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뱀과 악어
***
그것은 어둠이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압도적인 어둠. 거리감이 멀어지고, 내가 서 있는지 앉아있는지 누워있는지 가늠되지 않는. 별 한 점 보이지 않는 우주.
그 우주 속에서, 러셀은 아주 오랜만에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도깨비불이 타올랐다. 홍채의 보랏빛 불길이 동공 바깥으로 이글거렸다. 러셀은 완전히 달라진 시야로 주위를 살피며 몸을 일으켰다.
빛이 한 점도 없기에 색깔은 보이지 않는다. 회색의 시야. 시간 속의 시간처럼 색깔을 잃은 세상과 비슷하다. 무성 영화 같다는 감상을 품으며 러셀은 지금 있는 곳이 아치형의 큼직한 통로 한가운데라는 것을 알았다.
보이는 것 중 하나는 마력의 흐름이다. 바람이 불던 불지 않던 일정한 농도로 세상을 이루는 근원들은 이 어둠 속에서도 변함없이 존재했지만, 조금 더 그 양이 적었다.
밀집은 이해가 가더라도, 확산이라. 러셀은 저 암흑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찌나 깊은지 그의 눈으로도 한 눈에 보기는 어려웟다. 그저 길고 깊을 뿐.
시선을 다시 돌리자 오래 묵은 백(魄)의 집념과 원한도 보였다. 꼭 사람의 것 뿐만 아니라 다수의 본능과 일말의 이성을 지닌, 지성체라 할 수 있는 것들의 집약체가 바닥과 벽, 천장에 붙어 꾸물거리고 있었다. 보기 좋은 외견은 아니라 묘사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피부로 느껴지는 건 축축하면서도 습한 공기다. 그렇다면 지하라는 얘기군. 거기다 귀로 들리는 작은 물소리···. 수로. 지하수로인가.
하지만 아무리 지하 수로라 해도 과한 어둠이었다. 아예 관리를 하지 않는 곳이라면 모를까. 혹은 그만큼 깊숙한 곳일 수도 있었다.
습기가 베인 공기에서는 썩은 이끼 냄새, 비릿한 물 냄새,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악취도 났다. 갓 파헤친 수백 년 된 무덤 속의 흙냄새 같았다. 예시가 그렇다는 것 뿐, 정말 그 냄새를 맡아본 건 아니지만.
“으음···.”
황녀의 신음성이 들렸다. 아직 ‘눈’을 감지 않은 러셀은 고개를 내려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놀랐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던, 마력을 불어넣어도 보이지 않던 것이 지금은 보였다. 은빛과 금빛의 실 같은 아지랑이. 그것들이 황녀의 전신에서 피어올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저건 또 뭘까.
“···어? 꺄아아악!”
그때 정신을 차린 황녀가 비명을 질렀다. 바로 머리 위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는 도깨비불을 본 것이었다. 하지만 황녀는 그저 앉아서 비명만 지르는 행동력 없는 여인도 아니었다.
“케노-카스토!”
일전에 한 번 들어본 적 있는 주문과 함께 빠직거리는 벼락이 일었다. 아직 ‘눈’을 감지 않은 러셀은 그 벼락의 근원이 황녀의 오른손 팔목에 찬 팔찌에서 나온 것을 발견했다.
저게 그 유물인가 보군. 별다른 예열과정도 필요 없이 시동어만 외치면 바로 내장된 공격 주문이 튀어나간다니. 거기다 러셀도 놀랄 만큼의 위력이 담긴 벼락 주문이었다. 얼마나 비싼 물건일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콰릉-!
팔찌에서 나온 벼락은 황녀가 뻗은 오른손을 나선처럼 휘감아 오르더니 검지 끝에서 방출되었다. 막대한 빛과 열기에 팽창된 공기가 비명을 질렀다.
미리 방향을 짐작하고 있던 러셀은 가볍게 몸만 틀어 하얀 벼락을 피해냈고, 그래서 벼락은 그를 지나쳐 통로 안쪽으로 쏘아져나갔다.
그리고 황녀는 벼락의 빛에 주변이 환해지며 통로의 윤곽과 러셀의 모습을 식별했다. 번개는 잠깐이었고 주위는 다시 어둠에 포위되었다. 황녀가 기막힌 목소리로 암흑 속을 향해 말했다.
“러, 러셀?! 거기서 뭐하는 거예요!”
