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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27화 (28/225)

27화 언니와 여동생

“어, 뭐? 어어어···.”

되묻던 라이오스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리고 그 사자머리 투구에 주먹이 내리꽂혔다.

빠악!

라이오스는 검을 놓치고 뒤로 날아갔다. 러셀은 왼팔을 벌려 잡고 있던 라이오스의 검을 놓았다. 떨그렁! 쇳소리를 낸 검이 바닥에 뒹굴었다.

쿠당탕 바닥을 구르던 라이오스는 바로 일어났다. 의외로 멀쩡해보였다. 러셀의 주먹에 맞기 직전 뒤로 몸을 날려 충격을 최소화한 것이다. 투구에도 별다른 흠집은 보이지 않았다.

“개 같은 놈이···!”

“야.”

욕설을 내뱉는 라이오스의 말을 러셀이 끊고 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올려다본 라이오스는 흠칫 몸을 떨었다.

러셀의 눈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들고 있던 클레이모어를 바닥에 박았다. 대검은 무리없이 판석을 파고들었다.

“난 두 번이나 날 죽이려 한 놈은 안 봐준다.”

러셀의 신형이 고무줄을 늘인 것처럼 주욱 늘어났다. 라이오스는 그것이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 바람에 생긴 착시라는 것을 알았지만, 어떻게 대처할 순 없었다.

러셀의 주먹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절로 헉, 소리가 날 정도의 폭력이었다.

주먹 세례는 멈추지 않았다. 얼굴, 목, 가슴, 배를 가리지 않고 빗발처럼 주먹이 퍼부어졌다. 그때, 얻어맞기만 하던 라이오스의 사자머리 투구에서 푸른 안광이 새어나왔다.

“크아아아아!”

처음으로 주먹이 막혔다. 라이오스는 러셀의 오른 주먹을 왼 손바닥으로 밀고, 오른 손으로 팔꿈치 안쪽을 당겨서 타점을 흐렸다.

러셀은 아까와 달라진 라이오스의 갑옷을 발견했다. 사자머리의 눈구멍에서는 푸른 안광이, 갑옷에서는 옅은 아지랑이가 타올랐다. 건틀릿은 맹수의 발톱처럼 그 끝이 날카로워져서 섬뜩한 예기를 뿌렸다.

라이오스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천한 놈. 넌 내가 반드시 죽인다.

러셀은 씨익 웃었다.

“해봐, 어디.”

***

알베르트가 황녀에게 말했다.

“전하. 결투를 끝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녀는 고개를 저었다.

“놔둬요.”

알베르트는 알겠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으로 물러났다. 황녀는 차가운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

라이오스는 바로 다음 공격을 이어나갔다. 아까보다 더 사자 같아진 외견을 가지게 된 그는 정말 사자처럼 갈퀴손을 만들어 러셀을 베어갔다.

츄가가각!

몸을 돌려 피해내자 그 자리에 있던 바닥이 다섯 개의 칼날 자국을 내며 갈라졌다. 러셀이 보니 라이오스의 건틀릿의 손가락 끝부분이 클로처럼 날카로워져 있었다.

라이오스가 괴성을 지르며 손을 휘둘렀다. 러셀은 그 공격들을 하나하나 맞부딪치거나 피하며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러셀의 손과 발이 기이한 동작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걸음마를 배울 적부터 익혔던 훈련의 결과들이었다.

처음은 인간을 위협하는 괴물들에 맞서기 위해, 그 이후는 괴물과 비슷한 신체를 얻게 된 같은 인간들을 상대하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만들어진 무술들.

러셀의 육체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체득하고 쌓아온 기술들을 여감 없이 내보였다.

사자의 발톱 같이 변한 건틀릿을 내리 누르거나, 손목부터 쳐내서 방향을 바꾸거나, 종잇장 같은 틈을 두고 흘려낸다. 이빨처럼 덮쳐오는 어께와 무릎을 받아내고 밀쳐낸다.

