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기사의 질투
태양은 슬슬 오후로 접어들고 있었다. 초가을의 날씨였지만 아직 늦여름이라는 듯 거세게 햇빛을 내리쬐고 있었다.
일찍 장사를 마치려는 상인들이 값을 낮춰서 부르기 시작했고, 행인들은 상품들을 들여다보며 흥정을 이어나갔다.
그 평화로운 모습에서 어제의 난리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도시의 일상적인 풍경은 오늘이 이러했듯이 내일도 이러할 것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성주와 알베르트가 인솔한 일행은 곧 성을 빠져나와 큰 길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대문 앞에 섰다.
레필리아 검술 길드의 정문을 지키던 오후의 경비들은 하품을 쩍쩍 하고 있었다. 한 명은 허리춤에 검을 차고 무도복을 입은 차림새로 문 앞에 서 있었고, 한 명은 책상과 의자를 갖다놓은 자리에 앉아 턱을 팔에 괴고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멀리서 다가오는 러셀 일행이 점점 가까워지자 삐딱하게 섰던 다리를 바로 하고 굽었던 허리를 쭉 펴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하는 얼굴이던 그들은 성주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서, 성주님!”
“됐네. 안에 길드장 있는가? 불러줬으면 하네만.”
“예!”
책상 앞에 앉아있던 남자가 혼자 안으로 들어갔다. 남은 경비는 신분 높은 분들을 앞에 둔 것에 긴장했는지, 최대한 경의의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그래봤자 질린 얼굴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러셀 일행들에게는 잠시, 혼자 남은 경비에게는 억겁으로 느껴졌을 시간이 지나고 곧 검술 길드의 주인이 황당한 표정으로 나왔다.
러셀과 비슷한 검은 머리카락을 말총머리로 묶고, 170 중반으로 보이는 큰 키에 검푸른 눈동자를 지닌 여인이었다. 외모에서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이, 북방의 민족의 피를 이은 듯 했다. 하지만 조화를 잘 이룬 덕에 되려 이색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마침 검술 훈련을 시키고 있었던지 무도복을 입은 차림이었고, 한 손에는 목검을 들고 있었다. 나이는 이십 대 중반이나 후반으로 보여 길드장을 맡기에는 어린 것 아닌가 싶지만, 마력을 체내에 쌓으면 노화가 늦춰지는 만큼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었다.
그녀는 대문 앞에 서 있는 성주 일행, 황녀 일행, 러셀 일행을 보다가 잠시 러셀에게 시선이 멈췄다.
일단 그들 중 가장 큰 키와 덩치였으니 시선이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카렌은 그보다 다른 것을 먼저 보았다. 그녀와 같은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이질적인 자안. 눈을 가늘게 떴던 카렌은 곧 그들에게 인사했다.
“레필리아 검술 길드의 길드장, 카렌 레필리아입니다. 성주님과 제오나 아가씨의 방문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알베르트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카렌. 황녀 전하의 기사 한 명과 우리 도시를 구한 용사가 결투를 하게 되었는데, 잠시 연무장 좀 빌릴 수 있겠나?”
“···네?”
“그렇게 되었네, 카렌. 잠시 실례하지.”
“네?”
“죄송해요··· 스승님.”
“······.”
알베르트와 성주가 카렌을 지나치고, 되묻기만 하던 그녀 앞에 제오나가 허리를 푹 숙였다. 카렌은 목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 일단 들어오세요.”
카렌과 비슷한 표정의 황녀와 그녀의 기사들이 먼저 들어갔다. 러셀 일행이 마지막이었다. 문은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레필리아 검술관은 꽤 규모 있는 길드였다. 낮게 지어진 건물들이 대칭으로 잘 배치되어 있었다.
중앙은 카렌 레필리아가 거주하는 동시에 업무를 보는 3층의 목조 건물이 있었고, 좌우로 남자와 여자들의 생활관이 따로 있었다.
뒤로 가자 커다란 연무장이 있었다. 검은 색 띠를 머리와 허리에 두른 사범들이 단에 서서 아래의 훈련생들을 가르쳤다. 남색부터 거꾸로 가는 색깔 띠를 머리나 허리에 찬 남녀들이 호령에 맞춰 검을 휘둘렀다.
“그만!”
돌아온 카렌을 발견한 사범 중 하나가 손을 올리자 훈련생들은 한 동작같이 움직여 뒷짐을 지고 섰다. 러셀은 감탄했다. 무슨 군대도 아니고.
