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짙은 안개
***
“진짜 안 먹어?”
“츄릅, 아, 안 먹는다니까요!”
“입에 침이나 닦고 말하시지.”
“이거 침 아닌데요!”
“뭔데 그럼.”
에, 어, 이건, 그러니까. 러셀은 횡설수설하는 유리아를 보며 웃고는 손에 들린 고기를 다시 한 움큼 뜯었다. 입가에 기름이 묻었지만 개의치 않고, 그저 이빨 가득히 육질을 물었다.
“진짜 닭고기 맛이 나네. 거기다 쫄깃쫄깃해. 닭다리살 먹는 기분이야.”
“···꿀꺽.”
맛나게 고기를 먹는 러셀을 보며 다시 입을 헤 벌리고 침을 뚝뚝 흘리는 유리아. 강아지가 따로 없었다. 누가 지금의 그녀를 보고 제국의 고귀한 황녀, 유리아 히폴리아스 드 휘페리온을 떠올릴까.
“자.”
“엣? 으앗!”
러셀은 모닥불에서 다 구워진 고깃덩이 하나를 집어 유리아에게 던졌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잡아챘다. 마치 만화고기 같은 생김새의 거대 악어 고기였다. 아마 뒷다리 아니면 앞다리일 것이다. 그도 아니면 갈빗대거나.
“우리 밥 안 먹은 지 최소한 다섯 시간은 지났어. 먹어 둬. 조상님이나 용 앞에서 주린 배 부여잡고 있을 거 아니면.”
“으으으, 그래도 이건, 악, 악어 고긴데···.”
유리아는 떨리는 눈으로 손에 들린 것을 쳐다봤다. 십 분 전만 해도 단단한 가죽에 덮여 있던 것은 러셀의 손길 몇 번에 해체되어 야들야들한 분홍빛 속살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이제 표면에서 기름과 육즙을 뚝뚝 흘리는 고깃덩이였다.
꼬르르륵.
유리아의 뱃속에서 아우성을 치는 소리가 났다. 코앞에서 맡은 냄새는 그야말로 황홀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유리아는 이미 고기를 뜯고 있었다.
“하아아··· 웁.”
우물우물. 우물우물. 볼이 햄스터처럼 변한 황녀가 아구아구 고기를 씹어 먹었다. 러셀은 그런 유리아를 보며 피식 웃고는 자신도 다시 고기를 뜯었다.
그들은 교차점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굴러다니는 돌덩이를 의자 대용으로 앉아 있었다. 서너 시간 만에 취하는 휴식다운 휴식이었고 식사였다.
장작은 따로 필요 없었다. 러셀과 유리아 모두 마력을 매개로 불꽃을 피울 수 있을만큼 숙련된 마력 사용자였고, 장작 대용으로 쓸 만한 악어 시체나 거대 뱀 시체도 있었다.
하지만 바질리스크는 그 독성이 깃든 피 때문에 안 좋을 것 같았고, 그래서 악어 가죽과 먹지 못하는 부위들을 태워 불을 지폈다. 지금 그들은 악어를 장작으로 악어 고기를 굽는 것이다.
“감히 황녀한테 이런 식사를 대접한 걸 사람들이 알면 경을 칠 거예요.”
아구아구. 어느새 고깃덩이 하나를 해치운 유리아가 새로운 고기를 쥐었다.
“잘 먹으면서 무슨.”
“아, 아니거든요. 당신 말대로 루드비히 전하나 이스메니오스를 만날 때 배가 고프면 안 되니까, 싸울 때 방해가 되면 안 되니까! 그런 거거든요.”
퍽이나. 러셀은 옆에 수북이 쌓인 뼈 더미에 하나를 더 올려놨다. 아슬아슬하게 쌓인 뼈의 탑은 용케 균형을 잃지 않고 서 있었다.
많았던 악어 고기가 줄어들고, 만족스럽게 배를 채운 유리아는 그제야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멀쩡한 바닥은 하나도 없었다. 하나같이 다 파헤쳐지거나 뒤집어져 있었고, 부서진 돌덩이들로 가득했다.
거기다 멀지 않은 곳에 여전히 탄내를 풍기고 있는 거대한 뱀의 사체도 보였다. 바질리스크였다.
“나 저것 좀 보고 올게요.”
“뱀?”
“네.”
“그래.”
유리아는 돌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바질리스크의 시체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고기 탄 냄새는 더 심해졌다. 거기다 독성이 함유된 피도 같이 타거나 증발해버리면서 생긴 유독 가스가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유리아는 마력으로 몸을 보호한 채 가까이 다가가 시체를 살폈다.
