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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34화 (35/225)

34화 흑기사 *수정*

“어? 여긴?”

그곳은 꽃밭이었다. 알록달록한 꽃잎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어느 언덕의 위. 러셀과 유리아는 언덕 위, 꽃밭 한가운데 서 있었다.

위를 보자 구름이 군데군데 낀 하늘이 보였다. 곧 비가 올 것처럼 흐린 하늘이었다. 태양은 구름에 가려져 전혀 보이지 않았고, 하늘 전체는 균등한 빛, 혹은 그림자로 지상을 비추고 있었다.

고개를 내려 주위를 보면 아름다운 꽃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향기는 너무나도 달콤했다. 유리아는 향기를 가득 몸에 채웠다. 충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마약의 느낌일까 싶었다.

“헤헤···.”

점차 눈동자의 초점이 풀려가는 유리아가 러셀의 손을 풀려고 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아래의 꽃을 향했다.

“무슨, 꽃이 이렇게, 많이···.”

“유리아!”

그때 천둥 같은 러셀의 고함이 울려퍼졌다. 그 외침에 유리아의 정신이 번쩍 뜨여졌다. 그녀는 방금까지 자신이 품고 있던 생각에 당황했다. 왜 난 이 꽃을 만지려고 했지? 왜 흙을 파려고 했지?

왜 이 꽃들과 하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지?

“허억!”

유리아는 숙였던 허리를 벌떡 일으켰다. 뭔가, 뭔가가 이상했다. 이 향기가 자신을 붙잡았다. 땅 속으로 끌어당기려 했다.

“뭐, 뭐예요, 여긴? 우리, 우린 방금까지 지하에, 미궁에 있었잖아요.”

“여긴 오래 있으면 안돼. 내 손 꽉 붙잡아. 절대 놓치지 마.”

러셀은 성큼성큼 다리를 옮겼다. 그의 서글프도록 긴 다리길이 때문에 유리아는 거의 뜀걸음으로 보폭에 맞춰야 했다.

“무, 무슨 소리예요? 여기에 오래 있으면 안 된다니요?”

러셀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그 와중에도 꽃의 향기는 계속해서 그들 주위를 맴돌았다. 그리고 러셀이 어딘가에 가까워지자 더 심해졌다.

“우읍···!”

유리아는 마력으로 몸을, 코를 보호하며 냄새를 맡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너무 많은 향기를 들이마신 뒤였다.

머릿속이 꽃밭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한시라도 빨리 발아래의 흙을 파헤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샘솟았다.

그런 유리아를 돌아본 러셀은 숫제 달리기 시작했다. 유리아는 그의 손에 손목이 꽉 잡힌 채 겨우겨우 달리며 보조를 맞췄다.

머지않아 러셀의 ‘눈’에 길이 보였다. 길은 꽃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나무의 형상을 띄고 있었다.

향기는 이제 육안으로도 보일 수 있을 정도였다. 알록달록한 연기들이 유혹의 손가락을 내밀며 몸을 쓰다듬었다.

러셀은 주먹을 들었다. 마력이 휘감겨 투명한 아지랑이가 이글거리는 주먹이 나무를 후려쳤다. 그러자 나무를 쳤다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가 울렸다.

쩡-!

유리아는 입을 벌렸다. 러셀의 주먹이 부딪친 표면에 균열이 가 있었다. 거미줄처럼 쫙쫙 그어진 나무의 거죽이 유리처럼 깨져나갔다.

쩡-!

그 속에서 어둠이 덮쳐왔고, 유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러셀의 손을 놓지는 않았다.

눈꺼풀 너머로도 느껴지는 어둠이 사라지자 그녀는 눈을 떴다.

“여긴.”

사막이었다. 위로는 작열하는 태양이 천구의 중간에서 불타고 있고, 그 바깥으로는 구름 한 점이 없어서 도리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푸른 하늘이 있었다.

어느새 모래에 파묻혀 버린 발과 다리가 낯설다. 거기서 전해져오는 지독한 복사열도. 위에서 내리쬐는 햇볕보다 모래에서 올라오는 열이 더 강렬해서, 유리아는 숨이 턱턱 막혔다.

“이쪽이야.”

여전히 상체는 벌거벗었고, 두 눈에서는 도깨비불을 일으키고 있는 러셀이 앞으로 걸었다.

