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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32화 (33/225)

32화 가라앉은 먼지 속에는

***

촤악!

유리아의 검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그 곡선에 두 마리의 악어가 목이 잘려 나뒹굴었다. 그렇게 악어 떼는 모두 죽었다.

하지만 아직 한 마리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놈은 가장 큰 놈이었다.

캬아아아!

거대 악어가 돌진해왔다. 동족의 죽음에 복수라도 하겠다는 듯 맹렬했다. 유리아는 침착하게 검을 들지 않은 손을 들었다. 빛의 입자가 모여들기 시작하고, 곧 빛의 구체가 되어 쏘아졌다.

펑!

거대 악어는 작은 크기에 비해 만만찮은 위력을 지닌 빛의 구체에 휘청거렸다. 그러나 드러난 가죽에 상처는 없었다. 거대 애벌레나 고블린, 걸어 다니는 시체들이 한 방에 터져 나간 걸 생각하면 확실히 단단한 내구도였다.

거대 악어가 괴성을 지르며 재차 다가와 커다란 입을 벌렸다. 유리아는 한 입에 삼키고도 남을 정도의 입이었다. 위아래로 빼곡한 날카로운 이빨과 붉은 혀, 그 뒤로 보이는 시커먼 목구멍이 그녀를 씹어 삼키기 위해 짓쳐왔다.

그녀는 그 끔찍한 주둥이에서 물러나지 않고, 도리어 깊숙이 들어가 장검을 위로 찔렀다. 상시 날카로움의 주문이 부여되어 있는 칼날이 무른 입천장을 뚫고 콧잔등 위로 솟아올랐다. 악어의 노란 눈알이 부릅뜨렷다.

카아아아아-!

악어는 어마어마한 고통에 반사작용으로 입을 다물었다. 악어의 치악력은 엄청나다. 단단한 뼈도 과자처럼 쉽게 바스라트릴 만큼.

유리아는 지금 그 입속에서 검을 입천장에 꽂은 채 서 있었다. 곧 위와 아래가 만나기 위한 힘이 그녀를 올리고 또 내리눌렀다.

진풍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악어는 입에 들어와 있는 인간을 씹기 위해 턱을 앙다물려 했고, 안의 유리아는 그 힘에 저항하고 있었다.

체내의 마력이 세차게 전신을 돌았다. 괴물에 비해 무르디 무른 피부와 한없이 약한 힘을 가진 인간이, 괴물과 같아지기 위해 쌓아올린 토대의 기술이 발휘됐다.

카아아아아아-!

“끄으으!”

놀랍게도, 유리아는 바로 납작해지거나 하지 않았다. 전신을 보호하는 갑옷이 숨겨진 기능을 발휘하며 그녀를 도왔다. 부족한 힘을 보완하고, 마력 순환을 도우며, 열을 발산했다.

“흡!”

유리아는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한 손을 들어 빛의 속성력을 끌어 모았다. 밖에서의 타격은 별다른 상처를 주지 못했다. 하지만 안쪽이라면?

손바닥에서 응축된 빛의 구체가 벌려져 있는 목구멍 안쪽을 강타했다. 퍼엉,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속살이 뭉개지고 피가 철철 흘렀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아픔에 거대 악어가 입을 다물던 것을 멈추고 사납게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개가 먹이를 물고 흔드는 모양새였지만 큰 덩치와 괴력이 합쳐지니 무시 못 할 박력이 있었다.

“꺄아악!”

상대적으로 가벼운 유리아는 이리저리 부평초처럼 나부꼈다. 어떻게든 검을 놓지 않으려했지만, 입천장에서 흐른 피가 검 날을 타고 손잡이까지 흘렀다. 거기다 악어의 도리질은 너무 세찼다. 결국 유리아는 손잡이를 놓치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크워어어-!

입천장에 칼이 박혀 있어 입을 다물 수 없게 된 악어가 달려들었다. 웬만한 단검만한 크기의 삐죽삐죽한 이빨들이 유리아를 갈가리 찢어버리기 위해 번뜩였다.

