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판가름
루드비히가 감탄했다.
“정말 믿기지 않는 투지군. 무엇이 자네를 이렇게 싸우게 하는가?”
러셀은 이상한 걸 본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자식이 있나?”
“···그건 왜 묻지?”
“이제야 치매가 온 거면 나중에 똥오줌 가려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설마 유리아한테 그런 걸 부탁하진 않겠지.”
아까 자신을 죽여 달라는 말을 잊은 거냐는 러셀의 점잖은 말을 들어버린 루드비히가 입을 떡 벌렸다. 그러나 곧 껄껄거리며 웃어버렸다.
“거 참, 못 당하겠군. 그냥 궁금했네. 자네가 싸우는 이유는 뭔지. 솔직히 없지 않은가? 여기에 오게 된 것도 어쩌다 휘말린 거라면서?”
러셀은 대검의 칼날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머리카락도 베일 정도로 시퍼랬던 날은 이제 없다. 손바닥도 상처 입히지 못할 만큼 무뎌졌고 깨져나갔다.
흑요정이 수십 년 전 제련한 강철 검은 이제 너무 부서져버렸다. 검신의 아래쪽에 음각된 검은 세계수의 문양이 애처롭게 빛났다.
나중에 알리샤가 보면 화를 낼까. 조금 더 아껴 쓰라고 말할까. 아니, 그녀는 대장장이다. 무구들이 결국에는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지 모를 리 없다.
검은 검일 뿐. 그가 여기 러셀로 서있는 것처럼.
“한 번도 싸워보지 못했으니까.”
루드비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린가? 싸워보지 못 했다니. 딱 봐도 숱하게 전장을 구른 것 같이 보이네만.”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생의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니까. 러셀은 숨을 한 번 내쉬고 대검을 들어올렸다. 잘려나간 뭉툭한 칼끝이 서늘한 빛을 뿌렸다.
“잡담만 계속할건가. 아니면 이제라도 얌전히 목을 내밀 수 있게 된 건가. 내 약속은 아직 유효한데.”
“···그럴 리가. 다시 시작하지.”
다시 둘은 자세를 잡았다. 정적. 숲은 조용했다. 어떤 날짐승, 들짐승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푸르른 나뭇잎과 나무만 가득했다.
둘의 격돌에 날아올랐던 나뭇잎 중 하나가 이제야 하늘에서 살랑거리며 내려왔다. 나뭇잎은 정확히 둘의 중간에, 소리 없이 착지했다.
고요가 깨져나갔다. 비산한 고요의 유릿조각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공간을 베고 할퀴고 뜯었다.
백색 도끼가 다시 냉기를 뿜어댔지만 그건 더 이상 러셀에게 닿지 못했다. 루드비히는 아까 그를 날려보냈던 검은 무언가에 냉기가 가로막히는 것을 보며 경악했다. 정확히는, 그것이 뭔지 인지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마치 시야 바깥에 존재하는 것 같다. 초점을 두기 전에도 분명 거기 있다는 걸 알지만, 막상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그런 경험이 계속 반복됐고, 어느새 두려움을 느꼈다.
-키킥.
쭈뼛, 하고 등줄기에 소름이 달렸다. 루드비히는 거세게 도끼를 휘둘러 러셀을 물러나게 했다.
“···방금 들었나?”
러셀은 입꼬리만 비죽 올렸다.
“아니. 수줍음이 많은지 나한텐 말을 잘 걸지 않더군.”
쾅!
대검과 도끼가 충돌했다. 칼날과 칼날이 서로를 훑으며 불꽃을 일으켰다. 허나 갈려나가는 것은 러셀의 클레이모어였다. 루드비히가 검과 도끼를 맞댄 채 말했다.
“수줍음은 무슨. 꿈에 들을 까 무서운 목소리였네.”
“지랄, 이미 꿈속인데 뭐가 더 무서워?”
“헛, 그것도 그렇군!”
도끼의 서리가 러셀의 주변을 넘실거렸다. 그러나 곧 그의 자청빛 마력에 잡아먹혀 사라졌다. 냉기는 더 이상 러셀을 침범하지 못했다.
“후으읍!”
어느 새 두 눈에서 불을 일으키고 있는 그가 대검을 힘주어 눌렀다. 그에 루드비히의 무릎이 점차 숙여졌다. 루드비히는 올려다 보고, 러셀은 내려다보는 구도 속에서 힘을 견디지 못한 대지가 쩌적, 하고 갈라졌다.
콰르르르릉!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이 무너졌다. 깊은 구덩이에서 떨어지는 둘은 계속 무기를 부딪치기를 반복했다.
