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게이트
***
깊은 밤, 이블린은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였다. 촛불보다 환한 달빛이 방안을 비추고 있었다. 이블린은 몇 번 일지 모를 뒤척임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의 눈에 쿨쿨 자고 있는 렉시가 보였다.
목욕탕에서 나온 러셀과 샤샤가 곧바로 방으로 올라가자 렉시는 반짝이는 눈으로 이블린을 봤다. 그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몰래 구경하러(혹은 들으러) 가자!
어어, 하는 사이에 이블린은 자신의 방, 그러니까 러셀의 방 바로 옆의 방 벽에 귀를 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그 사실에 이블린은 아쉬운지 기쁜지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머리가 벗겨진 여관 주인이 벽을 두껍게 만든 것이 아니라면 모종의 수단이 소리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은 것이다. 아마 러셀의 솜씨겠지. 그는 전사답지 않게 마력을 잘 다루니.
마찬가지로 뭔가를 듣는 데 실패한 렉시가 새로 산 칼끝으로 구멍을 내면 어떨까, 하는 헛소리를 하는 것을 말린 이블린은 어쩐지 한숨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오늘 오전만 해도 성주와의 멋들어진 아침 식사와 금화를 받은 좋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정오에는 황녀가 스스럼없이 말해준 황궁의 비밀 공간이나 삼백 년 전의 조상, 루드비히와 용 이야기를 들었고, 오후에는 사자머리 투구를 쓴 기사와 러셀의 결투도 있었다. 꽤나 인상 깊은 일들이 하루 만에 일어났는데 지금은 남녀 둘의 거사를 훔쳐듣거나 보려고 하고 있다니. 이게 인생인가.
이블린의 만류에 입술을 삐죽 내민 렉시는 재미없다는 듯 재킷을 벗더니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게 코까지 골며 잠들어버린 흑요정을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보던 이블린은 고개를 젓다가 담배 하나를 더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황녀의 마법사가 전했던 말을 떠올렸다. 대답은 나중에 듣겠으니 오늘은 이만 가도 된다는.
그 말은 온전히 러셀에게 향한 것이었고, 그래서 러셀은 미련없이 몸을 돌려 검술 길드를 빠져나갔다. 러셀의 뒤를 따르면서 이블린은 복잡한 생각에 빠졌다.
황녀의 함께 하지 않겠냐는 물음은 러셀에게 간 물음이다. 그녀와 렉시에게는 따로 요청하지도, 묻지도 않았다. 그 진실에 실망해야 하는가?
아니었다. 이블린은 마탑의 고문서에서 이 도시가 도시로 있기 전 한 용의 레어가 있던 숲이었다는 기록과, 삼백 년 전 어떤 여행자가 도시로 용이 날아들었다는 것을 보았다는 수기만 믿고 칼리스덴에 왔다.
물론 그 속사정에는 대학이 방학을 맞은 것과, 무엇이든 좋으니 교수를 놀라 자빠지게 만들 만한 마법적 결과물을 가지고 오라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과제가 있기도 했다.
그래서 남들은 제각기 본가가 위치한 영지나 집으로 돌아갔을 때 이블린은 혼자서 상행에 올라타 이 멀고 먼 북동부의 도시까지 온 것이었다.
애초에 정말 용을 발견한다거나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품지 않았다. 그저 바람을 쐬고 싶었을 뿐이다. 벌써 몇 년이 넘게 비슷비슷한 하루를 보냈으니까.
부유한 집안에서 나고 자라 도시에서만 살았던 그녀에게 상행도 처음, 길가에서 습격해오는 괴물들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강의로만 보고 배운 괴물들과 실재에는 무시 못 할 차이가 있었고 그녀는 그대로 죽을 뻔 했다.