직선으로 내리꽂히는 라이오스의 공격들은 괴물들의 단순한 공격범과 비슷했다. 러셀은 그 매서운 발톱과 이빨들을 인간의 기술로 상대했다.

결국 갈수록 손발이 어지러워지는 것은 라이오스였다. 자신이 내뻗은 팔에 자신의 다른 신체 부위가 걸리는 동작들이 반복되는 것도 있었으나, 그 주된 원인 중 하나는 러셀의 손과 주먹에 닿을 때마다 일어나는 찌릿한 감각 때문이었다.

러셀은 방어를 사이사이에 전격을 일으켜 라이오스의 안으로 침투, 마력회로의 이완과 수축을 진행시킨 것이다.

쥐가 나 경련하는 근육을 다 잡는 것이 힘들 듯, 마력이 오가는 통로 그 자체인 회로가 자극당하는 공격은 마력의 수발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결국 마력을 뿜어내는 매개체 또한 육체이기 때문이다.

곧 완전히 꼬인 발걸음을 내딛은 것 때문에 균형이 무너진 찰나, 러셀의 다리가 휘둘러지며 라이오스의 오금을 걷어찼다.

단단한 은빛 갑주로 보호된 무거운 다리였으나 라이오스는 어이없이 쉽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목을 러셀의 손이 콱 쥐었다.

“컥!”

러셀의 커다란 손에 목이 졸린 라이오스가 발버둥쳤다. 러셀은 천천히 약간 굽혔던 무릎과 허리를 폈다. 그러자 땅에 대고 있던 라이오스의 발이 점점 공중으로 떠올랐다.

“큭, 이거 놔, 라! 놓으란 말이다!”

퍽, 퍽 하고 라이오스의 발과 주먹이 러셀의 팔과 몸통을 때렸다. 여전히 그의 갑옷은 활성화 되어있었기에 무시 못 할 공격이었지만, 러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그그그그

목 부분의 갑옷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우그러져갔다. 라이오스는 점점 목을 조여오는 갑옷에 경악하며 더 세게 발버둥을 이어갔다.

건틀릿을 낀 손으로 러셀의 손아귀를 풀려고 했지만, 마치 산을 들어올리는 것 같은 막막함만이 느껴졌다.

러셀은 멈추지 않았다. 라이오스는 목전까지 다가온 죽음을 바라보았다.

“커, 사, 살려줘.”

러셀은 물끄러미 사자머리 투구를 바라보았다. 그의 자안은 투구 속에서 눈물 콧물을 흘리고 있을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라이오스는 울면서 빌었다.

“살려, 줘······. 내가, 잘못······.”

“처음 한 번 봐줬을 때 알아서 기었어야지.”

러셀이 팔을 당기자 자연히 라이오스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라이오스는 시야에 가득 차는 자청색의 불길을 두려움에 젖은 얼굴로 바라봤다. 그의 입에서는 이제 말이라기보단 절규와 비슷한 것이 흘러나왔다.

“흐억, 흐어어억···.”

“내게 두 번은 많지 않아.”

러셀은 힘을 주었다.

우득.

라이오스는 축 늘어졌다.

“···후.”

러셀은 라이오스의 목을 놓았다. 완전히 조여진 목이 드러나고, 라이오스의 시체가 철그렁, 소리를 내며 판석에 떨어졌다.

사위는 조용했다. 누구 하나 숨소리 내지 못했다.

러셀은 품을 뒤져 담배를 꺼내려다가, 그것이 들어있는 갑옷을 결투장 바깥으로 던졌다는 것을 알고 다시금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

결투는 그렇게 한 기사의 죽음으로 끝났다. 설마 결투의 당사자 중 한 명이 죽을 줄 몰랐기에 자리했던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대노할 거라 생각했던 황녀는 별다른 처벌을 내리진 않았다.

“결투의 규칙을 어긴 건 내 기사가 먼저였습니다. 부하의 과오는 주인이 책임지는 법. 나는 러셀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황녀는 그리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돌린 상태에서 황녀가 말했다.