다시 봐도 엄청난 크기다. 그녀가 위의 통로에서 싸웠던 거대 악어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황궁의 숨겨진 비밀 공간의 서재에서 많은 지식을 섭렵한 유리아는 이 정도 크기의 바실리스크라면 최소한 이백 년 이상은 나이를 먹은 개체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백 년. 까마득한 시간이다. 말이 이백 년이지 실제로는 그 이상 나이를 먹었을 수도 있었다. 바질리스크 같이 뱀의 형태를 가진 고대 용족은 허물을 벗으면서 육체의 강인함과 크기를 키운다.
허물을 벗는 주기는 처음의 탈피 이후 점점 길어지고, 나중 가면 삼, 사십 년에 한 번 꼴로 허물을 벗었다. 유리아는 손을 뻗어 그나마 멀쩡한 부분의 비늘을 짚었다. 단단했다. 거의 지금 그녀가 입은 갑주만큼이나.
거기서 옆으로 돌아가면 반으로 나뉜 채 옆으로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냄새가 더욱 심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코도 막지 않은 채 주의깊게 그 단면을 살폈다.
‘아직도 열기가 느껴져. 한 번에 뚫은 거야. 던진 자리는···.’
가까운 곳에 러셀이 서 있었으리라 짐작되는 자리가 있었다. 깊게 박힌 왼발자국과 그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갈라져나간 흔적이 보였다. 유리아는 그 자리에 섰다. 그러자 바로 앞에 바질리스크가 보였다.
‘여기서 던졌어. 움직이지 않고, 바질리스크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아까 거대 악어의 끔찍한 주둥이를 보면서도 유리아는 진저리를 쳤는데. 코앞에서 죽음이 입을 벌리고 오는 장면을, 어떻게 그리 담담하게 보고 맞대응 할 수 있었을까.
유리아는 문득 거대 뱀의 두 눈이 모두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눈이 차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빈 채 어둠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 상처가 무척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싸우자마자 눈부터 공격을 한 것일까? 아니, 불가능하다. 눈이 있는 자리를 알기 위해서는 눈을 봐야 하는데, 그럼 돌이 되지 않았겠는가.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멀지 않는 곳에 눈을 감지 못하거나 도망치지 못 한 자들이 역동적인 자세의 조각상이 되어 있는 것을 유리아는 알고 있었다. 장님이 아닌 한에야 돌이 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녀는 뒤를 돌아봤다. 악어 한 마리 반을 해치운 전사는 포만감에 젖은 채 뼈바늘로 이를 쑤시고 있었다. 전혀 석상 같지 않았다.
다시 시선을 돌려서, 정면 위를 보면 저 멀리 벽에 난 흠집이 보였다. 러셀이 던졌던 클레이모어가 박혔던 흔적이었다. 높이도 웬만한 3층 건물 이상의 것을, 러셀은 그저 발구름 한 번으로 올라서 뽑고 내려왔다.
유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모닥불로 걸어와 앉았다.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닥불의 벌건 빛에 붉게 물든 러셀이 상체를 그대로 드러낸 채 앉아 있었다.
“어떻게 석화의 저주를 피했죠?”
러셀은 눈만 돌려 유리아를 쳐다봤다.
유리아는 계속 말했다.
“방금 보고 오니까 바질리스크의 눈에 구멍이 뚫려 있더군요. 바깥에서 검을 찌르거나 벤 상처가 있는 게 아니었어요. 그랬다면 눈가 주위로 다른 상처가 있어야겠죠. 저건 마치···.”
처음 바질리스크의 눈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맴돌던 의문이 말을 할수록 정립되어 갔다. 러셀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그녀의 말을 들었다.
“마치 안에서 터져나간 것 같았어요.”
“······.”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모닥불의 불빛이 일렁이는 자안과 금안이 서로를 마주했다. 서로의 반쪽 얼굴에 주황불빛과 음영이 서린 것을 보면서, 러셀은 말했다.
“나 눈싸움 잘한다니까. 진 적이 없어.”
“······.”
“이 변명은 마음에 안 드나 보군. 그럼 다른 이유를 대지. 격산타우(隔山打牛)라는 말을 아나?”
“···어떤 매질을 사이에 두고 충격을 전달하는 기술이죠. 설마 그렇게 해서 눈을 터트렸다고요?”
“그럼 눈싸움으로 이겼다는 말을 믿겠나? 어떤 거나 난 상관없어.”
유리아는 러셀이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졸렸다. 그녀는 작게 웃고 말았다. 싸우고, 먹고, 졸리고. 이게 인생인가?
전날 어떤 빨강 머리 마녀가 했던 것과 비슷한 생각을 한 유리아는 고개를 돌려가며 무언가 기댈 것을 찾았다. 그리고 그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녀는 졸음에 취한 채 방긋방긋 웃으며 그것에 다가가 머리를 기댔다.
“뭐하냐.”
“당신 어깨가··· 머리 하나만 얹고 다니기에는 너무 넓고, 허전하고, 외로워 보여서요. ···제 머리를 더 해줬죠.”