보랏빛의 신비로운 눈을 가진 남자가 아니었다면 이블린은 그대로 머리가 쪼개져 뇌에 바람을 쐬게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만나고 끝날 줄 알았던 인연은 상행 이후 도시를 덮친 괴물들의 군대와 용족과의 전투에서 다시 이어졌다. 거기다 황녀가 나타나면서 이블린 스스로도 회의적이었던 용의 존재가 확실해졌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대로 포기하기는 싫은데. 비늘이라도 하나 가져가면 동기들이나 교수들이나 벅찬 눈으로 자신을 다시 보게 될 것은 분명했다.
세상에서 거의 자취를 감춘 용들은 아직까지 활발한 연구 대상이다. 어떻게 그렇게 강력한지, 심원한 지혜를 품게 되는지에 대한 의문은 지금까지 이어져 온 궁금증 중 하나였다.
마법사들은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성격을 가진 족속들이니 당장 칼리스덴을 향한 조사단을 꾸리려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용이 제국과 인연이 있다는 것은 마탑에게 있어서도 꽤나 껄끄러울 것이다. 뭐라 해도 인류가 이룩한 문명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의 기술과 문화가 집약된 나라니까. 범국가적인 단체로서 돌아버린 마스터들을 다수 보유한 마탑이라도 두 번은 고민해볼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미래에 일어날지 모를 모든 일들은 이블린의 입에 달려 있었다. 결국 입을 싹 닦고 모른 척 해버리면 그녀의 손에서 떠날 일이다. 황녀의 말대로라면 그 용은 곧 일어날 것이고, 그건 엘레노아 사제가 말한 것처럼 재앙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싸운다는 것은 어불성설. 마법은 본래 용의 것이니, 사제가 스승에게 덤비는 꼴일 터. 청출어람이라는 말은 아직 인류에게 일렀다···.
그녀의 이런 고민들은 밤 내내 이어졌다. 이블린은 거의 뜬 눈으로 새카맸던 하늘이 점점 진청색으로 변하는 것을 우울하게 바라봤다. 그때, 진동이 일었다.
“···뭐야?”
이블린은 누워만 있던 침대에서 일어났다. 착각인가? 아니었다. 자고 있던 렉시가 벌떡 일어나더니 외쳤다.
“지진이다-!”
드드드드드드-!
건물이 마구잡이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블린은 침대에서 내려오려다가 균형을 잃고는 뒤로 자빠졌다. 일어나려 몸부림을 쳐도 이불만 휘감길 뿐이었다.
“일어나, 이블린!”
“도와줘!”
지진의 흔들림에도 마치 평지를 걷는 듯한 움직임으로 재킷을 입고 짐을 챙긴 렉시가 이블린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들이 문을 열자마자 옆방에서도 뭔가 커다란 것이 튀어나왔다. 흰 셔츠와 바지, 대검을 등에 맨 러셀이었다. 그는 이불로 샤샤를 감싼 채 안고 있었다.
“밖으로!”
“아냐, 밖이 더 위험해! 식당으로 가서 식탁 아래로 들어가!”
러셀의 인도에 따라 그들은 식당으로 내려와 식탁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러셀만이 혼자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손바닥을 바닥에 댔다.
진원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지하를 향해 마력 파장을 투사해도 돌아오지 않았다. 무언가에 부딪쳐서 반사될 만큼의 거리도 나오지 않는다는 뜻. 무척 깊은 곳에서 일어난 진동이었다.
위에서 방문들이 덜컹덜컹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투숙객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와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꺄아악!”
샤샤가 비명을 질렀다. 새벽 중에 깬 샤샤는 옷을 입을 정신도 없이 이불에 감싸여 있었고, 그래서 팔 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괜찮아. 금방 지나갈 거야.”
패닉에 빠진 그녀를 렉시가 안아줬다. 그녀는 지진을 예전에도 겪어본 것처럼 침착했다.
선반에 올려뒀던 액자와 초가 담긴 촛잔들이 떨어져 부서졌다. 식탁에 올려져 네 다리를 위로 한 의자들도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아직 해도 뜨지 않는 새벽이었기에 식당 안은 어두웠고, 그렇기에 소리는 더 크게 들렸다. 지진은 여진으로 계속해서 이어졌다.