“러셀. 대답은 다음에 다시 듣겠습니다.”

그리고 황녀는 검술관을 떠났다. 그녀의 뒤로 엘레노아와 시신을 수습한 여명의 기사들이 따랐다.

프레드릭 성주와 알베르트는 빠르게 자리를 수습했다.

“오늘은 이만 하면 된 것 같군. 결투 잘 봤네.”

한 푸닥거리 할 줄 알고 있던 러셀은 의외로 일이 싱겁게 끝나버리자 떨떠름해졌다. 못해도 황녀랑은 대판 틀어질 줄 알았는데, 자신의 기사가 죽은 것 치고는 너무 담담했다.

그때 알베르트가 다가와 말했다.

“왜 아무 일도 없는게 궁금한가?”

“그렇지 않다고는 못하겠군요.”

“라이오스 베일론. 베일론 백작가는 제국의 유력 귀족 중 한 곳이라네. 그리고 예전부터 제 1황자의 파벌 중 한 가문으로 있는 곳이야.”

제 1황자의 파벌이라. 그런데 왜 자기 가문의 차남을 황녀의 기사로 넣었을까. 알베르트가 말했다.

“완전히 줄을 서지는 않았다는 손짓이지. 언제든지 편이 되어줄 수 있다는. 베일론 백작은 음흉한 작자야. 지금 당장은 황자 쪽에 서 있어도 상황은 또 바뀌기 마련이니까. 어쩌면 황녀를 여제로 옹립하고 그 부마로 자신의 아들을 넣고 싶어했는지도 모르지.”

러셀은 알베르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제도의 사정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도시 밖에 모르는 성주를 위해서는 귀를 활짝 열어두어야 하는 법이지.”

러셀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이나 자기를 죽이려 해서 홧김에 죽여버리기는 했는데, 지금 알베르트의 말대로라면 정말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지도 몰랐다.

물론 제국의 백작가 아들을 죽여버린 일이라 완전히 작은 일이라고도 못하겠지만···. 뭐 어쩔 것인가. 여기서 제국까지는 무척 멀고 대륙은 한없이 넓다.

그리고 설사 복수를 하러 온다 해도 상관없었다. 죽이러 온다면, 똑같이 죽여주면 될 일이다. 그리고 러셀은 자신이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

황녀는 다시 별채에 돌아와 있었다. 거실에는 갑옷이 벗겨진 라이오스가 퍼렇게 물든 얼굴만 내놓은 채 수의에 감싸여 있었다. 황녀는 시신을 내려다보다 피식 웃었다.

“베일론 백작이 길길이 날뛰겠군.”

여명 기사단들은 침묵했다. 그중 늑대머리 투구의 여기사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전하. 단순히 날뛸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닙니다. 자칫하면 후원이 끝나버릴 수도···.”

“나에게는 충성스러운 기사가 필요하지, 아무 때나 날뛰는 야생마가 필요한 게 아니다.”

여명 기사단들은 침묵했다. 황녀는 수의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베일론 백작은 이리 같은 자다. 그자가 속내에 품은 마음이 무엇일진 진작 알고 있었지. 여차하면 줄을 갈아타고 날 황위에 앉힌 다음, 그 대가로 자신의 아들을 부마로 올리려 했을 것이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뒤를 지키고, 러셀에게 결투를 청했는지 안다. 모를 수가 없다.

황녀는 쓰다듬던 수의의 끝자락을 잡고 천천히 라이오스의 얼굴을 덮었다. 시체의 창백하면서도 차가운 얼굴은 곧 하얀 수의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이번 결투 또한 처음에는 탐탁지 않았으나, 후에 가서는 오히려 자신을 묶은 사슬 하나를 떼 버릴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결국 라이오스는 자신의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규칙을 깨트렸다. 살수를 펼쳤고, 그것은 경우에 따라 상대방에게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할 말 없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라이오스는 죽었다.

황녀는 굽혔던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여명 기사단들이 시립했다.

