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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28화 (29/225)

28화 징조

렉시는 환한 얼굴이 되어 알리샤를 껴안았다. 그녀의 땀이나 젖은 옷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알리샤는 어리둥절하면서도 마찬가지로 밝은 표정으로 렉시를 마주 안았다.

“이게 얼마만이야? 응? 네가 갑자기 인간 도시에 가겠다고 말했던 게 벌써, 음. 사십······ 우븝.”

“하하, 언니 성격은 여전하네. 나도 만나서 반가워. 어?”

그녀는 렉시를 보다가, 뒤에 서 있는 러셀도 발견했다.

“내 칼 사 준 고마운 사람도 왔네요? 무슨 일이예요?”

“그 흑요정한테 술 얻어먹기로 해서.”

“예에?”

불친절한 러셀의 답은 알리샤를 퍽 당황스럽게 만들었고, 그래서 렉시의 입을 막고 있던 손에 힘이 빠지게 되었다.

“요게! 이제는 언니 입도 막 틀어막는다 이거지? 예절 교육을 다시 시켜줘야겠군, 야뱌뱌뱌뱝!”

“으헷, 어, 언니, 아하하하핫! 그만 간지럽혀! 나 완전 땀범벅, 으헤헤헷!”

렉시가 요상한 기합성을 내지르면서 알리샤의 겨드랑이와 옆구리를 간지럽히자 알리샤는 숨넘어가는 웃음소리를 내며 몸부림쳤다. 하지만 아무리 대장간 일로 단련된 알리샤라도 괴물들을 직접 베어 넘기며 도시로 찾아온 렉시를 힘으로 이기는 건 어려웠다.

“여기냐? 여기가 약점이렷다!”

“그만, 그만! 으헤헷, 그만 해애!”

말이야 어찌되었든, 두 미인이 서로의 몸을 더듬는 것은 퍽 음란하게 보였다. 그것도 귀가 길쭉하면서 피부 색은 묘하게 차이가 나는 흑요정 둘에다가, 한 명은 땀에 흠뻑 젖은 모습이라면 말이다.

러셀은 말없이 담배를 태우며 그 장난스러우면서도 음란한 간지럽힘을 감상했다. 그리고 할까 말까 망설였던 결심을 굳혔다.

오늘은 목욕을 해야겠군.

***

렉시의 괴롭힘을 빙자한 간지럽히기는 한참이 지나서야 끝났고, 알리샤는 녹초가 된 얼굴로 쓰러져서 헐떡거렸다.

난쟁이, 필리 아줌마는 그런 알리샤를 내버려두고 러셀과 렉시에게 큼직한 나무잔을 건넸다. 저번에 러셀도 마셨던 차가운 맥주가 찰랑이고 있었다. 렉시는 그 큰 나무잔을 두 손으로 받고 고개를 갸웃했다.

“차갑네? 이게 뭐예요?”

“마시면 알아.”

얼음물같이 차가운 맥주를 마신 렉시의 오옷-! 시원해-! 하는 소리를 들으며 필리 아줌마가 물었다.

“이틀 만에 다시 왔구만? 갑옷은 어따가 팔아먹고 왔어?”

“팔진 않았고, 고치려고 왔습니다. 시간 괜찮으십니까?”

“그럼. 성주가 어젯밤에 전시 상황을 거뒀거든. 이제 다른 용병들이나 여행자들 무구들도 봐줄 수 있지. 그 너덜너덜한 게 갑옷인가?”

필리 아줌마는 러셀이 건넨 흉갑을 받아들었다. 명치 부분부터 완전히 반으로 갈라진 그것은 뒤로 이어진 가죽 끈과 사슬에 간신히 원형이 어땠는지만 보여주고 있었다.

필리 아줌마는 두툼한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쯧, 하고 혀를 찼다.

“안돼, 이거. 안쪽의 덧개부터 다 끊어졌어. 고쳐도 헐거워지고, 제대로 된 방어력도 기대하기 힘들어. 손질도 복잡해질거고. 차라리 하나 새로 사는 게 나아 보이는데.”

“그런가요.”

하긴, 카루곤의 지팡이 창에 그어지고 났을 때부터 너덜거렸던 것이다. 그것이 이번에 라이오스와의 결투에서 아작이 나버렸고. 새끼, 그냥 놔둘 걸 그랬나.