드드드드드······.
곧 지진은 잦아들었고, 완전히 멈췄다. 사위는 순식간에 침묵에덮였다.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이블린이었다.
“끝난, 끝난 거야?”
바닥에서 손바닥을 뗀 러셀이 답했다.
“지금 당장은 그런 것 같군.”
“지금 당장은?”
“그래. 성으로 가자. 거기도 아마 난리일 테니.”
렉시가 손수 샤샤를 안고 일어났다. 샤샤는 러셀도 아니고 흑요정에게 안기자 부끄러운 듯 말햇다.
“괘,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안에 아무것도 안 입어 놓고선. 가만히 있어.”
“···아, 알고 계셨나요?”
“그럼 그렇게 냄새를 풀풀 풍기고 다니는데 모르겠어?”
“내, 내, 냄새라니···!”
충격 받은 얼굴의 샤샤가 러셀을 돌아봤다.
“저 냄새나요?!”
“···안 나. 렉시, 장난 그만 치고 얼른 방에 데려다주고 와.”
***
대로에는 때 아닌 지진에 놀란 시민들이 나와서 놀란 가슴을 추스르고 있었다. 칼리스덴은 지진이 일어나는 판에 위치한 곳이 아니고, 시민들 대부분은 땅이 흔들린다는 것을 한 번도 경험해 본적 없었다. 소수의 늙은이들이나 용병들만이 겪어봤을 뿐이다.
시민들은 지진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자 엎드렸던 몸을 일으키고 조심스러운 발로 바닥을 디뎠다. 아까 그렇게 흔들렸던 것이 거짓말처럼 잠잠했다.
떨어진 가재도구와 창문, 잡동사니를 치우면서도 사람들은 가끔씩 불안한 눈으로 땅을 내려다봤다. 러셀과 일행들은 그런 사람들을 헤치며 성에 도착, 프레드릭 성주와 알베르트, 엘레노아를 만날 수 있었다.
성주 또한 자다가 굴렀는지 제멋대로 뻗친 머리카락과 흐트러진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알베르트는 요정답게 말끔한 모습이었고 그건 엘레노아도 마찬가지였다. 성주가 말했다.
“왔군. 황녀에게······.”
“전하.”
“에잇, 빌어먹을. 그래, 황녀 전하! 됐나?”
“됐습니다. 가시지요.”
“괴물들의 군대에 용족, 황녀에 이어 지진이라니. 다 져가는 해가 막바지에 기승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참나.”
그들은 바로 황녀에게 향했다. 여섯 명은 황녀가 머무는 별채에 도착했다. 황녀 또한 깨어있었지만 성주보다는 나은 모습으로 그들을 들였다. 한 명이 빠진 다섯 명의 여명의 기사단들 역시 황녀의 뒤에서 대기 중이었다.
이야기는 곧장 시작됐다.
“이스메니오스가 깨어나는 것입니다. 이 지진은 그로 인한 반동이고요. 이젠 제 말을 믿어주시겠지요, 성주님?”
“이 상황에서도 납득하지 못 한다면 바보겠지요, 전하. 안 그래도 가져왔습니다. 알베르트가 수고해주었지요.”
알베르트는 품속에서 팔각형의 패를 하나 꺼냈다. 광휘의 신을 상징하는 문양이 뒷면에 음각되어 있고, 앞면에는 검과 용이 양각 되어있는 패였다. 그 패를 알아본 황녀가 신음성을 흘렸다.
“황가의 증명패······. 삼백 년 전의 외양이군요.”
프레드릭 성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조상님이 대대로 물려주셨던 것이지요. 어느 대에 이르러서부터는 그 이유와 효능도 짐작하기 어렵게 변했지만, 다행히 알베르트가 찾아내었습니다.”
“그게 뭔데? ···요?”
