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결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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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선 채로 책상 위 수첩에 무언가를 휘갈겨 쓰고 있다. 전신에 광택 없는 검은 갑주를 착용하고, 등에 거대한 대검을 맨 남자였다.
그가 있는 공간은 한 서재였다. 정리되지 않은 서재. 바닥에는 종류 다양한 책들이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다. 발간 연도 또한 모두 중구난방이다. 그중에는 100년 전의 것도 있었지만, 마치 어제 출판된 것처럼 새 것 같았다. 거기 있는 모든 책들이 그랬다. 시간의 모래에 닳지 않았다.
남자의 머리카락은 백발이었다. 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반짝이는 은빛이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듯 했다. 약간 주름 진 피부였지만, 금색으로 반짝이는 눈은 총명을 잃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눈매는 고집스럽게 찌푸려졌고 턱은 세게 악문 듯 하악골이 불거져 있었다.
곧 필기를 마친 남자는 허리를 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두었던 검은 투구를 옆구리에 꼈다. 한 차례 서재를 둘러보던 그는 공간이 쿵- 하고 울리자 투구를 머리에 썼다. 그러고는 뒤의 문을 열고 사라졌다.
책상 위의 수첩에 남자가 새긴 잉크가 조금씩 말라갔다. 그 글은 이러했다.
‘······촉박한 관계로, 시간의 흐름이 비틀린 이 공간에서 나의 유지를 남긴다.
지금 바깥에는 미쳐버린 용이 히폴리아스를 덮치고 있을 것이다. 내 아내다. 그녀가 그렇게 된 까닭은 내 책임 또한 적지 않다. 나는 경솔했고, 그녀는 방심했다. 그것이 작금이다.
나는 이제 검은 갑주와 나힐니르로 그녀를 상대할 것이다. 그녀가 직접 벼려낸 갑주와 검은 그녀를 죽이게 될 것이다. 되돌릴 수 없는 운명이다. 과거로부터 쌓아온 선택과 우연의 순간이 지금의 나와 그녀를 만들어 이 자리에 배치시켰다. 신이 원망스럽다.
가능하다면, 나는 그녀를 이곳에서 멀고 먼 곳으로 떼어놓을 것이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고, 그녀가 가장 즐거워했던 도시, 데 칼라스로. 혹시 그곳에서라면 정신을 차릴 지도 모르기에.
나는 그녀를 죽이고 싶지 않다. 그녀는 내 사랑하는 아내이며, 저리 미쳐 날뛰게 된 원인을 제공한 것이 나니까.
만약 결말을 끝맺지 못했다면 그건 내 부족함일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후손이여. 그대가 대신 마침표를 찍어주길.
공간이 흔들린다. 나가봐야겠다.‘
다시 한 번 공간이 쿵- 하고 울리고, 책상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수첩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간이 흘렀다. 무수한 시간 동안 수많은 자들이 이 공간과 서재를 찾았고, 그에 따라 수첩은 누군가의 발길질에, 혹은 손길에 의해 여기저기 바닥을 굴러다녔다. 그 위에 또 두텁게 책들이 쌓였다.
그렇게 어언 삼백 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한 여인의 손이 책들을 정리했다. 손은 꼼꼼히 책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옆에 차곡차곡 쌓았다. 이윽고 그녀의 손은 오랫동안 빛을 받지 못한 한 수첩을 집어 들었다.
시간의 흐름이 비켜간 수첩의 글씨들은 어제 쓰인 듯 생생한 그대로였다. 여인은 수첩을 펼쳐 그 안의 내용을 한 줄, 한 줄 읽어나갔다.
***
정오의 햇살이 창문을 타고 거실로 흘러들었다. 공기 중에는 삼백 년 전의 이야기가 먼지와 함께 햇살 사이를 유영하는 듯 했다.
바닥에는 햇빛이 창틀의 사각형으로 빛나고 있다. 그중 한 햇살을 왼편으로 받는 황녀의 얼굴은 반은 빛나고 반은 음영에 잠겨 어두웠다.
“···그렇게 해서, 나는 칼리스덴에 오게 된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숨소리가 들렸다. 렉시의 것이 가장 컸다. 러셀은 슬쩍 소파 뒤에 선 두 기사를 쳐다봤다. 둘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미리 알고 있었던가, 아니면 대단한 평정심을 지닌 것일 게다.
하지만 라이오스가 그만한 평정심을 가진 이였다면 전날 러셀에게 쌍코피가 터지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니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다는 추측이 맞으리라.
엘레노아가 조용히 말했다.
“···황궁의 비처에는 여러 신비가 자리하고 있다더니. 놀랍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저희들에게 해도 괜찮으신지요.”
“뭐 어떤가요. 어차피 저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인데. 물론 다른 형제자매는 모르지만, 제가 직접 안내하지 않는 한 그들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쉽사리 믿기도 어려운 이야기잖아요? 황족 아닌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행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의 말대로 어디 술자리에서나 오갈 얘기고, 믿는 자들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이미 곳곳에 유적과 던전, 미궁을 넘치게 갖고 있었다. 굳이 황궁의 비밀 공간에 들고 싶어하는 자들은 없을 것이다.
