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란쉬무어의 바람
다행인지 알은 바로 깨지지 않았다.
그저 러셀의 손바닥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를 느낀 듯 했다.
혹시 깨지나 싶었던 러셀은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고, 알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코트 안쪽에는 생명체가 들어갈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러셀은 아까까지 바닥과 천장에서 빛을 뿌리던 마법진 두 개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그 마법진의 중간, 공중 한 가운데에 알이 둥둥 떠 있었다.
그는 방안을 살폈다. 썰렁했다. 기대했던 용의 보물 같은 것은 없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금은보화나 휘황찬란한 무구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벽 한 구석에 붙어있는 작은 탁자, 그 위에 놓인 주머니 하나였다. 러셀은 그 주머니를 들어 올려 안을 열었다.
“···흠.”
러셀은 다시 주머니를 닫고 코트 안쪽에 넣었다. 그리고는 알을 옆구리에 끼고 방을 나섰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
연이어 두 번의 큰 격전을 치른 칼리스덴이었지만, 의외로 사상자는 많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녀의 여명 기사단들의 실력이 출중한 것과 더불어 병사들도 있었고, 용병 중에서도 두각을 보인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활약을 한 자를 꼽으라면 지금 이 대도시 칼리스덴을 떨쳐 울리는 한 남자, 러셀을 말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밤하늘에 날아올랐던 용의 모습은 대도시 어디서라도 볼 수 있었다. 시민들 모두가 동쪽 성문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두려워했다.
하지만 어둠이 물러가고 또 하루의 해가 밝으면서, 성주는 대대적으로 괴물의 침공은 끝났음을, 그리고 용살자의 탄생을 널리 알렸다.
용과 그 포효 소리를 직접 들었던 이들도 반신반의했지만, 이블린이 잿더미에서 간신히 찾아낸 비늘 조각 하나를 성주가 증거로 내밀자 모두 환호했다.
모두들 용살자를 보고 싶어 했으나, 그들은 볼 수 없었다. 그는 이미 떠날 준비를 마쳤기에.
러셀은 성의 커다란 응접실에 있었다. 그곳에 황녀와 성주, 알베르트, 제오나, 그리고 엘레노아가 자리했다.
황녀가 말했다.
“벌써 간다고요?”
“예. 너무 오래 있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날짜는 3일 남짓이었으나, 그 동안 겪은 일들이 너무 파란만장해서 한 달은 있었던 것 같았다. 러셀은 이제 떠나야 함을 알았다.
“···이미 마음을 정한 것 같군요.”
황녀는 어째서인지 한숨을 쉬더니, 품에서 뭔가를 꺼내 건넸다. 그건 지하미궁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었던, 루드비히의 명패와 비슷한 것이었다.
작은 원 모양의 금패. 뒷면에는 황가의 문양이, 앞면에는 유리아의 풀네임이 이니셜로 적혀 있었다.
“나중에 제국으로 오게 돼서 곤란한 일이 생기면, 그 황금패를 꺼내서 보여줘요. 그건 제 1황녀의 아주 가까운 이라는 표식이니까.”
러셀은 사양 않고 받았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가 올리자, 황녀는 뭔가 벅찬 표정으로 러셀을 보고 있었다. 황녀는 곧 오른 손을 내밀었다.
“···고마웠어요.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러셀은 그 부드럽고 작은, 하얀 손을 마주 쥐었다.
“별말씀을. 전하.”
황녀는 부드럽게 손을 흔들더니, 씩씩한 발걸음으로 응접실에서 나갔다. 이제 그녀는 돌아갈 것이다. 제국으로,
러셀은 성주와도 인사를 나눴다.
“벌써 가려는가? 축제를 열 생각인데, 즐기고 가지 그러나.”
“생각한 것 이상을 머물렀습니다. 이제는 떠나고 싶군요.”
“어쩔 수 없지. 남자가 가겠다는 것을. 어느 성문으로 가는가?”