렉시의 질문은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성주는 한 손으로 턱에 난 짧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주 오래 전, 내 조상님이 한 기사에게 부탁과 함께 받은 것이지. 정확한 기록은 워낙 낡고 훼손되어서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그자는 엄청난 재물과 함께 그 패를 주면서 언젠가 찾으러 오는 자에게 돌려주라는 말을 남겼더군.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고, 조상님은 그렇게 하셨지. 그리고 난 어제 황녀 전하께 그 기사가 삼백 년 전의 황족, 루드비히 전하라는 말을 들었다네.”
알베르트는 그 팔각형 패를 황녀에게 건넸다. 모두가 조용한 눈빛으로 지켜봤지만, 패는 황녀의 손바닥 위에 조용히 올려졌을 뿐 빛이나 진동을 내진 않았다.
그때 황녀가 허리춤 어디선가 단검을 하나 뽑아들었다. 사람들의 눈이 커졌지만 여명 기사단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말릴 사이도 없이, 황녀는 자기 손바닥을 단검으로 그었다.
매끄럽게 베인 상처에서 피가 솟았고, 그녀는 패 위에 핏방울을 떨어트렸다. 핏방울은 그 안으로 스며들었다. 황녀는 뭘 확인한 건지 고개를 끄덕였다.
“열쇠군요. 열쇠가 있다면 그 짝도 있을 터. 이 열쇠가 안내해줄 겁니다. 일어나세요.”
엘레노아에게 치료를 맡긴 후 일행은 모두 별채에서 나왔다.
새벽은 이제 물러갔다. 동쪽에서 튼 해가 막 일주를 시작하고 있었다. 황녀는 나침반처럼 든 패를 들고 이곳저곳을 가리키다가 그 중 한 곳을 잡고 걸어갔다. 그 뒤를 일행들이 따랐다.
곧 그들이 들어선 곳은 성 뒤편의 작은 숲이라 할 만한 장소였다.
성주가 이 숲 또한 조상 때부터 대대로 훼손시키지 말고 지키라는 말이 내려온 장소라 말하는 것을 들으며, 일행은 숲 어느 한 복판에서 멈춰 섰다. 우거진 나무들이 공터 한 가운데를 비우고 비켜서 있었다.
“여기서 반응이 멈추는군요. 이 장소 같습니다.”
그리고 황녀의 말에 대답하듯 공터 한복판이 파파팟 소리를 내며 회오리쳤다.
재빠른 속도로 여명의 기사들이 황녀를 보호했다. 하지만 공격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오래된 마법이, 주문이, 맞춰지지 않았던 하나의 퍼즐이 맞춰짐으로써 그 약속된 소임을 다하는 것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삼백 년의 세월 동안 쌓이고, 썩고, 다시 쌓인 나뭇잎들이 부엽토가 되어서 흩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쌓이기 시작한 나뭇잎들이 같이 휘날렸다.
단장을 시작한 나뭇잎들은 빨간 색, 주홍색, 노란색이었다. 이따금씩 초록물을 미처 벗지 못한 은행잎이 수줍은 얼굴로 같이 날아올랐다. 눈이 보이는 곳 모두가 낙엽이었고,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위로 치솟았다. 바람의 노래 소리가 들린다.
휘로로로. 휘로로로로.
얼마 지나지 않아 회오리는 멈췄다. 그리고 비행했던 모든 것들은 추락했다. 나뭇잎은 다시 낙엽이 되어 온갖 곳으로 빙글빙글 돌며 떨어졌다. 그리고 가장 작고 가벼웠기에 가장 높이 떠올랐던 마지막 한 잎이 살랑거리며 멋지게 떨어지고 있었다.
눈에 띄게 빨간 단풍잎. 푸른 하늘, 우거진 나뭇가지, 사람들, 이미 떨어진 낙엽의 시선을 받으며 마지막 단풍잎이 살포시 바닥에 내려앉았다.
드러난 것은 하나의 마법진이었다. 이블린은 그 진을 이루고 있는 룬어를 알아봤다. 다만 엘레노아가 먼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간이동의 진입니다.”
잠깐 멍하니 서 있던 황녀는 조금 늦게 대답했다.