공간이 다시 뒤바꼈다. 바다였다. 정확히는, 군선과 해적선의 전투 한복판.
러셀은 돛에 커다란 검은 해골 문양이 그려진 해적선에 떨어졌고, 루드비히는 그 반대편의 푸른 줄무늬가 세로로 새겨진 돛의 범선에 떨어졌다.
해적과 범선의 선원들은 한창 싸우는 와중이었는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둘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머릿수건, 붉은 수염, 애꾸눈에 어깨에는 초록색 앵무새를 앉히고 적갈색으로 그을린 상체를 내보인 해적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돛을 펼쳐라! 석궁대! 우현에 붙어! 이 병신 새꺄, 네 손에 들린 건 석궁 아니냐?! 당장 우현으로 붙어!”
군선에서는 근엄한 얼굴에 푸른 제복을 입고 모자를 쓴 남자가 명령을 내렸다.
“무기고를 개방하라! 창잡이는 좌현으로! 조타수! 방향을 우로 꺾어라! 데니스! 내 선실에 가서 주문서를 갖고 와라! 오늘 저 해적 놈들한테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다!”
대략 그런 상태였다. 망망대해에서 해적과 해군들이 싸우는 것. 세계의 작은 축소판 위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또다시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러셀과 루드비히는 동시에 서로가 디딘 배를 박차고 공중에서 만났다.
꽈앙!
난데없이 허공에서 터진 충격파에 두 배의 돛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기우뚱, 하고 배가 반대방향으로 휘청거렸다.
“으아아아! 어머니이!”
“누, 누가 나 좀 잡아, 아아악!”
선체와 갑판이 기울며 그 위에 서 있던 사람들 모두가 아래로 곤두박질 쳤다. 곧 벌어질 전투에 흥분했던 해적과 해군들은 세상의 끝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바다에 떨어진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풍덩!
러셀과 루드비히도 바다에 떨어졌으나, 가라앉으면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더 유리한지는 자명했다.
숨을 쉴 수 없고 물의 저항도 다 받는 러셀과 달리 루드비히는 아무렇지 않게 숨을 쉬며 도끼를 휘두를 수 있었다.
꿍!
물속이라 둔중하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파문이 일었다. 러셀은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 뒤를 루드비히가 쫓았다가, 문득 멈춰 섰다.
또다. 감히 볼 수 없고, 감히 인지할 수조차 없는 무언가가 심연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가 안간힘을 쓰며 집중하자, 그것의 실루엣이 언뜻 보인 듯 했다.
그건 끓어오르는 거품이었다. 부글거리는 어둠이었다. 타오르는 공허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거대한 괴물이 뛰쳐나왔다.
기우뚱 거렸던 해적선과 군선은 곧 균형을 되찾았다. 철썩, 하고 거대한 파도가 쉼 없이 갑판 위를 적셨다.
푸확! 푸확! 푸확! 해수면을 박차고 거대하고 흐느적거리는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허공으로 하얗게 포말이 이는 폭포수 같은 물줄기가 중력을 거스르며 폭발했다.
간신히 난간이나 벽 모서리, 돛대 등의 구조물을 잡아 바다에 떨어지지 않았던 사람들의 고개가 위로 꺾였다. 그리고 모두 한 목소리로 외쳤다.
“크라켄이다아-!”
리바이어던과 같이 심해에 서식하는 가장 끔찍한 괴물 중 하나, 크라켄이 일어나 자신의 촉수를 휘둘렀다. 그에 두 개의 배가 작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러셀과 루드비히는 솟아오른 크라켄의 머리에 서 있었다. 발 아래로 물컹한 감촉이 느껴졌다. 루드비히가 중얼거렸다.
“···이 괴물은 내가 만든 게 아닌데.”
그걸 증명하듯 무수한 빨판이 달린 촉수가 루드비히를 덮쳤다. 그는 도끼를 휘둘러 베어내고는 위로 뛰어올랐다.
높은 공중에 뜬 루드비히는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는 러셀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의 눈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것도.
루드비히는 직감적으로 러셀이 이 공간에 간섭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크라켄을 만들어낸 것이다. 마치 루드비히가 장소를 뒤바꿔버린 것과 비슷한 짓거리였다.
루드비히는 아래로 떨어졌다. 러셀도 크라켄을 밟으며 뛰어 올랐다.
공중에서 만났으나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루드비히의 가속도가 더 빠르고 강했다. 둘은 쩍 벌린 크라켄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크라켄의 거대한 머리가 펑, 터져버렸다.