“졸리다는 말을 꽤 고차원적으로 하시는군.”
“나도 자존심이 있으니까요···. 후아암. 조금만 이러고 있을 게요. 조금만···.”
유리아는 그렇게 스스로도 못 알아먹을 소리를 하다가 잠에 빠져들었다.
쿠울.
러셀은 아무런 조심성도 없이 잠들어버린 유리아를 기가 막힌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외간 남자 앞에서 이렇게 무방비해지다니. 그만큼 믿는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인지.
다른 마음은 지랄. 러셀은 피식 웃고는 조심스럽게 유리아의 머리를 들어 자신의 허벅지에 올렸다. 그녀는 저항하는 기색도 없이 몸을 웅크리더니 러셀의 몸에 기댔다.
타닥, 타닥. 타닥, 타닥.
모닥불은 변함없이 타오르며 불티를 위로 올려보냈다. 러셀은 그 불티들의 화려한 탄생과 죽음을 지켜보면서 무의식적으로 유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옛날 누군가의 잠든 머리를 쓰다듬었던 것처럼. 잘 있겠지.
꿈속에서의 유리아는 편안한 손길을 느꼈다. 손길은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했고,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엄마···.”
러셀은 잠꼬대를 중얼거리는 유리아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다. 은빛의 머리는 걸리는 부분 하나 없이 매끄럽게 그의 손가락 사이를 노녔다.
타닥, 타닥. 타닥, 타닥.
***
삼십 분 후.
잠에서 깬 유리아가(엄마?)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는(우아아아! 왜 당신이 여기 있어요?!) 작은 일이 있었지만(머, 머리는 왜 쓰다듬은 거예요! 착각했잖아요!), 그들은 다시 미궁 탐사를(빠, 빨리 안 가고 뭐해요! 어, 지금 웃었어? 웃었어요?!) 재개했다.
이제까지와 같이 러셀은 갈림길들 중 마나의 분포도가 적은 길을 골랐다.
나타나는 괴물들은 바질리스크와 거대 악어 이후 확연히 적어졌다. 아니, 없다고 봐도 좋았다. 기껏 만난 것들은 비척거리며 땅에 몸을 누이지 못하는 살아있는 시체들이 다였으니.
손쉽게 비척거리는 시체의 머리를 몸통에서 분리해준 유리아가 말했다.
“뭔가, 이상해요.”
“나도 그래.”
“괴물이 너무 적군요. 갈림길도 더 이상 나오지 않고···. 혹시?”
“그래. 다 온 것 같군.”
직감적으로 미궁의 끝에 다다르고 있음을 그들은 깨달았다. 그때 러셀과 유리아의 머리 위에서 어둠을 밝히던 빛이 어느 경계를 뚫지 못하고 비비적거렸다. 둘은 그 경계 앞에서 멈춰섰다.
그것은 벽처럼 서 있는 흰 안개뭉치였다. 유리아는 어처구니 없는 얼굴이 되어 말했다.
“미궁에 웬 안개죠? 아니, 이걸 안개라고 불러야 하나?”
확실히 그냥 안개라고 이름 붙이기는 힘들었다. 안개는 넓게 퍼지지 이렇게 한데 뭉치지 않으니까.
유리아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안개의 벽을 만졌다. 안개는 저항 없이 손길이 휘저은 궤적에 따라 휘말리며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손을 물리자 다시 천천히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러셀도 눈을 가늘게 떴다. 마력을 담아 쏘아보아도 안개의 안은 전혀 투시되지 않았다. 웬만한 망원경이나 엑스레이 장치보다도 월등한 성능을 갖고 있는 자신의 눈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눈’을 떴다.
유리아가 보고 놀라서 벼락을 쏘아내게 했던 원흉, 두 개의 자청빛 도깨비불이 타올랐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러셀을 올려다봤지만 저번처럼 공격하진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
러셀의 ‘눈’이 안개를 헤치고 들어갔다. 안개로 이뤄져 있는 벽을 뚫고, 그 안의 모습을 뇌리에 전달했다. 러셀은 ‘눈’을 끄지 않은 채 그대로 말했다.
“들어가자.”
“네? 이게 뭔 줄 알고요? 뭐 돌멩이라도 집어던져 봐야 되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내 손 잡아. 들어간다.”
“에? 네?”
러셀은 대꾸하지 않고 유리아의 건틀릿게 감싸인 손을 쥐었다. 그리고 곧장 안개 벽으로 들어갔다.
유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숨을 흡 참았다. 일렁이는 안개가 콧속을 들어와 폐를 가득 채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그게 긴장감 내지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러셀의 손에 잡힌 것 때문인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푸하!”
결국 숨을 참지 못한 유리아는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코끝에서 맡아진 향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