.”
길드원은 목울대를 꿀렁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누구신지···”
여인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나른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헬라 카테리나 폰 블라디카. 북방을 지키는 여섯 가문 중 블라디카의 피를 이은 차녀. 그자가 오랜 인연을 찾는다고 전해라.”
***
레필리아 검술관, 길드장 카렌 레필리아의 개인 집무실. 그곳에 헬라와 카렌 둘이 독대하고 있었다.
방안은 엄숙한 고요만이 자리했다. 탁자 위에 카렌이 손수 따른 차는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아 하얀 수증기만 허공으로 흩어보냈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 위치가 전혀 달랐다. 헬라는 원래 카렌이 앉아있어야 할 주인의 자리에 있었고, 카렌은 반대로 손님이 앉는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둘 모두 그 배치에 이상함을 느끼지 않는 듯 했다.
“···그래. 그런 일들이 있었군. 꽤 자세히 알고 있는데?”
카렌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성주의 딸에게 들은 것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블라디카 당주님.”
헬라는 자신을 부르는 호칭을 부정했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 아버님, 어머님도 정정하시니까. 괜한 소리는 마.”
“알겠습니다.”
“카렌, 넌 돌아올 생각이 없는 건가? 아쉽지 않아?”
카렌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제 오라버니와 다른 가족들이 제 없느니만 못한 자리를 차고 넘치게 채우고 계시지 않습니까. 전 지금 있는 이곳이 편합니다. ”
헬라는 카렌을 보다가 후, 한숨을 내쉬었다.
“지그문트 경이 얼굴 좀 보면 좋겠다는구나. 나중에 시간 내서 올라와. 가족 얼굴은 아예 안 볼 생각이야?”
“···노력해보겠습니다.”
헬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했다.
“러셀은 어디로 갔지?”
“죄송하지만, 저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그랬겠지.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는?”
카렌은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전해 듣기로는 서쪽으로 향했다고 했습니다.”
“···서쪽이라. 언제?”
“3주 전입니다.”
헬라는 주먹을 꾸욱 쥐었다. 3주. 너무 길었다. 그 시간이면 러셀은 이미 한참은 멀어지고도 남았을 터.
거기서 더 갔는지, 혹은 아래로 갔는지는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러셀은 집을 나오면서 자신의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헬라는 거의 눈밭에서 바늘을 찾는 심정으로 겨우겨우 흔적을 모았고, 그의 마지막 도착지가 바로 이곳, 칼리스덴이라는 것을 특정했다.
최대한 속도를 올려 도착했건만, 벌써 떠난 지 3주나 지났다니.
카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러셀이라는 이름의 사내가 제가 짐작한 그자가 맞는지요.”
“누구라고 생각했는데?”
“···헬라님의 약혼자 아니십니까. 자하드 가문의 장남.”
헬라는 침묵했다. 하지만 따로 부정하지 않음으로 이미 긍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를 추적하실 생각입니까?”
“······.”
카렌이 조용히 말했다.
“헬라님. 겨울이 머지않았습니다.”
그냥 들으면 그저 추워지는 계절이니 조심하라는 뜻으로 읽히지만, 헬라에게는 달랐다.
그녀는 북방을 지키는 여섯 가문의 일원이다. 북방은 사시사철 추운 날씨가 지속되는 곳이지만, 그럼에도 계절의 경계는 분명 존재했다.
봄도 있고 여름, 가을도 있다. 그리고 겨울은, 북부가 가장 혹독해지는 시간이었다.
헬라는 이빨을 악물었다. 까득거리는 불쾌한 마찰음이 일순 들렸다가 사라졌다.
“나도 알아. ···지금은 돌아가야겠지.”
이미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그녀는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이제는 돌아가서 마수들을 막아야했다. 그것은 그녀의 의무이기도 했다.
헬라는 생각했다. 내 생애 가장 긴 겨울이 될 것 같군.
아마 봄이 오기 전까지는 러셀을 찾아 나설 수 없으리라. 그리고 러셀은 아마 이것까지 다 계산에 두고 집을 나선 것이겠지.
헬라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팔로 눈을 가렸다. 어둠 속에서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를 보며 웃었던 얼굴은 차츰 분노의 감정으로 일그러지고, 종국에는 감정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무표정이 되어버렸다.
헬라가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자청빛의 눈동자에서, 그녀에게 향한 감정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카렌은 그런 헬라를 보다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헬라는 오랫동안 어둠 속을 부유했다.
***
11월. 대륙의 북부와 중부, 그 사이 어딘가.
알록달록했던 나뭇잎들은 낙엽이 되어 썩어가고, 그 위에 흰 눈이 이불처럼 덮여 따뜻함 대신 한기를 흘렸다.
그리고 온 세상이 흑백, 둘만 있기로 서약하기라도 한 듯한 그 겨울 숲의 사이를, 말을 탄 한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