다음 순간, 러셀은 또다시 새로운 공간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사막이었다. 하늘에는 해도 떠 있지 않고 구름도 없었다. 오직 푸르름만이 있었다. 그러나 하늘의 한 구석에서 다가오는 뭔가가 있었다.
“푸, 퉤퉤.”
머리카락과 입에 들어간 모래를 털며 러셀이 일어났다. 대검은 아까보다 더 짧아져 있었다.
그건 루드비히의 도끼보다 클레이모어가 약한 것도 있었지만, 더 정확히는 ‘눈’의 힘을 강철이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얀 도끼의 서리를 막아내기 위해, 그리고 이 꿈의 공간에 간섭하기 위해 러셀은 ‘눈’을 떠서 공격에 써먹었다. 이제까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짓거리다. 왜냐면 본능적으로 알았으니까.
‘눈’을 자주 쓰면 쓸수록 정신 한 구석이 공허에 물드는 것을 말이다. 집에서 그가 본의 아니게 일으켰던 사건들에는 항상 러셀의 눈이 얽혀있었다. 당장 자신이 그 주인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아니, 정말 주인이긴 한 걸까? 사실은 그도 모르게 이미 노예가 된 것은 아닐까.
러셀은 무서운 상상을 뿌리쳤다.
쿠르르릉.
하늘의 한 구석에서 천둥이 울렸다. 그건 모래폭풍이었다. 붉은 번개가 번뜩이는. 이윽고 모래폭풍이 사구에 서 있던 러셀을 덮쳤다.
사위는 주황색이었다. 모래의 입자가 바람에 날리며 허공에 색을 덧칠하고 있었다. 꽈르릉! 그리고 이따금씩, 아니 꽤 여러번 붉은 색의 번개가 바람과 바람, 회오리와 회오리 사이를 질주했다.
눈을 번뜩이며 주변을 돌아보던 러셀이 재빠르게 몸을 돌려 대검을 들었다. 어느 새 나타난 루드비히가 도끼를 올려치고 있었다.
꽈릉!
무기의 부딪힘은 번개와 천둥에 가려져 들리지 않았다. 온몸을 휩쓸어대는 날카로운 모래폭풍 틈에서 두 남자가 붙었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주위는 바람 소리와 모래 알갱이들이 서로 부딪치며 마찰하는 소리, 또 그 마찰에 의해 발생하는 벼락과 천둥 때문에 시끄러웠다.
콰과광-!
그때 러셀의 정수리 위로 거대한 붉은 색 벼락 기둥이 내려 꽂혔다. 그러나 벼락은 러셀을 감전시키지도, 숯덩이로 만들지도 못했다. 되려 그의 몸을 휘감았다.
러셀의 전신에서 구렁이 같은 번개 줄기가 번쩍이며 옷 위를 핥아댔다. 그는 그 붉은 번개를 토막 난 검에 모았다.
마치 광선검처럼 붉은 번개가 검의 형상을 이뤘다. 루드비히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렸다.
“번개를 다룰 줄 아나?”
“전에 여러 번 맞아봤지.”
러셀이 붉은 벼락이 휘감긴 대검을 내리쳤다. 루드비히의 도끼가 마주하며 올려쳤다. 섬광. 공간이 떨리며 요동치고, 장면이 바뀌었다.
“정신 사나워 죽겠군.”
러셀이 온몸에 묻은 눈덩이들을 툭툭 털어내며 다리를 세웠다. 설원이었다. 아래는 단단한 빙하인 듯 했다.
하늘은 회색의 두터운 이불로 덮여있었다. 이불의 솜 같이 하얀 눈이 함지박 만하게 떨어졌다.
“그리 불평 안 해도 여기가 마지막이네. 이 이상은 나도 내려갈 수 없어.”
“바깥과 여기의 시간차가 얼마나 되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여기의 한 달, 반년, 혹은 1년이 바깥에서는 단 1초일수도 있지.”
러셀은 씩 웃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거야.”
“나도 그러길 바라네. 여긴 너무 추우니까.”
마력은 거의 다 떨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순수한 육체와 기술뿐이었다.
러셀과 루드비히는 기합성도 없이 달려들었다. 흰 발자국이 무수히 찍히는 새하얀 설원 위에서, 펑펑 쏟아져 내리는 눈을 머리와 어깨로 맞으며, 회색의 하늘 아래서 두 남자가 격돌했다.