카렌은 곧장 사범들에게 가더니 뭐라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사범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훈련생들에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4열 횡대로 모여서 연무장 바깥에 앉도록! 너희는 왼편, 너희는 오른편. 그래. 띠 색깔은 상관없다.”
사범의 지시에 훈련생들은 납검 후 연무장에서 물러나 앉았다. 카렌이 성주에게 물었다.
“일단 비워두긴 했습니다만. 자세히 설명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결투라니요?”
“음. 나보다는 황녀 전하께 듣는 것이 더 나을 것 같군.”
“네?”
“큼, 큼. 전하?”
프레드릭 성주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양보하자 황녀는 그런 성주를 째려보았다. 그는 슬쩍 눈을 돌렸다. 결국 황녀가 말했다.
“유리아 휘페리온입니다. 제국의 황녀고요.”
“아, 예. 만나서 영광입니다, 전하. 카렌 레필리아입니다.”
의외로 카렌은 황녀의 등장이나 그 권위에 주눅 들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태도였다. 그런 카렌의 모습에 황녀는 호기심이 든 듯 했지만, 해야 할 말을 잊지는 않았다.
“제 휘하의 기사와 러셀이라는 용병이 결투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제 약간의 다툼이 있었고···. 오늘 그 결판을 내고자 해서, 부득이하게 귀하의 검술 길드에 찾아왔습니다. 갑작스런 방문이었을 텐데, 미안합니다. 따로 보상을 바란다면 내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전하.”
카렌이 납득하자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그녀의 언질을 받은 사범들이 아까처럼 크게 외쳐서 러셀과 라이오스의 결투가 있을 것을 설명하자 훈련생들은 눈을 반짝거리며 기대에 찼다.
그들은 곧바로 러셀과 라이오스라는 두 걸투자를 찾아냈다. 러셀이야 누구보다 큰 키와 덩치, 등에 클레이모어를 메고 있었으므로 알 수 있었다. 누군가는 러셀이 그제 도시를 구하고 벼락의 전사라는 이명을 지닌 용병인 것을 알아봤고, 술렁거림이 이어졌다.
라이오스는 눈에 띄는 사자머리 투구에다, 만만치 않게 덩치도 크고 위협적인 장검을 허리춤에 달고 있는 기사였다. 황녀의 여명 기사단원 중 한 명이란 누군가의 아는 척에 훈련생들은 선망어린 눈으로 기사들을 쳐다봤다.
언젠가 그들도 마력을 각성하고 기사가 되고 싶은 만큼, 취준생의 마음으로 직장인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알베르트가 카렌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폼이 좀 안 사는군. 무대 좀 만들어도 되겠나?”
“폼은 무슨, 어휴. 마음대로 하시지요.”
카렌이 손을 들고 물러나자 알베르트는 씨익 웃더니 지팡이를 들었다. 그가 중얼거리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마력의 흐름이 요동쳤다.
알베르트가 지팡이를 쿵, 하고 바닥을 찍자 연무장의 중간 즈음이 굉음을 내며 일어섰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그 광경을 쳐다봤다.
포석이 깔린 바닥은 곧 동서남북으로 계단이 세워진 정사각형의 결투장으로 변모했다. 뭔가 본격적인데.
러셀은 결투장에 올랐다. 라이오스도 그의 앞에 섰다. 그는 원상태로 복구된 사자머리 투구를 쓰고 무장으로는 장검을 차고 있었다. 전날 썼던 전쟁 망치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망치를 안 들었군?”
“네놈은 검 하나로도 충분하다.”
러셀은 피식 웃었다. 라이오스는 허리춤의 검을 스르릉, 뽑아 들었다. 라이오스는 천천히 검을 들어 상단으로 잡고 자세를 잡은 후 말했다.
“라이오스 베일론. 베일론 백작가의 차남이자, 황녀 전하 휘하 여명 기사단의 제 2기사다. 네놈의 이름을 말해라.”
베일론 백작가라. 러셀은 그게 제국의 유력 귀족들 중 하나라는 말을 언뜻 들은 것 같았다.
과연 명가의 자손답게 라이오스는 흠잡을 곳 없는 육체였다.
자세 또한 바닥을 단단하게 받친 다리와 안정된 허리와 상반신, 흔들림 없는 팔 등, 제대로 검술을 배운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키도 170대 후반으로, 평균적인 남성들의 키를 고려해봐도 꽤 큰 키였다. 덩치도 두꺼운 장갑이 덮힌 갑옷 덕분에 두터웠다.