하지만 러셀은 죽이면 죽였지 사람을 백치 상태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남이 떠먹여주는 밥만 삼키며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며 사는 모습은, 사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괴로운 일일 테니까.

“큼, 저도 한 번 봐도 돼요?”

간신히 간지럽힘의 여운에서 벗어난 알리샤가 등 뒤로 말린 옷을 펴며 다가왔다. 옷을 갈아입은 듯 했다. 필리 아줌마가 내민 흉갑을 살피던 알리샤가 말했다.

“흠, 처음에는 길쭉한 창날 같은 것에 베였고, 그 다음은 칼에 잘려 나간 거군요.”

러셀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필리 아줌마는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보는구나. 창날에서는 다급함이 느껴지고, 칼날에서는 결기가 느껴지던데. 이 지경이 돼서 온 거면 상대들도 만만치 않았겠어?”

“하나는 용족이었고, 다른 하나는 황녀의 기사였습니다.”

“뭐야?”

“용족이요?”

러셀의 답에 흑요정과 난쟁이가 경악했다. 그래서 그는 간략하게 어제 겪었던 전장을 설명해줬고, 둘은 감탄의 눈길로 러셀을 쳐다봤다.

“허, 참. 대단한 손님이 왔었구만. 잠깐, 그러면 시장에서 도는 벼락의 대전사니, 천공의 사자니 하는 게 자네인가 보구만?”

“와. 그런데 얘기들이 워낙 허무맹랑하던데요. 무슨 벼락을 휘감았다더니, 검을 휘두를 때마다 천둥이 울렸다느니.”

러셀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것도 있고 해서 칼의 수리를 맡기려고 왔습니다. 이가 좀 빠져서요.”

“어디, 칼 줘 봐요. 봐줄게요.”

러셀은 순순히 벨트를 풀어 클레이모어를 건넸다. 칼집에서 꺼낸 대검을 꼼꼼히 보던 알리샤가 다시금 감탄이 새겨진 얼굴을 들었다.

“정말이네요. 이틀 만에 이런 흔적들이 새겨질 정도라니. 러셀 당신, 생각보다 더 대단한 전사였군요. 어디서 왔는지 물어본다면 실례일까요?”

러셀은 이 예의바른 흑요정의 질문에 슬쩍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북쪽에서 왔습니다. 여행 중이지요.”

“그냥 여행인가요? 모험이 아니라?”

“예. 그냥 여행입니다.”

알리샤는 눈앞의 남자를 눈여겨보았다. 고향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지 않고, 보물과 명예를 좆는 모험가도 아니며 주군을 찾아 해매는 방랑기사도 아닌 자. 고생을 하고 자라지 않았으리라 짐작되는 하얀 얼굴과 두 개의 자청빛 수정을 닮은 눈.

알리샤가 클레이모어를 필리 아줌마에게 건넸다.

“아줌마, 칼날 좀 갈아줘요. 보니까 이가 군데군데 빠져있더라고요. 한 번 달궜다가 뭉개야 할 수도 있어요.”

“음, 해보마.”

필리 아줌마가 대검을 들고 안쪽의 화로로 들어갔다. 알리샤가 말했다.

“갑옷은 밖에 전시된 것 중에 봐볼게요. 크기가 맞는 게 있을지 모르겠네요. 혹시 제작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치수 좀 한 번 재봐도 될까요?”

러셀이 양 팔을 벌리자 바지의 멜빵 주머니에서 줄자를 꺼낸 알리샤가 성큼 다가섰다. 곧 갈색 피부의 흑요정이 그를 껴안 듯이 팔을 뒤로 뻗어 등에서부터 가슴 중앙까지 치수를 쟀다.

화로에서 뚱땅거리며 망치를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필리 아줌마가 이가 나간 부분을 뭉개는 소리였다.

어쩐지 말을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알리샤는 치수를 재면서 굳이 이런저런 말을 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러셀도 입을 열지 않았다.

코 바로 아래의 흑요정에게서는 땀과 채취가 섞인, 약간 시큼하면서도 달큰한 냄새가 났다. 가슴과 등을 끝낸 다음, 어깨와 그 아래의 삼두, 이두로 이어지는 팔 둘레를 재던 알리샤가 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던 건데, 키가 무척 크시네요. 근육도 울퉁불퉁하시고.”