러셀이 말했다.
“흥미로운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왜 굳이 저희에게 하신 건지 듣고 싶군요.”
“그래요, 그 이야기도 해야지요. ···히폴리아스를 덮친 용, 이스메니오스는 수도에 대단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황궁도 삼분의 일 이상이 반파되었고, 엄청난 사상자들이 나왔지요. 거리는 아수라장이 되고 사람들은 겁에 질려 뛰어다녔습니다. 제국의 기사단과 마법사단이 저지하려 했으나 쉽지 않았어요. 용은 그 대단한 마법 실력 말고도 강인한 육체를 지닌 존재들이었으니까. 상황은 절망적이었고, 루이즈 여제는 피난을 가야하는 순간에 직면했습니다. 그때, 한 흑기사가 나타났습니다.
몸을 앞으로 숙이고 열심히 듣던 렉시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 흑기사가?”
황녀는 그런 렉시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렇습니다. 루드비히였지요.”
사람들은 황녀의 조용한 목소리에서 삼백 년 전의 상황을 상상했다. 제국의 수도에 나타나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용. 타오르는 불꽃, 쓰러지는 건물들. 그 용에 홀로 맞선 대검의 흑기사.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는 흑기사에 의해 구해진 자가 많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용은 물러갔습니다. 사람들은 영문을 몰랐지만 어쨌든 용이 사라지자 환호했습니다. 루이즈 여제는 제국을 지켜낸 영웅을 찾으려 했지요. 하지만 흑기사도 사라진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루이즈 여제는 그 흑기사를 찾지 않았지요.”
황녀는 시선을 돌려 창문을 바라봤다. 그러자 얼굴의 절반을 덮던 햇빛이 온전히 그녀의 눈코입 모두를 감싸 안았다. 황녀는 눈부심에 약간 눈살만 찌푸렸을 뿐,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창문과 그 너머의 도시를 바라봤다.
“조상님은 어떤 수를 썼는지 이스메니오스를 북동쪽의 도시, 데 칼라스로 이끌었어요. 이 도시, 칼리스덴이 바로 데 칼라스입니다. 삼백 년 전에는 그런 이름의 지명이었다고 성주가 확인했죠.”
“···아직 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것인지 답을 못 들었습니다만.”
러셀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예감을 증명하듯 황녀는 얼핏 장난기가 서린 듯한 미소를 짙게 지었다.
“바로 어제 칼리스덴은 괴물들의 침공을 받았습니다. 그 배후에는 용족이 있었지요.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는 신탁을 받은 사제, 용의 흔적을 발견한 마법사가 있습니다. 머지않아 용이 깨어날 것입니다.”
러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순 그의 자안이 마력을 받아 반짝였다.
“근거가 있습니까?”
그의 물음에 참다 못 한 라이오스가 발끈했다.
“저것이 감히 황녀님의 말씀을 뭘로 듣고···.”
“라이오스 경, 가만히 있으십시오.”
늑대머리 투구의 기사가 말리자 라이오스는 씩씩거리며 가라앉았다. 답은 왼편의 엘레노아가 했다.
“이스메니오스는 교회의 고문서에도 기록된 바 있는 강력한 용입니다. 그는 아버지로 전쟁의 신을, 어머니로 대지의 여신을 둔 용이었지요. 이른 바 신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엘레노아는 계속 말했다.
“그 용이 어째서 미쳐버리게 되었는지는 저희의 기록에도 정확히 명시되어 있진 않습니다. 다만 죽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되어 있지요. 그리고 전 교회에서 빛의 신탁을 받아 용이 얼마 안 있어 깨어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러셀님. 용은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후폭풍은 거대할 것입니다.”
그때 별채의 문이 열리고 자리하지 않았던 여명 기사단원 네 명이 줄지어 들어왔다. 그 중 여자 마법사와 갑주를 입고 투구를 벗은 남자 요정 기사가 다가와 황녀에게 귓속말 했다. 황녀는 확신에 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근거는 있습니다. 러셀, 오늘 도시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이상한 것? 러셀은 곰곰이 생각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하루의 일을 가만히 되짚었다. 황녀와의 대화. 성주와의 식사. 성으로 오는 길. 샤샤. 두 명의 기사. 침대. 천장. 도마뱀.
“···도마뱀?”
“맞습니다. 파충류뿐만 아니라, 다른 작은 소 동물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도시에는 그런 작은 동물들이 다급히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어요.”
“······.”
“반대로 덩치가 큰 괴물들은 모이고 있습니다. 나타샤?”
황녀의 부름에 고깔 모자를 쓴 여자 마법사가 말했다.
“네, 전하. 멀리 보기 마법으로 관찰해보니 중형 이상의 괴물들의 이동이 관측되었습니다.”
“음. 비칸데르?”