러셀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북서쪽으로 갈 것 같습니다.”
“그럼 북문으로 가게. 서문은 나중에 아래로 길이 휘어지니까. 그리고 마시장에 들려서 말도 한 필 받아가고. 설마 걸어갈 생각은 아니었겠지?”
프레드릭 성주가 짖궃게 웃자 러셀도 마주 웃어보였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알베르트가 말했다.
“그 코트, 한 번만 입어보면 안 될까?”
“안됩니다.”
“농담이네. 잘 가게.”
“예.”
제오나는 악수를 청했다.
“두 번이나 도시를 구해줘서 고마워요. 칼리스덴은 당신을 영원토록 기억하고, 또 반길 거예요.”
러셀은 씨익 웃으며 악수를 받았다.
엘레노아가 마지막으로 나섰다. 그녀의 모습은 전과는 조금 달랐다. 금발은 전보다 더 밝아진 것 같고, 파란 눈에는 정명한 빛이 반짝였다. 거기다 뒤통수 뒤에는 언뜻언뜻 후광마저 비쳤다. 그녀가 말했다.
“러셀.”
“음.”
엘레노아는 그를 조용히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당신의 앞길에는 고난과 역경이 가득합니다.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악몽이 도사리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모두 뿌리치고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러셀은 뭐라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악담이라기에는 그를 칭찬하는 내용이어서 그랬다. 그녀는 품에서 둘둘 말린 종이 두루마리를 건넸다.
“언제나 머리 위에 빛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러셀은 두루마리를 받으며 말했다.
“이건?”
“제가 따로 적은 소개문입니다. 광휘를 섬기는 교회의 지부 어디서든 그 소개문을 내밀면 따뜻한 잠자리와 식사, 원한다면 성수도 싼 값에 제공받을 수 있을 겁니다.”
러셀은 약간 놀란 눈으로 두루마리를 쳐다봤다. 과연 성녀 후보가 직접 쓴 소개서는 다르다는 거군.
거기다 지금의 엘레노아는 확실히 이전보다 신성력이 강해보였다.
몸에 흐르는 자태는 물론이고 목소리에도 범접할 수 없는 빛의 기운이 가득 했다. 지금 이 앞에 악마를 데려다놓는다면 그 자리에서 불타올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고맙게 받지.”
엘레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성호를 그었다.
“당신의 앞날을 축복합니다.”
러셀은 성 밖으로 나왔다.
성문 바로 앞에 이블린과 렉시가 서 있었다.
이블린은 거의 다 타버린 커다란 용의 비늘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걸 교수님이 용의 비늘이라고 믿을지 모르겠네.”
“마력 반응을 보면 되지 않나?”
이블린은 한숨을 푸욱 쉬었다.
“그게 문제야. 누가 용을 직접 만나봤어야 말이지. 여기서 느껴지는 게 어떤 반응일지, 그게 진짜 용의 것이라고 확신하진 못해. 아마 연구를 좀 해야할 것 같아.”
“그럼 돌아가겠군, 마탑?”
이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겸 대학이지. 고마워.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좋겠네.”
“그래.”
이블린은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먼저 떠났다. 빨간 머리가 걸음걸이에 맞춰 요동쳤다. 곧 인파 사이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러셀은 마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활기로 가득했다. 해는 중천에 떴고, 하늘은 하얀 뭉게 구름을 띄운 채 덧없이 흘렀다. 왁자하게 장사를 하는 상인들과 흥정하는 사람들, 가죽 갑옷을 입은 용병들, 순찰하는 경비병들이 거리를 오갔다.
마장에서 러셀이 성주가 직접 내어준 말을 보여 달라 하자, 말지기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는 이후에 드러났다.
말지기는 커다란 흑마를 데리고 나왔는데, 끌고 나오기보다는 도리어 끌려 나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히힝, 히히힝!