러셀은 오른손을 들어 클레이모어를 쥐었다. 커다란 덩치와 느릿한 움직임 덕분에 그의 동작 하나하나는 마치 수컷 공작새가 날개를 펼치는 것처럼 화려했다.
“러셀.”
러셀은 짧게 대답했다. 다른 수식어는 붙이지도 않았다.
결투장에 엘레노아와 알베르트가 올라섰다. 요정 마법사가 러셀과 라이오스를 쳐다보며 당부했다.
“마력의 사용은 가능하나 상대를 죽이는 것은 안 되네. 패배나 항복 선언은 스스로 외치거나, 전투 불능에 이르렀다고 판단되었을 때 내가 직접 말하지. 전투 불능은 무기를 떨어트리거나 사지 하나가 잘려나갔을 때네. 나한테 힐링 포션도 있고, 엘레노아 사제도 직접 상처를 봐준다고 하니 걱정은 말도록. 시작은 이 돌멩이가 떨어지는 것으로 하지.”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르트는 어느 샌가 주워든 돌멩이를 공중에 띄우더니, 하늘 높이 던져 올렸다. 돌멩이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러셀과 라이오스를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그 돌멩이를 향했다. 두 명은 서로를 직시했다. 라이오스의 갈색 눈동자가 러셀의 자안을 노려봤다. 러셀은 다만 담담한 얼굴로 시선을 받아냈다.
하늘은 맑았다. 때마침 커다란 뭉게구름 하나가 태양을 가리고 있었고, 커다란 구름의 그림자는 연무장을 덮으며 천천히 흘러갔다.
연무장 바깥으로 도시의 소음이 옅게 흘러들어왔다. 마차를 모는 말의 딸각거리는 발굽 소리, 철판에 고기를 굽는 소리, 누군가 어떤 이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 웃는 소리, 시끄러운 소리. 그 모든 소음들은 한데 뭉그러져 있어서 적확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연무장에 모인 자들이 내는 인위적인 침묵이 그 모든 소음을 덮으며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두 결투자는 침묵 속에서 흔들림 없는 자세를 유지하며 서로를 탐색했다. 응축된 근육이 신호를 기다리며 튀어나갈 준비를 마쳤다.
언제까지고 오를 것 같던 돌멩이는 어느 고점을 찍더니,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올라갔던 고개들이 그 포물선에 따라 내려왔다.
툭, 하는 소리가 났다. 작은 소리였으나 숨죽이고 있던 모두에게는 천둥만큼이나 커다란 소리였다. 러셀과 라이오스의 신형이 서로를 향해 쏘아졌다.
꽈앙!
어느 새 대검과 장검의 칼날이 끼긱거리는 소리와 불티를 내며 맞닿아 있었다.
“흡!”
라이오스는 예상을 훌쩍 넘어선 러셀의 힘에 투구 속의 눈을 부릅떴다. 마력이 담겨 번쩍이는 라이오스의 눈과 달리 러셀의 것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그럼 이게 그냥 본인의 신체능력이란 말인가?
거기다 그는 양손으로 장검을 쥐었는데 러셀은 한 손이었다. 다른 손은 뒷짐을 지듯이 허리에 대고 있었다. 라이오스가 노호성을 내질렀다.
“건방, 진!”
외침과 함께 라이오스는 러셀의 힘을 역이용하며 무게중심을 뒤로 낮추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칼날이 왼팔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곧바로 다시 대검에 막혔다. 러셀이 손목만 한 바퀴 돌려 대검을 세운 것이다.
두 차례의 검격을 나눈 라이오스가 오른발을 뒤로 내딛었다가, 그것을 힘껏 박찼다. 반듯한 포석이 발구름에 우직 쪼개졌다. 러셀은 한 손을 허리에 댄 자세로 변함없이 클레이모어를 들었다.
쾅! 쾅! 콰광!
강철과 강철이 만나 비명을 터트렸다. 일반적인 철 부딪치는 소리가 아니라 무슨 바위와 바위가 만나 박살나는 소리 같았다. 그럴 때마다 결투장의 바닥을 이루는 포석들이 우르르 떨렸다. 둘이 서 있는 곳은 힘과 힘의 충돌에 갈라진 것들도 있었다.