무기를 잃은 유리아였지만, 투지를 잃지는 않았다. 그녀는 머리 위에서 어둠을 물리치던 빛의 구체를 꺼버렸다. 삽시간에 어둠이 닥치고, 악어는 캄캄해진 시야에서 유리아를 놓쳤다.

그때 혀에 뭔가 단단한 감촉이 닿는 것과 동시에, 입천장에 박혀 있던 칼이 위의 주둥이를 두 갈래로 가르며 빠져나왔다. 무지막지한 고통에 악어가 눈을 크게 뜬 순간.

엄청난 밝기의 섬광이 천장에서 번쩍였다. 눈을 크게 뜨고 있던 악어는 순간 시력을 상실했다. 눈앞이 보이지 않고, 입이 갈라져 너덜거리는 고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악어 위로, 빛을 두른 갑옷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하아아압!”

기합성과 함께 검을 역수로 쥔 유리아가 칼끝으로 악어의 머리를 찔렀다. 얼마나 깊숙이 찔렀는지 검신이 단단한 가죽을 가르고 들어가며 십자 막이와 손잡이만 보였다.

거대 악어는 커다란 괴성과 비명이 섞인 울음을 내지르며 몸부림쳤다. 유리아는 이번에야말로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검에 마력을 주입했다.

손잡이에서 칼날을 타고 들어간 마력이 악어의 머릿속에서 폭죽처럼 터졌다. 그 충격에 악어의 두 눈과 콧구멍, 입에서 왈칵 피가 치솟았다.

악어의 몸부림이 뚝 멈췄다. 단말마가 새어나왔다.

-캬아아아···

뇌가 헤집어진 악어는 부들부들 떨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죽은 것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그제야 유리아는 참고 있던 숨을 내뱉으며 호흡을 가눴다. 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얼굴 가리개와 투구가 접혀 뒤로 넘어갔다. 위로 말려 올라갔던 은발이 출렁이며 떨어졌다.

둥둥 떠다니며 빛의 구체가 뿌리는 고운 입자를 머리와 어깨로 받으면서, 양손을 장검의 손잡이와 십자막이에 걸치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늘어트린 그녀의 모습은, 어떤 명화보다 아름다웠다.

어떤 화가도 지금의 그녀를 보면 붓을 들지 않을 수 없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지금 자신의 모습 따위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지쳐 있었다. 둘이서 싸우는 것과 혼자 싸우는 것은 생각한 것 이상의 차이가 있었다.

누군가 등을 봐주지도 않고, 사각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대신 쳐내거나 같이 공격하지도 못하는 상황.

혼자 있었던 시간은 드물다. 유리아는 황녀니까. 마찬가지로 홀로 싸우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녀는 지시를 내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고, 명령을 내리면 기꺼이 무기를 들어 적의 수급을 가져올 기사와 병사들이 넘쳐났던 것이다.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혼자 어둠을 보아야 했고, 혼자서 칼을 들어 겨눠야 했으며, 혼자서 다수의 적들을 상대해야 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심장이 요란스레 뛰고, 숨결에서는 단내가 맡아졌다. 순간의 실수, 순간의 판단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외줄타기에서 유리아는 간신히 삶을 고를 수 있었다.

그 감각이, 아직까지 피부의 바깥과 안을 떠돌며 뜨거운 열기를 자아냈다. 유리아는 지금 자신이 불타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뜨거움을 자각했다.

허나 차츰 숨이 골라지고 뜨거웠던 육체가 식으면서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지금 유리아는 혼자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저 통로의 아래에서 러셀이 바질리스크와 싸우고 있지 않은가. 언제까지 살았다는 감각에 취하고 있을 순 없었다.

꼬르르륵.

잠깐 긴장이 풀린 탓인지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유리아는 저도 모르게 아직 밟고 서 있는 악어를 쳐다봤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안 먹을 거야. 절대!

꽈아앙!