“자, 잠깐···!”

유리아도 다급히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아무리 발을 들어도 푹푹 빠지는 모래 탓에 제대로 걷기가 힘들었다.

“러, 러셀! 설명 좀 해줘요! 아까는 웬 꽃밭이고 여긴 또 왜 사막인건지···!”

“시간 없어. 빨리 가야해. 안 그러면 길이··· 잠깐만 실례하지.”

“어, 어멋!”

러셀은 유리아를 품에 안아들고는 사막을 내달렸다. 그는 발과 다리를 잡아 넘어트리려는 모래에도 아랑곳 않고 달렸다. 사람을 안고 달리는 건 무척 힘든 일이나, 러셀은 한결 같은 빠름으로 사막을 주파했다.

하지만 안긴 사람은 그리 썩 좋지 않은 승차감을 감내하며 입을 다물어야 했다. 잘못하면 혀를 씹을 수도 있으니. 유리아는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자신을 설득하며 그의 목을 휘감았다. 그러자 마구 흔들리던 몸이 한결 편해졌다.

“저기다!”

어느 모래 언덕에 선 러셀이 눈에 불을 켜며(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한 지점을 바라봤다. 유리아도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경악의 감정을 담아 소리쳤다.

“저, 저건 유사(流砂)잖아요!

유사(流砂). 흐르는 모래라는 뜻 그대로, 모래가 물처럼 흐르는 지형이었다. 무척 미세한 입자의 모래로 이뤄져 있어 밖에서 보면 정말 주황색의 물결이 흐르는 것 같았다.

수많은 여행자들을 모래의 이불로 덮어 영원한 잠을 재우는 죽음의 모래. 하지만 러셀은 바로 그 유사를 향해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바로 아래에 소용돌이치는 주황색의 바다로 향해, 피하지 않고 곧바로. 유리아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뭐하는 거예요! 저기 빠지면 죽는다고요!”

“여기가 유일한 생로야!”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항변할 틈도 없이 러셀은 유리아를 안고 유사로 뛰어내렸다.

유사는 삽시간에 그들을 집어삼켰다. 유리아는 이번에야말로 눈과 코, 입, 귀까지 손으로 막았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모래에 덮쳐진 것과 동시에.

“에?”

방금 전까지 머리카락과 목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뜨거운 모래 알갱이의 감촉이 느껴졌는데, 지금은 온데간데없었다. 당장 느껴지는 건 엄청난 추위였다.

“후. 가지가지하는군. 이거 만든 게 놈이든 년이든 얼굴에 죽빵은 꽂아 넣고 시작해야겠어.”

유리아는 여전히 러셀에게 안겨져 있었다. 그녀가 막 죽빵이 뭐냐고 물으려는 찰나, 앞에서 어마어마한 소음이 일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 소음의 진원지가 뭔지 보았다.

그들이 지금 서 있는 곳은 대설산의 산맥 한 자락 중턱이었다. 바로 머리 위에는 구름에 가려진 설산의 꼭대기와, 그쯤에서 점차 규모를 키우며 진군하는 눈의 군대가 있었다.

냉기의 투구와 갑주를 입고 서리의 창과 방패를 든 병사들이 온 세상을 쩌렁쩌렁 울리는 함성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꽉 잡아, 유리아.”

러셀은 바로 몸을 돌리고는 아래로 뛰어내렸다. 유리아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의 목에만 매달렸다.

러셀이 바닥을 찍자 쌓여있던 눈들이 굉음을 내며 위로 치솟았다. 가장 최근에 쌓인 것이든 수십, 수백 년에 걸쳐서 쌓인 것이든 가리지 않았다.

그 아래의 단단한 돌로 된 지반을 확인한 러셀이 다시금 다리를 들어 올렸다가 내리쳤다.

꽈아앙!

앞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울림 후, 지반이 러셀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일어섰다.

러셀은 공중에 떠오른 거대하고도 넓적한 바위를 툭 차서 넘어트리더니 그 위에 올라탔다.

마찰력이 0에 달하는 눈 위로,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큰 바위 서핑보드가 러셀과 유리아를 태운 채 곧장 산맥의 아래로 향했다.

오금이 저리는 속도감과 함께 날카로운 칼바람이 볼을 스쳤다.