라이오스는 상대적으로 러셀보다 작은 체구를 십분 활용, 갑옷을 입은 몸임에도 재빠르게 움직였다. 본인의 마력과 황녀가 내려준 갑옷이 가벼우면서도 특별한 힘이 내장되어 있는 아티펙트라 가능했다.
은빛 사자의 송곳니라는 이름을 가진 갑옷이 가진 힘은 다양했다. 착용자에게 무게를 거의 느끼지 않게 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그 튼튼함으로 받는 충격 또한 흩어버리는 마법 능력을 지녔다.
하지만 러셀은 어렵잖게 라이오스의 움직임을 잡아냈다. 커다란 만큼 베거나 찌를 곳도 많아보였건만, 러셀은 미세한 차이만을 두고 라이오스의 검격을 피하거나 흘려냈다.
두 검사의 대결은 그렇게 진행됐다. 보다 작은 쪽이 사납게 날뛰고, 보다 큰 쪽은 묵직하게 서서 막을 건 막고 흘릴 건 흘리는 전투. 라이오스는 그가 쓴 사자머리 형상 그대로 사자라도 된 것처럼 달려들었다.
“큭! 제대로 싸워라!”
“내가 제대로 싸우면 넌 죽어.”
“뭐, 뭐라?”
라이오스의 외침에 러셀은 담백하게 응수했다. 라이오스가 격분하기도 전, 러셀의 클레이모어가 크게 아래에서 위로 베어 올려졌다. 그에 맞춰 라이오스도 두 손으로 잡은 장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굉음과 함께 빛이 번뜩이고, 치익 소리를 내며 라이오스가 밀려났다. 러셀은 제자리에서 반 발자국만 뒤로 물러섰을 뿐이었다.
“이익!”
그 확연한 차이에 라이오스가 잇소리를 내며 마력을 격발시켰다. 이제까지의 마력운용이 정적으로 느껴질 만큼 폭발적인 흐름이 체내를 달려 사지백해로 뻗어나갔다.
그는 양손으로 잡은 장검을 수평으로 눕히고 무릎까지 낮췄다. 마치 한 마리 맹수가 웅크린 듯한 모습이었다. 쓰고 있는 투구마저 사자 머리 형상이니 그야말로 백수의 제왕이 웅크린 듯 했다.
러셀의 눈이 일순 반짝였다. 라이오스를 중심으로 엄청난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자세를 길게 잡은 만큼 대단한 일격을 보여줄 듯 싶었다.
러셀 또한 뒷짐 지던 손을 풀고 클레이모어의 널찍한 손잡이를 잡았다. 대검을 중단으로 세우고 왼발은 앞으로, 오른발은 뒤로 해서 안정적인 자세를 취했다.
러셀은 생각했다. 사실 마력을 다루는 초인, 기사와 싸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권세를 지닌 귀족가의 가문으로, 드넓은 영지를 가졌지만 자리가 자리인만큼 위협이 상시 존재하는 곳이었다.
겨울마다 북방의 아운힐나르 산맥에서 넘어오는 괴물들을 상대하기 위한 변경의 첨단에서 약한 자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자연히 살아남은 자들은 강인한 마음과 몸을 가졌던 자들이었고, 설사 그렇지 않았던 자들이라 한들 그런 마음과 몸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의 사이는 끈끈해졌다. 중앙 정치에서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내는 치들과 달리 변경을 마주한 귀족 가문들은 오랜 세월 동안 함께 괴물을 물리쳐온 동지로서 서로를 대했다.
서로의 성장을 돕기 위한 각기 기사들간의, 종자들간의 대련이 잦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딸이나 아들을 결혼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러셀은 더욱이 두각을 나타냈고, 상대했던 기사 모두를 거꾸러트린 전사였다.
그 강함의 바탕에는 사람들이 남몰래 수군거리는 육체의 비정상적인 재능과 마안이 있었지만, 스스로는 그런 부차적인 것들보다도 전생에 가졌던 유연한 사고가 더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마력을 신체의 강화에 초점을 두어 괴물과 비견될만한 몸을 얻는 것에만 초점을 둔 북방의 기사들과 달리, 러셀은 보다 근본적으로 마력에 파고들고 싶었다.
무협 소설, 판타지 소설에나 나오던 기, 마나라는 불가사의한 힘. 동방에서는 내공, 이곳에서는 마력으로 가공해 불가능해 보였던 이적을 가능하게 하는 이능.