말지기, 오렐은 겨우겨우 진정시킨 말을 보며 처량하게 말했다.
“아유, 이놈이 언제 나가나 했는데, 이제 나가는군요.”
“무슨 문제라도 있는 놈인가?”
“아유, 말도 마십시오. 삼 개월 전, 북동부의 드넓은 초원을 달리며 야생마 무리를 이끌던 놈이었는데, 그리핀들의 습격을 받고 있던 것을 사람들이 발견했다더군요. 아유, 무리의 태반이 죽었는데 이놈만 펄펄 살아서 그리핀들을 상대하고 있었더랍니다. 결국에는 그리핀들도 죽이지 못하고 가긴 했지만 이미 그 발톱들에 가족을 잃은 후였다는군요.”
러셀은 흑마를 돌아보았다. 그의 체격에 잘 어울리는 거대한 준마. 피부색도 까맣고 갈기도 까맸다. 머리부터 등까지 죽 이어지는 검은 갈기는 보기에도 탐스럽고 매끄럽게 빛났다.
“혼자 살아남아서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다가 여기로 왔습죠. 참 잘생기고 품종도 훌륭했지만 워낙에 성질이 사나워서 아무도 길들이질 못했습니다. 그나마 종마로서만 쓰고 있었지만, 아휴. 저는 그게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러셀은 말지기의 말을 들으며 말을 쳐다봤다. 말의 눈은 커다랬다. 검은 동공이 흰자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검은 구슬이 뒤룩뒤룩 구르는 듯 했다.
“가진 근육만 보면 능히 대륙도 일주할 수 있을 놈인데, 여기서 다른 암말들 배만 불려주고 있으니.”
흑마는 투레질을 했다. 푸르릉, 푸릉. 그 투레질과 검은 눈에는 감히 나를 타겠다는 거냐고 묻는 듯 했다.
“고삐 좀 줘보겠나?”
“예? 괘,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차피 나한테 주어진 놈이지 않나.”
오렐은 주저주저하면서 고삐를 러셀에게 건넸다. 과연 오렐이 고삐를 놓자마자 흑마는 금방이라도 날뛸 듯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근육을 진동시켰다.
그때 러셀의 눈이 말의 검은 눈과 마주쳤다. 그가 말했다.
“얌전히 있어. 넌 이제 나랑 간다.”
말의 큰 눈이 더 커다래졌다. 그 검은 동공에 러셀의 얼굴과 자안이 담겼다. 푸르릉.
“이, 이럴 수가?”
오렐이 경악성을 터트렸다. 어떤 기사나 용병도 길들이지 못했던, 맹수 같이 사나웠던 놈이 고분고분 고개를 숙인 것이다! 오렐은 믿을 수가 없었다.
“다, 당신은 대체?”
러셀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안장 좀 갖다 주게.”
“아, 예. 저, 다른 것들은···?”
“다 할 줄 아니까 걱정 말고.”
과연 오렐은 능숙하게 말의 등허리에 안장을 씌우고 각종 복잡한 끈을 묶는 것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디 기사님이신가 보지요? 이리 능숙하신 걸 보니.”
잠깐 러셀의 손이 멈췄다. 그러다가 언제 멈췄냐는 듯 다시 남은 끈들을 묶었다.
“잘 받아간다고 성주님에게 전해주게.”
“아무렴요. 살펴 가십시오!”
러셀이 거대한 흑마를 이끌며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던 렉시는 입을 헤, 벌렸다.
“엄청 크다아?”
“이제 가지.”
러셀은 말을 이끌며 대로를 걸었다. 사람들은 먼저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한 개 반은 큰 러셀의 키에, 그리고 그가 이끄는 거대한 흑마에 놀란 눈과 입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실시간으로 눈과 입의 확대를 이끌어내는 러셀을 뒤따라가며 렉시가 물었다.
“어디 가?”
“대장간. 이것 좀 건네주려고.”