“······.”

유리아는 어이가 없어서 그저 가만히 안겨 있었다. 지금은 어떤 단어도 지금의 심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러셀과 유리아를 놓친 눈의 군대가 분노의 고함을 지르며 그들의 뒤를 쫓았다. 어찌나 진군속도가 빠른지 거의 그들을 따라잡을 듯 했다. 섬뜩하고 차가운 시선을 목덜미로 느끼며 러셀이 말했다.

“추락에 대비해.”

네? 유리아는 자신이 그렇게 되물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바위를 타고 내려가는 그들 옆으로 엄청난 바람이 씽씽 불며 지나갔기에 러셀의 말도, 말했는지 안 했는지 모를 물음도 뒤로 실려가 눈의 군대에 잡아먹혔다.

찬바람에 유리아의 코끝과 볼이 빨개졌다. 하지만 상체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러셀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곧 산맥의 끝자락,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그 너머의 광대한 풍경도. 유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회색의 구름으로 가득 찬 하늘 아래에 솟아오른 설산들. 마치 대지의 거인들이 하늘을 향해 하얀 창들을 내찌르는 듯 장엄했다.

하지만 하늘은 언제나 그렇듯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의 창 위로 소담한 눈 한줌을 더할 뿐이다. 그들이 얼마나 더 창을 높이 들든 간에 자신에게 닿지 못할 것임을 알고서.

허나 대지 또한 그들의 창이 닿지 못할 것을 앎에도 찌르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모두에게 부여된 시간의 지속성은 그걸 허락지 않으므로.

러셀과 유리아가 탄 바위 서핑보드가 낭떠러지 위를 달리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잠깐의 부유감. 마치 황궁의 비밀 공간에서 부유한 것과 마찬가지의 감각이 그녀를 덮쳤다. 하지만 여기에는 발을 디딜 길이 없다.

끝내 그들을 사로잡지 못한 눈사태가 처절한 비명을 흘리며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했다. 그리고 그들도 추락했다.

새로운 공간이 그들을 내동댕이쳤다.

와아아아아-!

쏴아아아아···.

유리아는 볼에 무수히 닿는 물방울을 느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보던 유리아는 함성을 들으며 고개를 내렸다.

전쟁이 거기 있었다.

갑옷과 창, 검을 든 병사들이 서로를 향해 내달렸다. 칼이 투구를 쪼개고 창이 누비 갑옷을 꿰뚫었다. 웃는지 우는지 모를 얼굴들에, 드러난 이빨에 피가 묻는다.

왜 저들은 싸우고 있을까? 이 자리의 모두가 서로의 부모형제, 연인을 찔러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되는 것일까?

그런 기막힌 우연 따윈 없다.

그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이유로, 다만 남성이기에, 갑옷을 입었기에, 창을 들었기에 여기 있었다. 서로에게 죽고 서로를 죽이고 있었다.

육신이 흘린 핏방울들은 하늘이 흘리는 비에 섞여 대지에 스며들었다, 유리아는 현실감각을 잃어버린 채 전쟁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들은 그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다. 어디에도 치우쳐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양쪽 진영의 병사 모두 아군이라 생각하지 않고 창을 찔렀다.

타당!

두 개의 창이 위로 떠올랐다. 러셀이 유리아를 노린 창들을 걷어낸 것이었다. 그는 멈추지 않고 대검을 휘둘러 병사들을 쪼갠 뒤 유리아의 어깨를 잡았다.

“정신 차려, 유리아. 이건 환상이다. 실재가 아니야.”

“···실재가 아니라고요?”

꽃밭도, 사막도, 대설산도, 이 빗방울도, 방금의 그 살기 어린 공격들도?

“그래. 하지만 네가 실재라고 믿게 되면 그것은 진짜가 된다.”

러셀은 그 말을 증명하듯 그를 공격하는 칼날과 방패를 피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칼날과 방패는 러셀의 몸이 허깨비인양 속을 가르고 빠져나왔다. 아니, 병사들의 공격이 유령처럼 투명해진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비에 젖지도 않았다.

당혹해하던 병사들은 곧 러셀이 아니라 유리아를 공격했다. 유리아는 도저히 자신의 몸을 향해 곧게 찔러오는 칼을 환상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고, 반사적으로 장검을 뽑아 칼날을 쳐냈다.