러셀의 유연한 사고와 그 사고를 받쳐줄 수 있는 육체의 재능이 만나자 가히 마법적인 일들이 가능했다. 그것은 가히 입으로 내뱉는 주문이나 수인으로 자아내는 법칙의 뒤틂이 아닌, 육체 자체로서의 마법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마력을 담아 빛의 꼬리를 흘렸다.
생각은 그야말로 순간이었고, 러셀과 라이오스의 신형은 순식간에 교차했다.
검광이 번쩍였다.
챠아앙!
맑은 울림과 함께 둘은 각자 있던 반대의 위치에 서 있었다. 서로에게 등을 보이고 서 있던 러셀과 라이오스는 천천히 뒤돌았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놀란 소리를 냈다.
러셀의 가죽 갑옷 흉갑이 크게 찢어져 있던 것이다. 허나 상처를 입은 것 같진 않았다.
라이오스의 갑옷은 멀쩡했다. 배갑과 옆구리에 커다란 흠집이 새겨져 있긴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흠집이었고, 어떤 파손을 준 것은 아니었다.
라이오스는 숨을 몰아쉬며 서로가 교차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분명 그의 칼날은 러셀의 가슴을 갈랐다. 그런데 갑옷을 넘어 살갗에 파고드려는 순간, 그의 피부 너머로 마력이 유형화되어 마법사의 실드처럼 칼날을 막아냈다. 주문이나 수인을 맺지도 않았지만 그 배열은 분명 실드와 흡사했다.
러셀은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가죽 갑옷을 쥐더니 그대로 뜯어서 결투장 바깥으로 던져버렸다. 그의 상반신에는 이제 갑옷이라 할 만 한 것이 달려있지 않았다. 그냥 흰 셔츠 차림이었다.
생각보다 라이오스의 실력이 괜찮았다. 힘으로는 그에게 당하지 못하더라도, 검술만큼은 높은 경지에 이른 듯 싶었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찰나에 진입할 수 있을 정도로.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러셀의 몸에 부닥쳐 머리카락을 휘날리게하고, 근육의 울룩불룩한 선을 그려냈다. 여자 훈련생들의 눈이 멍해졌다.
두 사람은 다시 자세를 잡아 검을 들어올렸다. 러셀은 칼날을 살폈다. 마력으로 강화했음에도 이가 살짝 나가 있었다. 반면 라이오스의 것은 멀쩡했다.
“새끼, 템빨 좋네.”
“후욱, 템빨?”
“꽤 튼튼한 물건이라고. 그 갑옷.”
“···전하께서 내게, 친히 하사하신 보물이다. 훅, 너같은, 천한 놈은 꿈도 꿀 수 없는 갑옷이지.”
라이오스는 눈에 띌 정도로 숨을 몰아쉬었다. 러셀은 처음 그대로 평온했다. 겉보기로 유리해진 건 갑옷이 멀쩡한 라이오스였으나, 지켜보는 자들은 왜인지 그 반대 같았다.
성주와 황녀, 카렌 일행들은 의자에 앉아 알베르트가 만들어낸 결투장보다 조금 더 높은 자리에서 결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프레드릭 성주는 다시 보는 러셀의 무용에 신난 기색이었고, 알베르트는 혹시나 마안을 쓰지는 않으려나 하는 기대감에 차 있었다.
제오나는 걱정스런 표정, 엘레노아는 무표정이었다. 이블린 또한 알베르트처럼 러셀의 눈을 유심히 보고 있었고, 렉시는 언제 챙긴 건지 과자를 먹고 있었다. 응접실에서 가져온 듯 했다.
카렌은 사범들과 같이 눈을 빛내며 대결을 지켜봤다. 작게 소곤거리기도 하는 것이 시선 떼지 말고 잘 보라 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을 들은 사범들은 괜히 눈을 부라렸다.
황녀는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다른 여명 기사들은 각기 팔짱을 끼거나 늘어트린 채 결투를 관람했다.
하늘의 뭉게구름은 여전히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마치 지상의 인간들 일 따윈 내 알바 아니라는 듯 느긋했다. 그리고 구름이 흘러감으로써 그림자의 반경 또한 자리를 이동했다. 구름에 가려졌던 태양이 존재감을 과시하며 눈부신 햇살을 뿌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햇살을 만난 훈련생들이 손을 들어 차양막을 만들었다. 햇살의 범위는 점차 넓어져 결투장과 라이오스에게도 닿았다. 일순 그의 은빛 갑옷이 햇빛을 받아 번쩍였고, 러셀은 눈부심에 살짝 눈을 감았다. 그리고 때를 기다리고 있던 라이오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흡!”
