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39화 (40/225)

39화 루드비히의 유산, 밤의 전장

***

“궁수, 앞으로!”

척, 척 하고 활과 화살을 매긴 병사들이 흉벽에 다가가 섰다. 그리고 시위를 뒤로 크게 젖히며 화살촉을 벽 아래로 향했다.

“쏴라-!”

푸슉, 푸슈슈슉! 화살들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성벽 아래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시 명령이 떨어졌다.

“바로 제 2열! 마법사는 화염 주문을 준비하라!”

사위는 어둑어둑한 밤이었다. 하늘의 한 구석에는 초승달이 걸려 푸른빛을 발했다. 검은 융단에 뿌려진 보석 같은 별빛들이 지상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끄아악!”

“죽어! 죽어라, 이 개 같은 자식들아!”

“으아아아!”

고요와 평화로 가득차야 할 밤은 비명과 죽음으로 얼룩졌다. 용의 울음이 퍼지자 날뛰기 시작한 괴물들이 부락과 동굴, 숲을 박차고 뛰어나온 것이 그 원인이었다.

아주 오랜 옛날, 제대로 된 문명이 일어서기 전. 모든 피조물들은 거대한 존재들에게 지배받은 역사가 있었다.

후에 자신들만의 문명을 이룩한 종족들은 그 기억들을 떨쳐냈지만, 동굴과 지하의 짐승, 괴물들은 여전히 본능의 깊숙한 곳에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거기다 지하 깊숙한 곳에서 올라온 용의 울음에는 사악한 마력이 내포되어 있어 괴물들의 흉성을 자극했다. 그리고 칼리스덴은 미쳐 날뛰는 괴물의 군단을 막아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병사, 용병들은 질서 없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성벽에 기어 올라오는 괴물들을 죽이거나 죽었다.

마법사들이 하늘에 띄운 흰 조명빛 아래의 괴물들은 보다 선명했고, 그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피부는 보다 창백했다.

“그어어어엉-!”

“···시발. 저건 또 뭐야.”

전장을 울리는 포효에 시선이 모였다. 어둔 밤에서 더 커다랗게 보이는 거인의 형체. 키가 4, 5미터에 이르고, 근육으로 뭉쳐진 육체에 눈이 이마에 하나 달린 괴물. 퀴클롭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 손에 나무 몽둥이를 든 외눈박이 거인은 느긋하게 걸어왔다. 그러면서 빈손을 아래로 뻗어 작은 괴물들을 입에 넣어 씹어 먹고, 남은 부스러기들을 칼리스덴에 던져댔다.

콰앙! 성벽과 첨탑이 날아온 육편들에 갈라지거나 쪼개지며 돌조각들을 흘렸다, 날아온 것들 대개는 몸의 절반 이상이 사라진 괴물 시체들이었지만, 그 중에는 용케 살아남은 것들도 있었다.

팔과 다리가 부러지고 뜯겨져 나갔음에도 괴물들은 고통에 아랑곳 않고 바로 앞의 인간을 물어뜯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생존 욕구마저 거세된, 극도에 달한 흉성에 병사들은 전의를 잃고 물러섰다. 하늘에서 빛나며 어둠을 물리던 조명 마법도 힘을 잃었다. 그렇게 어둠이 닥치려는 순간.

“만물을 비추는 참된 빛이 어둠을 거두리라.”

정명하면서도 명징한 목소리가 전장에 퍼졌다.

“사악한 존재들이여, 눈이 멀지어다.”

성벽 어디선가 황금빛의 광선이 하늘로 솟구쳤다.

“빛 아래 싸우고자 하는 자는 일어설 것이요, 삿된 것들은 스러지리니.”

솟구쳤던 황금빛의 광선은 천공에서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드문드문 끼어져 있던 구름들이 그 서광에 훅, 밀려났다. 각기 신앙을 가진 다들에게 그것은 모두 다르게 보였다.

누군가는 빛나는 십자가를 보았고, 누군가는 거대한 망치를, 또 누군가는 목동의 지팡이를 보았다.

“광휘여, 투지를 노래하소서.”

번쩍.

빛의 막대가 전장을 관통했다. 그 충격에 휘말린 괴물들의 육신이 부서져나갔다.