“제가 통구이가 된 미래를 피했습니다. 그런 걸 함부로 사람한테 쏘시면 안 되죠, 황녀님.”
그 태연자약한 지적에는 과연 황녀라도 사과의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아, 미안해요. 순간 너무 놀라서···. 안 맞았죠?”
“제가 이미 죽었고, 황녀님이 사실 강령술사였다 라는 충격적인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면, 예. 안 맞았습니다.”
“다행이네요.”
황녀는 베시시 웃었다가 곧 얼굴을 굳혔다.
“아니, 근데 진짜 봤는데.”
“뭘 말입니까?”
“둥둥 떠다니는 도깨비불 두 개가···. 어! 지금 보인다! 세상에, 저게 뭐람. 러셀도 보여요?”
“제 눈입니다.”
“···에?”
러셀이 한 걸음 성큼 다가가자 그만큼 가까워지는 두 개의 불길에 황녀는 작은 비명을 질렀다.
“꺄아···! 뭐, 뭐예요! 무서운데 빨리 꺼줘요!”
눈빛을 촛불처럼 끌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물음은 지금 황녀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 듯 했다. 러셀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회색의 시야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다시 암흑이 채웠다. 황녀도 그나마 낮은 농도로 어둠을 물리던 도깨비불이 사라지자 당황한 기색이었다.
“어어, 다시 켜달라고 하면 무례한 거겠죠?”
러셀은 피식 웃고는 검지 끝 위로 불꽃을 피워 올렸다. 촛불 정도의 크기였지만 마력을 더 불어넣자 순식간에 횃불 정도로 커져 주위를 환히 비췄다.
“윽···.”
갑작스레 밝아진 불빛에 손으로 눈을 가린 황녀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은빛과 황금빛이 세련된 조화를 이룬 매끄러운 판금갑옷을 입고 있었고, 그렇기에 촛불의 빛에 반사되어 빛났다. 마치 자체발광을 하는 듯 했다.
차츰 빛에 적응이 된 것인지 황녀는 손을 치우고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가 어디죠?”
러셀은 처음 칼리스덴에 왔을 때 여관 식당에서 들었던 말 중 하나를 떠올렸다.
“지하수로, 아니면 지하미궁일겁니다.”
“미궁이요? 그런 게 왜 여기에···.”
“성주가 말하길, 예전에는 이곳이 용의 레어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심심풀이 삼아 만들어놓은 것일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애초에 미궁이었던 곳에 용이 자리 잡았던 것이거나.”
황녀는 생각보다 그럴 듯한 추측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추측이에요. 그렇다면 이 열쇠가 이 지하수로, 혹은 지하미궁으로 옮기게 해주는 포탈이었군요.”
황녀는 다른 손에 쥐고 있던 패를 들어올렸다. 내장되어 있던 주문의 효력을 잃은 그것은 더 이상 열쇠나 포탈이 아니었다. 그저 고풍스런 장식이 마감된 오래된 골동품일 뿐. 문득 황녀가 말했다.
“···그런데 왜 저와 러셀, 둘만 여기 있는 거죠?”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황녀님이 그 패를 마법진에 올려놓았을 때 국소적인 게이트가 열렸습니다. 본래대로라면 좌표가 고정되어 안정적으로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었어야 했겠지만, 그렇지 못 했습니다. 게이트는 황녀님을 빨아들인 후 그대로 닫힐 작정이었고, 저만 간신히 같이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게이트가···.”
“아마 삼백 년의 시간만큼의 세월이 주문을 불안정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마법사는 아니라서 확답은 못 드리겠지만.”
“아니에요. 일리가 있어요. 바보 같이, 그런 것도 짐작 못하고.”
작게 자신을 자책하던 황녀는 문득 러셀이 아직까지 피우고 있는 마력의 불꽃을 바라봤다.
“불 꺼도 돼요.”
“어둡지 않겠습니까?”
“저도 방법이 있어요.”
러셀은 군말없이 마력을 거뒀다. 두 번째로 어둠이 덮쳐왔다. 그때 황녀의 손바닥에서 빛나는 구체가 생성되며 덮치는 어둠을 잡아먹었다. 어둠 속에서 더 아름다운 하얀 빛의 구슬들이었다.
구슬들은 유성처럼 아름다운 꼬리를 그리며 어둠 속을 헤엄쳤다. 그러다 러셀과 황녀의 정수리 위에서 고정되며 빛의 입자를 뿌렸다. 팅커벨 가루 같군.
“정령입니까?”