러셀은 침묵했다. 뭐라 말하기 곤란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고맙다고 말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연신 오옷, 오오옷, 하는 소리를 내며 맥주를 홀짝이던 렉시가 둘을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봤다.

“뭐해, 둘이?”

“치수 재잖아.”

“거기 아까 잰 곳 아냐?”

“그런가?”

헛기침을 하며 알리샤가 물러났다. 어째선지 아까 렉시에게 간지럽힘을 당했을 때처럼 볼에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그녀는 아우, 왜 덥지? 하며 손부채질을 해댔다. 그러고는 다시 맬빵 주머니에서 수첩과 연필을 꺼내 러셀의 치수를 적었다.

“그럼 한 번 밖의 흉갑들 좀 봐볼까요. 견갑은 필요없나요?”

“있으면 좋겠지요,”

아쉽게도 둘 다 마땅한 것이 없었다. 모두 러셀에게는 너무 작았던 것이다. 그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에 실망하지 않았다. 원래 입었던 것들도 집에서 떠나기 전 수제 제작이었기에 그랬다. 알리샤가 어깨를 으쓱였다.

“없네요. 주문하겠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값은 이걸로 대신하죠.”

알리샤는 러셀이 내보인 성주의 훈장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성주가 이걸 내줬어요?”

“주더군요. 금화 더미와 함께.”

“정말, 러셀 씨가 엄청 인상적이었나 보네요. 저도 공방 승인 받을 때 이런 게 있다- 라고만 들었지 진짜로 볼 줄은 몰랐는데. 돈 굳었네요?”

공짜는 언제나 옳다. 그것이 내 돈이 아니라면 더더욱. 러셀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넣어둬요. 일회용 아니니까. 아마 따로 반납하거나 성주가 회수하겠다고 하지 않으면 계속 쓸 수 있을 거예요. 언니? 언니는 뭐가 필요해?”

뒤에 따라와서 같이 구경하던 렉시가 베시시 웃었다. 그녀는 갑자기 팔을 벌리더니 알리샤를 꼬옥 껴안았다.

“나아? 난 우리 동생만 있으면 괜찮은데에.”

“···언니가 술이 약하다는 걸 깜박했네요.”

러셀은 렉시가 어제 전투에서 외날 도 두 자루를 부러트렸다고 얘기해줬고, 알리샤는 겨우 렉시를 떼어놓은 다음 모양이 똑같은 칼 두 자루를 가져왔다. 러셀의 클레이모어와 마찬가지로 검신과 검막이 이어지는 부분에 세계수의 문양이 양각으로 찍혀져 있었다.

렉시가 만세를 불렀다.

“와아! 그 칼 나 주는 거야?”

“언니는 돈 내야지! 금화 두 개!”

“뭐어?! 왜? 루시한테는 돈 안 받았잖아!”

“···설마 러셀 씨를 루시라고 부르는 거야?”

알리샤는 러셀을 쳐다봤고, 러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담긴 작은 체념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쨌든 안 돼. 금화 두 개야.”

알리샤는 렉시가 아무리 배신감 어린 표정과 애원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이면에는 아마 아까 간지럽힘에 대한 복수도 조금은 담겨있는 것 같았다.

결국 렉시는 콧물을 훌쩍이며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 줄 수밖에 없었다. 알리샤는 잽싸게 금화를 낚아챘고, 렉시는 조용히 주머니 입구를 닫아 품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훌쩍. 알리샤가 속물이 됐어···.”

“언니가 상식이 없는 거거든.”

울상을 지은 렉시와 득의만만한 알리샤는 여느 자매와 다를 게 없어보였다.

하지만 울상도 잠시, 렉시는 의자에 앉아서 두 자루의 칼을 살펴보며 바보 같이 히죽 웃음을 흘렸다. 러셀도 그 장검보다는 조금 짧고, 중검보다는 길면서 폭도 웬만큼 넓은 칼을 구경했다. 알리샤가 말했다.

“안 그래도 며칠 전 부터 쌍둥이 검을 만들고 싶었었거든요. 만들면서 언니 생각도 했는데, 결국 이렇게 언니가 찾아온 걸 보면 세계수께서 지켜봐주시기라도 한 것 같네요.”

“후아아아! 내 생각 해준 거야아?”

“아우, 좀! 달라붙지 좀 마, 언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알리샤는 적극적으로 렉시를 떼어놓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러셀은 팔짱을 끼고 두 흑요정을 관찰했다.