“남문의 늪지에서도 소요가 발생한 듯 보였습니다. 악어들이 보이지 않더군요.”
요정 기사가 답했다. 황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러셀을 직시했다.
“이건 용이 일어나는 징조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사제님은 최소한 이번 달은 넘기지 않으리라고 하셨지요. 제 휘하의 사람들도 조사를 해본 결과 아무리 늦어도 이번 주 이내에 사단이 일어날 것입니다. 어쩌면 당장 오늘, 혹은 내일 용이 깨어날 수도 있지요. 그럼 이 도시 뿐만 아니라 세계에도 큰 재앙이 일어날 것입니다.”
러셀은 여행 후 처음 찾은 대도시에서 이런 일을 겪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잠깐의 여독만 푼 후 바로 여정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용이라니. 너무 거창하지 않은가.
“러셀, 당신에게 이 길고 긴 이야기를 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와 함께 해주세요.”
“···함께 해달라는 말씀은?”
초롱초롱한 눈빛이 러셀의 자안을 마주본다.
“휘페리온 황가의 조상, 루드비히 휘페리온이 끝맺지 못한 일. 이 불민한 후손이 그 마침표를 찍을 생각입니다. 동참해주겠습니까, 러셀?”
그때 갑작스레 터진 외침.
“저는 반대합니다, 황녀 전하!”
황녀의 고개가 훅 아래로 꺼졌다. 은발이 그 고갯짓에 따라 축 늘어진다. 마치 그녀의 현재 심정을 대변하듯이. 심연에서 올라오는 듯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라이오스.”
“전하! 저희는 전하의 충실한 기사들이옵니다! 저런 용병 따위 없어도 충분할 것입니다!”
“···준비는 과한 것이 모자란 것보다 낫다. 난 너희들을 못 믿는 것이 아니야. 너희는 어제 평원에 선 검은 거인을 못 보지 않았느냐. 거인을 무찌른 이 전사도. 나는 그 신위를 보았다. 그러니···.”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라이오스는 성큼성큼 걸어 소파를 돌아오더니 사자머리 투구를 벗고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더 없이 충성스런 자세로 말했다.
“어제는 제가 방심했을 뿐이옵니다. 만반의 자세를 갖춘다면 전하가 말씀하신 용족이든 검은 거인이든 다 무찌를 수 있습니다! 저 용병 또한! 그러니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무슨 기회를?”
“러셀이라는 이름의 저 용병과 결투를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제가 잃어버린 명예와 황녀 전하의 명예를 되찾아오겠습니다!”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자리한 자들이 눈을 껌벅거렸다. 황녀는 기도 안 찬다는 표정이었고, 다른 기사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늑대머리 투구만이 홀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엘레노아와 이블린 마저 입가에 호선을 그렸고, 렉시는 눈을 빛내며 러셀과 라이오스를 번갈아 봤다. 누가 봐도 기대하는 모습들이었다.
라이오스가 고개만 들어 러셀에게 눈을 부라렸다. 사나운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것이, 마치 불독 같다.
“네놈이 남자라면 거절하지 않겠지?”
러셀은 피식 웃었다. 새끼.
그때 다시 문이 열리더니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프레드릭 성주와 제오나, 알베르트가 들어오고 있었다. 박수를 그친 성주가 웃음 띈 얼굴로 말했다.
“이 얼마나 용감하고 멋진 기개란 말인가! 전하께서 데리고 다니시는 여명 기사단은 그 하나하나가 충절과 용맹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더니, 과연! 소문이 헛됨이 아니군요, 전하!”
“아, 아니, 성주···.”
알베르트가 뒤에서 고개를 숙였다.
“불찰을 용서해주십시오, 전하. 밖에서까지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 실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황한 황녀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성주가 더욱 빨랐다.
“지금 저희 병영은 황녀님의 군사로 가득 채워져 있어 따로 연무장이나 훈련장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마침 제 딸과 함께 레필리아 검술 길드에 갈 생각이었으니, 그곳을 결투장으로 삼는 것은 어떠십니까? 괜찮지 않습니까?”
“아니, 그런, 으아아···.”
황녀는 이도저도 못했다. 라이오스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외쳤다.
“장소도 결정되었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전하! 네놈도 빨리 응해라!”
그 말에 황녀가 고개를 홱 돌려 러셀을 쳐다봤다. 그 간절한 시선에 러셀은 씨익 웃었다. 그러자 황녀의 얼굴에 약간의 안도감이 깃들었다. 미안해서 어쩌나.
“응하지.”
좌절하는 황녀를 뺀 나머지가 기대와 호기심, 신남이 깃든 동작으로 일어섰다. 가장 신난 건 당연히 프레드릭 성주였다.
“결투자도 모두 준비가 된 것 같군! 일어나십시다! 검술 길드는 성 바로 아래에 있어 가깝다네!”
그렇게 성주와 제오나, 알베르트의 인솔 하에 그들은 레필리아 검술관으로 향했다.