커다란 기합성도 없이 숨 한 번 들이킨 라이오스가 자리를 박찼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황녀 전하에게 바칠 승리, 단 한가지만이 박혀 있었다.
고도의 집중력에 마력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활기를 띄었다. 이전까진 거칠었던 흐름이 도도한 강줄기처럼 굽이치면서도 힘의 손실 없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그러자, 라이오스는 잠깐 다른 세계에 진입했다.
내딛는 발바닥이 바닥의 단단한 포석을 깨트리며 질주했다. 몸은 바람 같고, 손에 들린 검은 깃털처럼 가볍다. 그는 지금 이순간, 새로운 경지로 한 발자국을 내딛었음을 알았다.
뭐든 할 수 있다는 강렬한 쾌감이 뇌리에서 솟구쳤다. 그리고 첫 번 째로 할 것은, 당연히 저 건방진 용병의 심장을 터트리는 것이었다. 서로의 목숨을 노릴 정도의 살수는 내비치지 말라던 규칙은 어느 샌가 저 멀리 사라졌다.
그녀가 말한 대로 저 러셀이라는 남자가 용족을, 혹은 검은 거인을 천둥신의 현신 같은 모습으로 물리치긴 했을 것이다. 라이오스는 황녀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은 절대적이다. 처음 그녀의 얼굴과 눈동자를 마주쳤을 때부터 그랬다. 라이오스의 심장은 황녀의 것이었다. 그리고 만약 이 자리에서 그런 전사를 죽인다면, 자신은 그야말로 신을 이긴 기사가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황녀는 어제 자신에게 향했던 그 매몰찼던 시선을 거둘 것이다. 실망했다는 생각을 거둘 것이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울컥울컥 피를 빨아들였다가 내보내는 작업을 빠르게 진행했다.
이 모든 생각과 행동은 찰나에 불과했다. 라이오스의 검극이 곧게 찔러갔다. 쏘아진 화살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그 끝에는 러셀의 심장을 향해. 설사 강철 갑옷을 입고 있었더라도 무리 없이 뚫어냈을 힘을 담아.
푸우욱!
사람들의 눈에는 라이오스가 자세를 잡았다가 흐릿해지고, 바로 러셀의 바로 앞에 나타난 것밖에 보지 못했다. 러셀의 등 뒤로 칼날이 비죽하게 솟아올랐다.
비명이 터졌다. 성주와 알베르트의 표정이 싹 굳어지고 제오나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엘레노아가와 이블린, 렉시가 벌떡 일어났다.
“라이오스! 저 멍청이가···!”
여명 기사단들도 대경하며 자리를 박찼다. 그들이 당장 결투장으로 뛸 자세를 취할 때, 황녀가 가만히 있었다. 찰나를 포착한 눈이 가늘어져 있었다.
“모두 가만히 있도록.”
그들에게 절대적인 황녀의 명령에 여명 기사단들은 거짓말 같이 바로 섰다.
가만히 있던 것은 카렌과 사범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사범들은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려다, 그녀가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다시 앉은 것이었다. 카렌 또한 굳은 얼굴로 아래를 바라봤다.
비명은 곧 사그라들었다. 누군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피가··· 없네?”
그의 말대로 결투장 바닥에는 뜨거운 피가 흩뿌려지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의 강력한 힘에 이리저리 헤집어지고 깨져나간 돌조각들만 가득했다.
영문을 모르는 얼굴들이 러셀과 라이오스를 쳐다봤다. 둘은 너무 가까이 붙어서 있었고 햇빛이 라이오스의 갑옷을 타고 반사되고 있어서 식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때 다시 어디선가 흘러온 구름이 태양을 서서히 가렸다. 그제야 사람들은 둘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러셀은 왼쪽 겨드랑이로 라이오스의 검을 흘려내 잡고 있었다. 다음 경지의 어른거림과 무한한 상상의 나래로 눈이 흐려져 있던 라이오스가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의 장검이 러셀의 겨드랑이와 팔 사이에 끼어있는 것을 보고 의문성을 흘렸다.
“어, 어? 뭐야?”
“너.”
-너.
러셀의 낮은 음성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일그러진 목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라이오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한 쌍의 자안이 불타고 있었다. 그는 자안 속에서 러셀 말고도 다른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 것 같았다.
“날 죽이려 들었군.”
-나의 ■■을 죽이려고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