그녀는 장검을 통해 전달되는 묵직한 감각 속에서 외쳤다.

“하지만 아까 당신도 창을 쳐냈잖아요!”

“네가 이것들을 사실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도 거기에 간섭할 수 있었던 거다. 아까의 눈사태도 그래. 난 휩쓸려도 멀쩡했겠지만 당신은 파묻혀 죽었을 거야.”

“도대체가, 말도 안 되는···.”

“그래. 정말 말도 안 되는 공간이지. 따라와! 길은 이쪽이다!”

러셀은 다시 유리아의 손을 잡고 달렸다. 악다구니를 쓰며 서로의 목숨을 취하려는 병사들을 해치면서, 때로는 대검을 휘둘러 양단하면서 어느 천막에 다다랐다.

그리고 놀라 고함을 지르려는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내의 몸을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갈랐다. 그러자 다시 균열이 생겨났다.

“이젠 익숙하지?”

“···아니요.”

그렇게 러셀과 유리아는 세계의 수많은 지형을 넘고, 달렸다. 그곳은 까마득한 절벽이기도, 망연한 초원이기도 했다. 혹은 망망대해였고, 넝쿨 줄기와 벌레가 가득한 정글이기도 했다.

하지만 러셀은 언제나 길을 찾아냈고, 유리아는 말없이 그를 따랐다.

지하 미궁에서도 언제나 앞장선 것은 그였지만, 지금의 기상천외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유리아라도 경원의 시선으로 그를 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지?

시간 감각은 진즉에 잃어버렸다. 유리아는 누군가가 한 달이 지났다고 말해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걸린 시간은 짧을 것이다. 아마 두 시간도 채 되지 않겠지.

그러나 그 잠깐의 시간 동안 경험하는 것들이 워낙에 어처구니없고 대단해서(유사와 눈사태, 전쟁, 폭풍, 기타등등) 그보다 오랜 시간을 체류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공간에 떨어졌다.

비명이 들렸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유리아는 어느 샌가 다시 안겨 있던 러셀의 품에서 내려 단단한 바닥을 디뎠다. 거리가 익숙했다. 길 양옆에 서 있는 건물들도.

“···히폴리아스.”

서쪽으로 해가 내려앉는 저녁. 하늘은 불타는 석양빛으로 가득하다. 곧은 햇살을 감내하는 구름들은 길게 찢어져 수평선까지 이어졌다.

그 불타는 하늘 아래, 제국의 수도에 러셀과 유리아는 서 있었다.

그들의 곁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스쳐지나갔다. 현대적인 복장이 아니라 몇 백 년 전의 복식을 입은 사람들. 유리아는 사람들이 도망치는 곳을 쳐다봤다.

-쿠-오-오-오-오-오-!

그곳에 용이 있었다. 찬란한 금빛 비늘의 용. 거대한 뿔들이 자란 머리. 그 아래로 이어지는 길쭉하면서도 선명한 곡선을 그리는 목과 늘씬한 몸체. 몸통을 지탱하는 굳건한 다리. 가늘게 출렁이는 꼬리까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족의 모습으로, 하지만 끔찍한 대파괴를 일으키는 현장의 주인공으로서, 용은 포효했다.

“저게 이스메니오스인가 보군.”

유리아는 러셀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용의 아름다움에 홀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다 무너지는 건물들과 거기 깔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어느 아이가 돌무더기에 주저앉은 채 울고 있다. 아이의 바로 앞에 먼지에 더러워진 가느다란 팔이 돌에 깔린 채 튀어나와 있다. 간신히 아이만을 밖으로 던지고 스스로는 빠져나오지 못한 현장이었다.

곳곳에 그런 모습들이 산재했다. 무너지는 건물에 갇힌 사람들도 있었고, 서까래에 다리가 끼여 빠져나오지 못하고 손을 뻗는 자도 있었다. 도와줘! 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도우지 못했다.

곧장 뛰쳐나가려는 유리아였지만, 러셀이 팔을 잡아채는 바람에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왜요!”

“아까도 말했을 텐데. 이건 환상이야. 그것도 과거에 일어난 장면을 재현한 것에 불과하지. 당신은 저들을 구할 수 없어.”

“······.”

“이미 죽은 자들이야. 가만히 놔둬.”