“나타샤.”

“네, 전하.”

나타샤라는 이름의 여자 마법사가 앞으로 나섰다.

“성주에게 관을 하나 짜달라고 전하라. 그리고 라이오스는 빙결 주문으로 얼려서 부패하지 않게 하고.”

“알겠습니다.”

“올리비아.”

“네, 전하.”

늑대머리 투구를 쓴 여기사가 고개를 들었다.

“레필리아 길드장에게 심려를 끼쳐 미안하다고 하고, 이 주머니도 전하라.”

올리비아는 예를 표한 뒤 황녀가 내민 돈 주머니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베네소르. 하툼카.”

“예, 전하.”

전신을 코트로 감싼 정체불명의 인물과 무도복을 입은 대머리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중 베네소르는 여명 기사단 중의 일원이지만 누구도 그 진정한 정체를 모르는 자였다. 오직 황녀만이 그의 얼굴과 능력을 알고 있다.

무도복의 대머리 남자는 남방의 무예를 익힌 자로서, 그 능력과 성품을 높이 산 황녀가 기사단으로 임명했다.

둘의 외견은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늦어지는 황녀의 말에 변함없는 모습으로 서 있음으로서 하나의 공통점을 만들어내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황녀가 말했다.

“검은 머리에 자줏빛 눈을 가진 남자에 대해 조사해보라.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예, 전하.”

***

러셀은 너덜너덜해진 가죽 갑옷을 들고 도시의 대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입에는 한 대의 담배가 물려져 있었다. 그의 입술에서 스며 나온 흰 연기는 앞에서 달려온 바람이 휙 훔쳐 가버렸다.

흰 셔츠만 입은 상체의 뒤에는 클레이모어가 걸려 걸음에 맞춰 흔들거렸다. 대각선으로 뻗은 검신이 왼쪽 허리와 엉덩이를 툭, 툭 치는 것을 느끼며 러셀은 생각했다. 헐거워진 벨트도 좀 조여야겠다고.

성주와 알베르트, 제오나는 레필리아 검술 길드에 남았다. 아무래도 길드장 카렌에게 뭔가 용건이 있는 듯 했다.

“루시. 어디 가는 거?”

“러셀. 대장간.”

“음음. 내 여동생이 있는?”

“그래.”

“알았어.”

그의 곁에는 렉시만이 남아 흥흥 거리며 웃었다. 아까 전에 사람이 죽었음에도 별다른 감정의 기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러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살인의 감각은 빠르게 잊혀졌다. 이 어두운 세계에서는 그래야 미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블린은 자신도 볼 일이 있다면서 다른 길로 빠졌다. 나중에 란쉬무어의 바람 여관으로 온다고는 했으니, 저녁이나 술은 같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 흑요정한테 술도 아직 못 얻어먹었군.

렉시는 갑자기 러셀이 자신을 지그시 쳐다보자 입가를 더듬었다.

“왜 쳐다봐? 과자 부스러기라도 묻었어?”

“오늘은 네가 술사라.”

“에엑? 내가 왜?”

“네가 사기로 한 거 기억 안 나냐?”

“···칫, 돈도 많으면서.”

“넌 돈 안 받았냐?”

투닥거리다보니 둘은 어느새 장인 거리에 도착해 있었다. 대장간의 정겨운 뚱땅거리는 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러셀과 렉시는 한 대장간 앞에서 멈춰 섰다.

깃대 위의 펄럭이는 깃발에서 세계수의 문양과 난쟁이의 모루와 망치 문양, 그 아래 구석에 성주의 공방 인증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알리샤와 필리의 공방이었다.

“여기야?”

“그래.”

“알았어.”

쾅쾅쾅!

렉시는 대뜸 문을 쾅쾅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나가요- 하는 고운 목소리가 들렸다. 곧 문이 열리고, 갈색 피부의 건강한 흑요정 미인이 땀범벅인 얼굴로 나타났다.

“누구··· 어? 언니?”

“알리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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