러셀은 코트 안쪽에서 부러진 클레이모어를 꺼내보였다. 한 뼘 정도밖에 남지 않은 검신에는 세계수의 문양이 검게 빛나고 있었다. 렉시가 완전히 부서져 버린 대검에 감탄했다.
“와. 뭘 어떻게 하면 강철이 이렇게 돼?”
“지하 미궁에서 괴물 여럿과 싸우더니 이렇게 되더라.”
기다란 다리로 훌쩍훌쩍 걸으니 어느새 대장간 앞이었다. 문을 두드리니, 이미 알고 있었던 듯 알리샤가 필리 아줌마와 같이 나왔다. 그리고 러셀 뒤의 말을 보며 놀랐다.
“어, 저 말? 그 난폭한 종마 아닌가?”
러셀이 필리 아줌마의 말에 답했다.
“예. 성주님이 챙겨줬습니다. 절 기다리셨던 겁니까?”
“음. 한 번 들릴 거라고 생각했지. 이제 가려는 건가?”
러셀은 고개를 끄덕이고 부러진 클레이모어를 알리샤에게 건넸다. 알리샤는 어딘가 아련한 표정으로 대검을 받았다.
“뭐랑 싸웠어?”
“바질리스크, 그리고 300년 된 망령. 그 망령 도끼질이 좀 거칠더군.”
알리샤는 피식 웃었다.
“남이 말했으면 무슨 헛소리냐고 했겠지만, 당신이 말하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 고마워. 이 아이도 당신 같은 전사와 함께 싸워서 좋았을 거야.”
“그랬다면 좋겠군.”
“다음에 다시 이 도시에 들리면 꼭 찾아와. 더 엄청난 놈을 만들어냈을 테니까.”
“기대하지.”
필리 아줌마가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역시 맥주잔이 들려 있었다.
“들리면 찾아오게. 맥주는 항상 차가우니까.”
“예.”
러셀은 렉시를 돌아봤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의 무표정 그대로로 보였다. 하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어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 렉시가 말했다.
“너랑 있으면 재밌었는데.”
러셀은 픽 웃으며 말했다.
“나도 내 이름 이상하게 부른 건 네가 처음이다. 끝까지 술 안 산 것도 네가 처음이고.”
“내가 아직도 안 샀었나?”
“그래.”
렉시는 씨익 웃었다.
“그럼 다음에 만날 때 사면 되겠네.”
“그래.”
렉시는 한 걸음 다가와 러셀을 껴안았다. 그런 채로 그녀가 속삭였다.
“다음에는 나랑도 한 번 했으면 좋겠는데.”
“···그래.”
러셀은 간신히 그렇게 대답하고는 몸을 돌렸다. 모든 흑요정은 다 저런가? 아직 충분한 데이터를 모을 만큼 만나보지 못해서 알 수 없었다.
다만 뛰어난 청력으로 속삭인 말을 들은 알리샤가 렉시의 등을 후려치고, 필리 아줌마가 호탕하게 웃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아마 렉시만 그런 걸지도 몰랐다.
러셀은 피식 웃고는 말을 이끌며 여관 거리로 향했다.
푸힝힝.
같이 웃자는 듯 말이 울음 소리를 냈다.
***
식당은 점심시간으로 분주했다. 여급과 중노미들이 부엌과 식당을 바쁘게 오가며 요리를 나르고 있었다.
러셀은 바깥의 기둥에 고삐를 묶고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 중 막 빈접시를 나르는 여급을 불렀다. 샤샤가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크게 떴다.
“러셀님!”
샤샤는 지나가던 중노미의 품에 쌓인 접시들 위에 자신의 것을 얹고서는 쏜살 같이 달려왔다.
“왜 이제야 오셨어요! 식사는요? 아직 안 하셨죠? 저번처럼 고기 많이 가져올까요? 이번에 돼지랑 오리고기가 많이 들어와서 훈제를 했어요. 엄청 맛있을 거예요.”