사람들의 상처가 아물었다. 두려움이 물러가고 용기가 솟았다.

누군가가 고양감을 참지 못하고 가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함성을 지르자, 모두가 똑같이 고함을 외쳤다.

빛의 막대는 곧 사그라들었으나 한 번 새겨진 투지는 꺼질 줄 모르고 타올랐다.

우어어어엉-!

빛에 놀라 물러섰던 퀴클롭스가 괴성을 지르며 쿵쿵 달려왔다. 표정은 흉악하고 몽둥이를 높게 쳐든 것이, 당장이라도 성벽을 날려버릴 듯 했다.

거대한 발에 깔린 작은 괴물들은 그대로 터져 죽었다.

전의에 가득 찬 병사들, 용병들도 감히 어쩌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던 그때.

성벽 한 쪽에서 쌍검을 휘두르던 검은 인영 하나가 외눈박이 괴물을 힐끗 보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활과 화살 두 개를 챙겨 들었다.

그의 귀는 여타 인간들의 둥글둥글한 귀와는 달리 위로 솟은 뾰족한 모양이었다.

쌍검을 칼집에 꽂은 검은 인영은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린 다음 바닥을 박찼다, 판석이 힘을 버티지 못하고 우그러졌다.

그는 막 성벽에 기어 올라온 괴물의 머리통을 짓밟고 밤하늘로 뛰어올랐다. 아래로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인영은 신경 쓰지 않으며 공중에서 화살 하나는 입에 물고, 하나는 시위에 매겼다.

초승달과 별빛이 감탄의 시선으로 그를 비췄다. 푸르스름한 빛에 비친 그는 백발의 머리카락에 연보랏빛의 피부를 지닌 흑요정이었다.

활줄이 팽팽이 당겨졌다. 그리고 흑요정의 도약력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화살은 그야말로 쏜 살이 되어 아래로 쏘아졌다. 그 목표는 퀴클롭스의 정수리였다.

푸욱!

예상치 못한 고통에 퀴클롭스가 몽둥이를 떨어트렸다. 외눈박이 거인은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그러나 화살은 뽑히지 않고 대가 뚝 부러져나가 누군가 뽑아주지 않으면 영 힘들게 변해버렸다.

해소되지 않는 고통에 퀴클롭스가 분노하며 이 고통을 준 원흉을 올려다봤다. 흑요정은 이제 막 밤하늘을 배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외눈박이 거인 괴물은 두 손을 치켜들며 떨어지는 그를 붙잡고자 했다. 잡은 동시에 쥐어짜고, 둘로 나눠버릴 생각이었다. 그 다음 입에 넣고 우적우적 먹어 버릴 것이었다.

그러나 흑요정에게는 아직 화살이 한 대 더 남아 있었다. 다시 화살이 허공을 가르고, 핏발을 가득 세운 하나의 커다란 눈에 직격으로 박혀 들어갔다.

“카아아아아!”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에 퀴클롭스가 손으로 눈을 가리며 허리를 숙였다. 뒷목이 훤히 드러났고, 흑요정은 쌍검을 빼들었다. 세계수의 문양이 찍힌 검신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번쩍였다.

자르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거대한 머리가 쿵,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렸다. 곧 거체가 어깨 위에 얹고 다니던 것을 잃은 모습으로 쓰러졌다.

흑요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쌍검을 휘둘러 남은 피를 털었다. 그때, 성벽에서 밧줄이 날아왔다. 빨간 머리의 마법사가 고함을 빽 질렀다,

“렉시! 그대로 내려가 버리면 어떡해! 빨리 잡고 올라와!”

과연 렉시라 불린 흑요정을 향해 괴물들이 짓쳐오고 있었다. 렉시가 바로 밧줄을 잡자 성벽 위에서 영차-! 하며 밧줄이 위로 당겨졌다.

렉시는 밧줄이 다 끌어올려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요정다운 날렵한 움직임으로 벽을 툭툭 차더니 두 번 만에 다시 흉벽에 올라섰다. 밧줄을 잡고 있던 병사들은 멍청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아까의 빨간 머리 마법사가 다가와 소리쳤다.

“누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뛰쳐나가래? 죽을 뻔 했잖아!”

렉시는 베시시 웃었다.