그때 공간을 뒤흔드는 굉음이 울렸다. 깜짝 놀란 유리아가 그 굉음의 진원지를 쳐다봤다.

“···러셀?”

안 그래도 거대 악어와 전투를 치르는 내내 멀리 통로의 끝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계속 울렸다. 하지만 방금의 소리는 지금까지 울렸던 어떤 소리보다도 컸다.

그녀는 다급히 악어의 머리에서 칼을 뽑은 다음 통로의 끝으로 달음박질 쳤다. 설마, 설마 죽지는 않았겠지. 죽으면 죽여 버린다고 까지 했는데, 죽지 않았을 거야.

다급한 마음만큼 빠르게 통로를 주파한 유리아는 길의 끝에서 아래를 쳐다봤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거기 있었다.

***

-너, 그락, 넌 도대체 뭐하는, 그러럭, 쿠러라라악!

눈알이 있던 자리가 텅 빈 바질리스크가 말을 잇지 못하고 피를 토했다. 붉은 색은 하나도 찾을 수 없는 검은 피가 돌바닥에 쏟아지며 치이익- 소리를 냈다. 엄청난 독성이 들어있는 듯 돌이 녹으며 부글부글 끓었다.

“나도 그게 궁금해. 도대체 내 눈에서 뭘 봤기에 다들 그렇게 벌벌 떨었던 건지.”

러셀은 클레이모어를 뽑으며 피를 토하는 바질리스크에게 다가갔다.

트드드드드드등.

그가 클레이모어의 검극을 바닥에 대고 걸었기에 섬뜩한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아무리 물어봐도 말하지 않더라고. 말하면 죽을 거라면서. 난 죽이지 않는다고 했지. 근데 내가 죽인다는 게 아니래. 그녀가 죽인다고 했지.”

트드드드드드등.

“그녀는 누구일까. 안 그래도 내 주위에는 무서운 여자가 많단 말이야. 그런데 내가 모르는 여자가 또 있다니.”

바질리스크는 러셀의 말에서 저도 모르게 아까 느꼈던 어둠을 떠올렸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뇌가 곤죽이 되가는 느낌이었지만, 이백 년을 넘게 산 용족은 무의식적으로 잊으려 애썼던 기억을 생각하고야 말았다.

검은 망토. 눌러쓴 후드와 베일에 가려져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망토 아래로 나온 팔이 하얀 색인 것만 기억했다. 너무 하얀 색이라 오히려 빛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창백한. 그리고 그 손이 다가와 순식간에 눈알을 뽑아갔다.

“말해 줄 수 있어?”

-말하면 죽어.

러셀의 목소리와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바질리스크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러셀에게 돌진했다. 눈이 사라져도 생명체를 열로 감지하는 기관은 남아 있었다.

그 기관이 보내주는 이미지대로, 바질리스크는 하얗게 불타고 있는 형상, 즉 러셀에게 입을 쩍 벌리며 달려들었다. 러셀은 1초마다 커져가는 동굴 같은 입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너도 말해주지 않는군.”

그는 자신을 삼키려드는 입을 오른쪽으로 빙글 돌며 피했다. 간발의 차로 뱀의 날카로운 이빨이 러셀을 물지 못하고 스쳐지나갔다. 러셀은 클레이모어를 들었고, 그대로 앞에서 지나가는 바질리스크의 몸통을 내리쳤다.

오랜 세월 동안 허물벗기를 반복해 강철만큼 단단해진 비늘 가죽이 러셀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쩍 갈라졌다.

크-아-아-아-아-!

뱀은 나뭇가지에 찔린 지렁이처럼 꿈틀대며 몸부림을 쳤다. 이십 미터는 넘는 거대하고도 긴 몸뚱아리가 통로의 벽과 바닥을 사납게 쳐댔다. 그럴수록 천장에서 떨어지는 먼지와 돌가루가 점차 많아졌다.

천장을 살피던 러셀의 고개가 퍼뜩 돌려졌다.

쉬아아아악!