외모에서 유사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비슷한 점이야 뾰족한 귀뿐, 머리카락색이나 피부색 모두 다르다. 눈동자야 빨갛지만, 그것도 알리샤는 짙은 진홍색이라면 렉시는 핏빛처럼 맑게 붉은 색이었다. 자매라고는 하지만 부모 중 누구 하나는 다른 것일까.

생각을 이어가던 러셀은 피식 웃었다. 흔치않은 흑요정이 서로를 언니 동생 하는 것을 보니 추리병이라도 도셨나.

얼마 안 있어 필리 아줌마도 러셀의 클레이모어를 가지고 돌아왔다. 한 손에 대검을 든 필리 아줌마가 알리샤에게 말했다.

“계산은 했니, 알리샤?”

알리샤가 대답했다.

“언니한테는 받았고, 러셀 씨는 성주의 훈장이 있더라고요. 나중에 따로 계산서를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 거 참, 자네 정말 어지간했나 보구만. 그 짠돌이 성주가 이렇게 신경써주는 걸 보면.”

난쟁이의 감탄은 그 종족에 걸맞게 짧고 굵게 끝났다. 필리 아줌마가 러셀에게 클레이모어가 든 칼집을 내밀었다.

“자! 여기 있네. 알리샤보다야 못 할테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수리했어. 난쟁이의 모루와 망치를 걸고 말하는 거니 믿어도 좋아.”

“무슨 말이에요, 필리 아줌마. 저도 이제 가르칠 게 없다니까요?”

러셀은 서로에게 하는 금칠 어린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대검을 뽑았다. 스르릉, 소리를 내며 빠져나온 클레이모어의 검신은 처음 받았을 때처럼 매끈했다. 칼날은 이 빠진 곳 없이 곧았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소문만 들어보면 자네 혼자 이 도시를 구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라서 다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네한테 고마워하는 시민들은 많았어. 그러니 감사는 필요없네.”

러셀과 렉시는 대장간을 나섰다. 알리샤는 그들이 어디 여관에 묵고 있는지 묻고는(란쉬무어의 바람이라고요? 흐응, 러셀 씨 답네요) 나중에 찾아갈 수 있다면 찾아가겠다고 했다.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는 듣지 못했다.

해는 이제 저물고 있었다. 빨간 색과 주홍색의 빛이 서쪽 하늘 저편에서 비췄다. 햇빛을 가로막은 구름들은 붉게 물든 갈가리 찢긴 구름들이 고즈넉하게 하늘을 비행했다. 어린 아이가 색종이를 잘게 찢어서 푸른 웅덩이 위에 놓은 것 같았다.

하늘 아래의 대로에는 저녁 장사를 시작한 식당들과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여관 종업원들의 호객 소리로 시끌시끌했다. 그만큼 많은 여행객들, 모험가들, 용병들이 시민 사이에 섞여서 걷고 있었다.

러셀은 헐거워졌던 벨트도 잘 조여진 것을 느끼며 걸었다. 단단하게 메인 클레이모어가 존재감을 과시했고, 사람들은 그 커다란 덩치와 대검에 압도된 표정으로 러셀의 앞에서 비켜섰다.

러셀이 큰 키와 대검으로 사람들을 물렸다면 렉시는 품에 끌어안은 두 자루의 칼을 내려다보며 가끔씩 짓는 미소로 행인들을 비켜 지나가게 했다.

미인에다 흑요정이었지만, 아무리 아름다워도 시퍼런 칼을 들고 헤죽 웃음을 짓는 여자 앞에서 표정이 떨리지 않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대로를 오가는 행인들의 중간을, 마치 파도를 가르는 범선처럼 가르며 러셀과 렉시는 길을 걸었다.

그들이 여관 식당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종업원들의 인사가 들렸다. 어서 옵쇼-! 하는 인사들 사이, 러셀님! 하는 외침이 함께 울렸다. 샤샤였다.

그녀는 뒷마당에서 금광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어도 이렇게 밝을까 싶은 표정으로 달려왔다. 뒤에서 삼촌인 여관 주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이 보였다. 러셀은 조금 얼굴이 붉어졌다.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일행 분은 벌써 오셨는데?”