러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 샤샤, 내 가방 좀 가져다줄래?”
그 말뜻을 알아차린 샤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잠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때, 언제 부엌을 나온 것인지 여관 주인이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다가왔다.
“가시려는 거군요.”
“너무 오래 있었지. 식사는 맛있었소. 또 오고 싶을 만큼.”
여관 주인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용살자의 입맛에 들었다니, 영광이군요. 짐은 다른 아이를 시켜서 가지고 오게 하겠습니다. 샤샤.”
샤샤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삼촌을 돌아봤다. 여관 주인은 말했다.
“배웅해주고 오거라.”
곧 중노미가 러셀의 가방을 들고 내려왔다.
러셀은 그 묵직한, 용의 알이 든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그가 식당을 나서자 샤샤가 다급히 따라나섰다.
“왜, 왜 이렇게 빨리 가세요. 성주님이 축제도 여신다고 하셨어요. 일주일은 넘게 벌어지는 축제래요. 근방을 순회하던 유랑극단도 온다는 말도 있고, 맛있는 음식이랑 술이 공짜고, 또···.”
러셀은 샤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샤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러셀이 말했다.
“이 도시에 오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중 가장 즐거웠던 추억을 쌓은 건 이 여관이었던 것 같아. 란쉬무어의 바람. 평생 못 잊을 것 같은데.”
“···란쉬무어의 바람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응? 러셀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알리샤도 비슷한 말을 했었던 것 같은데.
“무슨 뜻인데?”
“···전설이에요. 백년 전, 란쉬무어라는 이름의 시인이자 여행자가 있었다고 해요.”
러셀은 조용히 서서 샤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특출나게 잘생기지도, 키가 엄청 크지도 않았지만 단 하나, 목소리는 무척 아름다웠다고 해요. 또 시와 노래를 무척 잘 지었고, 한 자루의 검도 능수능란하게 다뤘어요. 란쉬무어는 대륙을 여행하며 자신의 노래와 시로 숱한 염문을 뿌리고 다녔기에 많은 남자들의 적이자 여자들의 우상이었죠.”
바람둥이였다는 말이군.
거리는 시끄러웠지만, 동시에 고요했다. 너무 많은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나왔다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소음의 틈바구니 속에서, 러셀은 샤샤의 목소리만을 골라서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란쉬무어는 실종돼요. 어디서도 시체는 발견되지 않죠. 하지만 여행자들은 산맥에서, 초원에서, 숲에서 그의 노래와 시를 들을 수 있었어요. 우리 여관 이름은 그런 의미예요. 란쉬무어의 바람.”
“···그렇군.”
샤샤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커다란 밤색 눈동자에서 투명한 눈물이 떨어졌지만, 그녀는 웃었다.
“잘 가요. 나의 란쉬무어.”
러셀은 다가오는 샤샤를 품에 안았다. 그녀가 러셀의 가슴팍에서 웅얼거렸다.
“기다릴게요.”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기다릴 거예요.”
그리 말한 샤샤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그건 목걸이였다. 가죽 끈에 투명한 자수정이 걸린 목걸이.
“받아줘요.”
러셀은 목걸이를 받아 목에 걸었다. 그리고 뒤돌아서 훌쩍 말에 올랐다.
삽시간에 눈높이가 달라졌지만 러셀은 적응했다. 그는 마치 거인과 비슷한 시야로 샤샤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샤샤도 똑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필요없었다.
러셀은 말을 걷게 했다. 천천히 여관에서 멀어지면서, 그는 샤샤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샤샤는 두 손을 모아쥐고 서서 러셀을 바라봤다. 인파 속에서도 그의 말과 덩치는 쉽게 식별이 가능했다.
그러나 점점 멀어지면서 흐려졌다. 종국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샤샤는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렸다.
***
3주 후. 북쪽에서 어떤 여행자 무리가 칼리스덴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