“아뇨, 빛의 속성력이예요.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던 힘이죠.”
속성력. 특정의 원소를 마력 없이도 빚어낼 수 있는 힘이었다. 정확히는 정신력으로 마력을 결집시켜 구현하는 것이었지만, 놀라운 재능임은 확실했다.
“자, 그럼.”
러셀은 기다렸다.
“···어떻게 하죠?”
싱거운 황녀님. 러셀은 말했다.
“세 가지 방법이 있겠군요.”
“그렇게나 많이요?”
어쩐지 들떠 보이는데. 여명의 기사단원 한 명도 없이, 낯선 용병 남자(중요)와 같이 있는데도 황녀는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신나 보이기까지 했다.
“일단은 가만히 앉아서 구조를 기다리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공간을 전혀 모르고, 저 어둠 너머로 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음음. 그리고요?”
“황녀님은 황녀님이십니다.”
“···나도 알아요.”
“그만큼 다양하고도 값을 매길 수 없는 마도구들을 가지고 계시는 걸로 보이는데. 기사들과 소통할 수 있는 도구가 있지 않으십니까? 그런 게 있다면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가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러셀은 경험에 의거해서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의 아버지에게는 그런 도구가 있었으니까. 황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바로 가로저어서, 결과적으로 목이 좀 뻐근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없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나도 아까부터 시도하고 있었는데 제대로 되지 않는군요. 아마 너무 거리가 멀다거나, 아니면 다른 마력 작용이 통신을 방해하는 것 같아요.”
둘 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러셀은 이 통로에 가득 차 있는 음습한 마력들을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세 번째 밖에 없군요.”
“오, 보통 세 번째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던데.”
“이 통로의 끝으로 가는 겁니다. 황녀님을 여기로 전송시킨 마법진이 홱까닥 돌아버린 것이 아니라면 이곳에 황녀님의 조상님이 계실 겁니다. 더불어서 그 용도 있을 가능성이 높고요.”
“합리적이네요. 러셀 당신, 정말 용병 맞나요? 제가 아는 그 어떤 용병도 이렇게 논리정연하진 못 하던데. 애초에 많이 만나본 것도 아니지만요.”
“그건 저만의 독특함이라고 해두죠.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전하.”
“유리아.”
“예?”
“유리아라고 불러요. 어차피 여기는 나랑 당신 둘 밖에 없잖아요. 황녀님이니 전하니, 몇 년이나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어요. 지긋지긋해요. 그러니 이름으로 불러줘요.”
러셀은 빛 아래의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의 턱에나 간신히 정수리가 닿을 키. 빛의 움직임에 따라 흐르는 폭포수처럼 물결치는 은발. 고요한 금안. 화려한 판금갑옷과 허리의 벨트에 매인 보석으로 장식된 칼집의 장검. 러셀은 말했다.
“유리아.”
유리아는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음미하듯 러셀의 목소리를 되새겼다.
“한 번만 더요.”
“유리아.”
“한 번만 더.”
“출발하겠습니다.”
“엑! 가, 같이 가요!”
러셀은 그대로 암흑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빛에서 멀어지자마자 자연히 어둠이 그의 몸을 장막처럼 휘감기 시작해서, 유리아는 다급히 다리를 움직여 곁에 섰다.
한 번 더 부르는 게 뭐 얼마나 어렵다고! 두 번 불렀습니다. 그럼 세 번도 부를 수 있잖아요? 거기 앞에 돌. 우갹! 어, 어딜 만져요! 갑옷입니다만. 허리잖아요!
대화 소리는 암흑 속에 파묻혀갔다. 곧 완전한 침묵과 어둠이 차지했다.
***
“꺄아아아악!”
“비명만 지르지 말고, 검을 휘둘러!”
“꺄아아아악!”
유리아는 러셀의 말을 반반 실행에 옮겼다. 비명을 멈추진 않고, 검은 휘두른 것이다.
그 검의 반경에 머리를 드밀고 원형으로 난 이빨을 들이밀며 덮쳐오던 거대 벌레는 그대로 횡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머리가 잘리고 나서도 꿈틀거리며 다가오려 했고, 유리아는 다시 비명을 지르며 그것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바닥에 모인 빛의 힘이 강렬한 파동을 그리며 포탄처럼 쏘아졌다. 진짜 포탄 같이 열기나 불똥을 튀기진 않았지만, 그에 못지않은 파괴력이 담긴 공격에 벌레의 머리는 산산조각 났다.