“왜 그래? 결국엔 잘 됐잖아? 아, 방금 그거 러셀도 봤어야 했는데. 나 엄청 멋졌지? 그지?”

이블린은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마지못해 끄덕였다.

“그래. 멋졌는데, 아직도 한참 남았어.”

렉시는 어깨를 으쓱였다.

“알았어.”

둘은 다시 전장으로 몸을 돌렸다. 전투는 끝나지 않았고, 괴물은 여전히 많았다. 밤은 이제 막 흘러가고 있었다.

***

떨그렁.

뒤늦게 도끼날이 설원에 떨어지며 쇳소리를 냈다.

둘은 잠시 그 자세 그대로 있었다. 루드비히는 가슴에 검이 꽂힌 자세로, 러셀은 검을 꽂은 자세로.

검은 피 한 줄기가 루드비히의 심장에서 흘러 나와 검신과 러셀의 손을 지났다. 툭, 피 한 방울이 하얀 설원 위에 떨어졌다.

루드비히는 숙여진 상체에서 그걸 내려다봤다. 그 검은 점이 마침표 같다고 생각했다.

루드비히는 웃었다.

“하하하···.”

삼백 년 전에 미처 찍히지 못한 마침표가, 오랜 기다림 끝에 찍혔다.

우웅, 하고 수만 마리의 벌이 떼를 지어 날갯짓을 하는 듯한 울림이 퍼졌다. 둘은 설원 위에서 사라졌다.

검은 피 한 방울만이 새하얀 설원의 대지에 남아 있었다.

***

유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루드비히 님!”

그녀는 갑작스레 나타난 두 사람에게 달려갔다. 러셀은 루드비히의 심장에서 검을 뽑지 않았다. 그 상태 그대로 천천히 상체를 받쳐 초원에 눕혔다.

루드비히는 러셀의 손길에 따라 자연스럽게 풀밭에 몸을 뉘였다.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마력이, 이 공간을 이루는 주문의 씨줄과 날줄이 해체되고 있었다.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루드비히는 부들부들 떨리는 왼손을 들어 아직 대검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러셀의 손을 덮었다. 그의 호흡은 금방이라도 끊길 듯 힘들게 유지되고 있었다.

유리아가 무릎을 꿇은 채 그를 부여잡고 울었다. 루드비히는 오른손을 들어 유리아의 어깨에 얹었다. 그는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한다. 러셀. 그대야말로 진정한···. 내 휴식의··· 인도자였음을, 알았다.”

러셀은 그저 담담히 그의 말을 들었다. 색색거리며 루드비히의 호흡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유리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슬퍼하지··· 말거라, 유리아. 난··· 기쁘다. 더 이상, 그 길고··· 암흑 같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을 수 있음에.”

유리아는 말도 못 한 채 고개만 주억였다. 그 움직임에 따라 굵은 눈물 방울이 흩뿌려졌다.

“곧··· 내 아내를 만날···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있어도, 놀라지 마라. 그리고 그녀에게도. 나와 같은··· 휴식을··· 선사해주게나.”

“그리 하겠소.”

그의 시선이 러셀의 더 이상 불타고 있지 않는 자안에 닿았다. 그 다음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유리아의 금안을 보았다.

“이, 공간이··· 무너지면, 둘 각자에게··· 선물이, 남겨져 있을 걸세. 부디 신념에 맞게, 잘 써주게.”

유리아는 힘주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루드비히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는 둘 모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눈동자의 초점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이니스.”

그리고 루드비히는 숨을 거두었다. 유리아는 루드비히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러셀은 조용히 심장에 박혀져 있던 검을 뽑았다.

쿠드드드드드···.

울림이 일었다. 지평선에서부터 시작된 진동은 차츰 대지를 무너트렸다. 그들을 중심으로 한 공간의 테두리에서부터 시작된 무너짐은 점점 빨라졌다. 하늘도 균열이 가기 시작하더니 푸른 조각들을 우수수 떨어트렸다.

중심축이 생을 다하자 공간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루드비히의 몸도 천천히 빛의 입자로 변하며 공중으로 흩날렸다.

러셀과 유리아는 그 반짝이는 가루들이 하늘 높이, 높이 오르는 것을 지켜봤다. 곧이어 시야에 닿는 모든 것이 빛으로 화했다.