“···루드비히 전하가 계신 곳과 연결되는 진이겠군요.”
“혹은 바로 용과 맞닥뜨릴 수도 있겠지요.”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믿고 싶지만··· 모르겠군요. 조상께서 후손에게 얼마나 많은 기대를 걸고 계셨을지는.”
일행은 갑작스레 다가온 침묵에 당황하면서도 누구 하나 입을 열어 그 침묵을 깨트리진 않았다. 바로 앞에 삼백 년전의 전설이 있는 것이다. 정확히는 그 전설과 만나게 해주는 문 같은 것이지만. 황녀가 가장 먼저 침묵을 깨트렸다.
“러셀.”
러셀은 그 물음에 황녀를 보았다.
“오늘 난 답을 듣겠다고 했습니다. 간밤은 그리 길지 못했지만, 고민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겠지요. 받아들이겠습니까?”
“저는 어제 황녀의 기사님을 죽였습니다만. 제안은 여전히 유효한 겁니까?”
황녀는 고개를 저었다.
“어제도 말했다시피, 그건 제 부하 기사가 먼저 잘못한 것이었으니까요. 결투의 규칙은 누구도 깨트려선 안 되는 신성한 것입니다. 먼저 깨트린 자는 죽어도 할 말이 없는 법. 러셀 당신은 할 일을 한 것입니다.”
의외로 터프하시군. 러셀은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안을 받지요.”
오히려 황녀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금안을 끔벅거렸다. 해맑은 황금이 눈꺼풀에 덮였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보며 러셀은 미소를 지었다.
“용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그 전사다우면 전사답고, 바보 같다면 바보 같은 대답에 황녀는 픽 웃었다.
“근래 들어본 말 중에 가장 기분 좋은 말이군요. 나도 용을 본 적은 없으니 피장파장으로 치죠. 좋아요, 그럼 이 열쇠를 작동시켜볼까요.”
황녀는 팔각형의 패를 가지고 마법진의 가운데에 섰다. 그리고 패를 조심스럽게 놓은 그 순간을 인식한 것은 러셀 밖에 없었다.
삼백 년의 세월 동안 톱니바퀴 하나가 빠진 채 자리하던 마법진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을 황녀는 미처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저 조상과 용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러셀의 대답을 들어 들뜬 마음뿐이었다.
그렇기에 패이자 열쇠인 것이 바닥에 닿자마자 갑작스레 터진 하얀 빛무리에 대응할 수 없었다. 하얀 빛은 마법진 전체에서 빛나고 있었고, 열쇠는 공중에 떠올랐다. 그리고 허공에 불안정한 게이트 속으로 황녀는 폭풍에 빨려 들어가는 모든 것처럼 휘말려 들어갔다.
찰나 같은 순간을 인식한 러셀이 자안을 번쩍이면서 시간 속의 시간을 달렸다. 모든 것이 제 색깔을 잃고 흑백으로 보이는 세계. 그 멈춘 것 같이 보이는 시간을 러셀은 달렸다.
앞으로 쭉 뻗은 손이 황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하지만 이미 황녀의 몸 절반 이상은 게이트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고, 동시에 게이트는 닫히고 있었다.
이대로 잡아끌다가는 황녀는 둘로 나뉘게 될 것이고, 그 끝은 러셀과 황녀 둘 모두에게 썩 좋은 결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러셀은 황녀를 끌어당기기보다 오히려 밀어 넣었다.
푸확-!
황녀가 완전히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고, 러셀도 간발의 차로 막 닫히기 시작한 게이트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한 순간에 열렸다가 닫힌 게이트의 충격파로 떨어졌던 낙엽들이 바깥으로 확 밀려났다.
다시금 쏟아지는 낙엽을 머리로 맞으며 프레드릭 성주와 알베르트, 여명의 기사들, 엘레노아와 이블린, 렉시는 멍하니 러셀과 황녀가 사라진 곳을 응시했다.
휘오오오오.
한 줄기 바람이 바닥을 쓸고 지나갔다. 마법진은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