러셀은 샤샤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벽난로가 붙어있는 어제와 똑같은 자리. 그곳에 이블린이 담배를 피우며 연기를 뻐끔거리고 있었다. 그녀도 러셀과 렉시를 발견하더니 한 손을 들었다. 샤샤가 조마조마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주문하시겠어요?”

“식사 6인분, 그 중 3인분은 한 접시에 담아서. 맥주 3잔도 같이.”

“네. 그리고요?”

러셀은 멀뚱히 서서 자리로 가지 않는 렉시에게 눈길을 주었다. 렉시는 멀뚱한 시선으로 받아쳤다. 러셀은 한숨을 쉬었다.

“목욕은 나중에. 밥 다 먹고.”

“에헴, 큼. 아,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할게요!”

얼굴이 빨개진 샤샤가 주방으로 달려갔다. 렉시는 그 예쁘장한 얼굴에 참 어울리지 않는, 다 알고 있단다- 하는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아저씨 같은 얼굴이 되어서 히죽거렸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가늠이 안 되는 용모의 종족이란 이토록 피곤한 것이었던가.

식사가 끝나고, 러셀은 일찍 일어났다. 이블린이 벌써 자느냐고 물으려는 것을 옆의 렉시가 제지하더니, 뭔가를 속닥거렸다. 그러자 이블린의 얼굴도 펑 하고 빨개졌다. 그래, 다 말하고 다녀라.

***

늦은 밤. 창문을 타고 들어온 푸른 달빛이 침대를 비췄다.

침대에는 두 명의 남녀가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아무것도 걸쳐져 있지 않은 어깨에 달빛이 반사되며 눈부신 하얀 빛을 빚어냈다. 샤샤는 그 달빛이 무섭다는 듯 러셀의 품에 파고 들었다.

문득 그녀가 살며시 입술을 벌렸다.

“러셀님.”

러셀은 말하지 않는 대신 다만 샤샤의 귓바퀴를 만져주는 것으로 답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또 귀에 닿는 그의 손길이 너무나도 달콤해서, 샤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다시 말했다.

“저도··· 갈 수 있을까요?”

주어는 들어 있지만 목적어는 없다. 하지만 왜인지 러셀은 알 것 같았다. 그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귓바퀴만을 계속 쓰다듬었다.

돌아오지 않는 대꾸에 샤샤는 고개를 올렸고, 거기서 러셀의 반짝이는 두 눈을 발견했다. 그녀의 초점이 맹하게 흐려지고, 고개가 지탱할 힘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까무룩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고른 숨소리가 나직하게 방안을 채웠다.

“······후.”

샤샤를 재운 러셀이 가벼운 숨을 내뱉었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마안까지 동원한 그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창틀을 타고 넘어온 달빛은 낮과는 다른 은빛의 사각형으로 천장의 나뭇결을 비췄다.

그의 경이적인 시야는 은빛이 닿는 나뭇결의 굽이치는 모양, 삭은 흔적, 세월에 의해 풍화된 것까지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나가 그렇듯이, 사람의 미래까지는 볼 수 없었다.

도시의 바깥은 험한 곳이다. 가녀린 여자는 물론이고 자신감 넘치는 노련한 용병마저 한 순간에 목이 달아나버리는 위험으로 가득하다. 평원의 지하에서 꿈틀거리는 것들이나 숲속의 나무 사이에서 번뜩이는 이빨들도 그렇지만, 정말 무서운 것은 같은 사람이었다.

산적, 도적, 강도 떼 같은 직접적인 부류는 알아보기라도 쉽다.허나 친절과 배려를 가장하고 다가오는 놈들은 또 어떨 것인가. 놈들은 집요하면서도 날카롭게 빈틈을 찾아내고, 독과 함정을 쓰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여관의 여급에게 그런 것들은 벅차다.

···라는 긴 이유를 러셀은 설명하지 않았다. 그가 동생들에게 겨울마다 선물을 주고 떠나는 산타클로스에 대한 전설을 믿게 해주고, 몰래 그들의 침대 맡에 선물을 놓았던 것처럼.

대다수의 경우, 거짓은 진실보다 포근한 법이다.

***

새벽녘이었다. 동은 아직 트지 않았고, 하늘은 무섭도록 파란 색깔로 물들어 있었다. 러셀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내가 왜 일어났지?

그 답은 방을, 아니 건물 전체를 흔드는 진동이 되어 찾아왔다.

드드드드드-!

칼리스덴에 지진이 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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