···눈을 뜨자 넓은 공동이 보였다. 텁텁한 공기가 느껴졌다. 오랫동안 순환되지 못한 공기의 냄새. 그들은 지하미궁에 돌아와 있었다.

무릎을 꿇고 있던 유리아가 고개를 숙인 채 일어났다. 그리고는 쓱쓱 눈가를 닦았다.

러셀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들의 머리 위에 빛나는 구체가 둥둥 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공동의 저편에 뭔가가 있다는 것도.

“유리아. 이게 루드비히가 남긴 선물인 것 같은데.”

유리아는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녀는 빛의 구체를 보자마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녀가 손을 뻗자 떠 있기만 하던 빛의 구체가 스르르 내려왔다. 그리고 유리아의 손바닥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잠시만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아요.”

유리아는 가만히 손바닥에 놓인 빛의 구체를 바라보더니, 곧 그것을 둘로 쪼갰다. 그리고 그 중 하나를 러셀에게 건넸다.

“자요. 루드비히 님이 남기신 거예요.”

“뭐가 들었는데?”

“그건 저도 몰라요. 여기에 루드비히님이 남겨놓은 사념이 있었어요. 저는 그분이 하라는 대로 한 거라, 아마 직접 흡수해야 알 수 있을 거예요.”

러셀은 말없이 유리아가 건네주는 빛의 구체를 받았다. 그러자 뭘 할 것도 없이 빛의 구체는 그의 몸에 흡수되었다. 러셀은 순식간에 루드비히가 뭘 남겼는지 깨달았다.

“하.”

그는 유리아를 돌아봤다. 그녀도 막 빛의 구체를 흡수한 것인지, 전신에 옅은 광채가 서렸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유리아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금안에서 빛이 반짝였다.

“후우우.”

러셀은 루드비히가 유리아에게 남긴 것이 막대한 마력을 단단히 뭉친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일종의 영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지금 유리아의 마력은 아까보다 족히 두 배에서 세 배는 늘어났다.

영단의 마력을 모두 소화하진 못하고, 체내 깊숙한 곳에 남겨둔 유리아가 팔다리를 움직여봤다.

아까보다 확연히 가벼워진 것이 느껴졌다. 대단한 충만감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 러셀이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헛기침을 했다.

“흠흠. 뭐예요? 러셀은 뭐 받았어요? 저처럼 마력이었어요?”

“아니.”

러셀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유리아는 잠깐 당황하다가 그의 보폭에 맞추기 위해 달려갔다.

“어디 가요?”

“내게 주어진 것을 받으러.”

“네? 방금 받은 거 아니었어요?”

“내가 받은 건 사용법이야.”

“뭐에 대한 사용법이요?”

“바로 앞에 있는 거.”

곧 유리아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공동의 끝에는 여섯 개의 계단이 있었고, 그 맨 위에 옥좌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옥좌에는 한 묵색의 갑주가 주인 없이 홀로 앉아 있었다.

그걸 알 수 있는 이유는 머리에 씌워져 있어야 할 투구가 팔걸이에 얹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리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저건···!”

아까 회상의 공간에서 처음 루드비히를 만났을 때 입고 있던 갑옷이 아닌가?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러셀은 계속 걸어가다가 옥좌에서 몇 걸음을 놔두고 앞에 섰다. 그는 손을 뻗고 뇌리에 새겨진 주문을 속삭였다.

그러자 계단과 옥좌가 부르르 떨리더니 회색의 먼지가 되어 스러졌다.

묵색의 갑주는 옥좌가 없어져도 앉아있는 자세로 떠 있더니 곧 저 혼자 일어섰다. 그리고 각각의 파츠가 분리되며 날아와 러셀에게 입혀졌다.

그는 가만히 서서 갑주가 장착되는 것을 지켜봤다. 발부터 시작해서 정강이, 허벅지, 배, 가슴, 어깨, 팔꿈치, 팔뚝, 손까지. 빈틈없이 갑옷이 덮여졌다.

마지막으로 투구가 날아왔다. 그것은 급할 것 없다는 것처럼 천천히 날아와 러셀의 손에 내려앉았다.

검은 투구에는 네 개의 큼직한 뿔이 달려 있었다. 미간에서 솟아오르는 것 하나, 그 양옆으로 죽 이어져서 관자놀이에서 솟은 것 두 개, 그리고 정수리에 하나.