무시무시한 속도로 바질리스크의 꼬리가 짓쳐들고 있었다. 피할 만큼의 시간도 부족했다. 러셀은 그 자리에서 곧장 대검의 검면으로 앞을 막아 충돌에 대비했다.

쾅!

바위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러셀이 날아갔다. 그들이 있는 교차점은 좁은 크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엄청 커다란 것도 아니었다. 갈림길들이 있는, 말 그대로의 교차점일 뿐이니까.

러셀은 벽에 부딪혔다. 단단한 벽은 몸의 모양대로 한 치가 넘게 들어갔다. 그는 구겨진 상태 그대로 말했다.

“시발.”

우지직, 와자작!

러셀이 박혀든 벽에서 빠져나오자 회색 돌조각이 우수수 떨어졌다. 먼지를 뒤집어 써 잿빛이 된 러셀이 침을 뱉었다.

“말해주지 않을 거면 됐다. 너도 가라.”

-카아아아아아!

바질리스크가 바닥을 미끄러지며 입을 들이밀었다. 좌우로 갈라진 혓바닥이 들리더니 그 아래의 분홍색 살구멍에서 노랗고 투명한 액체가 쏘아졌다. 러셀은 생각할 것도 없이 뛰어올랐다.

취이이이익-!

공중에 뜬 자세 그대로 몸을 돌린 러셀은 방금까지 등을 대고 있던 벽이 엄청난 속도로 녹아내리는 것을 봤다. 아까 검은 피가 바닥을 녹였던 것보다도 빨랐다. 저걸 그대로 뒤집어쓰면 바로 이승은 하직이겠군.

바질리스크는 눈 대신 열을 보는 감각으로 아직 높은 허공에서 떨어지고 있는 러셀을 발견했다. 뱀은 몸을 용수철처럼 꼬더니, 억눌렀던 힘을 해방하듯이 튀어 올랐다. 삽시간에 가까워져 오는 주둥이.

러셀은 한 손으로는 충격파를 뿜어 추진력을 얻고, 허리를 뒤틀어 힘을 얻은 다음, 반대편의 손에 들린 대검의 검면을 휘둘렀다.

쫘아악!

커다란 손뼉이 부딪친 것 같은 소리가 나고 바질리스크는 거인에게 손찌검을 맞은 것처럼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러셀도 힘의 반작용으로 반대편에 떨어졌다. 하지만 볼썽사납게 바닥을 구른 바질리스크와 달리 다리를 아래로 한 안정적인 자세로 착지했다.

그리고 둘은 다시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씨아아아아악-!

아까 러셀을 날린 꼬리가 다시 한 번 공기를 찢으며 날아들었다. 어찌나 빠른지 음속을 돌파하는 소닉붐이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러셀은 아까처럼 날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달려가는 다리를 멈추지 않고 클레이모어를 들어 마력을 불어넣었다. 대검의 칼날에 빠직거리는 벼락이 깃들었다.

촤악-!

러셀은 그대로 두꺼운 꼬리를 갈랐다. 검은 피가 쏟아졌고, 그는 독성 가득한 액체를 피하기 위해 앞으로 굴렀다. 둘이 치르는 싸움의 여파에 바닥은 크고 작은 돌덩이로 가득했다. 러셀은 우둘투둘 등에 베기는 돌 조각들의 감촉을 느끼며 벌떡 일어났다.

꼬리가 잘려나간 바질리스크가 재차 달려들었다. 그 맹목적인 모습에서 고대 용족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본능만 남은 짐승,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러셀은 일어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근접전은 피 때문에 위험했다.

어떤 갑옷도 두르지 못했기에 그의 상체는 벌거벗은 상태 그대로였고, 러셀은 자신의 육체가 저 독성을 이길 정도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리고 설사 괜찮다하더라도 산 채로 피부가 녹는 고통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러고 보면 저 피 때문에 고기도 먹을 수 없겠군. 제기랄.