대가로 녹색의 체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중 하나가 볼에 철썩 달라붙는 것을 느끼며 러셀은 대검을 휘둘렀다.
보통 장검보다도 길고 널찍한 클레이모어가 가로로 베자 벌레들의 허리가 양단되어 잘려나갔다.
보통 눈이 달린 놈들이라면 그 검격에 겁을 먹거나, 주춤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하 깊숙한 곳에서 사는 생물들이 그러하듯이, 이놈들 또한 눈이 없었다.
그래서 동료(서로를 그렇게 생각할진 모른다. 어쩌면 가족일지도)의 죽음에도 아랑곳 않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앞의 놈들과 똑같이 죽었다.
수로를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괴물들이 나타났다. 지하수로의 습기와 축축함을 사랑하고 음습한 마력을 먹는 거대 벌레들.
송충이 같이 피부 위로 길고 뾰족한 가시들을 둘렀지만 그 크기는 가히 사람 몸통만 했다. 게다가 마력만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어린아이 머리통도 바스라트릴 원형의 톱니 같은 이빨들도 가지고 있었다.
충분히 혐오스런 외관이었고, 유리아는 비명을 질렀으며, 러셀은 두 번 만에 존댓말을 집어치웠다.
거대 벌레들은 피부 위에 돋아난 빽빽한 가시들을 파도가 유영하는 것처럼 출렁이더니, 그대로 쏘아냈다. 러셀은 벌레 주제에 대체 왜 이런 공격 기술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담아 검을 쥐지 않은 빈손을 내밀었다.
마력이 일고, 일전 카루곤이 나타나자마자 퍼트렸던 충격파가 작은 규모로 재현되었다. 펑! 소리를 내며 공기가 밀려났고, 그에 따라 날아오던 가시들도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티티팅, 티딩! 가시들은 유리아의 갑옷에 흠집도 내지 못하고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머리에도 어느새 얼굴까지 완전히 가리는 투구를 쓰고 있었다.
러셀은 다시 대검을 쥐고 달려 나갔다. 민둥민둥해진 벌레들이 그의 칼날에 갈려나갔다.
십 분 후, 그들은 벽에 기대어 서서 휴식을 취했다. 바닥은 수십 개의 벌레들 사체 조각과 끈끈한 체액으로 뒤덮여 있어 앉을 수가 없었다.
유리아는 자신의 갑옷에 묻은 잔해들을 마력으로 태워 없앴다. 구역질나는 냄새에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러셀은 볼에 묻은 것과 대검에 묻은 끈적한 체액들을 휙 털어내며 말했다.
“벌레를 무서워합니까?”
“난 다리 여섯 개 이상 달린 것들은 다 싫어해요. 그리고 굳이 벌레를 안 무서워하는 사람도 질겁할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할 말 없군요.”
“그냥 반말해요.”
러셀이 유리아를 쳐다보자 그녀도 검을 휙 털더니 그대로 칼집에 꽂았다.
“급박한 상황인데 말끝마다 긴 어미를 붙이면 체력 낭비잖아요. 반말해요.”
“먼저 반말 하면 저도 놓지요.”
“전 그냥 이 말투가 편해요.”
러셀은 별 말 하지 않았다. 자기가 편하다는데.
“음. 그럼 혹시 먹을 거 있나?”
황녀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 없는데요.”
“나도 없어. 그리고 지금까지 아침을 건너뛰었고, 곧 있으면 점심도 그렇게 될 것 같은데. 이대로 더 있으면 그동안 먹을 생각도 안 했던 것들을 고민스런 얼굴로 봐야 할 수도 있고.”
유리아는 바닥으로 눈짓하는 러셀의 행동에 시선을 아래로 돌리진 않았다. 뭐가 있는지는 이미 아니까.
“···그냥 빨리 가자고 말하면 덧나나요?”
“언젠가 현실로 닥쳐올지 모를 경고를 한 거지.”
“조용히 해요.”
그리고 둘은 두 어 시간을 더 깊은 어둠과 괴물들 틈바구니를 헤매었다. 지하의 사악하고도 음습한 마력, 햇볕이 들지 않는 축축한 환경은 다수의 괴물들을 불러들였다.
거기다 카루곤이 조종해 모은 괴물들과, 그 괴물들과 싸워 죽은 인간들의 원념 등이 지하로 모여들면서 더 가속되었다.