루드비히는 점차 지쳐가는 것을 느꼈다. 이 공간의 주인인 것과 별개로 그의 정신과 육체는 이제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가장 깊은 곳에 와버린 것 또한 그런 영향을 주는 것인지도 몰랐다. 알 수 없었다. 그도 여기까지 내려온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루드비히는 힘차게 다리를 뻗고, 허리를 틀고, 상체를 숙이고, 팔을 휘둘렀다.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깡, 깡 하면서 불티와 쇳조각이 흩날렸다. 러셀의 마력을 두르지 못한 강철 대검은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며 부서지고 있었다.
그러나 러셀은 아랑곳 않고 검을 휘둘렀다. 마치 네 소임을 다하라는 듯이.
어느 순간, 러셀은 신기한 경험을 맞닥뜨렸다. 자신의 모습을 제 3자의 시선으로 보게 된 것이다. 바로 앞에서 스스로가 루드비히와 싸우는 것이 생생하게 보였다.
의식의 한 곳에서는 코앞에서 도끼를 들이미는 루드비히가 보이는 한 편, 다른 한 곳에서는 도끼를 막는 자신의 옆모습이 보였다.
그는 인지했다. 자신을 인지했고, 주변의 공간을 인지했고, 수없이 번뜩이는 도끼날의 폭풍을 인지했다.
‘눈’은 도끼의 궤적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고 대검은 수차례 깎아지면서도 결국 그 공격들을 받아냈다. 그러나 도끼에서 뻗어져 나온 날카로운 예기는 그 자체만으로 러셀에게 상처를 입혔다.
볼에 난 상처에서 주륵 피를 흘리던 그는 힐끔 대검을 쳐다봤다. 이제 남은 검신은 한 뼘이 채 될까 말까 했다. 기회는 단 한 번이었다.
러셀은 시선을 돌려 루드비히의 몸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기둥이 있었다.
수천, 수만 개의 빛나는 룬 어와 주문으로 이뤄져 있어 멀리서 보면 그저 빛의 기둥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기둥은 설원 아래로 마치 나무의 굵은 뿌리처럼 여기저기 뻗쳐져 있었고, 여기저기가 부서져 있었다. 전투의 충격에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의 몸이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루드비히는 점점 그 속도를 따라올 수 없었다.
꽈아앙! 러셀은 남은 한 줌의 마력을 끌어 모아 진각을 내질렀다. 단단한 빙하의 바닥이 부서지고 솟구쳤다. 삐죽삐죽한 빙산들이 만들어졌다.
루드비히는 크레바스처럼 양쪽에서 자신을 덮치는 빙산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투명하고 푸른 얼음조각들이 허공을 날아다녔다. 그 속을 러셀이 질주했다. 그의 몸에도 단단하고 뾰족한 얼음 조각들이 부딪히고 몇 개는 박히기까지 했지만, 러셀은 멈추지 않았다.
다시 발이 빙하를 내려찍자 거짓말처럼 하얀 대지가 기우뚱, 하며 얼음산이 세워졌다. 그 첨단부에서 루드비히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러셀은 직각에 가까워지는 빙산의 사면을 맹수처럼 타고 올라 루드비히의 목을 잡아챘다. 루드비히는 마치 독수리가 사냥감을 움켜쥐듯 목을 조이는 힘에 절로 비명을 뱉었다.
“컥!”
“흐아압!”
기합 소리와 함께 루드비히의 몸이 설원의 대지에 처박혔다. 그는 얼음을 부숴가다가 멈췄다. 갈아엎어진 얼음 대지 위에 루드비히가 토한 붉은 선혈들이 길게 죽 이어져 있었다.
피부 안에서는 불타는 듯한 작열 통을, 바깥에서는 온몸을 얼려버릴 차가운 얼음의 감각에 루드비히가 신음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고통마저 달게 느껴졌다.
약속된 휴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축제가, 머지않았다.
부들거리며 일어난 그는, 곧 고함을 지르며 다가오는 러셀에게 돌진했다.
“아아아아아!”
러셀은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지는 도끼를 물러나서 피하지 않고, 오히려 안으로 파고들었다. 왼쪽 어깨로 자루를 받으며 오른쪽 어깨로는 루드비히의 가슴팍을 쳤다.
둔중한 충격과 함께 입에서 피가 뿜어졌으나 곧장 러셀의 검을 쥔 오른 주먹이 턱을 올려치는 바람에 핏줄기는 허공에 흩뿌려졌다. 손에서 힘이 빠지며 도끼가 떨어졌다.
러셀은 제자리에서 왼쪽으로 반 바퀴를 돌아 설원에서 낮게 떠오른 루드비히의 복부를 팔꿈치로 쳤다.
그 충격에 그의 몸이 앞으로 접혀졌다. 동시에 러셀의 오른손에 들린 토막 난 대검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며 루드비히의 심장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