그는 그 무시무시한 생김새의 투구를 머리에 썼다. 눈이 완전히 가려졌지만, 유리아의 것과 마찬가지로 마법적인 조치가 취해져 있는 것인지 시야는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투구가 완전히 씌워지자 결합부가 맞물렸다.

모든 갑주를 착용하자 갑자기 마안이 번뜩였다. 그러자 관절 부위를 보호하는 비늘 모양의 철갑들이 촤르르 하고 튀어나왔다. 목 아래서도 마찬가지로 철갑이 나오며 턱과 얼굴을 덮는 면갑이 만들어졌다. 등 뒤로 진회색의 망토가 펄럭였다.

유리아가 감탄했다.

“와. 멋있긴 한데··· 악마 같이 생겼네요.”

그녀의 말대로 러셀의 모습은 완전히 현세에 강림한 악마의 왕 같았다. 루드비히가 입고 있었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발끝에는 세 갈래의 발톱이 튀어나왔고, 그 위로는 하반신 전체를 보호하는 갑옷이 거친 단면을 내보이고 있었다.

더 올라가면 복근의 모양이 드러나는 배갑과 뾰족뾰족한 돌기들이 솟아있는 흉갑과 견갑, 흉흉한 갈퀴 손가락이 달린 장갑이 보였다.

거기다 네 개의 거대한 뿔이 솟은 투구와 악마를 닮은 면갑까지. 밤에 보면 누구라도 악마라고 착각할 외형이었다.

러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것까지 있으면 그렇겠군.”

그가 손을 옆으로 뻗자 검은 구멍이 나타났다. 아까 루드비히가 만들었던 것과 같았다. 러셀은 구멍에서 삐죽이 튀어나온 손잡이를 잡고 뽑아들었다.

그것은 아까의 백색 도끼였다. 마력도 얼어붙게 만드는 혹한의 서리를 간직한 외날의 도끼.

도끼날을 아래로 한 채 긴 자루 윗부분에 손을 걸친 러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악마 왕이 따로 없었다.

“···어쩐지 저보다 당신한테 준 게 더 많은 것 같은데요.”

“불만이면 네가 싸워서 이겼어야지. 그리고 넌 이미 갑옷 있잖아?”

“하여튼 한 마디를 안 져. 그럼 여자한테 인기 없거든요?”

“아니던데.”

러셀은 들은 척도 안 하면서 도끼를 살폈다. 그의 클레이모어와 부딪히고도 이 하나, 흠집 하나 나가지 않은 강도를 자랑하는 도끼였다.

시범삼아 몇 번 휘두르자 묵직한 손맛과 함께 예기가 번뜩였다. 마력을 넣으면 아까처럼 서리를 이용한 공격들도 가능할 것 같았다.

유리아는 그 모습을 부러운 눈길로 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그 갑옷, 나중에 벗는 거 힘들지 않겠어요?”

“아니.”

러셀이 다시 어떤 주문을 속삭였다. 그러자 검은 갑주에서 옅은 빛이 나더니, 곧 크기가 줄어들었다. 외형도 점점 변해갔다.

검은 갑주, 바엘은 코트가 되었다. 테두리와 어깨, 등에 은빛의 문양이 새겨진 아름다운 검은 색 롱 코트였다.

입을 쩍 벌린 유리아에게 씨익 웃어준 러셀은 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코트 안쪽에 넣었다. 그러자 백색의 거대한 도끼는 그 크기가 무색하게 코트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는 반절 이상 부러진 대검도 안쪽에 넣고 코트의 옷깃을 툭 털었다. 무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만족스러웠다. 자신의 육체가 가진 가능성을 자각했을 때만큼이나.

“잘 쓰겠소. 루드비히.”

“···진짜 내가 싸웠어야 했나?”

헛소리를 중얼거리는 유리아의 이마를 툭 건드린 러셀은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옥좌가 자리하고 있던 곳 뒤로 향했다. 그쪽에 길이 있었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 이마를 문지르던 유리아가 다급히 그를 따랐다.

“같이 가요!”

“그럼 빨리 와.”

둘은 길 안쪽으로 사라졌다. 남은 공동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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