러셀은 대검의 손잡이를 역수로 쥐고 들어올렸다. 마치 투창을 쏘는 창잡이처럼.

“후우우우.”

눈을 감았다. 소리가 멀어졌다. 지금 그는 완전한 고요의 상태에 있었다. 멀리서 바질리스크가 짓쳐드는 것도 보이지 않았고, 그 아래 깔린 바닥이 부서져나가며 튀겨대는 돌조각들의 소리도 듣지 않았다.

몸속에 가득 차 있는 마력이 의지에 따라 일며 사지백해를 순환했다. 퍼져나갔던 마력은 그만큼이나 다시 빠르게 모여들었다.

러셀은 오른발을 뒤로 해 바닥을 단단히 딛게 하고, 왼발을 앞으로 뻗었다. 쿵, 하고 닿은 바닥에서 솟은 힘이 발목, 무릎, 허리, 어깨, 팔꿈치, 손목에 다다랐다.

거의 같은 속도로 마력도 같은 구간을 통과하며 힘을 증폭시켰다. 오른손에 쥐어진 대검이 한계 이상의 마력을 받아들이며 부르르 떨렸다.

이제 코앞까지 다가온 바질리스크의 입이 그를 삼키기 직전.

러셀의 눈이 마력을 담아 눈꺼풀 안쪽에서 타올랐고, 대검 또한 마찬가지로 이글거렸다.

눈이 떠진 것과 젖혀졌던 팔이 움직인 것은 동시였다. 빛살이 쏘아졌다.

뻐어엉-!

막대한 힘의 여파로 공기가 출렁이며 전 방위로 밀려났다. 밀려난 안쪽의 공기와 바깥쪽의 정체된 공기가 충돌하면서 천둥 같은 굉음이 울렸다.

슈아아아아···

공기의 대류가 일어나면서 지하미궁에서 있을 수 없는 바람이 태어났다. 태어난 바람은 자신이 산맥도, 초원도, 절벽도 아닌 지하 깊숙한 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에 놀랐다.

바람은 그 놀람을 담아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그녀의 원피스에 묻은 먼지자락이 함께 팔락였다. 그리고 그 먼지를 손으로 휘저으며 한 사내가 나타났다.

바람은 자신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끔 한 사내를 휘감았다. 그 자는 먼지에 덮여 뿌예진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헌양한 외모와 형형한 자청빛 눈은 그 속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사내는 입을 열었고, 바람은 아버지가 내뱉을 첫마디를 기대하며 얼굴을 바라봤다. 아버지의 첫마디는 이러했다.

“콜록, 콜록. 어우, 시발 먼지. 담배··· 는 없군. 시발.”

바람은 황당한 얼굴이 되어 아버지를 쳐다봤다. 물론 그 말은 세상 여느 아버지가 내뱉어도 이상하지 않을 말이었지만, 그것이 이 젊은 남자의 입에서 나오니 요상했다.

하지만 바람은 더 이상 그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태양이 없는 이 지하에서는 더 이상 바람을 새로운 곳으로 이끌 만한 동력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바람은 천천히 스러졌다.

스러지면서도 바람은 우뚝 서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러셀이 말했다.

“아우, 이제야 가라앉네. 좀 적당히 할 걸 그랬나···.”

“러셀!”

그때 공간을 울리는 맑고도 청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러셀이 고개를 들자 아까 자신이 있었던 통로의 끝자락에 유리아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당황과 경악이 반반 섞인 표정으로 외쳤다.

“괜찮아요?!”

“괜찮아. 악어는?”

“잡았어요! 아니, 그것보다도! 뒤에 뭐예요, 그건?!”

뭐긴 뭐야. 러셀은 피식 웃었다.

그런 그의 뒤로 먼지가 가라앉으면서 어떤 모습이 드러났다. 그것은 완전히 좌우로 갈라진 길쭉한 무언가였다.

반으로 갈라진 단면은 까맣게 타 있었고, 거기서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바질리스크는 그렇게 바깥으로 자신의 속을 여과 없이 내보인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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