유리아는 눈물을 대롱대롱 달고 그를 올려다봤다. 러셀은 여전히 무서운 눈을 하고 있었다. 마치 불타오르는 악마의 눈 같았다.

여전히 주위를 둘러보면 죽었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모두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유리아는 무서운 진실을 깨달았다. 그 누구도, 대로 위에 서 있는 러셀이나 유리아를 향해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건 결국 그들이 이 공간에서 이방인이라는 것을 뚜렷하게 알려주는 증거였다. 그녀가 아무리 지금 이곳, 이스메니오스가 파괴하고 있는 제국의 수도 히폴리아스가 환상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사람들을 구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알아챈 것을, 자신은 너무 늦게 알았다.

“···이렇게 무력하게 볼 수밖에 없다는게 싫어요.”

러셀은 그녀를 힐긋 내려다봤다가 다시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는 바꿀 수 없어. 시간은 책이 아니니까. 다시 앞장을 넘겨서 고쳐 쓸 수 없지. 우리는 현재를 걷고 있고, 미래는 계속해서 다가와 우리를 스쳐서 과거가 된다. 현재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 오직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하는 일이다.”

러셀은 집에서 동생들을 보살폈던 경험을 십분 살렸다. 전날 도시 바깥에서 제오나를 구한 것도 그렇고, 이번 생은 유독 애를 돌보는 일이 많은 것 같았다.

그녀는 러셀의 말을 듣고 주먹을 꾹, 쥐었다가 눈물을 닦아냈다. 그러고는 그를 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영롱하게 반짝거리는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좋아요. 그럼 여긴 어떻게 나가야 하는 거죠?”

“여기는 막다른 길이야. 더 이상의 길은 없어.”

“네? 그, 그럼 어떡해요?”

러셀은 대꾸하지 않고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저편의 용을 쳐다봤다. 노을 빛 아래의 용은 황금이 불타오르는 듯 한 모습으로 파괴를 자행하고 있었다.

대로의 어디선가 갑옷과 창칼로 무장한 병사들이 용에게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달려가는 자들. 생존의 욕구가 본능의 가장 우선순위에 있음에도, 다른 것을 그 위에 올려둘 수 있는 사람들이 죽음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유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저 용을 여기서 무찔러야 한다는 건 아니겠죠?”

“하하. 아니란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방금의 답은 러셀이 말한 것이 아니었다. 유리아는 그가 소리내서 웃은 걸 본 적이 없었으니까.

대로 위에 아까까지 없던 장대한 체구의 한 흑기사가 서 있었다.

어둠을 뭉쳐서 모루에 놓고 두드리면 저리 되지 않을까 싶은 흑색의 갑주. 그 뒤로 넓게 펼쳐져 펄럭이는 무늬 없는 회색의 망토.

갑주의 표면은 유리아의 것처럼 매끈하지 않다. 마치 안에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힘을 억누른 그대로 굳어버린 듯한, 삐죽삐죽 튀어나온, 괴상하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갑옷이었다.

투구는 악마의 얼굴을 형상화한 것 같다. 관자놀이쯤에서 거대하게 솟아있는 뿔도 그렇고, 흉악한 생김새의 얼굴 가리개도 그러했다.

한 손에는 갑옷과 똑같은 묵색 검신의 대검을 들고 있었다. 대검의 모양은 기이했다.

칼끝부터 검신, 십자막이, 손잡이로 이어지는 부분이 나뉘어져 있지 않았다. 마치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그 모양 그대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듯 했다.

거기다 반사광도 없어서 마치 공허의 어둠이 검의 형상으로 빛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러셀이 말했다.

“누구지?”

흑기사의 고개가 유리아에서 러셀을 향해 옮겨졌다. 그의 시선은 러셀의 불타는 자안에 닿아 있었다.

“···오래 전 그녀가 말했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볼 수 없는 것 또한 볼 수 있는 자를 위한 길을 만들라고. 그때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만들었지만···. 이제야 알 것 같군.”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러셀이 표정을 찌푸린 사이, 유리아는 멍하니 그 흑기사를 바라봤다. 그녀는 부지불식간에 한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루드비히 전하?”

루드비히는 웃었다. 얼굴이 검은 투구와 가리개에 가려져 있음에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 자랑스러운 후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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