하수구에서 태어나는 진흙 괴물, 원래 동굴 속에서 사는 고블린, 미궁이 품은 보물에 홀려 발을 디뎠다 비명에 죽은 여러 용병들의 걸어 다니는 시체까지.
의외로 거미는 보이지 않았다. 지하에 거미가 없다니. 러셀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유리아는 의문을 품지 않고 순수하게 기뻐했다(그건 다리가 여덟 개나 되잖아요!).
가지각색의 괴물들이 침입자를 향해 발톱과 무기를 들이밀었지만 그들은 보통 침입자들이 아니었다.
통로는 쭉 이어져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서 그들은 몇 번 쯤 갈림길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러셀은 눈으로 보다 마나의 농도가 적은 길을 골랐다. 다섯 개의 빨대 중 하나만 짧으면 그쪽으로 시선이 가지 않겠는가? 그 외에는 별달리 방향을 잡을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틈바구니를 헤친 유리아는 전신을 덮은 갑옷 덕분에 그런대로 깔끔한 모습이었지만, 러셀은 상체를 보호하는 가죽 갑옷을 구하지 못해 맨몸과 옷 그대로였다.
그렇기에 흰 셔츠는 그의 과격한 몸놀림에 이곳저곳이 찢어져 너덜거렸고, 괴물들의 피에 젖어 더러워졌다. 결국 러셀은 셔츠라기보단 걸레로 개명을 해야 할 것 같은 누더기를 벗어서 버렸다.
“와우.”
“앞을 봐.”
“우와.”
“앞 좀 보라니까.”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것보다 더한 구경거리여야 할 거에요···. 뭔데요?”
“뱀인가? 엄청 큰데. 잘 모르겠군.”
“응?”
그제야 유리아는 러셀의 근육들에서 눈을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그들은 통로의 끝에 다다라 있었다.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그 아래의 다섯 갈래로 갈라지는 교차점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천장은 높았고, 벽은 모두 단단해보이는 회색 질감의 돌벽으로 이뤄진 교차점이자 교차로. 유리아는 작은 연병장만한 교차로의 절반쯤을 홀로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것을 발견했다.
날카로운 세모꼴의 머리, 그 위에 왕관처럼 바깥쪽으로 삐죽삐죽 돋아난 날카로운 뿔.
머리 뒤로 이어지는 두꺼우면서도 짙은, 암녹색의 비늘 덮인 몸통. 몸통의 길이는 어디까지인지 짐작되지 않았다.
몇 번 똬리를 틀고 있음에 겨우 꼬리라고 할 만한 것이 보였다. 어마어마하게 길고 큰 뱀이었다. 러셀은 이무기를 떠올렸지만 유리아는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유리아는 핏기가 가신 창백해진 얼굴로 잠들어있는 그 괴물을 응시했다.
“···바질리스크에요.”
“바질리스크?”
들어본 것 같은데.
“고대의 용족 중 하나···. 절대 눈을 보면 안돼요. 저 괴물의 눈에는 생명체를 돌로 만들어버리는 석화의 저주가 담겨 있어요. 저길 봐요.”
러셀은 유리아가 가르키는 방향을 쳐다봤다. 이상한 모양의 돌 조각상들이 서 있거나 쓰러져 있었다. 모두 팔 같은 것으로 얼굴을 가리려 하다 실패한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죽은 건가?”
“알 수 없어요. 그리고 그게 더 끔찍하죠.”
유리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석화의 마안을 가진 바질리스크. 전설에나 나오는 괴물인데, 왜 이런 곳에.”
“이런 곳이니 있는 거지. 용의 레어였다고도 하지 않았나. 바질리스크 정도는 충분히 있어도 되는 곳 같은데. 아니, 없으면 이상하겠군.”
유리아는 반박할 수 없는 스스로의 입이 저주스러웠다.
“조용히 가요···. 조용히. 아무리 러셀 당신이라도 저런 괴물은 상대도 안 된단 말이야.”
“그럼 용은 되고?”
“이잇! 벌써 힘 뺄 필요 없잖아요! 잔소리 말고 가! 어느 쪽이에요?”
점점 편해지는군. 러셀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유리아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 통로는 바질리스크가 틀어막고 있었다.
그때 러셀은 그런 유리아를 내버려두고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예민한 감각이 뭔가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마력을 담은 자안이 어둠을 꿰뚫고 그들이 지나온 통로를 훑었다. 러셀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결국 싸울 수밖에 없겠어.”
“네? 무슨 소리예요?”
“악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